4. 선물 같은 오늘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살후 3:10)
녹취자 : 오지윤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별로 기쁘지 않은 소식부터 전해야겠습니다. 내일 모래부터 방역 4단계로 들어가고 확진자가 1300명 이상 나왔는데, 이때야말로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때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들이 위기를 넘겼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 한구석이 너무 아팠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많이 하라고 말씀해주시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시기 위해서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해줍시다.
오늘 공과는 다시 게으름 제4과 선물 같은 오늘입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사역한 것인데,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도 이것을 너희에게 명령하였으니 이는 마냥 누구든지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로 하여금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한 것이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그릇된 종말론이 침투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단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주제가 뭔지 아십니까? 행복, 은혜, 진리 이런 것이 아닙니다. 종말입니다.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끌고 들어오면서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텐데, 사람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방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이다. 곧바로 임하시니까 지금 우리는 이렇게 일상에 종사할 때가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해서 예전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야 된다. 라고 하며 이것을 전파하고 다닙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그릇된 종말론을 듣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나름대로 전도한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이단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종말이야 우리 모두 기다리는 것이고, 오게 될 것이지만,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면 우리의 삶이 그렇게 크게 바뀌겠습니까? 종말이 온다는 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소식이 되지 않는 것 자체가 저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보겠습니다.
이것이 이단을 전파하는 사람들의 이율배반 모순입니다. 종말이 왔다고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깥으로 뛰쳐나오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찢어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왜 싸우게 되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예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먹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어떤 사람은 종말이라는 것이 당장 올 것이니까, 평범한 직장생활, 사업 이러한 것들을 다 때려치워라, 그러한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게 아니다. 우리와 함께 종말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널리 전파하러 다니자고 선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웃기는 것은, 이게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교사입니다. 점잖게 앉아서 이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종말이 왔으니, 일상적인 삶을 살면 안 된다. 특별히 종말을 위해 준비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은 걷습니다. 1980년대에 있었던 종말론 사건이나, 2000년대에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가장 웃긴 것은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한테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일상적인 직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고 해놓고, 주님이 곧 오신다는데 돈을 걷고 성전을 짓습니까? 무수한 똘마니들이 이 사람들을 따라다니지 않겠습니까? 똘마니들이 따라다니면서 이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밥만 먹고 살아갑니까?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더 많은 욕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종말을 가르치는 교주들이 종말을 선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더 사치스럽고, 세상에 성전을 지으려 하고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이 사람들한테 돈을 바치고, 그 사람들은 돈을 움켜쥐는 것입니다. 결국은 일하고 먹고사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해서 밥 먹고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게 하나님 앞에 게으름의 문제입니다.
스피노자가 그 말을 안 했다는 것이 정상입니까? 이제까지 우리가 스피노자가 했다는 말로 듣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가 그 말을 한 것을 학자들이 아무리 찾아도 발견을 못 한다고 최근에 이야기했습니다. 안 했다고 칩시다. 어쨌든 그 사상은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이 오실 것을 대망하면서 살면, 오늘 살아가는 그 삶이 예수님이 내일 오신다고 하더라도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앞에 예배로써 드리는 삶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도표의 핵심은, 그렇게 종말에 대해서 삘이 꽂혀서 미친 듯이 거짓 교리를 전했는데, 처음에는 자기들도 종말에 대해서 긴장했을지도 모르지만, 전파하고 사람들에게 돈을 걷어 먹고살다 보니까 그 마음의 정체가 일하기 싫은 게으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배경 아래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게 하지도 말라는 말이 나왔고, 이것을 제일 많이 인용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 아닙니까? 그래서 노동을 강조하는 데 쓰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이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도 너희에게 명령하기를" 이것이 한두 번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까 도표에서 보면 이 사람이 이렇게, 이 사람은 어쨌든 놀고먹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전파하는 것도 일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노동을 안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누군가는 대신 노동해야 양식을 마련하지 않겠습니까? 불평등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쓸 것을 자기가 벌어 먹고살아야지, 자기는 게으르고 편안한 삶을 택하고, 남들은 열심히 뼈 빠지게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나도 같이 먹고살겠다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봤을 때 심성이 바르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나라가 어려운 사람도 돕고,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조금 이따가 나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의 자세는 결코 그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에게 인생의 보람을 느끼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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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파이어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파이어는 해고됐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비자발적 해고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해고를 하는 것입니다. 저도 얼마 전에 본 어느 신문에서 한 페이지에 걸쳐서 상세하게 나왔습니다. 40대 초반밖에 안 된 사람이 부모님에게 직장을 그만둬야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편도 그렇고 모두 괜찮은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정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직업을 갖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의 꿈대로 전원주택을 짓고, 그때 목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20억을 모으면 스스로 파이어 한다는 목표입니다. 그 나이에 20억을 모았으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20억으로 서울에서는 집 한 채밖에 못 살지 모르겠지만, 강남에서 그 돈으로 전세밖에 못 사지만, 시골에서는 4억 들여서 집 하나 짓고, 16억 남으면 은행에다 넣어놓고 투자도 하고, 안전한 곳에다 굴리면서, 시골에서 사 먹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생활비도 별로 안 들어가고, 애들 교육비도 많이 안 들어가고,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세계여행 가고 싶으면 훌쩍 떠나가고, 그림 그리고 싶으면 그림 그리고, 그렇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인생이 편안할지 모르지만, 야망을 버리고 소박하게 산다는 면에서는 남에게 해도 안 끼치고 산다는 면에서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보람이라는 것을 과연 그 안에서 느낄 수 있을까, 그냥 자기만족 하면서 나 편한 대로 살았다, 그것이 인간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있을까 싶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마 그렇게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직장 다니면서 평생소원이 있었습니다. 한 달만 휴가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를 하고 나서 교역자들이 6년을 일하면 1달은 쉬게 해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는 안식년을 별로 안 가졌고, 최근에야 20년 지나서 6개월 정도 다녀왔습니다만,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너무 지치고 힘들 때, 가능하면 휴직을 하든지 직업을 이동할 때 중간에 휴식일을 가지면서, 자기를 조금 더 북돋우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파이어족의 그 철학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목표가 생깁니다. 그러면 그 목표에 마음이 불타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일을 할 때 우리들이 행복한 것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고 논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명령하기를"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도 이 말을 했다는 것은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버려 두기만 하면 누구든지 일하기를 싫어하고, 일은 하기 싫어해도 소비는 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일하기를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여라, 사람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얻어먹는 게 아닐 테니까, 하나의 비유일 것입니다. 너희가 일하기를 싫으냐 그러면은 먹지도 말아야 한다는 공식을 가지고 소명감 있게 살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밥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둘 다를 이야기합니다. 밥 문제를 가지고 진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 도와주라. 이것이 성경의 일차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공부하며 배웠지만, 그때 마르틴 루터가 양식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육신을 위한 빵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모든 조건을 함께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심지어 일용할 양식 속에 좋은 교육을 받을 것, 문화를 즐길 것, 이런 거는 들어가는데 귀금속은 안 들어간다. 이렇게 딱 부러지게 이야기할 정도로 인문주의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인간의 편에 서서, 일용할 양식이라는 문제를 당시 1세기에 주어졌던 문맥보다 16세기의 문맥에서 훨씬 더 인간적으로 해석을 해준 것입니다. 저는 그 이론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씀드렸고, 참고로 이 문제를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상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깊이 읽는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는 부분을 한번 잘 읽으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지금도 재난지원금을 가지고 말이 많지만, 그것을 잘 해야 합니다. 잘 못 하면 백성들을 점점 게으르게 하는 것도 되고, 잘 하지 않으면 백성들로 하여금 더 고통받게 만들어서 좌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잘 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먹는 밥의 문제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을 권리, 정치에 참여할 권리, 문화를 누릴 권리 등등의 것들이 골고루 모두 다 포함되어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누리고 더 좋은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는 혜택을 받는 모든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그런 삶의 조건들을 모두 양식으로 보고 그 모든 것들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밥이라고 표현했는데, 단순히 밥 먹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맥락에서 보면 그 당시에 굶은 사람이 많고, 기근으로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다. 지금은 물질적인 부분의 문명이 많이 발전하면서 밥을 그렇게 한정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도와주라"라고 되어있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삼시 세끼를 굶는 사람 이외에는 부재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연약한 사람은 강하게 붙들어주고, 문화를 누려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해주고, 의료의 혜택을 도움을 받아서 삶이 개선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해주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주신 명령입니다. 특히 스스로 자기를 부조할 수 없는 사람들, 고아나 과부, 질병 속에 있어서 노동력을 상실한 이러한 사람들, 노동력 상실자,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교회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와주는 것은 적극적으로 성경이 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하나를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신세를 지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는 공동체의 밥이 아까우니까 너한테 주기 싫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일을 안 해도 신세를 지면서 살게 만들어주면 이 사람 자신의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국가의 복지라고 하는 것이 양날의 칼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한 나라에서 최소한 굶어 죽거나, 질병에 걸렸을 때 돈이 없어서, 대책이 없어서 죽어가는, 정신적으로는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립사하는 그런 사람이 없도록 국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 일을 위해서 세금을 내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세금을 내고, 그 재원을 가지고 그런 삶의 경계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되고, 가난한 집에 태어난 아이들이 교육을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나쁜 조건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도록 그러한 사회적인 여건을 개선하는데 그런 것들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만 잘못하면 사람들이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 대량으로 양산해내는 사람들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제가 20여 년 전에 캐나다를 한 번 갔습니다. 캐나다에 가서 어느 중요한 집회에 제가 살펴볼 일이 있어서 가서, 책 쓴 것 대문에 살펴보고, 거기에 있는 후배 목사님이 저를 데리고 관광지를 갔습니다. 버스를 탔는데 너무 젊은 사람들이 가득 찼습니다. 그때가 전혀 휴가철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그때 제가 강의를 안 다녔습니까? 휴가철도 아닌데 왜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잔뜩 타고 여행을 가느냐고 물어보니, 늘 이렇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주는 웰페어만 가지고도 사는데,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그 돈이 100만 원 정도 되었으니까 정상적으로 버는 사람들보다는 불편하게 느낍니다. 불편하게 느껴서 취업해서 돈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괜찮은데, 돈을 얼마 못 버는 사람들은 그렇게 취업을 하고 나도 세금 내고 하면 웰페어 받는 것과 일하는 것 사이에 임금 격차가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합니다. 나중에 1년, 2년 세월이 흘러 지나가고 나면, 일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취업을 시켜줘도 몇 달 있다가 그만두고, 실업급여를 받으며 국가를 의존하며 살아가다 보면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노동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빠지는 것이 대게 마약이나 알코올중독에 빠집니다. 그런데 빠져서 사람들이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뿐만 아니라, 너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그런 태도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노동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보면,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양식이 노동의 대가라는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노동을 합니다. 기업이든지 개인이든지 누구에게, 기술이나 노동력을 제공하고 혹은 아이디어나 자본을 제공하고, 이렇게 해서 대가를 받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가지고 양식을 사니까, 분명히 양식은 노동의 대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대가를 많이 받으려고 서로 애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조금 더 좋은 양식을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문화를 누릴 수도 있고, 더 좋은 교육의 기회도 가질 수 있고, 더 좋은 사회집단에 소속될 수도 있고 하는 이러한 특권들이 주어지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런 의미에서 양식은 노동의 대가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양식은 노동의 대가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상적 의미라고 본다면, 이것은 천상적 의미입니다. 노동함으로써 세상을 가꾸고, 일은 세상의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거기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와 관련지어져서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면, 이것은 정신과 관련되어서 행복하게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지만 행복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는 행복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150조에 가까운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베이조스나 빌 게이츠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세계적인 갑부입니다. 아마 돈에 대해서는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고, 꿈꾸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행복하지 않지 않습니까? 이혼하고 가정이 파탄 나고 그렇게 하면서 세월은 가고 늙어가는데, 아무리 우주를 가고 아무리 새로운 문명을 개발해내고 인류를 위해서 헌신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행복할 때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신은 행복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이 정말로 최상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림을 보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과 주관의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주관적으로는 내가 만족하는 것이 행복일지 모르지만, 죄를 지으면서 만족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는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불행이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측면과 함께 객관적인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만드신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의식이 동의를 해주는 것과 같이 섬김을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육체와 정신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놀고먹으면서 살면 남에게 폐를 끼친다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폐를 끼치는 그런 삶으로 기생하듯이 살아가면 진정으로 행복에 이를 수 없다. 당연히 그런 사람이 신령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노동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동을 합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인데 그 세계는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시점 T라고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과 아름다움을 현실로 다 나타내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아직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지는 않지 않습니까? 자연밖에 없습니다. 하늘에 새가 날아다니고 물에는 물고기가 다니고 땅에는 짐승들과 과일 맺는 채소와 이러한 것들이 모두 자라기는 했지만, 그것은 자연의 세계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그런 현실에 노동을 보탬으로써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것들이 새롭게 발전하고 조합을 이룰 수 있도록 주신 가능성을 현실로 나타내도록, 여기의 현실과 가능하도록 함께 주셨는데, 그 가능함을 현실로 바꿔나가는 이 노동이 운명입니다. 그러면서 발전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인간들이 수십억 명이 발가벗고 다니면서 과일이나 따 먹으면서 살아가리라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번성하고, 그 사람들이 사회를 만들면 당연히 죄는 없지만, 당연히 더욱 효율적인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길도 놓을 것이고, 문명이 발전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담이 그 동물들의 이름을 붙여준 것 자체가 노동이지 않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있는 대로 내버려 두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있는 대로 내버려 둘 바에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성과 가능성을 함께 주셔서 창조된 세계인데, 여기에다가 노동을 보태어서 문명을 일굼으로 가능했던 것은 현실로 만들어서, 이 창조된 세계보다는 이루어질 세계가 더 좋은 세상이 되도록, 하나님을 더욱 잘 보여주는 세계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노동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직업을 돈하고만 연결을 시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 직업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이 세상에 유익을 끼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소명을 느끼는 것이 신앙적인 자세입니다.
보겠습니다. 세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한 사람은 모릅니다. 모르는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은 방황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아는 사람은 똑바로 살아갈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흔들리기도 하겠지만, 아니까 크게 방황하지 않고 갈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이고, 이것은 덜 좋음입니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모를 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과는 다른 것을 확신해버리는 사람입니다. 미친 듯이 이것을 위해서 질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정해놓고 부지런할수록 이 사람은 악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이만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교역자들이나 성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놀라는데, 세대차이가 많이 나서, 내가 늙어서 놀란다기보다는, 놀랍게 껍데기는 그리스도인인데 속의 생각은 세상 속에서 가르쳐주는 가치관에 의해서 너무 많이 잠식되어있습니다. 그것도 교육의 문제이고 신앙의 문제인데, 성경을 배우고 진리의 말씀을 배우면서 그것을 벽돌 쌓듯이, 한 번 보고 버리는 광고지처럼 사용하면 안 되고, 그것을 건축자재 삼아서 차곡차곡 벽돌을 놓듯이 인생관을 쌓아가야 됩니다. 그런 일을 안 하다 보니까, 껍데기는 그리스도인인데 사고방식은 전부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을 확신 있게, 뭔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부지런하게 인생의 보람을 느끼면서, 비록 수입이 많지 않고, 때로는 고난을 당해도 거기서 하나님이 내가 하는 일을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볍게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깊이 있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책과 씨름하고 기도와 씨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삶의 체계 자체가 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 분의 대화를 들어봤는데, 너무 정답 같은 대화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주제에 대해서 재미있게 잘 이야기해준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 중학교를 다닐 때 야구를 많이 좋아했습니다. 선수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미치다시피 했습니다. 주일이면 교회를 다녀와서 얼마나 열심히 어두워서 볼이 안 보일 때까지 동네 친구들하고 야구를 하고 나면, 저는 지면 끙끙 앓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아침에 일어나고 나면 상쾌합니다. 매일이 그랬습니다. 그 상쾌한 아침이라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렸습니다. 아마 제 생각에는 상쾌한 아침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꽤나 오래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교수 생활을 할 때까지는 그런대로 유지가 되었는데, 목회하고 나서부터는 상쾌한 아침은 없었습니다. 아침에 항상 새벽기도를 나갈 때는 댓돌에서 헛구역질을 자꾸 해야 했습니다. 수면이 모자랐습니다. 많은 일이 기다리고, 저는 건강관리를 거의 안 하고 그랬습니다. 정말로 옛날에 상쾌한 아침이라고 하는 낱말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기력이 너무 떨어져서 좋은 내과에 가서 링거를 맞았습니다. 어떻게 놔주셨는지는 모르겠는데 5시간은 링거를 맞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약에 취해서 5시간을 맞으면서 자고, 비몽 사몽하게 집에 와서 다시 잠들었습니다. 그렇게 12시간을 잤습니다. 그리고는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눈을 뜰 때 항상 기분이 있습니다. 온몸이 쑤시고 여기저기 얻어맞은 것 같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그랬는데, 눈을 떴는데 내 몸이 천상에 구름 위에 뜬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 데도 안 아프고 정말로 수십 년 만에 맞이해본 상쾌한 아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숨을 쉬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 같은 죄인에게 오늘 하루를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정말 상쾌한 아침입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몸이 아프다가도, 몸에 아픈 것이 없이 정신과 육체를 맞이하는 것도 선물 같은데, 죽을 사람이 안 죽고 살아서 오늘 살 기회를 얻지 않았습니까? 내가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속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내가 사랑해서 못 해준 게 후회되는 사람에게는 사랑할 기회가 있고, 내가 다툰 사람과는 화해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굉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어제 죽은 사람은 오늘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내일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살아있는 사람은 내일 또 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래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오늘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특권이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이 선한 것이 있다고, 당신 만드신 세계를 잘 가꾸지도 못하는 나를 이렇게 오늘 하루를 살려주셨을까 생각하면 매일매일이 감격 속에서 아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몸이 아픈 데가 있고, 힘든 데가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니까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큰 행복만 누리려고 하지 말고, 오늘도 소소한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건강한 몸으로 일어나게 된 것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같이 살 수 있다는 것, 만날 수 있다는 것, 풀잎에 스치는 작은 바람결 하나에도, 내가 그 흔들리는 풀잎을 보면서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이러한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기 배경에 저런 노을을 보면서 저렇게 나의 모든 감각이 살아있어서 저것을 보고 연상할 수 있고, 붉은 노을을 보면서 마음이 뛸 수 있다는 것, 윌리엄 어즈워스가 "내가 어려서도 그랬고, 나이 들어서도 그랬으니, 그렇지 않다면 내가 죽는 것보다 나은 것이 뭐가 있겠나"라고 노래하듯이 그렇게 가슴 뛰는 아름다운 정동을 간직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 때, 게으름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보면 영어로 현재도 프레젠트고, 선물도 프레젠트고 둘 다 똑같은 단어인데 두 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현재라고 하는 이 말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어제 누군가는 이렇게 되었을 것 아닙니까?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기준으로 갈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제 살다가 죽은 사람이고, 이 사람은 오늘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이 자체가 너무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없고 부족한 것만을 바라보면 행복한 내일도, 오늘도 없습니다. 그러지 마시길 바랍니다. 몸이 아프십니까? 그래도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병원을 갈 수 있고, 치료를 받을 수 있고, 그리고 희망이 있고, 그러한 것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가 이렇게 살아있어서 감사하다.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오늘을 사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보람을 느끼면서 주님이 하늘을 열고 우리를 내려다보셨을 때, 못 할 일을 하다가 들킨 것만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고, 너 무엇 때문에 보람도 없는 삽질을 하며 인생을 사느냐고 했을 때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내가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물결 속에서 흘러갑니다. 이런 물줄기를 만날 때도 있고, 이때만 있겠습니까? 배가 이렇게 요동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때도 있고, 평안한 때도 있고, 어떠한 시간을 지나든지 항상 이것은 현실 세계와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현실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바다니까, 거기에서 이것만을 바라보면 사람이 울고 웃으며 살다가, 사람이 간사해집니다. 이것을 잘 나갈 때도 이것을 보면서 너무 기뻐하지도 말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생각하면서, 내가 올바로 살고 있는지를 보고, 이것이 요동칠 때도 인생의 의미들을 생각하면서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 내가 어차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닌가, 하면서 요동치는 여기에서 이것만을 바라보면서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꿈과 보람이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도 이 말씀을 듣고 격려가 되셨기를 바랍니다.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인생을 정말 보람있게 사랑하며 살아서, 마지막에 눈을 감을 때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방역에 조심하시고, 일주일 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