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 II-(2)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4)
녹취자 : 김세나
안녕하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무서운 여름 장마 비 가운데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비도 많이 오고 홍수 소식도 들리고 코로나는 조금 잠잠해 졌는데 끊임없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름에 우리가 나타해지지 않고, 영적인 침체에 빠지지 않고 잘 지내려면 열심히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6장, 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반부를 공부할 차례입니다. 3단락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라” 부분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주어졌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를 이루심으로써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고, 그 의를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도록 부름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도표를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광경이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의를 주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를 획득하십니다. 그 의를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심으로 그 의를 받게 됩니다. 이 의가 결국 단순한 의가 아닙니다. 이 의가 자신에게 획득된 방식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는 사랑을 통해서 획득된 의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결국 이 의를 받은 사람은, 여기에서 ‘그 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방식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이 죽음을 통해서, 이 동기는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었지만, 이 믿은 것을 자랑할 수 없는 것은, 이것 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사랑을 통해서 희생으로 의가 획득되었고 이 의가 아무 자격 없는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받은 사랑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자기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결국 의의 두 측면입니다. 법대에 놓인 판결 같은 것입니다. 의의 두 측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측면은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측면은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를 심판하는 일 없이 의로운 자를 구원하는 것도 의가 아니고, 불의한 자를 심판하기는 하였으나 의로운 자를 구원하지 않는 것 또한 의가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이 만약에 심판을 받을 대상이라면 의로운 자가 될 수 없고,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면 심판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두 개가 서로 모순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십자가라는 방법으로 이것을 해결하십니다. 인간이 지은 죄가 있는데, 그 측면에서 보면 그는 불의한 자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습니다. 모든 인류가 다 심판을 받아서 죽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가 무의미해집니다. 그래서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되,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게 하심으로써 의를 충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그 의를 전달해 주심으로써 그를 의로운 자로 여기셔서 구원하심으로써 의의 한 측면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의 놀라운 측면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파하실 때에 이미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놀라는 표정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구약시대 때부터 많이 전해지던 선지자의 메시지였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역사적으로 어느 때 주어졌습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바르고 좋은 관계를 맺을 때에는 이러한 메시지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언제 주어집니까? 잘못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관계가 파탄날 정도로 심각하게 위기에 놓였을 때 항상 이 말씀을 외쳤습니다. 결국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으니, 너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돌이키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 뒤에 보면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나옵니다. 무엇인가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회개하라 지옥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한다면 말이 되겠는데 천국이 가까이 오는 것이 마치 재앙인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이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보셨을 때 어떤 의미였는가 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워졌으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왜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부터 이미 확고하게 전해지던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변질되었고, 유대인들은 변질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 것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나라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보내신 훌륭한 왕이 나와서 이스라엘 나라를 다윗의 시대처럼 번영한 지상 왕국으로 통치하는 나라,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다윗의 시대처럼 로마를 무찌르고 그 지배에서 벗어나 주위에 있는 많은 나라를 제압하고 그들을 신하로 삼아서 조공을 받고,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다면 그러한 나라가 온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겠습니까? 울며 회개하겠습니까? 울며 회개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잘 사는 나라가 되고, 부강한 나라가 되고, 복을 받는 나라가 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하시려고 하였던 나라는 그러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개념에 대해 예수님이 3년 동안이나 가르치신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도 제자들이 여쭤봅니다. “그 나라가 임하시는 것이 이 때입니까?” 그들의 머릿속에 있었던 그 나라가 천국이었고, 그 나라는 다윗 왕국과 같은 그러한 엄청난 번영을 누리는 지상적인 왕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은 아버지의 권한 아래 있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는데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당신 자신이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가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결국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러한 껍질을 깨고, 거기에서 그것이 한 알의 밀알이 되고 거기에서 깨져서 솟아난 것이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임금이 화려한 왕의 의상을 하고 다스리는 그러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고 성령으로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해서 자기를 드림으로써 성령의 통치를 받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지지난번에 했던 공과와 연결해서 들어보시면 아마 잘 이해되실 거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의의 두 측면이 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게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살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 의를 받아들이고, 그러한 심판에 이르게 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인류의 구원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뭐냐 하면, 구원을 받아야지만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인간은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받고, 영적인 충만한 생명을 받음으로써 능력있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왼쪽 그림에 보면 사람이 고뇌가 많습니다. 머리를 싸매고, 턱을 괴어 괴로워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입니다. 육체와 정신, 영혼, 모두에 관련된 고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무엇 때문일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국 돈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구나, 생각하며 가난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혹은 질병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질병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인간이 불행한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면 인간의 불행은 조금 더 해소되지 않을까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과학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가난에 있어서도 예전에 비해서 나아진 것이 사실이고, 질병도 많은 것들을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화) 예전에 할머니 말씀을 들으면, 시골에서 오줌을 못 누어서 죽는 사람이 가끔 나왔다고 합니다. 소변이 꽉 찼는데 이게 안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도계통의 문제라든지 말입니다. 그러면 속에서 부패하게 됩니다. 오줌독이 올라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관장하듯이 오줌 길만 열어 주면 우리로 말하면 호수만 꽂으면 다 살 수 있는 병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렇게 죽어간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많이 극복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사람이 나이 80살을 살았다고 해도 60세를 회갑이라고 합니다. ‘갑’이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70세를 ‘고희’라고 합니다. 예로부터 그만큼 산 사람이 희귀하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70세에 돌아가셨다고 할 때 ‘너무 일찍 돌아가셨네.’ ‘너무 일찍 요절하셨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평균 수명이 80세가 넘어가니까 말입니다. 80세에 돌아가셨어도 “아, 진짜 장수 하셨네.”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정도로 말하려면 90세는 살아야지만 “장수하셨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한 질병에서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현상적 요인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극복이 되면 인간이 훨씬 더 행복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더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합니다. 자살은 고대 시대 때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 엄청나게 높은 자살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OECD 국가 중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라고 할 정도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인간이 결코 그것만으로 해결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높은 소득 수준을 자랑합니다. 재작년인가 노르웨이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니까 GNP가 106,000불인가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세 배가 될 정도로 소득이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북유럽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외로움이라는 감정이라고 합니다. 일반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펜젠이라는 학자가 ‘고독’에 대하여 책을 썼는데, 북유럽에서는 “행복하십니까?” 그러한 것을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뜬금없는, 현실과는 동 떨어지는 질문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깊은 골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외로움입니다. 누가 누군가를 지배하지도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사는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결국 가난, 질병, 무지, 인간관계, 이와 같은 것들이 불행의 현상적인 원인은 되지만 뿌리는 아니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감기에 걸리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콧물이 나오고 목이 붓고 기침이 나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뼈마디가 쑤십니다.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면 감기 몸살입니다. 그것은 감기 몸살이라는 바이러스가 이미 들어가 있고, 감염이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후입니다. 그래서 결국 치료를 하려면, 두통약이나 해열약을 먹어서는 안 되고, 감기약을 먹어서 속에 있는 바이러스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상도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끊어지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좋은 영적인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 하는데서 나타나는 병적인 증후군들이 오히려 가난, 질병, 무지, 이러한 것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새롭게 누리며 그 사랑과 생명을 받으며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 생명과 사랑이 충만하면 결국 가난해도 불행하지는 않고, 질병에 걸려도 그것 때문에 인생까지 더 비참해지지는 않고, 그렇게 그것들을 극복해 가면서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의를 힘입으면 그 의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이 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절한 마음으로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래간만에 사연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7월의 마지막 구역강의 참여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때를 보내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많이들 인사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심판과 구원은 같은 의미로 들리는 맞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두 측면이 한 측면이 심판이고, 한 측면이 구원입니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한 측면이 심판이고, 다른 한 측면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도 결국 끝까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고 끝까지 믿었던 사람들을 복 주시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음 계속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에 대해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 말합니다.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하나님이 이것만 원하시겠습니까? 불신자라 하더라도 돈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에게 구박을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지위가 높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고 피해를 주고 하는 세상을 하나님께서 원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작은 하나님의 뜻들이 결국 모두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창조되었는데, 다양한 사람들이 창조되었습니다. 타락한 다음에는 모두가 죄인들이 되었고, 그 죄도 다양한 종류의 죄를 짓는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되도록 온 본성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결국 다양한 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절대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들도 행복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의 의’를 덧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 인류가 창조 목적을 따라서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서로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갈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랑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정리하자면, 온 인류의 창조 목적은 사랑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행복하고 자연 모든 만물이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그러한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삶인데, 그것을 위해서는 그들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거기에 도움 되는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가 서로에게 아름다우시고, 완전하심으로써, 서로에게 사랑스러우시고, 서로를 완전하게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과 생명과 사랑의 관계를 충만히 누리게 될 때 이 사랑은 항상 사람을 향해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으로 하나되는데, 이 사랑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게 하는 그러한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먼저 믿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살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결국 삶과 사랑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책에서 기발한 예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다 읽으셨겠지만, 안 읽으신 분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반복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느 날 아내의 표정이 매우 안 좋습니다. “당신 변했어.” “내가 뭘?” “당신은 어쨌든 변했어. 옛날 같지 않아.” “뭘? 내가 뭘?” “처음에 결혼했을 때에는 선물도 많이 사오고 먹을 것도 싫다고 해도 매일 저녁 사 가지고 오고, 집에도 일찍 들어오고 그러더니 이제는 몇 년 지났다고 아침에 쓰레기도 안 버려주고, 선물도 안 사오고, 먹을 것도 안 사오고… 그러잖아!” 직장에 왔는데 내내 아내의 이야기가 걸립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나도 사는 게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뭐 그렇게 요구하는 사항이 많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에 쓰레기봉투 버려주고, 저녁에는 선물을 잔뜩 사들고 들어가 아내 앞에 탁 내려놓으면서 “이제 됐어?” 이렇게 퉁명스럽게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듣겠습니까? 아내는 선물을 갖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변했다” 이 이야기는 당신이 나와 옳은 관계에 있지 않다, 올바른 사랑의 관계에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너는?” 물으면 할말이 없겠지만, 어쨌든 아내는 주관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옛날처럼 사랑하는 관계로 돌아가자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선물을 가져 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삶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사랑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삶과 사랑은 그러한 점에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심오하게 철학적인 존재가 아니라 감각적이지 않습니까. 누가 그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저런 것을 줄 이유가 없는데,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탁 볼 때도 속이 보입니다. 무엇인가 부탁하려고 주는 구나. 그러고 줍니다. 그러한 선물을 계속 줍니다. 그러면 받는 사람이 ‘이거 혹시 진심 아니야?’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명언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들어 보십시오. “뇌물도 계속 주면 선물이 되고, 선물도 가끔 주면 뇌물이 된다.” 선물을 주는데 딱 필요할 때만 가지고 옵니다. 이것은 선물입니까, 뇌물입니까? 뇌물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뇌물도 시종일관 제공을 하면 선물이 되고, 선물도 자기 필요할 때 주면 뇌물이 된다.” 실감 나실 것입니다.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삶과 사랑은 함께 묻어 나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 말씀으로 결론을 내자면 이렇게 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사는 삶은 교호적입니다.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불의한 세상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사람들에 대해서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지는 사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의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지는 사회도 아니고, 사랑 때문에 불의한 사람들이 마구마구 용납되는 사회도 아닌, 그러한 사회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두가 한 진리, 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그러한 질서로운 세상이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돌보고, 또한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철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면서 더 많은 기도로 여름을 이기시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풍부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