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제9장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신자의 경험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녹취자 : 오희열
성도 여러분 잘 지냈습니까? 이제 벚꽃도 모두 떨어지고 본격적인 녹음이 우거지는 계절로 향하고 있습니다. 정말 희미하게 느껴졌던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게 느껴지고 여기저기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어있습니다. 오늘은 조금 쌀쌀한데요, 우리가 “아사밤”을 하며 잠시 멈췄던 죄와 은혜의 지배 9과부터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제 9장,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신자의 경험.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사람이 금방 겉모습까지 망가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서 이야기하는데 이것을 보면서 너무 낙관적인 마음을 갖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눔 질문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신자의 특징은 영적인 활기가 쇠퇴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지독한 영적인 침체가 있을 텐데 그 경험을 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지체 1 : 저의 영적침체는 한 마디로 사는 것이 지옥이었다. 빛이 없는 동굴 속에서 헤매이고 있는 모습, 소망, 희망,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나는 없어져야 한다는 마음과 우울, 공포, 두려움, 눈물, 무기력, 게으름, 나태함,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고 나의 생각 속에 갇혀서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최악을 생각하면서만 살았던 것 같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엊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기력하게 보내면서 죄의 속임과 강압으로 나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체 2 : 결혼 후 아이가 생겨 멀리 있는 모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영적인 방황이 시작되어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기 시작했고 열린교회에 오기 전까지 부부가 마음을 합한 교회를 찾지 못해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말씀 시간에는 집중을 잘한다고 자부했던 제가 말씀 시간에 자주 졸고 소그룹 모임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급함으로 아내에게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아내와의 영적인 연합은 없었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 그 누구에게도 영적인 도전을 좀처럼 받지 못하고 스스로 침체의 시기에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체 3 : 한 때 하나님 없이 세상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씩씩하게 달려갈 때가 있었습니다. 예배는 때우기 식이었고 기도, 경건생활, 구역모임, 모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거추장스럽게까지 느껴졌는데 그러면서도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환경 탓으로 돌려지면서 가족들과의 관계도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세 분이 말씀하셨지만 공통점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지지 않고, 또 빠졌다면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서도 가능한 것은 영적인 은사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신비적인 몸인 교회이 머리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와 관계를 갖고 있는데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은혜와 은사입니다. 신비적인 교회의 머리로서의 은혜는 이렇게 주어집니다. 이 은혜를 받으면서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또 하나님이 운사를 주십니다. 이것은 유기체적인 지체의 통치의 머리로서 수여하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사랑하게 하심이고 은사는 일하게 하시는 것, 사역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혹은 섬김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같은 시간에 일하는 것은 재능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일하는 것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은사는 거짓 선지자도, 가룟 유다 같은 사람도 받았습니다. 가룟 유다 같은 경우에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도 삼으시면서 능력을 주십니다. 거기서 가룟 유다가 제외되었다고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결국 불택자로서 파멸의 길을 가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얼마든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내적인 깨달음은 있습니다. 여기 그림을 보면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 말씀의 경험은 이렇게 말씀은 깨달아지는데 여기 죄가 이렇게 가득 차 있어서 이 자체가 사랑으로 변해야 하는데 이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죄의 지배 아래 큰 힘으로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한 번에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씀의 깨달음이 오는 것 자체가 자신이 굉장히 경건하고 좋은 영적인 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인 경험을 지나치게 신뢰하게 되는데 죄의 지배 아래서도 이런 말씀에 대한 일시적인 깨달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면죄시켜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고민해야 할 것은, 이렇게 죄의 지배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내 마음 속에 가득하게 되는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서 경험의 차이가 있는데, 은혜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는 말씀의 경험이 지속적입니다. 말씀의 깨달음, 말씀의 은혜가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그것이 간헐적입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깨닫고 나면 그 깨달음을 실천하기에 굉장히 유리한 고지에 있습니다. 깨닫고 나면 놀랍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그 안에 있습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은혜의 힘입니다. 힘이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적합한 예일지 모르겠는데, 불이 타오르고 있는데 작은 불꽃이라서 물방울 하나라도 떨어지면 꺼질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불꽃이 워낙 크다면 물방울 하나 떨어뜨려봐야 피시식 할 뿐이지 불은 계속 타오릅니다. 그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실천적으로 이어지기가 어려워집니다. 깨달음이 오면 이 깨달음이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뭔가를 깨달아도 이것이 계속 끌고가지 못합니다. 금방 다른 생각이 들어와 버립니다. 마음에 깨달음이 있고 뭔가 보일 것 같고, 질문이 계속되어야 하는데 계속되지 못하고 툭 끊어져버립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그것이 집요하게 내 마음 속에 살아서 해결될 때까지 나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합니다. 결국 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이런 정신의 기능들이 왕성하게 활동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가능한 것은,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견고합니다. 이런 사랑이 있으면 끊임없이 거룩해지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거나 기도하거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것들이 단속적이지 않고 지속적입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사람은 고통스럽습니다. 당연히 자신은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너무 힘들고 괴로우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때를 생각하기도 하고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네가 그렇게 살면 불행하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라고 할 때 당연히 순간적으로 따뜻한 정서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자신이 거룩해지고자 하는 욕구로까지 이어져서 다시 잃어버렸던 신앙의 의무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런 일은 죄의 지배 아래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영혼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극은 계속 주어지지만 그 자극도 계속 반복되는 자극하는 힘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 말씀의 경험과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말씀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해 봅시다.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지체 1 :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 말씀의 경험은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또 마음에 찔림을 주셔서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주시고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반면,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말씀의 경험은 말씀받는 그 순간에는 분명 깨달음도 있고 말씀의 찔림도 있었지만 그것이 굉장히 일시적이었고 삶의 변화나 말씀의 순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체 2 : 스무 살 후반 처음 사회생활 했을 때의 일입니다. 수직적인 조직문화로 힘들었던 시기에 술과 돈을 좇아가는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며 지냈습니다. 주일날 예배시간이 되면 예배에 집중할 수 없었고 말씀의 은혜가 잠시 머물다가 다시 월요일이 되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기도를 하였지만 회개가 없었고 말씀을 읽었지만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선교가 저 멀리에 있는 아프리카가 아니 바로 내 옆에 있는 직장 동료, 상사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후로 직장을 다니며 동료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매일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싹트기 시작하자 동료에 대해 상사에 대해 사랑에 대한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체 3 :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저에게 들려지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그 깨달은 말씀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일으킵니다. 삶의 현장에서도 그것을 적용해보고자 실패할지라도 애를 씁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도 저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은 말씀은 제 마음 속에 많은 갈등들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정말 죄를 죽여야 할 순종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은혜가 있을 때는 그 죄를 죽이는 척이라도 하지만 은혜가 없을 때는 그 죄를 남겨둔 채로 제가 순종할 수 있는 부분의 죄들만 죽이는 일을 하는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의 대표적인, 그러면서도 교회를 완전히 떠나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죄에 지는 자신의 상황으로 성경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상황은 context 인데 context 로 성경, text를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성경의 진리를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신앙이 가슴 속 깊이 들어와서 자신을 본질적으로 바꾸는 신앙이 아니라 다분히 형식적인 신앙, 외식하는 신앙이 됩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도덕적인 의무는 수행할 수 있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사람들이 죄를 쉽게 짓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분이 영적인 침체에 빠져서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해서 갑자기 개망나니 같은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사람이 볼 때는 좀 선한 행실을 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외식이 나옵니다. 에드워즈의 유명한 철학책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책의 602페이지, 603페이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전 세계 모든 인류에 대하여 유익을 끼치도록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배제시킨다면 그것은 참된 도덕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이 뜻은, 어떤 사람이 자기를 버리고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세계 모든 인류에 대해서 엄청난 헌신을 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럴 경우는 참된 도덕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을사오적 이야기를 하고 매국노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도 보면 공직자들이 부패해서 국가의 정보를 가지고 자기 재산을 불리는 일에 사용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보다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과 투쟁하면서 목숨을 바치고 나를 지켰던 항일 투사들을 훨씬 더 존경하게 됩니다. 그리고 6.25때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막아내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나를 지켰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훨씬 더 존경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작은 부분에서 넓게 확장되어 가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 대신 애국적인 사람이면 애국적인 사람일수록 이런 올바른 가치관에 의해서 지도되지 않으면 배타적으로 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애국이라는 이름 하에 국수주의자들이 양산되고 결국 자신의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이 없이 배척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서로 정의를 지키고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로 모두 수렴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결국은 모든 덕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애국심이 하나님의 법과 충돌하게 되고 심지어는 인류애가 하나님의 법과 충돌하게 되는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참된 도덕의 본질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참된 도덕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도덕적인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살기가 어렵다, 일관된 도덕적 삶이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범죄에 대해서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 절대로 죄에 대한 후회가 없습니까? 그것은 정도의 차이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데 아주 강력한 지배를 받고 아주 오래되고 아주 굳어질 경우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면서도 불신자보다 더 악하게 나쁜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정인이 사건에도 나왔는데 결국 검찰에서는 사형을 구형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부부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기독교 직장에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그 직장에서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결국 해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약간 싸이코패스적인 부모들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심리적인 문제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지 간에 주고받은 문자 같은 것들을 보면 인간으로서 참 저럴 수 있을까 하는 끔찍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 우리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고 마음이 완악해지면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자기 자신의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그림에 보면, 개인적으로 범죄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누구에게 회개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회개를 해야 하는데 죄의 지배 아래서도 참회를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는, 시인이 고백하듯이 “내가 오직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하는 고백이 아니라 동기 자체가 다릅니다. 동기가 이기적입니다. 죄에 대해서 후회하고 참회하는 이유는 자기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지 손상된 하나님의 명예, 자기가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그 사랑에 대해 배반했다는 진실한 신앙적인 후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 회개가 지속적이지를 못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참회가 아니기 때문에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죄의 지배 아래서도 참회할 때가 있지만 총체적이지 않고 단편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회개가 굉장히 총체적입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이번에 쓴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책에서 등장하는데, 일제 강점기 때 추록성도 가운데 한상동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한 75년도쯤에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신학교를 다니실 때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오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때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영어 시험이었습니다. 다른 시험이었으면 설교라도 쓰고 가면 설마 빵점을 주겠습니까? 그런데 영어라서, “I am a boy.”가 입력이 안 되었는데 출력이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옆에 학생이 비스듬히 앉아서 자꾸 답안지를 자기 쪽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순진한 한상동 전도사는 “이게 뭔가?”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옆에 학생이 이 전도사님을 보기에 불쌍하니까 보고 쓰라고 한 것입니다. 이 전도사님이 그 자리에서 시험지를 덮고 백지를 내고 퇴장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길래 나를 잘 안다는 친구가 그 답안지를 보여주면 볼 사람으로 저를 이해했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평소에 삶이 정말 거지같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런 내가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하며 회개했답니다. 답안지를 본 것도 아닌데 그 정도의 일을 가지고 회개를 했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 목사님의 경우는 아주 작은 한 사건을 보면서 삶 전체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사고하는 방식입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항상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종합적으로 생각합니다. 마음의 순전함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그 순간의 위기를 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제가 준비하지도 않았는데 아주 적절한 예화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으로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흔히 일어나는 것은,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단을 하지만 그것이 헛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지 않겠다는 그 결단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서 너무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가 계속 살아 있습니다. 그런 양심의 혼란과 고통보다도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가 더 커지게 되면 당연히 항거하지 못하고 죄를 또 짓게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청교도 신학에서는 회개에 대해서 존 오웬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적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율법적 회개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법을 어겼구나! 내가 벌을 받겠구나! 하나님이 진노하시는구나!” 이래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복음적 회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지은 바로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내가 또 죄를 지었구나! 정말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을 괴롭다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게 될 때, 다시 도표로 돌아가면 비로소 이렇게 죄의 근원을 공격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의 복음적 원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 마음이 변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렇게 되면서 죄의 지배를 벗어나서 은혜의 지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명료하지 않습니까? 나만 명료합니까?
문제에 대한 답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은사와 은혜에 대해서 마태복음 7장, 10장이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인가? 무슨 구절입니까? 7장에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보십시오. 주님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 다시 말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인데도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재밌는 것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라는 구절입니다. 그리스어로 “에그논”이라는 단어인데 제2부정과거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할 때에는 너희를 알았는데 너희들이 나중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모르는 것으로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몰랐던 것입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랑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은혜 없이도 그런 은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0장 1절에는 더 명료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며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맨 마지막에 가룟 유다의 명단도 나옵니다.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가룟 유다가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는데 자신은 사실 구원받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끔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하시는 사역을 신학에서는 둘로 구분합니다. 구속적 사역과 사역적 사역입니다. 구속적 사역은 하나님이 그 인간을 구원하시면서 사역하시는 것이고 사역적 사역은 하나님이 써 먹으시기 위해서 그 사람을 단지 일하게 하실 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많이 섬기고 있다고 해서 자랑하거나 하면 안 됩니다.
부산에 집회하러 내려갔는데 어떤 장로님이 식사 대접을 해 주셨습니다. 여러 장로님들과 집사님들, 목사님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장로님이 계셨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투리 섞인 말로 또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부산 지역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제가 억수로 주님을 열심히 섬깁니다.” 그 말은 듣고 제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리고 집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잠깐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장로님이 내 손을 붙잡으면서, “목사님, 제가 너무 몰랐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듣고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하면서 자기 의에 빠졌던 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좋은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에 마음을 너무 많이 가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항상 사랑하고 있는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이 가능합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의 말씀에 대한경험의 차이는 어떻습니까?
말씀의 경험이 간헐적이라는 것, 지속성이 없다는 것,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 잊지 마십시오.
3번입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다 할지라도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 거룩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면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는 영혼의 변화가 아니라 그냥 정서의 변화일 뿐이고 다시 죄의 지배로 돌아간다. 자기 암시적인 상황일 뿐이기 때문에 근원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번,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만큼 도덕적 실천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막보는 사람이고, 죄의 지배 아래 있었던 분들, 아까 자기 간증하셨는데 그래서 교회를 아예 안 나오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신앙을 포기하고 저처럼 불신자가 되었습니까? 무신론자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죄의 지배 아래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반항일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지배로부터 멀어져도 겉으로 보기에는, 예를 들어 정숙하던 사람이 죄의 지배로 들어가니까 갑자기 바람둥이가 되고, 정직하던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들어가니까 갑자기 모든 것에 있어서 다 속이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가 아니기 때문에 사뭇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모든 도덕적인 삶의 뿌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진정한 도덕적인 행위와 실천의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번, 죄의 지배 아래에서 신자가 경험하는 참회가 있다. 한계가 무엇입니까? 동기가 이기적입니다. 자신이 괴로워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회개하는데 정서의 변화가 있을 뿐 영혼의 변화가 없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눈물은 흐르지만 기도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도 죄에 대항하려는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다시 그런 죄를 짓지 않을거야!” 하지만 또 죄를 짓습니다. 저는 불신자 때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끔 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술에 약하기도 했고 취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술을 먹고 나면 다시 술을 먹으면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결심하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아침에 깰 때입니다. 술을 먹고 필름이 끊겨서 곯아떨어졌는데 아침에 깨어나서 말할 수 없는 두통과 온몸의 찌뿌둥함, 눈을 뜨고 보니 여기저기 토한 것이 있는 것을 볼 때,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다.”라고 하지만 며칠 후에 다시 “건배!”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결심을 하지만 이 속에서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따라 살고자 하는 성향들이 이미 형성되어서 자기를 이기지 못하고 또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헛된 결심을 계속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근원을 공격해서 죄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진짜로 회개할 때가 되면 처음 시작은 너무 괴로워서 회개가 시작될 수 있지만 그 회개가 진정한 회개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배반이었고, 자기가 그분의 옆구리를 찌른 것임을 생각하면서 그 고통이 자신에게 전해져 깊이 회개하게 될 때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이 직접적으로 공격당하면서 죽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때 죽이는 주체는 내 마음의 결심이 아니라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간절한 사람의 마음을 사용하셔서 그 안에 함께 역사하시고 죄의 근원을 공격하고 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그 방식은, 죄는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생기는데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죄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은혜의 지배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자, 오늘 오랜만에 편지를 받아보겠습니다. 많이 들어오셨습니다. “목사님, 옷도 봄꽃 같아요.” 제 옷에 관심이 있으셨나봅니다. 분홍색을 입었습니다. “일본에서 화요일 11시에 죄와 은혜의 지배를 공부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두꺼운 책이 지금도 기억에 선합니다.” 일본에서 “저의 버킷리스트는 열린교회 도서관, 열린교회 투어입니다.”, “코코 귀는 잘 치료되었나요?”, 코코 귀는 진작 나았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 버킷리스트가 꼭 이루어지시길 바랍니다. 또 일본에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모습이 멋지십니다.”, “전쟁과 같은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네, 박수를 보냅니다. “사역적 사역은 정말 무서운 거네요. 나는 쓰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봄날을 맞으시고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