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제10장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1)
녹취자: 백지영
봄기운이 이제 무르익고 있습니다. 어제 보니까 32도까지 기온이 올라갔는데 진짜 여름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입니다. 어쨌든 산과 들이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꽃들이 있고 녹음이 우거져가고 있습니다. 희망에 찬 봄을 맞아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오늘 우리가 공부할 것은 제10장, 죄의 지배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제일 먼저 선생님이 문진을 합니다. 기계를 들여다 대기 전에 먼저 ‘어디가 아프세요?’ 아니면 ‘잠은 잘 주무셨어요?’ ‘언제 특별히 통증이 오던가요?’ ‘콧물이 나던가요?’ 아니면 ‘변 상태가 어떻든가요?’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어떤 병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징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징후들을 통해서 그 다음에 그 병을 추적해 나가는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도 신자가 죄의 지배아래 있으면 어떤 징후들이 보입니다. 그 징후들을 가지고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먼저 나눔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고통스러웠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우리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5교구 권금옥 집사(40대),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고 생각과 마음으로 반복해서 죄를 짓게 되자 어느덧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버렸던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인생의 고비 때마다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기억을 떠올려 다시 힘겹지만,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깊고 풍성한 기도가 아닌 너무도 빈약하고 연약한 기도였지만 마음을 실어 진실하게 내뱉은 그 고백들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겨주시고 다시 은혜 안에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5교구 오세인 집사(40대), 마음이 굳어 고통스러운 적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과의 첫사랑을 되새기고 그분이 지금까지 인도하신 선하신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확실한 저의 감정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저의 시선이 하나님께 가있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만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저는 저의 죄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저의 굳어졌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5교구 나동훈 집사(50대), 저는 예전적 태도를 의식적으로 붙잡으려고 해요. 제 상태의 느낌, 수준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보다 저의 떨어진 신앙의 상태를 더 소중히 여기는 그 상황을 제가 벗어나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하는 내용을 제가 먼저 정확하게 들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예전적인 태도를 의식적으로 반복하면서, 하나님은 내 신앙 상태와 다르시다고 하는 고백을 또박또박 한 마디 한 마디 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제가 그 상황을 벗어났던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자, 대충 듣고 보면 공통점이 발견되지요? 몇 분이 간증을 하셨는데 결국은 마음이 굳어졌던 때에는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당연히 죄의 지배아래 있었고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앞에 세 분은 대부분 공통적인 것을 이야기해주셨는데 그게 뭐냐면 예전에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셨던 은혜들을 회상하는 것, 그리고 나동훈집사님은 예전적 태도라고 하셨는데 정확하게 제가 그 예전적이라는 게 예전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liturgy를 이야기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집사님 이야기도 보면 결국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처해있는 상태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자꾸 묵상하려고 할 때 죄의 지배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라고 하는 간증이었습니다.
종합해서 보면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놓여있는 상태의 절망하는 데서는 답을 찾을 수 없고 그리고 결국 하나님이 예전에 나에게 어떻게 선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분의 성품을 주목하며 희망을 가질 때에 그때 우리에게 영혼의 회복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씀과 기도로 나타난다, 이런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여러분들은 생각이 어떻습니까? 틀림없이 모든 사람이 조금씩 달라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회복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본론에 들어가서 한번 보겠습니다.
위험한 징후가 몇 개 거론되고 있는데 제일 첫 번째는 지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특정한 죄가 상상력을 지배하여 사고기능에 간여함,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간여한다고 하는 것은 간섭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 죄가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는데, 자기가 특별히 사랑하는 욕망하고 있는 어떤 죄에 집중되어서 계속 같은 쪽으로 생각이 되고, 그것이 사고하는 기능에 자꾸 관여하게 되어서 그래서 자신의 판단을 어느 한쪽으로 데려갈 때에 그때에 그것은 죄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지배아래 있을 때는 죄에 대한 상상력이 전혀 안 생기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에 대한 생각이 나는데, 그런데 이제 문제는 횟수와 방향의 문제입니다. 은혜의 지배아래 있을 때는 죄에 대한 상상을 하는 횟수가 줄어든다고 보면 됩니다. 사람이 상상을 하는 이유는 실행을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상상하지 않습니다. ‘아, 나 화장실가야 되겠다.’ 이것은 화장실 가겠다는 것을 수없이 상상을 하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변의가 느껴지면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도덕적인 문제의 경우에는 자기가 그것을 좋아하게 되면 횟수도 많아지고 다른 어떤 욕망보다도 그것 하나에 마음이 확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분산이 되는 게 아니라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물건을 훔쳐야 되겠다고 하게 되면 그 물건이 사고전체를 지배하다시피 차지하고, 또 예를 들어서 성적인 어떤 유혹을 받는다고 그럴 때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집중적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게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이고 사고기능에 간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조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표를 보시면, 그래서 어떤 심리가 되느냐? 죄를 실행합니다. 그런데 환경의 제약이 있는 것이지요. 돈이 너무 갖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 집에 들어가서 훔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경비가 너무 잘 돼 있어서. 확률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실패했을 경우에, 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발각되고 처벌받을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죄의 실행을 못하는 것이지요. 그때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실행이 환경의 제한이 있을 때 상상을 하게 되는데, 이게 유익이 뭐냐 하면 물리적인 희생이 없습니다. 두 번째 양심의 가책을 덜 받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뭐냐 하면 미움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가서 한 대 때려주는 것입니다. 한번 얼굴에다 주먹을 날려가지고 한번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는 실제로 제약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가 그럴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고 또 오히려 그 사람한테 맞을 수도 있고, 또 이렇게 될 경우에 나의 도덕적인 명예가 실추되는 것도 있고 실정법 위반도 있고 많이 있습니다. 그때 상상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사람이 불행해지는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뿌리가 어디서 오느냐 하면 교만, 육욕, 불신앙, 미움 이런데서 이런 것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때 그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지었건 안 지었건 상관없이 이미 벌써 그의 마음이 죄의 지배아래 있는 징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콧물이 계속 나고 재채기를 하는 것을 보면 감기에 걸렸다는 것을 우리가 바이러스검사 안 해도 알 수 있듯이 말하자면 저런 징후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이것은 1번에서 더 발전을 하게 되면 특정한 욕망이 정서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싶을 때 사람이 모든 죄를 골고루 짓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 상황에 따라서 각각 다른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젊은 사람들 중에 명품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한꺼번에 모든 것을 갖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차가 갖고 싶다 그러면 차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게 되고, 화장품이 사고 싶다 그러면 화장품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찬다든지, 아니면 요트를 사고 싶다고 그러면 그 생각으로 꽉 차겠지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도표를 보시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지성은 이해와 오성입니다. 그래서 이해를 추론이라고도 하는데 뭔가를 사물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그 다음에 번뜩번뜩 하고 깨닫는 것, 믿음이 대표적으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정서는 마음의 호불호입니다. 어떤 것들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이 판단하고 정서는 좋아하고 싫어하고, 이 두 개가 합쳐지면서 인간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성적으로 그건 참 별로 안 좋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이 워낙 그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불행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머리하고 가슴까지의 거리가 우주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멀 때가 있는 것이지요. 제가 아사밤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두 가지, 무언가에 대한 지식과 판단 이것하고, 그 다음에 정서,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고, 이 두 개에 의해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도표를 보시면, 지성은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정서는 나쁜 것은 싫어하고 좋은 것을 좋아하는 상태가 되면 가장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 길이 뭐냐 하면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래서 이해와 믿음, 믿음을 통해서 진리에 입각해서 정확한 판단을 갖는 지성, 그 다음에 간절한 기도 속에서 죄를 싫어하고 선을 좋아하는 마음의 정서를 갖는 것입니다. 두 개가 딱 만날 때에 그때에 우리는 정확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길이 은혜의 수단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좁게 보면 하나님 말씀, 성찬, 성찬은 반드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지 감격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 더 넓게 보면 저런 것들을 전달해주는 찬양, 교제, 독서 모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은혜가 공급이 되고, 그러면서 저런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명쾌하지요? 그 다음 보겠습니다.
세 번째의 경우에는 머리가 죄라는 것을 알았는데 가슴으로 그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현저하게 버릴 수 있는 힘이 뚝 떨어진 상태, 그리고 몇 번을 실현해 봐도 다 머리로는 설득이 되는데 나는 그것을 버릴 수가 없다 해서 결국은 죄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이 죄의 지배아래 있는 아주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은혜를 붙들고 죄를 버리게 됩니다. 조금 마음이 끌리다가도 마음이 놀랍게 복원력이 있습니다. 회복이 되어서 그래서 그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은혜가 없습니다. 죄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죄를 은혜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요. 당연히 은혜는 우리에게 선하게 살라고 요구하고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죄는 악하게 살고, 그 다음에 사랑하는데 이게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죽이면서까지 하나님을 따르기 싫은 것입니다. 그때에 기꺼이 은혜를 버리고 죄를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사람이 하나님 사랑이 식어지면 은혜가 주어지는 환경 속으로 들어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것을 찾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그런 은혜의 환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죄를 버려야 되니까.
자, 그러면 복습하겠습니다. 잘 보십시오. 감기가 걸리면 콧물이 나고 목이 아프고 기침이 나고 열이 나듯이, 똑같이 죄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 징후가 나타나는데 첫째 죄가 상상력을 지배한다, 두 번째 특정한 욕망이 정서를 지배한다, 그 다음에 세 번째 미움이나 정욕 같은 그런 것들인데 이성적으로는 죄가 파악됐는데 그 죄에 대한 사랑을 못 버린다, 그게 안 된다, 그게 이상하게 안 된다, 마치 내 마음이 불구가 된 것처럼 예전에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이상하게 안 된다고 할 때 그것이 이제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 있는 징후입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 징후는 뭐냐 하면 마음이 심각하게 굳어진 것입니다. 이 굳어짐은 총체적 굳어짐과 부분적 굳어짐으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총체적 굳어짐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총체적으로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겠지요? “목사님,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굉장히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들 중에서 안 믿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그런 게 아니라 자연적 성품에 대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 믿고 은혜 많이 받은 사람 중에도 차가운 사람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성품 자체가. 그래서 처음 본 사람하고 말을 섞는 것 싫어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반적인 성품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자연적 굳어짐 혹은 본성적 굳어짐이라고 이야기하 데, 영혼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굳어져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경이 또 하나 이야기하는데, 두 개가 완전히 나눠지는 것은 아니고 심판적 굳어짐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저들의 마음을 내버려두사” 하면서 각종 죄에 빠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을 이제 하나님의 심판적 굳어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그렇게 굳어진 것 자체가 그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날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로의 마음을 계속 강퍅하게 하셨던 것 이런 것들이 심판적 굳어짐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신자의 경우에는 부분적 굳어짐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굳어져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싫어하면서도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분도 있고,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과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근본적인 원인으로서는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그 자체가 부패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이런 굳어짐이 생기는 것이고, 또 신자의 경우에도 이 부패성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굳어지는 것이고, 또 은혜를 떠나게 됩니다. 은혜를 떠나게 되기 때문에 부패성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아래 있을 때는 마음이 아주 부드럽고 그리고 은혜를 떠날 때는 마음이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굳어진 마음은 세상을 향해서는 아주 말랑말랑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굳어진 마음에는 세상의 욕망과 세속적인 사상 이런 것들이 잘 씨가 떨어져서 아주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아주 부드러워진 마음은 세상의 유혹에 대해서 딱딱한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마치 세상이 뭔가 우리에게 욕심, 죄악 이런 것들의 씨를 뿌려도 길가에 뿌려진 씨 같아서 잘 자라지를 않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하나님을 향해 부드러운 마음은 세상의 유혹을 향해 딱딱한 마음이고, 세상 사랑에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딱딱한 마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범죄입니다. 실제적인 원인은 두 가지인데 범죄 할 때, 인간이 죄를 품에 안고 계속해서 생각할 때 마음이 변하고, 그 마음에 품은 것을 실행을 했을 때 마음에는 또 한 번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이 사람의 마음이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게 되면. 너무 중요해서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죄를 생각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부드러웠던 마음은, 죄를 생각을 많이 할 때 그때 마음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생각했던 그 죄를 실행에 옮기게 될 때 급작스럽게 마음이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큰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마음을 못 지키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지키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지킬 가치가 있는 마음을 지키십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주체적인 독립성을 짓밟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화합하는 방식으로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 할 때 제일 나쁜 것 중의 하나는 거짓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 나쁜 것은 과장하는 것입니다. 과장은 사실은 거짓말에 가까이 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우월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나도 저항할 수 없이” 그런 표현들을 많이 쓰는데, 좋은 표현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만 그러나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결국은 자기가 한 모든 일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일입니다. 그런데 선한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마치 자신은 아무 결정권이 없고 기계처럼 그렇게 움직여졌다는 식으로 간증하는 것은 100% 과장입니다. 그런 습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는 대부분 잘 훈련이 돼서 안 그러시는데 말만 꺼내면 “주께서 아침에 제게 말씀하셨는데” 아니면 “주님께서 제 마음에 저에게 말씀하여 주시기를” 등등, 대부분 영적인 열등감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신앙적인 열등감, 그리고 또 하나는 영적인 교만입니다. 그냥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되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단호하게, “주님이 아침에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잘못된 본들을 선배들에게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정도의 신앙이 아닌 사람이 그런 말을 남발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앞의 말과 뒤의 한 말이 충돌을 일으켜서 하나님이 한 입 가지고 두 말을 하신 것처럼 몰아갑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우러러 보지요. 외식입니다. 아주 심하게 말하면 구역질나도록 불쾌한 것입니다. 왜 그런데서 어떤 영적인 우월감을 느낍니까? 저는 그런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은 신뢰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권위도 느끼지 마십시오. 사실 아닙니다. 오히려 진실하고 정직하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굳이 자기가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이 들으면서 압니다.
그래서 굳어진 마음의 증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까만 마음이지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요.
자, 질문이 하나 들어왔는데, 원리적으로 죄죽임은 거듭난 사람만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거듭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우선 그 사람이 거듭나지 않았다는 판단이 정확한지 먼저 봐야되겠지요. 거듭난 가장 중요한 표는 자기가 언제 거듭났다는 날짜를 계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게 있으면 죄를 지어도 거듭난 사람입니다. 괴롭겠지요. 그리고 만약에 거듭나지 않은 것이 확실할 경우에는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더 중요한 것입니다. 결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죄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 다음 하겠습니다. 나눔 질문입니다. 기도하면 죄에 대한 욕심이 죽습니다. 단 기도가 아주 진실하고 열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 드는지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5교구 김민조 집사(50대), 저는 마음속에서 있던 미움이라는 죄가 현실에서 행동으로 그 상대를 해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며 너무나 견딜 수가 없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됐는데 그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벧전3:9)”는 하나님 말씀이 떠오르며 그때부터 상대의 복을 비는 기도를 시작했더니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이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며 미운 마음이 사라지고 기도가 미움의 죄를 죽이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5교구 최윤성 집사(40대), 하나님께 지속해서 기도를 드리고 마음을 지켜 성화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을 때 어느덧 마음속에 나타나는 죄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죄가 싫어지고 죄의 유혹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원천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5교구 이선길 집사(50대), 저는 누군가를 미워하면 마음이 참 힘들었어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도 괴로웠고 누군가를 미워할 때 마음의 평화가 완전히 깨어지더라고요. 말씀을 의지하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달라고 참 많이 기도했습니다. 미워했던 사람을 다시 사랑하게 하셨고 제 마음은 평안해졌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어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제가 아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계속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특이하게 미움에 대해서 집중해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느 젊은 선교사가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자란 사람인데, 자기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포르노그래피에 아주 깊이 빠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말려도 봤지만, 쉽겠습니까?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존 라일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그 이야기는 우리 안에 죄가 없다 그 뜻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죄에 빠지지 말라 그 뜻입니다. “들어오게 하지 마라. 들어오면 절대 안 나갈 것이다.” 단호하지요? “들어오면 절대 안 나갈 것이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습성화되고 인 박혀버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포르노그래피에 빠졌는데 말려도 보고했는데 안 됐습니다. 그러다가 이 형제가 어느 자매와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에 빠지고 나니까 그 포르노그래피를 싫어하게 되더라”
결국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냐 하면, 죄를 물리치기 위해서 죄 자체로 집중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로 돌아가면 그게 무슨 죄이든지 결국 버리게 됩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러니까 의사들이 우리의 몸을 치유할 때도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다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암이 있다든지 상처가 있다든지 하면 그것을 도려낸다든지 아니면 그것을 꿰맨다든지 이런 방식으로 치료를 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만 하지 않고 면역력을 키우고, 그 다음에 몸에 활기를 더 불어넣어 주어서 몸이 병을 이기도록 만들어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앞의 것이 소극적인 방식으로 병을 치료하는 상식이라면 두 번째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치료를 하는 것이고, 앞의 것이 부정적인 방법이라면 후자는 긍정적인 방법으로 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영적인 원리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만 주목하는 것으로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냥 주목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율법으로 죄를 못 이긴다는 게 그런 것입니다. 깨달아봐야 깨닫기는 하는데 그것으로 이길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인 에너지들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움 같은 경우도 그런 경험들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섯 번째 설명해보겠습니다. 죄죽임을 위한 방편들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 있을 때에는 저런 죄죽임의 방편들을 가까이 하는 게 힘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기쁩니다. 예를 들자면 오른쪽 것부터 보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자꾸 천국을 묵상하게 됩니다. “아, 정말 세상은 잠간 지나가는구나. 그리고 나의 영원한 안식이 주님의 나라에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십자가를 질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 희생하겠습니다.” 그리고 자기부인이 없습니다. 자기 와이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self denial 자기를 ‘아니다’ 이렇게 부인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은혜 아래 있을 때는 자기부인이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를 부인했을 때 즉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설명을 해보면, 자기부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성은 타락하고 욕망은 부패해 있습니다. 이게 그런 자기부인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기부인이 있을 때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런 생활이 싫어질 때, 그게 몸에 배이게 될 때, 그가 이미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 있는 증거입니다.
여섯 번째, 특히 지속적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밑에 보면,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게 말하자면 하나의 면역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갑옷과 같은 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공격을 하려고 해도 사실은 틈이 별로 나지 않습니다. 방패에 막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면 이런 순환이 안 되는 것입니다. 형식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하나님 찾고 이럴 수는 있는데, 결국은 현저히 경건의 능력이 떨어지면서 그 갑옷을 저 죄가 뚫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러니까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 틀까지도 모두 버리고 그리고 알몸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와의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단계가 있는데, 첫째는 기도에 있어서 소위 readiness, 딱 이렇게 준비되는 것, 그래서 예를 들어서 물주머니에 물이 꽉 차 있으면 핀으로 탁 찍으면 물이 팍 터져 나오듯이 그런 식으로 기도가 꽉 차 있어서 어떤 상황이 생기면 확 기도가 쏟아져 나와야 되는데 거기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때 겉모습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속에서 물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기가 싫어집니다. 기도하러 가는 것 자체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핑계를 대면서 기도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기도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기도의 의무 자체를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네 단계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 기도함으로써 마음의 거룩한 틀들을 유지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문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2.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상상을 통해 범죄하는 것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상상을 통해 범죄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차이는 무엇이냐 하면, 사고기능에 지속적으로 간여함,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간여하지 못합니다. 간헐적이지요. 마음으로 범죄할 의지를 받아들임, 은혜아래 있는 사람은 그런 유혹을 받아도 그것을 쉽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1-4.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욕망이 신자의 정서를 지배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보고, 듣고, 경험한 것 이미 알고 있는 바를 통해 떠오른 악한 생각을 털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6. 말씀의 빛에 의해 파악된 죄임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그 죄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어떻게 죄와 타협합니까?
죄에 대한 친화성, 친화성 아시지요? 좋은 것.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 냄새만 나도 너무 좋습니다. 기름에 튀긴 것을 지금은 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옛날에 정말 좋아했습니다. 중국에 가서 기름으로 막 길거리에서 튀기는 것을 보면 위생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흠 하고 끌립니다. 그런 게 친화성입니다. 그 친화성이 은혜에 대한 갈망보다 크기 때문에 죄를 못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먼저 생각이 죄의 속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인간의 마음에 들어올 때 제일 먼저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라울러기 이야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기를 띄우기 전에 먼저 그라울러기라고 하는 전자전 장비를 실은 비행기가 갑니다. 어마어마하게 비쌉니다. 그런 그라울러기가 떠서 강력한 이엠피폭탄을 터트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전자정비가 다 망가집니다. 그리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헬리콥터는 그 폭탄에 맞으면 기계가 작동이 멈추면서 추락을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런 강력한 이엠피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죄가 들어오게 되면 먼저 죄를 탐지할 수 있는 레이다를 교란시키는 것입니다.
2-1. 신자의 마음이 굳어진 증거는 무엇입니까? 각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 죄책의 인식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죄를 아파하지 않는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 이게 신자의 마음이 굳어진 증거 입니다.
2-3. 죄를 죽이기 위한 방편 네 가지는 무엇입니까? 신자가 자신의 행실로는 죄를 죽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부인, 십자가를 짊, 내세에 대한 묵상, 기도의 실천, 그런데 자기 행실로 죄를 죽일 수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직접 죄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 안에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주체가 되어서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2-5. 기도는 신자가 죄를 죽이는 가장 훌륭한 방편 중 하나입니다. 기도가 죄를 죽이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요건은 무엇입니까?
지속적으로 계속 기도해야 하고,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혹시 이것 좀 더 알고 싶으시면 ‘성화와 기도’라는 얇은 책이 있습니다. 예전에 공과 한 적이 있으니까 찾아서 다시 한 번 읽어보시고 잘 모르시면 도서관에 와서 빌려 가시기 바랍니다.
전체문제와 답은 강의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45분 안에 강의를 끝냈습니다. 좀 더 일찍 끝내지 못해서 아쉬운데, 한 주 믿음으로 승리하시고 다음 주일 말씀에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