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 II-(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19-24)
녹취자: 백지영
성도 여러분 잘 지내셨습니까? 며칠 동안 폭우가 많이 쏟아졌는데 피해는 없으셨는지요? 7층에 어거스틴 파크의 판자가 바람에 다 찢어질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늘 우리들이 아주 맑은 하늘을 덕분에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생사란 그런 것 같습니다. 나쁜 일이 있으면 그 나쁜 일 때문에 또 좋은 일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제 6장, 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를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성경구절을 같이 한번 큰 소리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짧은 구절이 매우 묵직한 신학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이제 공과공부니까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우리들이 다루어보면서 이 말씀에 담겨져 있는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결국은 이 말씀을 하기 위해서 '너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부터 시작하셔서 그래서 들에 핀 백합화와 공중에 나는 새를 계속 말씀하신 것입니다. 6장 19절 이하서부터 6장 32절까지는 사실 마지막 이 33절 말씀을 하기 위한 논리의 전개였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염려하지 말아야 되는데 왜 염려하지 말아야 되느냐? 염려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그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으로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할 텐데 그래야 우리들이 행복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에 부합할 텐데 염려는 그것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게 무엇이냐? 그게 결국 그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이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시작하실 때에 이렇게 도입부가 됩니다.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그 유명한 산상수훈이 시작이 됩니다. 그 산상수훈 속에서 그 6절에 네 번째 복으로 이런 복이 나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며'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복'이라는 이 말씀이 그리스어에서는 '마카리오스'입니다. 그래서 이게 히브리어에서는 '아쉐르'가 되는데 어쨌든 이 복은 일반적인 복이 아니라 신령한 의미에서의 복입니다. 그러니까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주시는 그런 복이 아니라 우리 영혼에 직접적으로 내리시는 복입니다. 그것을 영적인 복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일반적인 복하고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할 때 그 복도 이런 영적인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적으로 생각해 보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복이 있으려면 어쨌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가 불러야합니다. 그래서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 했으니, 결국 이것은 인간이 경제적인 동물이라 계속해서 물자가 생산되지 아니하면 백성들은 항상 심(心), 평안한 마음이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주리고 목마른데 어떻게 복이 있을까? 답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무엇에 주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의(義)입니다. 하나님의 의이지요. 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미 영적인 복을 받은 사람이니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며, 여기에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미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내가 그들을 배부르게 해 줄 것이다, 여기서 ‘배부르다’하는 표현은 히브리식 표현으로 ‘만족하다’ 그런 뜻입니다.
자, 그러면 설명을 해 봅시다. 그 밑에 보면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 어떤 나라입니까? 예전에는 세상을 사랑했었는데, 결국은 자기를 사랑했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사랑을 드립니다. 당연히 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겠지요. 그러면 이 사랑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이 사랑은 이 사람 마음 안에서 수많은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아이가 연애를 하면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에 빠지면 부모가 볼 때 그 아이가 달라진 것이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왜 그럴까요? 평소의 마음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랑은 결국은 질서에 대한 추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맛있는 것을 먹었다 누가 생각납니까? 아무도 생각이 안 난다 그러면 문제가 있지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먹는데 아내가 생각이 난다, 이 사람 참 좋아하겠다, 먹여주고 싶다. 가다가 상점에서 예쁜 옷을 봤습니다. 누가 생각이 납니까? 남자가 여자 옷을 보면서 아내가 저 옷을 입으면 참 좋겠다. 가구상을 지나가다가 아주 멋있는 책상을 봤습니다. 누가 생각이 납니다. 우리 남편이 그렇게 서재를 갖고 싶어 했는데 여유가 있어서 조그만 공부방이라도 하나 마련하고 저기다 저것을 갖다 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게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질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당연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자기 안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그런 질서가 이루어지면 바깥에서도 그런 질서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지요? 어느 날 친구목사님이 와가지고 막 씩씩거리고 화를 냅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어떤 목사님이 목사님의 책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웃으면서 그랬습니다. '그 사람은 뭘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 본인은 나보다 화가 더 났습니다. 알지도 모르는 친구가 공개석상에서 김남준 목사님의 책에 대해서 비판을 했다고, 자기가 쓴 것 보니까 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했다고 그러면서 막 화를 냅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은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저에 대해서 누군가가 근거 없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책을 깎아 내릴 때 화가 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은 끊임없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도 똑같은 것입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그러면 그것이 이루어진 것만큼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즉 정의로운 세상, 하나님 사랑의 질서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편애가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강아지도 예뻐하는데 두 마리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서로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시샘을 해서 그렇게 서로 싸운다고 합니다. 저는 두 마리 안 길러봤습니다만 그런답니다. 아이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그게 나에게 질투를 불러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을 저렇게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내게 주실 사랑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그런 바보스러운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도 하나님께는 여전히 또 우리를 그 이상으로 사랑하실 만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질서, 그게 이 세상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가치를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합니다. 그게 결국은 전도의 동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고통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의를 사모하는 사람은 불의한 세상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러한 사회를 견딜 수 없어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만큼 세상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곧 그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게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굉장히 어려운 말이 나옵니다. 의라는 것이 무엇일까? 의가 무엇일까? 이것입니다. 성경에 의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참 어려운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사실은 평생을 공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지요. 그런데 우선 구약성경, 신약성경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리스시대의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도 '의롭다'라고 할 때 '키카이오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것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비난받을 만한 전혀 없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성경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성경을 보시면 구약성경에는 의라는 단어가 대표적으로 두 단어가 나오는데 '쩨데크' 그리고 '쩨데카'라는 단어입니다. 사실은 이 두 단어가 거의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것의 여성형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형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을 연구한 저의 소견은, 쩨데크는 히브리사람들 생각에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의의 자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뭐냐 하면 그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의로운 성품입니다. 자질입니다. 그 자질이 그 마음 안에 있음으로 그가 의로운 행동을 하게 하는데 쩨데카는 그런 의로운 행동을 나타낸다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것은 내면적인 것이고 이것은 외면적인 것입니다. 요것을 합쳐놓고 보면 결국 진정한 의는 구약에서 볼 때 사람이 의로워야 하고, 그 의로운 사람과 의로운 삶 사이에 연속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로만 의롭고 행동은 의롭지 않다거나 또 의로운 행동을 가끔 하지만 마음은 전혀 의롭지 않을 경우에 바리새인이나 혹은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면적으로는 의의 자질이 꽉 차고, 그것이 행동으로도 나타나서 인격 자체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실까요?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소중하게 그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데 이바지하며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의라는 이 단어는 여러 번 나오는데 '디카이오쉬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기본적으로 '디카이오' 그러니까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형용사는 '디카이오스', 그 다음에 명사는 '다카이오쉬네'가 됩니다. 이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옳음', '허물없음'입니다. 특히 계약관계에서 이 단어가 많이 사용이 되었습니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과 계약을 맺습니다. 서로 의무과 권리를 갖고 있겠지요? 그 의무를 다 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상대방에 대해서 책임질 일이 없는 사람의 특성, 이것을 '디카이오쉬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구약을 고려할 때 이 '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이것을 하나님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불의에 대해서 반응을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의는 그의 거룩하심에 항거하는 모든 것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그 의를 인간에게 적용하게 되면 대개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인 의를 반영한 것으로서 내면세계와 외면 생활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합치되어서 하나님께 비난받을 일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것을 누가 도달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번도 하나님의 뜻에 완벽하게 합치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시니까 예수는 그렇게 하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누가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맞았습니다. 인간은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완벽한 상태. 그것이 구원의 조건인데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덧입혀 주셔서 그렇지 않은 사람을 그렇게 여기시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취임하거나 광복절이 되거나 하면 대대적인 사면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너무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은 제외하고 그 나머지 자잘하게 죄를 짓거나 위반한 사람들, 그 사람들의 죄를 사면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대표적인 게 어떤 것입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큰 것은 아닌데 지나가다가 차를 살짝 긁었는데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나중에 그게 뺑소니로 입건이 됐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처벌을 받게 되었고, 법원에까지 가서 호소했지만 결국 판결을 받아서 그래서 결국은 뺑소니 죄가 됐습니다. 그게 기록에 남습니다. 그런데 사면을 받으면 그것을 지워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떤 경우에라도 과거에 뺑소니를 했던 사실 때문에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게 사면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를 통해 덧입혀주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내면세계와 외면생활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합치될 수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서 우리를 그런 사람이라고 사면해 주신 상태,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럼 좀 더 봅시다. 이런 구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가지를 위해서 충분합니다. 우리를 구원받게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활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 뜻이 성경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탐구하고, 때로는 학문의 도움을 받으면서 더 구체적으로 그 뜻을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안 읽은 사람보다는 당연히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이해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많이 깨닫고, 그냥 성경만 읽은 사람보다는 성경을 더욱 탐구하고 또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 뜻을 풍부하게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함이고 한편으로는 잘 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이 가장 핵심적으로 구약성경에서 나타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굉장히 많은데 이것이 다 수렴될 때에 한곳으로 이렇게 뭉치게 될 때에 이것이 율법입니다. 율법 중에서도 이 핵심이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두 군데에 새기십니다. 한 군데는 돌판에 하나님이 직접 새겨주십니다. 이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계명을 돌판에만 새기셨다면 그러면 그 돌판을 못 보거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계명의 흔적이 전혀 없겠지요. 그러면 그 계명과는 상관없이 살 것이니까 세상이 너무 혼란스럽게 될 것이니, 하나님이 그것을 돌판에만 새기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양심에 새기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과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도 심판을 받는데, 이 양심에 새겨진 계명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윤리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서 양심신성설(良心神聲說)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聲) 뭐냐 하면 소리입니다. 목소리. 그러니까 목소리 성(聲)자 성설(聲說), 양심은 하나님의 목소리라는 이론입니다. 그게 바로 이런 뜻입니다. 결국은 양심이 스스로 율법이 되어서 그 사람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끊임없이 송사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율법으로 데려가서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양심에 거스르는 어떤 일을 하면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양심을 onscience라고 얘기하는데, ons은 함께 있다는 뜻이고 science는 지식이라는 듯입니다. 그게 의식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의 의식에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게 양심입니다. 그런 양심의 송사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국은 나 자신이면서도 나 자신이 아닌 연원을,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새겨주신 양심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것을 모두 준행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행한 의로운 사람이 되는데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예를 들어서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런데 마지막에 결국은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들어갈 때 결국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십계명의 마지막에 탐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골로새서에 가면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하고 십계명을 다시 1계명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 자체가 나란히 되어 있는 계명이 아니라 원으로 되어 있어서 1, 2, 3, 4, 5, 6, 7, 8, 9. 10하고 다시 이리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게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그래서 이 모든 계명들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해도 인간이 여전히 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것을 지키지 못해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서서 당신의 의를 덧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십계명을 보면 일부는 1계명부터 4계명까지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5부터 10까지는 이웃을 향한 계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종교적인 관계, 사람들과의 사회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금지의 명령 '하지 말라', 그 다음에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당연히 '하라'는 계명과 '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십계명이 있고 십계명이 확장된 것이 모세오경이고, 이게 십계명 그 다음에 이게 모세오경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까지. 그 다음에 이렇게 넓혀서 당 시대의 사람들에게 너희 그렇게 사면 안 되지 않겠느냐, 만약에 모세가 다시 온다면 이 모세와 다른 우리 시대에 어떻게 살라고 가르쳤겠느냐고 한 선지서가 바로 이런 위치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십계명이 중심이 되어서 외연을 확장해 나간 것이 오경, 그것을 자기시대에 적용하고 확장한 것이 선지서입니다. 역사서는 이것들이 이루어져 온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서를 보면, 하나님이 우상숭배하면 벌을 주십니다. 그래서 나라가 위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결국은 그 역사들도, 전개되는 이런 역사의 많은 것들도 십계명으로 다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의롭다고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을 행해서 책망을 받을 것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완벽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완벽하게 책망을 받을 상태에 도달할 사람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류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당신 자신이 이루신 의를 우리 인간에게 전가시켜 줌으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비로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전도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의로운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되는 핵심적인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의를 향한 갈망을 봅시다. 역사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해서 인간이 타락합니다. 그래서 원래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던 두 사람이었는데 타락을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그리고 시커먼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사랑에 불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을 함으로서 - 이 원의(原義)라고 하는 것은 원래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던 의로운 상태입니다. 원래 본래 인간에게 주셨던 죄가 없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게 원의입니다. - 이것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이것으로 끝내셨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범죄 한 이 사람들을 만약에 그냥 심판해서 없애버리시면 창조가 무의미해지고, 내버려두시면 하나님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 그런 것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정면으로 반역한 사람들의 모든 것이 없었던 것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의를 상실한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사회가 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불의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사회에 대한 첫 번째 경험을 누가 하게 되느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싸웠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안 나옵니다. 각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랬더니 결국은 두 사람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괴로운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신 여자가 내게 줌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 얘기는 무슨 뜻입니까? "그 여자가 내게 주지 않았더라면 먹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가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까, 죄를 지은 것을 회개하기보다는 자신이 이런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에 대한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와는 같은 추궁을 받았을 때 "뱀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습니다." 끊임없이 전가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이 가장 죄가 들어온 다음에 연약한 것이 깨끗하게 책임질 수 없는 끊임없는 핑계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참 어렵지요? 사회의 많은 갈등들도 잘못한 당사자들이 깨끗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렇게 안할 때 그 갈등이 분노로 폭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 인간을 한번 죄를 지었다고 해서 미워하시고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결국은 원의를 상실하고 육체의 죽음을 겪게 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두 가지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첫째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입니다. 구원자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제와 관련시켜서 이것을 이야기해보자면 그 메시아에 대한 약속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그렇지요. 불의한 사람을 의롭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 자신의 힘으로는 의로워지기 위해 애쓸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코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완전한 상태에는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두 번째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아주 강력한 표현으로 나오는데 거의 필연입니다. 피할 수 없는 필연. 무트 타무트라고 하는 구문인데 그래서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액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즉각적으로 죽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혼은 즉시 죽고, 육체도 죽는데 그 죽음을 유보하십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자손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전에 자손들을 생산하고 하면서 인류는 존속하되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이 말씀은 실행이 되게끔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사람들은 결국은 그렇게 행복한 상태를 잃어버렸고 아담과 하와가 제일 괴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는 상태에서 그 행복을 몸소 경험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타락하여서 행복한 상태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 즉각적으로 고통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손들이 계속 태어납니다. 그러면 자손들이 계속 태어나면 결국은 현실적으로 끊임없는 이 죄 때문에 불의한 세상이 되고 그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현실들을 모두 겪게 됩니다. 당연히 메시아를 기다리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영혼의 죽음은, 영혼은 육체와는 다르니까 숨을 안 쉰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면서 영혼다워야 할 텐데 그런 영혼이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적인 생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영혼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육체의 죽음은 유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늙어서 이렇게 되는 동안에 자손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손들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 기다림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가인이 태어납니다. 이 가인이라는 뜻이 '획득하다', '얻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본 것입니까? 존 오웬 목사님 같은 분은 이것을 결국은 아담과 하와가 가인을 낳았을 때 그 이름 속에 아담과 하와의 소망이 담겨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내가 너로 말미암아 얻으리라, 무엇을 얻는 다는 것입니까? 너로 말미암아 메시아를 얻으리라, 그래서 결국은 우리를 이 비참한 상태에서 건져줄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시간이 좀 흘러가서 노아가 태어났을 때 이 노아라는 말은 느후, '안식하다'입니다. 쉬는 것, 배 같은 게 바다에 돌아다니다가 항구 같은 데 딱 되어 있는 상태, 이게 느후입니다. 거기에서 온 이름이 노아입니다. 그리고 바람 같은 것이 막 불다가 잔잔해 진 상태, 뭔가 일을 하다가 쉬고 있는 안식의 상태, 이게 노아입니다. 이 이름도 결국은 부모와 조상들이 얼마나 쉼이 없는 고단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구원에 대한 여망이 계속 묻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셔서 그래서 결례를 받으러 가실 때 그때 시므온과 안나도 똑같이 이렇게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갈망 안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불경건하고 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 없었습니다. 그런데 경건한 사람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면면히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이어져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해석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모든 해석가들이 일치합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치명적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그럴 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결국은 결정적인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몸이 있는데 팔이 하나 떨어져도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리가 하나 부러진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깨지고 나면 사실은 그 사람 몸 전체를 통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결정적인 멸망을 가져오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것은 이것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고, 그 다음에 '발꿈치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고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이어져 오다가 제사라는 제도가 이루어져서 제사제도가 결국은 궁극적인 메시아에 대한 갈망을 제사로 계속 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게 해 주심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궁극적인 죄 용서받을 메시아의 때를 갈망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이 의로워진다고 하는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보면, 복음적인 의와 율법적인 의로 이렇게 우리가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율법적인 의라고 하는 것은 율법에 의해 획득되는 의 이런 뜻이고, 복음적인 의는 복음에 의해 획득되는 의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말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만 율법적인 의라고 하는 것 이것이 부정적인 읽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 율법적인 의 속에는 결국은 꼭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중심성의 이동입니다.
즉 구제를 하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보고 하는 일들이 모든 일들이 다 좋은 일인데,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져야 될 텐데 이게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들이 누군가를 구제할 때에도 진심으로 이 사람을 위해서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구제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에 나를 어떻게 평가해 줄 것인가, 심지어 내가 이렇게 구제한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보상이 내가 구제하기 위해서 쓴 것보다 크지 않겠는가, 이런 기대 때문에 구제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에도 결국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자기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얼마나 높이 평가해 줄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개달으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은 사람들에게 자기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들이 의의 어떤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율법적인 의기 때문에 결국은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다 하십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인간에게는 이 속에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순수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의를 덧입혀 하나님 앞에 다시 살게 해 주셨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은 여기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바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때문에 이렇게 이 사람이 의로워졌는데 이렇게 되어서 덧입혀진 의를 복음적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의를 행했을 때는 자기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왜?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적인 의를 입었을 때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의롭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기는 이 의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는 너무 쓸모없는 사람이고 하나님은 자기를 너무 많이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대한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이 베텐베르그 사원의 탑에서 주님을 깊이 만납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밤낮으로 묵상하는 가운데 나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의 문맥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거기서 나는 존재 전체가 다시 태어나 활짝 열린 환의의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또 나옵니다. "거기서 성경 전체의 완전히 다른 얼굴이 내게 보였다. 그때부터 기억을 더듬어 성경을 관통해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또 다른 영으로 된 유비들을 발견했는데, 하나님의 일, 즉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 일, 우리를 강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 우리를 슬기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힘, 구원, 영광을 보게 되었다." 라틴어저작 서문 337쪽에서 이런 자신의 간증을 하게 됩니다. 결국은 자기가 의롭게 된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에게 하나님의 의의 개념과 사랑의 개념은 결코 나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복음적인 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결국 하나님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염려를 하게 되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행복해지고 죄로 일그러진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세상이 된다. 두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안에 그 사랑의 질서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게 ‘의’다.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받은 사람은 자기 바깥의 세상에서도 이것이 실현되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목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 의는 결국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것인데,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구약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셨고, 결국 그렇게 의로워지는 것은 내 바깥에 있는 어떠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 지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셨고 그것이 구원자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 의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의를 추구하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다. 이것이 오늘 공과의 핵심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어떠셨는지요? 오늘 많은 분들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반갑습니다. 비 피해는 없으신지요? 어거스틴 파크의 담장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냅시다. 예. 목사님 안경 바꾸셨어요? 아주 오래됐습니다. 2년은 됐습니다. 아, 주일날 쓰는 안경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비 기독교인이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흔적이, 예, 그의 양심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말을 시켜서 지금까지 하나도 못 들었습니다. 다시 들으셔야 되겠네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인데 2장 17절로 잘못 나왔네요. 그랬습니까? 그 다음에,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매”라고 되어 있는데 로마서 3장 10절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는데 어떻게 될까요? 노아가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이 없나니 하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비교적 당대의 타락한 사람들에 비하면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짐승처럼 살아가던 사람들에 비해서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완전하다는 게 타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순전하다, 온전하다 그런 뜻입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누구누구 어때요?’ ‘아 그 사람 진짜 의로운 사람이지.’ 그러니까 하나님도 꼼짝 못할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너무 너절하게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 사람정도 되면 훌륭한 사람이지 그런 뜻입니다. 염려 책이 늦어지나 봅니다. 그래요. 저도 그래서 슬픕니다. 출판사에서 하고 있는 책들이 너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좀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8월에는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자, 오늘 공부 어떠셨습니까? 오늘 하루도 여러분들이 말씀을 붙들고 힘차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시고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