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I-(2)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19-24)
녹취자 : 오지윤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벌써 한 주가 지났습니다. 우리가 2주 전에 공과 공부를 했는데, 야간 강의로는 벌써 2주가 지났습니다. 참 시간이 빨리 흐릅니다. 코로나 사태는 좀처럼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어제 확진자가 많이 줄었다고 하니까, 조금 희망을 가져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장기간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더라도, 신앙의 손해를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분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제2부의 첫 장인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를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되짚어보면, 가장 먼저 '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고대의 서양 철학자들과 동북아시아의 사상가들이 국가의 이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세상 나라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학자마다 각기 다르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의와 평화, 사랑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나라라고 말씀드렸고, 그 원형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토, 국민, 주권이 있는 그러한 공동체를 우리들이 '나라'라고 부르고, 그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도록, 그것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였습니다. 염려하면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명제까지 오게 되었고, 오늘은 그다음에 계속되는 이야기를 엮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이야기하면,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역설적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통치하시던 나라였는데, 반역이 일어나고 나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공명하게 대조가 되면서, 얼마나 두 나라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역사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아담을 구원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가정을 택하시고, 그 가정을 통해 민족을 만드시고, 나라를 세우시고 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루어져 오는데, 구약의 지상적인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본격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 왕국이 깨지고 영적인 나라인,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두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통치가 이루어지는 방식과 그 나라로 역동하게 하는 질적인 면에 있어서, 현저하게 다른 나라입니다. 우리는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할 때, 조지 엘든 라드05.59 라고 하는 사람이 이 그래프를 그려서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좋은 그림입니다.
처음 창조가 있고, 시간이 이렇게 이쪽으로 흐릅니다. 이것은 지상 나라이기도 하고, 이것은 하늘나라이기도 한데, 이것은 시간 안에 속해있고, 이것은 영원에 속해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나라가 이렇게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고, 이것은 재림입니다. 예수님이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 오셔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성령이 함께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새로운 방식으로 임했다고 하는 것을 현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현재에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그러한 기적은 되풀이되지 않는데, 예수님은 그러한 기적까지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옴으로써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옛날에 있던 그러한 나라와 다르다."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영적인 축복이 임하는 새로운 방식의 영적인 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공부를 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시간이 나시면, 예전에 배웠던 주기도문 가운데 '나라에 임하옵시며' 하는 부분을 두 장에 걸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부분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임했습니다. 지상의 나라는 통합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우리가 부활하고,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고, 신자들이 부활하고 하면서,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아직 안 왔고, 이렇게 이렇게 침투해 들어왔고, 이렇게 이렇게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나라의 중간지대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구간에서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공존하게 됩니다. 이 싸움은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는 것을 통해서 이미 죽음으로 세상을 잡고 있던 사단의 권세는, 큰 공룡에 비유하자면, 등뼈가 이미 다 부러지고 배로 기어 다니는 정도로 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힘을 가져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것을 조심하라고 성경이 그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더 큰 능력을 받으면서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현재적 차원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미래적 차원에서는 아직 그 나라가 완전히 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러한 현재 긴장 관계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나, 여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여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있으면서도 동시에, 세상 나라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나라는 물리적인 영토를 확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인 영토를 뛰어넘어서 사람들에게 파고듭니다. 또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도 세상 나라가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각각 자기를 주인 삼으면서 사는 나라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신자가 된 우리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죄성이 남아있습니다. 남아있는 죄성들이 함께 연합을 이루어 확장되어 나간 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옛사람, 이것은 여전히 성령이 이미 우리에게 오셨지만, 여전히 사단의 세력이 남아있는, 이 세상과 우주의 구도와 유사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기도에 힘쓰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찬송하고, 끝없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세상 나라가 여전히 있고, 그것들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 중심에는 까리따스의 사랑,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이 있고, 그 죄의 한 중앙에는 꼬삐띠다스 나 자신을 임금으로 삼는 육욕? 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신자는 죽을 때까지 거듭난 사람이면서도 옛사람을 끌고 다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더 많이 기도하고 새 사람으로 성령이 충만해지면, 옛사람을 이기면서 살아감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하나님을 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실하게 사랑의 힘을 가지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이 여전히 죄가 있지만, 그것들을 이기고 극복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됩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기에,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두 그림에서, 현재적인 차원부터 먼저 설명을 했습니다. 현재적인 차원에서는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요한 일서 3장 8절이 아주 본질을 꿰뚫고 이야기합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셔야 될까요? 제일 먼저 마귀를 멸하셔야 됩니다. 두 번째는 마귀의 사주를 받아서 마귀의, 행동을 하려고 하는 우리들을 변화시키셔야 합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변화시키시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셔야 합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단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나라가 파괴되고, 사단이 인간을 사로잡고 통치하는, 마지막 중요한 무기가 있었습니다. 사망입니다. 죽음입니다.
죽음이 무엇일까요? 생명으로부터 끊어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음에 항거합니다. 여러분이 마룻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개미 한 마리를 이쪽으로 툭툭 치고, 갈 길을 막아봅시다. 개미는 평소와는 다르게 더욱 부지런히 움직이게 됩니다.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가던 길을 막고, 움직이려고 하면 또 막고, 어마어마한 컵 크기의 무엇인가가 와서 자기들의 몸체를 이리저리 밀어낼 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가 소멸될까봐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똑같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단이 죽음이라는 카드를 들고 위협을 하는 것입니다. 그 위협을 가지고, 자기의 종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지시를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가 아니라, 창조의 목적을 거슬러서, 궁극적으로 세상을 혼란스럽고 악하게 만듦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에 반하고자 하는, 사단의 의도에 이바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받았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되고, 베드로는 옥 속에 갇혀서, 야고보는 이미 처형되고, 죽음이 앞에 다가오는데 감옥 속에서 완전한 평강을 누리면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감옥 속에 갔을 때의 바울과 신라? 도 한 일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찬송이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낸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시냐면, 인간이 나이가 들지 않습니까? 나이가 많이 들면 죽음에 친숙해집니다. 나이 90먹은 영감이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85세인 경우에, 대부분 눈물을 안 흘립니다. 왜 그럴까요? 남편이 35에 죽고, 아내가 30살이라면, 울다가 혼절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이가 들고 소멸되어가는 연습을 하게 하셔서 죽음에 대해서 훈련을 시키십니다. 죽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인간은 무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진짜 죽을 때에도 우리의 온몸에 깃들여 있던 엔도르핀이 마지막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인간의 마지막 순간을 기분 좋게 맞이하면서 돌아가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옛날에 젊은이들 가운데, 목매달기 장난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집에 기둥 같은 곳에 밧줄을 묶어두고 자기 스스로 매달려보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매달리다가, 죽기 직전에 땅을 밟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은 아이들도 있습니다. 죽을락 말락 할 때, 엄청난 희열이 속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망이 사단의 도구로 쓰였고, 그것을 하나님이 생명을 주심으로서 이기게 하십니다. 마음이 산란하고 염려되다가도,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영적인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하나님이 놀라운 새 힘을 주십니다. 육체적으로만 죽어도 다시 살아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그 생명이 영원으로부터 뚫고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서, 예수와 함께 우리가 다시 사는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0장에 나온 바와 같이, 예전에는 어두움에, 진노 아래에 있는 자식들이었지만, 그 어두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서 빛의 나라로 들어오게 하셨고, 그 영광된 기업을 누리면서 살도록 만들어주셨는데, 이미 완전한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받겠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받겠지만, 이미 그것을 우리들이 받고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라기보다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미 그것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임해온 것입니다. 이 복이 얼마나 놀라운 복이었는지, 예수님께서 두 구분 사이에 이렇게, 여기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여기에 있던 사람이 세례요한이었는데, 거의 붙은 지점에 와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신약으로 연결될 때의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를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여기입니다. 당신과 함께 임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그 사람들은 이미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누리고 있는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망의 두려움 때문에, 사단에게 순종하고,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육체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구합니다. 그 가운데에 그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갑니다. 이 자체가 아주 무거운 멍에를 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기억하십니까? 여러 해 전에 있었던, 꽤 오래되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12살인 남자아이 제자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미국을 흔들어놓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그 당시 나이가 30살 조금 넘었습니다. 여자는 '자기가 사랑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중형이 선고되었습니다. 7년 정도 선고가 되었는데, 이후에 어떻게 어떻게 해서 평생토록 그 아이에게 접근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가석방이 됩니다. 가석방이 되고 나서 바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7년 형을 받고 여자가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신기한 것은 7년의 기간을 채우고 출소해서, 세월이 많이 흘러서 12살 아이가 19살 즈음 되지 않겠습니까? 결혼을 합니다. 안된다고 하는데, 법정 투정을 하여 결국은 승소해서 따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12년 후에 결국 이혼을 하게 됩니다. 미국을 뒤흔들어놓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이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여선생님이 아이를 향해가니 사랑이 진실한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그것은 우리가 뭐라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본인은, 본인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12살, 미성년자 아닙니까? 미성년자의 아이를 가지면서 내가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 안 하지 않겠습니까? 이 여자는 이미 아이들이 있는 유부녀였습니다. 그 당시에 미국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무엇일까? 하고 생각이 났습니다. 어거스틴보고 설명하라고 하면, 그것을 마음의 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병든 생활을 하게 되고,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마음의 병이라는 것은, 의지의 병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도덕 관념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못 하도록 마음에 장애가 생긴 것입니다. 의지가 질병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결함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중에 어느 한 부분이, 그것 하나가 그 사람의 전체가 아니라, 전체가 한 사람으로서 엮어진 삶입니다. 우리가 한 번 엄청난 힘을 발휘해서 누구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어떠한 업적을 이루어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세상을 눈에 띄게 변화시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역사 속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마음이 어느 한순간에 망가지지 않게,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며 사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우리는, 얼마든지 영웅적인 삶과 그 반대의 삶, 이러한 것들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중에 어느 하나를 보고 그 사람 전체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추항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보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시각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훌륭한 삶을 깎아내리거나, 어떤 사람의 잘못을 비화?33.35 시키거나 혹은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것이 우리 자신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어느 대학의 교수님이 열심히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료 교수님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노아의 사건입니다. 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아이를 갖고 자손을 번식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역겨워하면서 자신을 전도한 교수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게 어떻게 성서가 될 수 있냐고, 이것이 만약 까만 책에 이러한 글씨로 쓰여 있지 않고, 평범하게 종이에 인쇄가 되었다면 출판할 수 없는 책이 아니냐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이, "그것이 결국 나와 당신의 이야기다." 그러한 인간의, 우리들이 생각해도 역겨울 정도로, 그렇게 희망이 없는 삶을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답니다. 이 사람이 일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대신해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개를 하고, 죄를 없애주신 분이, 예수그리스도는 무죄한 분이지 않습니까? 무죄하신 분이신데, 아주 비참한 방식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내가 살아온 이러한 삶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죄의 사슬들을 끊어주시고,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또 다른 삶의 목표를 향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신이, 이웃이 가장 완벽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되도록, 꿈꾸면서 살아가고 자신도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그러한 삶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루스페이에 풀겐티오스 라고 하는 교부? 인데, 많이 알려지신 분은 아니지만 5세기부터 6세기를 살았습니다. 어거스틴보다 약간 후의 사람입니다. 그가 쓴 글 가운데, "에데 인 카르치우네 에트크라티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은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뜻깊은 말을 남깁니다. "그러나 생명의 성령께서는 단지 믿음을 보심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을 주심으로서 자유하게 하신다. 이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선한 의지에서 비롯된 은혜로서 불신자의 마음에 믿음을 불러일으키시고, 이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고, 마음이 병들었다는 것은 의지가 병듦으로써 잘못된 행동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의지의 병의 정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렇게 피부가 있습니다. 피부가 상처가 나서 곪든지, 저절로 곪아서 계속 고름이 나오고 살이 상해서 들어갑니다. 이것을 병에 걸렸다고 이야기합니다. 몸에 있는 충만한 생명의 상태에 결함이 오게 된 것입니다. 의지의 결함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해야 할 올바른 대상을 사랑하지 않고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질병입니다. 질병 상태에 들어간 것만큼, 의지는 그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어거스틴이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 마음이 발 더러 이렇게 가라하면 가고 손 더러 움직이라고 하면 움직이나이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하려고 하면 마음은 듣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이겠습니까?"라고 고백록에 되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거스틴이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 이러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러한 가책이 왜 없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에 상당히 가까이 있을 때도 그러한 잘못된 일을 합니다. 심지어 학자들은 그가 동성애에 대한 고백까지 암시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저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 시대에 그것들이 아주 드문 죄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싫어하면서도, 원하지 않으면서도, 끌려가면서 좋아하는 그러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마음이 병들어있는 상태입니다. 의지가 질병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 때의 의지가 가장 건강하겠습니까? 지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힘이 의지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때 가장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내가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부모가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들에게 해로운 일을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의지가 사랑해야할 대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을 때, 의지는 단일?42.35 해집니다. 그러한 모순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말도 안 되는 어느 자치 단체의 의회의 의장이 ATM기에서, 앞에 사람이 돈을 꺼내놓고 그냥 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약 30년 전 즈음에, 카드를 집어넣고 10만 원을 찾겠다고 하고 비밀번호를 눌렀습니다. 그 사이에 제가 은행 창구에서 무엇을 물어볼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떠났습니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정신 나간 짓입니다. 그때는 기계가 느렸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다시 가니까 카드만 달랑 걸려있고, 돈 통에 10만 원은 누군가 빼간 것입니다. 은행에 가서 이야기하니, 추적하면 추적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뒷줄에 서 있던 사람이, "아저씨 여기 돈 나왔는데요?"라고 이야기를 해야지, 내가 잘못했지만, 돈 찾으러 온 사람일 텐데, 어떻게 남이 벌써 찾아놓은 돈을 자기는 카드도 안 집어넣었는데 그냥 꺼내 간 것입니다. 의회 의장이라는 사람이 70만 원 밖에 안되는 돈을 가지고 와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형사사건입니다. 절도죄입니다. 반드시 처벌받습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의지가 병든 것입니다. 돈을 보는 순간에 병든 것이 아니라, 평소에 병들어있는 것입니다. 사건이 벌어지면 병들어있는 의지가 그대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병들어있는 고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고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계십니다. 한순간에 하나님이 그 의지를 고치셔서, 죽었던 사람을 살아갈 힘을 얻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간증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신실한 삶을 살고도 그렇게 살았던 자신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래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증인입니다. 너무나 잘 압니다.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는 그렇게 병든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하나님 사랑을 하게 만들어서 병들었던 나의 의지가 온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나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라, 나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 때문에 가능했던 이유입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까? 그래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덕을 볼 수 있겠습니까? 덕을 보실 수 있다면 그분이 하나님이겠습니까? 덕을 봐야 하는 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당신?47.01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의지가 병들어서 사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그렇게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부패하고 육적이니까, 심지어는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자원을 걸고, 때로는 그렇게 안 하면 네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버린다고 협박하시면서까지 당신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목이 매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원래 하나님 안에만 있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도록 만드시는데, 그 방식이 교재입니다. 교재라는 것은 사귐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나온 교재는 개와 인간이 교재가 되진 않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그렇다고도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인간의 해석입니다. 교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영적인 피조물들끼리 교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은 당신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늘 자원을 공급해주십니다. 하늘 자원이 있고, 지상의 자원이 있습니다. 하늘 자원은 우리로 하여금 영혼을 살게 하는 자원이고,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다고 우리가 몇 주일씩 밥을 안 먹을 수 있습니까? 밥을 안 먹으면 기도도 못 합니다. 육체는 여전히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이 두 가지 자원을 충만하게 누림으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육체를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지상의 자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욕심 때문에 한없는 자원이 필요한 것이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어느 나라에서 호텔 전체를 금으로 만든 호텔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림으로 봤는데 방에 들어가면 문고리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욕조부터 의자까지 모두 금으로 떡칠했습니다. 1박에 어마어마한 돈을 받을 것입니다.
터키에 갔을 때, 왕이 앉았던 의자를 보여주는데 60kg의 금으로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저기에 앉으면 치질에 걸리겠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얼마나 차갑겠습니까? 너무 차가우니까 거기에 모피 같은 것을 깔고 앉는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좋겠습니까?
최근에는 마스크 하나에 몇천 만 원짜리를 만들어서 판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부터 시작해서 온갖 보석을 수염처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마스크를 판다고 합니다. 그렇게 계속 욕망을 확장하면, 어마어마한 자원을 다 가져도 모자랍니다. 우리들이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재화는 엄청나게 많이 드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이 영혼도 하늘의 자원이 필요하고, 육체는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두 자원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하늘 자원을 주시고, 당신과의 교재?52.03에서 지상 자원을 공급받게 하시고, 이것이 충만한 생명으로 나타납니다.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어떻게 들어옵니까? 어느 한순간에 삶이 꺾어지면서, 도저히 '나는 살아갈 수 없다'는 좌절감이 생깁니다. 그것이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의지가 병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극복하며 살게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영적인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야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믿음과 순종의 삶입니다. 믿고 순종하며 살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것을 계획한다고 할 때, 그것이 순수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과 순종의 삶은 말씀과 기도에서 나옵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경험하게 하셔서, 병들었던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 사랑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면서 그 마음으로 말씀과 기도 속에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자신은 그렇게 사는지 몰라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데 이바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첫째, 인생의 추구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한 목적을 따라 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것을 목적으로 바꿀 때 인간은 말할 수 없는 추악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학교 가는 아이에게 가방을 사주고, 옷을 사주고, 운동화를 사주고, 학용품을 사주고, 다 해서, 도시락을 싸서 보냅니다. 공부 잘하고 오라고 그렇게 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먹고, 입고, 마시는 것 때문에 염려하지말라 하시는 이유는, 너희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적, 너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인생의 목표는 다른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위해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생명의 근원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날마다 죄와 더불어 죽고, 죄를 죽이고, 그의 부활을 본받아, 자신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다음이 자기 부인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그렇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항거하는 문화가 있는 것처럼, 내 안에도 바르지 않은 자아가 있다. 그것을 비판하고 의지적으로 거부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려고 하는, 순종의 삶 속에서 덕스러운 삶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기쁨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그 나라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그것이 히브리서 11장 16절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렇게 해서 우리가 공부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오래 하게 되어서 사연을 못 보았습니다. 그래도 몇 개만 보겠습니다. “심심해서 유튜브를 켰는데 라이브가 떴네요, 듣고 있습니다. 너무 좋네요.”, “의지의 병, 너무나 공감이 됩니다.” 목사님: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사람의 가치는 그의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다. 그 선한 의지가 클 때,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의지의 병은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대상을 사랑하는 결핍의 상태다.” 네, 맞습니다. “하나님의 목 메인 사랑에 감사합니다.” 네, 은혜롭습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58분 정도 공부를 했는데, 다음 구역공부는 7월 24일 금요일입니다. 두 번 금요일에 하고 다시 화요일에 돌아오겠습니다. 금주 한 주간 동안도 기도 생활 많이 하시고, 의지의 병을 고치면서 충만한 의지의 건강을 회복하시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