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은혜의 지배(2021.04.27._온라인 구역공과)
19. 제11장 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에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1)
녹취자: 이재호
오늘 우리 구역공부 죄와 은혜의 지배 제 11장 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에 신자는 죄의 영향을 받지만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오늘 나눔 질문 먼저 하겠습니다. 은혜를 떠나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경험을 우리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제가 은혜를 떠나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을 죄의 결과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공과에서도 다루듯이 죄의 시작은 미미한 것 같지만 점점 그 찌꺼기들이 마음에 쌓여 영혼의 기능과 판단을 흐리고 결국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생각만 하던 죄들이 실제 저의 언행을 통해서 드러날 때 마음에 죄책감과 후회, 두려움 등이 생겨나고 내가 또다시 너무 멀리 떠나와 죄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세상의 가치관을 좇다가 허무함을 느낄 때 내가 지금 죄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즐거움과 저 자신의 만족을 좇으며 살 때는 마치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고 저의 현재 상태를 직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세상의 어떤 것도 나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음을 깨닫고 허무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야 비로소 제가 잘못된 가치를 좇고 있었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다른 것들로 저의 마음을 채우려 했음을 보게 됩니다.”
“작정한 듯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고, 매일 계획했던 은혜 생활은 어느새 무너져버렸습니다. 자유롭게 세상을 즐겼지만, 즐길수록 제 영혼은 더 초라해지고 억압당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서 오는 소외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세 형제, 자매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까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세 분 모두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못 깨달을지 모릅니다. 아까 마지막 자매가 이야기한 것처럼 소외감, 고통을 깨닫게 될 때 내가 이렇게 은혜의 통치를 떠나서 죄의 지배로 미끄러져 갈 때에 많은 유혹들이 나를 꿰어서 미끄러지게 했는데 알고 보니까 이것이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 내용을 보겠습니다. 신자와 죄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죄가 지배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죄가 신자에게도 죄의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지배 기간이 길어집니다. 그럴 경우에는 신자의 내면의 세계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까지 다 어떤 특정한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 죄를 좇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틀로써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죄의 지배력이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에 보면 거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제가 아주 잘 드는 예화 가운데 하나는 저는 사실은 회심 전에 술을 마셨고 회심 후에도 술을 마셨지만 생애 전체를 손꼽아 볼 때 술에 취해서 몸을 못 가누어 본다던 지 아니면 너무 술이 마시고 싶다던 지 별로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냥 기분이 우울하고 술이 먹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술을 좋아해도 거기에 인박이거나 혹은 중독 상태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인박이고 중독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아주 쉽게 끌리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저처럼 인박이지 않으면 술을 먹자고 유혹하는 환경이 많이 펼쳐져도 내가 이렇게 강하게 끌리지 않으니까 ‘아 나 싫어’ 하면 싫고 ‘그래 그럼 가지, 내가 가서 같이 있어주지’ 그런 정도는 할 수 있지만, 내가 만약에 강하게 끌린다고 하면 이야기만 들어도 내 몸이 저절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김유신의 이야기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말을 탔더니 말이 그냥 술집으로 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인박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죄의 실효적인 힘이라고 부릅니다. 실효적이라고 부르는 뜻은 실제로 효력이 있는 힘입니다. 반드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도를 가리켜서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것이지만 실제로 효력이 있는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실효적으로도 우리나라가 지배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일본 위에 있는 열도들은 일본 것인데 러시아가 가져갔는데 법적으로는 일본 것이지만 실효적으로는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향력을 못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림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복음을 통해서 복음의 능력이 이 사람에게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죄를 이길 힘을 주고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고 죄와 싸울 수 있는 동기와 격려를 주는 것입니다. 아까 우리 인터뷰했던 지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순간에 죄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 누가 떠밀려서 들어간 것은 아닌데 은혜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자기 스스로 마음이 변질되어서 죄의 지배로 걸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깊은 고통을 느끼고 하나님의 단절, 소외감을 느끼고 비참하다는 사실을 자신이 생각할 때 ‘그 때 은혜 아래 있었던 때가 정말 행복했구나’ 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이 죄와 싸울 수 있는 동기와 격려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면 죄로부터 자유를 주시고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것 같은데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율법의 문제가 여기서 나옵니다. 율법은 하나의 단어지만 신학적으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크게 두가지 의미로 구분되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넓은 의미로 율법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모든 계시의 총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편에서 말씀, 말씀, 말씀 그럴 때 그 말씀이 어떤 때에는 구약의 모세 5경을 비롯한 율법만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어쨌든 하나님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모든 계시의 지식, 인간의 양심 안에 있던 밤마다 뜨는 달 혹은 아침마다 뜨는 해를 보면서 천지의 조화를 보면서 느끼던지 간에 모든 인간과 세계에 대해 주시는 계시의 총체를 넓은 의미의 율법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율법은 하나님이 에덴에서 주셨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면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내산에서 아주 구체화됩니다. 그래서 에덴에서는 개인, 인류의 대표였지만 시내산에서는 나라, 이스라엘이 드디어 생겨나게 됩니다. 율법이 아주 상세하게 주어지게 됩니다. 이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게 되는데 이 율법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도저히 그 율법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밖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도움이 우리를 구원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율법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율법의 판결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다스리십니다. 그 다스리시는 방식이 두 방식입니다. 하나는 율법으로 다스리시고 또 하나는 은혜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총체는 십계명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여기에 십계명이 있고 이것이 확산되어서 점점 퍼져 나가는 것이 구약성경인 것입니다. 결국 이 율법을 하나님이 두 개의 장소에 새기십니다. 하나는 돌판에 새기시고 하나는 인간의 마음에 새기십니다. 이것이 양심으로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리학자들이 ‘양심은 신의 음성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양심심성설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죄를 짓고 나서 마음이 확 흐려지고 하나님의 율법을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 만을 경배해야 할 책임,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속에는 모든 사람들 속에 절대자가 있다고 하는 의식이 어느정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절대자는 둘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절대자가 둘이라면 그것은 절대자가 이미 아닌 것입니다. 절대라는 것은 대를 끊는다는 것입니다. 연결될 수 있는 상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자는 둘일 수 없습니다. 만약에 둘이 있다고 하면 사실 둘 중 아무도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식이 인간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뒤로 넘어가면 율법이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계명이고 인간에 대한 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부터 시작해서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나오는데 그것을 가만히 보면 동양에서는 살인하는 것이 큰 죄고 서양에서는 살인하는 것이 칭찬할 만한 행동이고 그렇지는 않습니까? 서양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죄이고 동양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큰 덕이다 라는 식으로 되지는 않습니까? 파스칼도 ‘피뢰뇌 산맥을 인간의 도덕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지 봐라’ 그러면서 ‘피뢰뇌 산맥을 중심으로 이쪽에서는 선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이쪽으로 악하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런 경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엽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산맥을 중심으로 이쪽 동네에서는 살인을 칭찬하고 이쪽 동네에서는 살인을 비판하고 그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하의 작은 문화의 차이라든지 혹은 정치 지도자들이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서 여러가지로 도덕들을 만들어서 강요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불신자는 양심속에 율법을 하나님이 주셔서 양심이 율법이 되어서 그들이 올바로 살아가는지 측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 태어난 사람은 어떤 식으로 무엇에 근거해서 형벌을 받느냐는 것은 자기 자신의 양심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양심이 이미 자신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은혜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에게는 은혜만 있고 양심은 없느냐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불신자는 양심으로써 저울질하셔서 평가하실 뿐만 아니라 선악을 생각할 때에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선과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상당히 많은 변동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자기 깨어짐 속에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 중에는 아주 어려서 담배를 피우고 어른이 되면 담배를 피우면 아주 우스깡스럽다고 여기는 문화를 가지는 족족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여섯,일곱살이 되면서 담배를 배우기 시작해서 성인이 되면 담배를 끊습니다. 많은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면 좋은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을 하고 어른이 되면 어느정도 관용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의 문화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에게 은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뚝 털어져서 죄의 지배 속에 들어가도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의식속에서 ‘그것은 죄다’ 라고 하는 것이 선명하게 세겨져 있어서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죄를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졌다고 인간이 짐승처럼 변하는 것은 아닌 이유가 결국 하나님이 이런 양심을 살아있게 하시기 때문에 사회의 질서와 이런 것들이 유지되고 돌아가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신자는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을 할 때 가책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신자를 은혜의 통치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자, 나눔 질문해 보겠습니다. 충만한 은혜 생활을 할 때의 마음과 미끄러졌을 때의 마음이 어떻게 달랐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들어보겠습니다.
“충만한 은혜의 생활을 할 때는 나의 행복에 대해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충만한 은혜는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든지 늘 하나님을 생각하게 해주어 일상의 모든 일이 기쁨이며 묵상할 것들로 가득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굳이 애써 행복을 추구하지 않아도 되었고 기뻐지려 노력하지 않아도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미끄러짐이 찾아왔을 때 모든 중심은 나 자신이 되었습니다. 나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 죄의 씨앗이 마음속에 생겨나 세상의 가치관, 이기심들이 자라났고 죄가 순식간에 삶의 지배자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각이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오직 나의 미래, 나의 삶의 윤택함, 나의 마음을 돌보고 신경 쓰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충만한 은혜 생활을 할 때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자아의 욕구대로 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강한 마음을 주시고, 그렇게 살도록 순종하게 해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나 용서하는 마음, 작은 일에도 감사함을 느끼고 어려운 일에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미끄러졌을 때는,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나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보다는 의무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영혼의 상태에는 무관심하면서도 세상의 기준에는 온갖 관심을 가졌고, 감사보다는 불만이 넘쳐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마음이었습니다.”
“충만한 은혜 생활을 할 때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제 마음을 주장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늘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께서 저와 가까이서 동행해 주신다는 기분이 들었고, 그 울림으로 인해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나의 언행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신앙에서 미끄러졌을 때의 마음은 가장 먼저, 마음의 평안이 사라졌다는 불안한 감정이 들었고, 주님께서 마음속에 지어 주셨던 질서들이 무너지는 기분 탓에 삶에서 나타나는 나의 언행이 옛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빛으로 살기 위해 여러 가지 은혜의 방편으로 다시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형제, 자매들은 주님들을 만난 분들 같습니다. 어디서 주서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실제로 기뻐해보고 실제로 고통하기를 은혜 아래서 죄의 아래서 다 해 본 것 같습니다. 자,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자기 사랑도 사랑이고 하나님 사랑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은 원인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은혜 그 자체가 사랑의 감화입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놀라운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이 안에서 사랑 그 자체가 갈들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자아와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나 사이에는 갈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에는 모순들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놀라운 질서가 있습니다. 존귀이 여길 것, 그 다음으로 귀하게 여길 것, 그 다음으로 소중히 여길 것, 하찮게 여겨도 좋을 것, 이런 질서를 따라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사랑은 똑같은 종류의 사랑인데 그 사랑은 항상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사랑이 충만해지면 주님을 떠나 죄 가운데 들어가게 되고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A를 선택했고, 그 다음에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후에는 B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이 두개가 서로 충돌을 일으켜서 내 마음 안에서 모순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게 될 때 그 순간에는 무엇인가 꽉 찬 것 같고 나름대로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 안에 내가 하나가 되지 않고 찢어지는 것입니다. 수많은 내가 서로 싸움질하는 것이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동안에는 이 안에 수많은 갈등과 모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잠시 누리던 기쁨보다 더 큰 고통을 자기 분열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사랑의 열매는 쓰디쓴 고통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신자와 죄의 관계를 보면 원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실 죄는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구원받은 사람을 지배하고 있고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구출 받았기 때문입니다. 원리적인 면에서는 그 신자안에 있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신자에게는 여전히 죄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믿고 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 그를 주관하여 평안하고 의미있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을 때, 생각이 미끄러질 때,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 죄는 점점 이렇게 자기 자신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더 악하고 나쁜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지만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6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심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그렇게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서 원리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완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의 대처입니다. 첫번째는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어떤 상태이고 죄의 지배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쉽게 이야기해서 나의 대적이 누구이고 그 대적이 나를 어떤 식으로 지배하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굉장히 많은 신자들이 이런 교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책이 2005년도에 출간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해에 출판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많은 네티즌들이 글을 올렸는데 이 책이 쉬운 책은 아닙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고민을 가지고 극복해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손자병법 같은 책이지만 죄와 함께 살아가려는 사람에게는 쉽게 말하면 군대가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전술 교과서 같은 것입니다. 누가 읽겠습니까? 군대 가기를 기피하고픈 사람에게 병법서를 읽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빛을 받았습니다. 책 사이트에 가서 죄와 은혜의 지배 책을 검색해 보면 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오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자는 나의 다음 행동을 알고 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밀하게 들여다본 적인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이 사실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입니다. 체험적이고 아주 세밀한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는 그런 신앙 말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이나 니코틴 중독이나 특히 성중독인 사람들에게 의사들이 항상 권하는 것이 ‘생각 끊기’ 입니다. 생각이 딱 들어가게 되면 생각이 계속 꼬리를 물면서 정서를 불러 일으키고 그러면서 의지가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 끊기’ 입니다. 네가 연약하고 유혹받는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이 떠오를 때 딱 끊어라. 끊는 연습을 해라 그것을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싸우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내가 비록 잠시 실패해서 죄의 지배아래 있지만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나를 여기서 건져 내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라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죄가 지배하고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지를 생각하면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의 지배 아래 사는 것이 결코 운명적인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 하나님이 건져내 주십니다. 다시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다시 믿음과 순종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젠가는 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았던 것입니다.
자, 1번입니다. 신자를 향한 죄의 지배는 절대적이거나 완전히 실효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통해 입증됩니까? 복음이 주는 능력을 보면 그렇게 오랫동안 죄의 지배를 겪던 사람이 놀랍게 이겨내는 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힘이 죄가 지배하는 힘보다 훨씬 크다고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복음이 자유를 주고 우리에게 그렇게 죄와 싸울 동기와 격려를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죄가 신자인 우리에게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이 이미 자유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두가지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제한으로 주십니다. 죄에 대한 용서, 순종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께 말로는 순종하고 싶다고 하면서 마음 진심으로 구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면서 죄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죄가 여전히 신자인 우리에게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확신을 가지기 바랍니다. ‘어떤 죄도 하나님이 용서하시기에 커다란 죄는 없다. 아무리 오래된 죄의 지배라도 벗어나는데 그 기간처럼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의 가슴에 새기기 바랍니다.
넓은 의미의 율법과 좁은 의미의 율법의 목적을 설명해 봅시다. 넓은 의미의 율법은 하나님이 세계와 인간에게 대하여 주신 계시의 총체를 가리킨다고 말했습니다. 영적인 생명과 힘을 교회에 제공하는 수단이 됩니다. 좁은 의미의 율법은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율법은 율법에서 굉장히 긍정적으로 묘사가 되고 좁은 의미의 율법은 부정적으로 묘사가 되고 있는 율법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가 죽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살렸나이다.’ 그래서 결국 신자의 특권은 보이는 이 모든 세계 속에서 하나님이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학문을 하든지 자연을 보든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든지 혹은 이웃의 삶의 상황을 보든지 그것을 발견하면서 희망을 갖는 것이 신앙입니다.
4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율법 아래 있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율법 아래 있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유무를 따라서 어떤 사람은 여전히 율법 아래에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은혜 아래에 들어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5번입니다. 저자는 성적인 타락 때문에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진 지체에게 어떠한 구체적인 권면을 해주고 있습니까?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아까 오각형에서 설명했지만 더 요약하면 죄 죽임의 원리, 은혜의 지배의 원리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죄를 죽이는 것은 생명력있는 삶을 사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안에 은혜를 주시는데 은혜가 아주 좋아하는 두 축이 있습니다. 죄죽임과 순종의 삶입니다. 죄죽임과 순종의 삶이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너무 좋아서 은혜가 계속 커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는 무엇을 좋아하겠습니까? 죄살림, 불순종할 때 죄는 계속 커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죄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빛에 대해서 아는 사람만이 어두움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고 빛에 대한 관념은 어두움을 배경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그 사람의 지식과 거룩함에 대한 지식은 정확하게 비례합니다. 죄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은 거룩함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가 너무 강해서 항거할 수 없을 때 대처하는 여섯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아까 나온 오각형하고 거의 비슷한 내용입니다. 죄의 지배의 교리를 기억하는 것, 이것을 배우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삶의 환경을 정비하라는 것입니다. 계속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교리를 기억하고 진리의 말씀을 믿고, 죄를 이기도록 어떨 때 하나님이 죄를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지를 배워보라는 것입니다. ‘아, 내가 기도를 많이 했더니 하나님이 그래도 내 마음을 바꾸어 주시더라’ ‘찬양을 많이 불렀더니 하나님이 내 마음이 죄를 향하던 마음을 말씀으로 향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아, 은혜 받은 친구와 함께 교제하니까 하나님이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더라’ 라고 하는 그런 많은 방법들이 결국 둘로 집중이 됩니다. 말씀과 기도로 집중됩니다.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과연 내가 이렇게 살라고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내가 양심이 나에게 송사해서 그래서 ‘너는 도저히 그런 죄를 짓고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 그럴 때에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신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돌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한 주도 믿음으로 잘 살아서 이 교리들을 실천하고 어둠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깨우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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