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제12장 복음이 자유를 주기 때문에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녹취자 : 허혜숙
신자로서 마음에 참된 자유를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다시 찾게 되었는지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해 봅시다.
성도 1 : 예전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싶은 마음이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석했는데 지금 와서 뒤돌아보니까 그 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제 자신의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누구도 지워주지 않는 삶의 멍에를 지고 자유함이 없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는 책을 통해 열린 교회에 오게 되었는데 예배 중에 십자가의 감격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인격적으로 그 구원의 감격을 맛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기쁨이고 감사함인지 느끼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은혜를 갈망하게 되고 제 존재 자체 제 마음, 제 영혼이 참 자유를 얻게 되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성도 2 : 저는 대학시절 예수제자 훈련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일상을 내려놓고 하루 종일 하나님께 집중하는 기간으로 주님과의 관계에 친밀함을 누리고 주님께 마음을 일치시켜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훈련을 마치고 취업을 준비하고 새 직장을 얻었을 때 제가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 증명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그렇게 분주한 일상을 사는 동안 서서히 그 자유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에서 큰 잘못을 하게 되었고 나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인지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의 어떠함을 보이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의지하기로 결단했을 때부터 마음의 자유가 회복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복음을 위한 마음의 자유는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와 비례했던 것 같습니다.
성도 3 : 참된 자유를 잃어버릴 때를 살펴보면 저의 영혼의 상태는 싫증으로 가득 차있고 육체적으로는 경건생활을 아주 게으르게 하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 바로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되는데 저 같은 경우는 힘든 환경이 쓰나미처럼 지속적으로 밀려올 때 완전히 그로기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다시 섰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목숨을 걸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기도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은혜를 주셔서 기도를 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전적인 의뢰의 마음을 주시고 내 안에 사랑과 평안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제까지는 불편했던 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 가서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게 하시고 저에게 해결되지 못한 죄의 문제들도 쉽게 해결할 수 있게 은혜를 충만히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경우에는 예배드리는데 목숨을 걸자, 지속적으로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리에 나아가자입니다.
자, 이제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 경험들, 그리고 어떻게 찾게 되었는지에 대한 경험들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사랑, 성령, 예배 몇 가지지로 집약이 되는 것으로 초점을 맞춰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결국 자유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유라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상태가 자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을 자기가 선택해서 살 수 있는 자유가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자, 들어가 보겠습니다.
자유를 주는 율법, 율법의 기능에 대해 나옵니다. 갈아디아서 3장 24절과 25절을 우리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 3:24-25). 번역하기 굉장히 어려운 단어입니다. 그리스어로 ‘파이다고고스’라는 단어입니다. ‘파이다’는 어린아이, ‘파이스’ ‘파이디온’에서 온 것이고 ‘아고고스’는 인도자, ‘아고’가 인도하다라는 동사입니다. ‘아고고스’ 인도자, 경호원 이런 뜻입니다. 예전에는 몽학선생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그 시대로 돌아가 보면 인격이 있고 학식이 있는 믿을만한 학식이 있는 노예들을 파이다고고스로 삼아서 귀족 집안의 어린아이들을 생활과 도덕적인 행동 등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영화를 보시면 귀족 집안 아이들을 덩치가 큰 할아버지처럼 생긴 흑인이 ‘도련님, 오늘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다투지 말고 잘 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타일러서 학교 앞에 데려다 주는 광경을 보신 적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로마시대에 파이다고고스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도표를 보시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뜻을 깨닫게 되면 죄도 깨닫게 됩니다. ‘아, 이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구나,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인데 내가 안 했구나.’ 이렇게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율법을 다 배우고 나서 마지막에 깨닫는 것은 ‘아, 내가 이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구나, 그리고 율법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내가 죄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의 목적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했던 파이다고고스의 경우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까지는 파이다고고스가 필요하지만 아이들이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 대학생활을 하게 된다면 파이다고고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율법은 우리에게 초등교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이 가지고 있는 억압과 속박을 생각해 보면 요한복음 15장 22절에서 “내가 와서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이것은 진짜 죄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너희들이 죄를 죄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내가 와서 너희에게 가르치지 않느냐? 모두 명백하지 않느냐? 그러니 지금은 그 죄에 대해서 몰라서 그 죄를 지었노라고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말씀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분별력이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을 깨닫고 나면 속박이 오는 것입니다. 밑에 도표를 보면 율법이 주어집니다. 그러고 나면 엄격하게 무엇이 죄고 무엇이 불법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죄는 상대적인 관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그런 율법을 무시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를 때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율법을 부여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엄격한 기준이 생기게 되고 자신이 잘못 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억압과 속박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을 깨닫고 속박을 느끼는 사람이 되지 말고 무지한 가운데 아무렇게나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되자, 그것을 가르치려는 것은 아닌 것을 여러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당연히 무지하고 자유로워서 사는 삶은 짐승 같은 삶이고 그래도 깨닫고 속박을 느끼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인 죄의 문제의 해결은 아니라는 것,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의 한계를 깨달을 때 우리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러니까 그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의로운 행실이 아니라 또 다른 우리 바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을 우리 같이 소리 내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라고 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서 결국 위에 보면 사람이 삽니다. 옛사람입니다. 결국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그 죄에 대해서 고통을 받으며 후회를 합니다. 그런데 궁극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서 ‘내가 더 이상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다’ 라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죄의 종노릇 하는 것은 죄가 좋아서 종노릇 하고 두려워서 죄의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 보다 더 큰 능력이 우리를 붙들게 되는데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좀 더 질문을 진전시키면서 지체들의 생각을 들어보겠습니다. 회심하기 전에 생각했던 자유와 은혜 받은 후의 자유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나누어보겠습니다.
성도 1 : 어릴 적 겁과 두려움이 많고 변화보다 순응을 좋아하는 저에게 부모님의 신앙적 가르침과 성경말씀은 어떤 제도와 틀 안에서의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자유는 정서적 억압이나 육체적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또는 마음의 불편함으로부터의 해방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자라고 생활이 복잡해지며 어느 순간 저를 돌아보았을 때 구원과 죄의 경계를 갈팡질팡하며 말씀을 열심히 들으면서도 세속적 욕망과 공허한 마음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헛바퀴 도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야말로 가련하고 비참한 영혼의 상태를 알게 되었습니다. 태생적 죄인임을 체감하고 진리 되신 예수님만이 십자가의 공로로 나를 죄로부터 근본적으로 자유하게 하신다는 놀라운 은혜를 깨달았을 때 진정한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멀어졌던 관계가 회복되어 단지 벌을 피하기 위해 말씀의 잣대로 이것이 죄가 아닐까 방황하는 영혼이 아닌, 또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닌 거리낌 없고 자연스러운 사랑의 관계를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참 자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 2 : 회심하기 전에 생각했던 자유는 죄, 곧 사망에 묶여 인간적인 욕심만을 좇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육체적 욕심, 마음의 욕심 등 죄로 인해 벗어날 수 없는 사실상 자유라고 말할 수 없는 사망이 존재합니다. 은혜를 받고 난 후의 자유는 복음으로 인한 자유로 죄, 곧 사망에서 해방되고 참 진리로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님의 구속하심으로 진정한 자유, 곧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도 3 : 예전에는 자유라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범위 내에서 자신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유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욕심이나 두려움, 결과에 대한 부담, 또 세상의 권위나 사회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자유로운 선택은 불가능했습니다. 그 이후 말씀과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답답한 상태도 죄의 지배아래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고 인생의 방향이 명확해지면서 세상과 주변인을 대하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저의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의 질서대로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회심하기 전에 생각했던 자유와 은혜를 받고 난 후의 자유에 대한 개념이 다릅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사랑 안에서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리는 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자유롭게 산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자유보다 훨씬 큰 속박입니다. 속박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율법을 깨달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이런 저런 법을 어긴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닫고 나면 나에게 속박이 되는 것입니다. 속박은 자유의 반대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유를 선택했는데 마지막 돌아오는 것은 속박입니다. 그 속박은 마음과 정신의 속박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 가정을 버리고 방탕하게 살았다고 칩시다. 그런 사람이 자기의 부를 지키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게 되었고 궁핍하게 되었고 의지할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자체가 속박입니다. 가난하고 의지할 사람도 없고 외톨이고, 그 자체가 속박입니다. 마음과 정신, 현실과 환경의 속박을 받는 것이 결국은 잘못된 자유를 선택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는 자유에 대한 개념이 달라집니다. 진정한 자유가 마음먹은 대로 사는 그것이 아니고 그것은 매우 쓴 열매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것이 참 자유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펼쳐보겠습니다. 자, 로마서 8장 1절과 2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들이 예전의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비교하면 예전에는 사단의 죄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결국 죄입니다. 죄에 묶여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호령하는 것은 사단입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사랑받아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사람이 사단의 노예가 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사람이 고통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전의 모습니다.
그런데 헷갈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 사단의 노예였던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죄의 노예였던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렇게 변화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예수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변화가 된 것이다, 아니면 성령님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시켜 자유를 주셨다고 할 때 이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느낍니다. 이것을 세 가지로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의 노예에서, 사단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는데 이것이 충족이 되어야지만 A 상태에서 B 상태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의 죄를 대신해서 율법의 형벌을 받으신 것을 공로 적 원인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토대가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대신 죽지 않으셨으면 내가 무엇을 믿었으며 믿었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을까? 이것은 구속입니다.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 적 원인은 나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갖도록 우리에게 효과를 가져다 준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단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이 토대가 되어서 성령이 효과적으로 역사하셔서 믿음으로 그것을 적용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성경이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모두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어디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또 심지어 성령께서 너희에게 믿음을 주셨다, 혹은 너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이렇게 한 쪽에서 보는 것입니다. 어느 입각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가 되는데 내부적으로 이 세 가지가 엮여있는 것입니다. 공로 적 원인 그리스도의 구속, 효과적 원인 성령의 역사, 적용적 원인 우리의 믿음.
그 다음 보겠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영적인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는 영혼의 자유이고 영혼의 자유에서 마음이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마음의 속박을 받기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자, 보겠습니다. 예전에는 무지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모르고 두 번째는 불신앙입니다. 이것은 본질이 믿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입니다. 그러니까 믿으려고 하는데 안 믿는 것은 회의라고 부르고 아예 안 믿겠다고 의지의 고집을 부리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성경에서 이 불신앙보다 큰 죄는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편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공정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모든 진리의 판결자 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자기 생각에 그릇된 것은 그릇된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가장 믿을만한 것이다라고 가정을 합시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이르게 됩니까? 진리는 없고 인간의 이성이 가장 믿을만하다고 결정하는데 그렇게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입니다. 그 순간 이성이 진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성만이 가장 믿을만하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말과 말 자체를 뒤집는 것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자기 자신의 이성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편견입니다.
그 다음은 악한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모든 행실입니다. 그러다가 성령의 역사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죄의 결박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무지에서 지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구원의 길을 알게 됩니다. 불신앙하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설복되고 편견에 사로잡혔던 사람은 성경적인 관점으로 돌아가 편견에서 벗어나게 되고 악할 생활을 버리게 됩니다. 결국 내적인 어두움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성령과 사랑과 도덕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름에 그런 사람은 내면에서 사단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지배를 받으면서 그에 합당한 죄된 행실, 유혹에 굴복하는 속박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믿는 순간에 사단은 지배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사단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워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서 자유를 주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귀신같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존재는 인정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귀신과는 비교될 수 없는 더 큰 신이신 성령님의 지배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문제1) 율법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왜 우리에게 억압과 속박을 가져다 줍니까?(p290-291)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는 것,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 하는 것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기능이 있는데 그 율법이 있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무리 국가가 없어도 인간의 마음에는 수치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비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아는 판단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긋났을 때 자기 양심 스스로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율법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율법이 억압과 속박을 가져다주는 이유는 몰랐을 때는 자유롭지만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기 때문에 우리에게 억압과 속박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깨닫기만 할 뿐 아니라 그 지배에서 벗어나야지만 억압과 속박이 깨트려지는데 깨닫기만 할 뿐이고 벗어나지 못하니까 더 큰 억압과 속박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문제2)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이중적 자유는 무엇이며 각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p294-296)
신분의 자유 즉 사단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영혼과 마음의 자유를 다시 가져다줍니다. 즉 내적 역사의 자유입니다. 특징은. 율법과 그로 말미암는 저주로부터의 해방, 이 해방은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차마 짊어지지 못하는 율법의 요구를 모두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자유가 온 것입니다.
문제3) 신자가 구원을 통해 누리게 되는 신분과 상태의 자유의 세 가지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중 으뜸이 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p297)
삼각형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공로적 원인, 효과적 원인, 적용적 원인(도구적 원인)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혹은 구속이 이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그것을 유효하게 만들어 준 것이 성령이시고 그 다음에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결국 하나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입니다.
문제 4)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자유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근거로 한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나타난 세 가지 효과는 무엇입니까?(p298)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포함하고 언제든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면 용서를 해 주십니다. 순종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은혜를 구하면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죄의 지배가 종식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 성령을 주심, 죄의 지배의 종식. 다시 불순종하고 거역함으로써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지 말아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문제 5) 성경에 따르면(행26;18), 신자가 누리는 내적인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입니까?(p308)
어두움으로부터의 자유 무지입니다. 사단의 능력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은 권세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이고 이것은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무지에서 깨어나서 참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의 핵심이 다름이 아닌 복음입니다.
여러분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죄와 은혜의 지배를 배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해서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 주간 동안 주님의 은혜로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