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소년의 고백-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입니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녹취자: 박윤정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한동안 못 만났는데 이제 새롭게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책이 새로 나왔는데, 사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1997년도에 초판이 나오고 25주년이 지나서 이번에 80세를 맞아서 옛날 책의 내용하고는 거의 다르지 않는데 거의 한 문장도 거의 제대로 다시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전체적으로 그 기조를 유지하면서 표현을 바꿨고, 시대에 맞게끔 좀 문체를 더 간단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한번 나에게 예배란 무엇인가 한번 우리 오프닝영상을 보도록 하실까요?
“예배는 오아시스입니다.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주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나침판입니다.”
“예배는 섭리입니다.”
“예배는 거울입니다.”
“예배는 종소리이다.”
“저에겐 예배란 멀어지지 않는 집입니다.”
“예배는 별빛입니다. 마음이 어두울 때도 걸어갈 수 있게 해줍니다.”
“예배는 저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에 먹던 빨간 시럽의 감기약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예배가 무엇인지 그 지식의 바다로 떠나는 은혜의 이야기를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신약의 예배에 관한 결정적인 구절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말씀하시는데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여자가 목마르지 않는 물을 찾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예배로 설명을 이끌어나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슨 뜻이냐면 그런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생명의 물이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런 생수와 같은 생명을 마음에 가득 솟아나게 되는 그런 사람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다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제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씩 풀어가겠습니다.
우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예배에는 사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사적인 예배는 개인적인 예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공적인 예배는 교회의 의해서, 교회 안에서 규범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성경을 읽으면서 잠깐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도 훌륭한 예배이고, 그리고 오늘 하나님 앞에 찬양의 시간을 드리는 것도 훌륭한 예배이고, 가족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 아니면 친구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 또 심지어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 이 자체가 성경이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을 사적인 예배라고 한다면, 공적인 예배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 공적 예배의 개념이 지금 코로나를 통해서 큰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도 전쟁이 일어나면 주일을 지키기 어려울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군인은 전투에 나가야 합니다. 소방대원은 불이나면 불을 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가 모든 예배를 무시해야 한다고 한다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팬더믹 사태로 인해서, 여러 가지 감염병 사태로 인해서 대면해서 예배를 못 드리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게 하기에 두려운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데 이것은 특수한 상황이고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성경적인 예배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4, 25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가 나오는데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결국은 본성을 갖게 되는데 그게 결국 예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기 싫어하는 본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죄인은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예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한 시간 동안 떠드는 것은 좋아해도 예배드리는 것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마음이 우리가 성화론에서 수도 없이 많이 배웠지만 이게 사실 가변적이잖습니까? 이렇게 병들 수도 있고, 싸워버릴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그러면 예배드리고 싶어 하는 새로운 본성 하나만 가지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의무의 개념이 필요합니다. 의무는 우리를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에 이탈할 것 같은 우리를 말씀에 우리를 꼭 붙들어 메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의무’, ‘duty’라는 이 말을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실족을 삶의 방종을 막아주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무에 대한 인식이 살아있고,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 다시 은혜를 받고 의무가 기쁨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의무조차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장 좋은 것은 의무가 아니라, 주님이 시켜서가 아니라 ‘나는 예배드림이 정말 기쁨이 됩니다. 그것이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생각하고 예배드려야 하지만 거룩한 의무감이라도 가지고 도리라도 해야 되겠다는 것을 유지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데이비드 클락슨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17세기 청교도입니다. “공적예배에서 죽은 자들이 성자 하나님과 당신의 종들의 음성을 들으며 그 말씀 들은 자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 공적예배에서 성자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들을 다시 보게 하시며 말씀으로 병든 영혼들을 고치시고 사단을 쫓아내시며 죄인들의 영혼 안에 있는 전 본성을 돌이키시사 예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지나가게 하신다. 공적 예배는 이런 일을 행하시는 유일한 통상적인 수단이다.” 그러니까 특별한 다른 수단이 있을 수도 있는데 통상적으로는 그렇게 하신다고 하실 때에는 예배가 이런 일을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화면으로 돌아가면 이 글이 하나의 소논문이나 혹은 강연집 같은 것인데 거기에서 뭐라고 하냐면 “Public worship to be preferred before private.” 공적인 예배는 사적인 예배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돼야 한다. 좋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사적으로 드리는 예배보다 공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훨씬 더 기뻐해야 한다. 이렇게 제목을 해석할 수 있는데 볼륨 제3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잘 적어 놓으시고, 이것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이제 ‘예배는 영적인 유익을 위한 특권이다’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공적인 예배에 참여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유익을 위한 특권입니다. 어떻게 되냐면 주일에 육체가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6일 동안, 아니면 요새는 5일 근무지만, 5일 동안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다가 주일에 육체도 쉬고 육체는 근로로부터 해방되어서 육체는 휴식을 취하고 그 날이 육체로써는 뭔가를 덜어내는 날이고 그리고 영혼으로써는 무언가를 담는 날입니다. 육체에서 일을 덜어내고 피로감을 덜어내고 영혼으로써는 말씀과 은혜로 가득 채우는 날이 되어야지만 그게 진짜 제대로 된 주일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주일이 안식일이라고 하니까 육체를 쉬는 것 그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속 쉴 수가 있나요? 쉬는 것 자체가 노동보다 더 많이 활동을 하지 않나요? 예를 들면 직장 가는 날은 책상에 앉아서 조용히 일을 하지만, 휴일에는 높은 산을 오르신다면서요? 그것이 우리의 육체에서 피로를 덜어내는 방법이고, 우리의 몸에서 우리들의 몸이 쉼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휴식입니다. 주일날 우리의 육체를 쉬고, 피로를 덜어냅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주일 동안 사실은 신령한 일에 자기의 영혼을 돌아보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배우는 시간을 잘 쓰지 못하잖아요, 그때에 주일날 그 시간을 활용을 해서 영혼의 충만한 은혜를 담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겠죠? 그렇게 될 때에 도표에 돌아가 보면 이 죄악된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권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림 전체를 놓고 보면 주일이 겨우 육체만 쉬는 날이 아니라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가득 채워서 다시 일주일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날이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마태복음 15장 8절과 9절에서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 사람들은 헛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냐면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살았던 양심의 가책과 마음의 부담을 보상하기 위한 종교적인 보상심리를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있는데 몸만 교회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있으니까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못 만났지만 예배가 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큰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식적으로 지킨 주일 예배보다는 차라리 주일을 못 지킨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드리는 더 예배를 기뻐하실까요? 예배를 빠지고 나면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리게 될까요? 그게 아닙니다.
지하실에 교회를 개척했을 때의 일인데 어떤 사람이 평일에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예배의 감격을 빠져라>를 읽고 왔다고 그러면서 목사님을 뵙고 싶다고 그래서 나한테 왔습니다. 그리고 둘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러는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를 읽으면서 부인이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여보, 당신이 예배드리는 모습이 이 책에 그대로 나와 있어. 한번 읽어봐.”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주보에 줄 긋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기와 똑같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냐면 이렇게 은혜도 못 받고 내 신앙의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 이런 예배를 드리는 게 뭐가 의미가 있나 라고 생각하고선 교회를 몇 주 안 나갔답니다. 그런데 그 책을 보니까 그렇게 하는 건 하나님을 막보는 것이라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았답니다.
우리들이 다투고 그럴 수도 있지만은 사람을 막보고 나면 그러면 그 갈등을 해결하고 다시 만날 그런 의지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면 안 만나겠다고 하는 의지가 강력할 때에 막말도 하고 되지 못하는 행동도 하면서 막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끔 불순종할 때는 있지만 그렇게 막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은혜가 안 된다고 해서 예배를 안나와버리고 하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써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예배를 나와야 되는데 의무만으로 나오기 어렵습니다. 예배 속에서 실제적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이 책을 전체를 가지고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에 관해서 정리를 하자면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예배의 결과는 거룩한 감화와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그 다음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과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열매는 결국은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에 새롭게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만나고, 돌 같은 마음이 녹고, 죄인임을 깨닫게 되면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배를 통해서 그렇게 자신의 영혼이 회복돼야 하는 경험이 없을 때에 그 때에 교회 생활은 매우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오는 기대 자체가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니고 인간적인 이유로 대치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경이 가르치는 데서는 좀 멀어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그 다음 예배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교회의 영적 상태는 예배를 통해 드러납니다. 예배의 수준은 그 교회의 영적 수준을 말해 줍니다. 한 교회의 예배는 신자들의 영적 수준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것만 못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나, 그것을 뛰어넘는 예배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이제 전체적으로 보면 당연히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그 다음에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자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전체적인 목적인 동시에 예배를 통해 나타나고 이웃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할 때에 이것은 선교와 이웃을 섬기는 것을 통해 나타나고, 마지막 세 번째로 교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교회 자신이 신자들의 어머니가 되어서 그들을 말씀으로 젖먹이며 양육하는 사명을 가져서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람들이 되도록 돕는 것 그것이 교회가 있는 이유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잘해야 합니다. 예배, 전도와 섬김, 성도들을 양육하는 것. 이 일에 아주 뛰어난 교회가 될 때에 예배는 그들의 삶으로 이어지고, 삶은 예배로 이어지는 순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문제가 나왔습니다.
문제 1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경배는 무엇으로 표현됩니까?
다른 것으로도 많이 표현되지만 그러나 성도들이 모두 공동체적으로 모였을 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배는 예배를 통해 최고로 잘 표현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 2번. 예배는 의무이자 특권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지친 육체가 쉼을 얻고 영혼이 은혜로 채워진다는 점에서 죄악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 점에서, 말씀을 깨닫고 권능을 받는다는 점에서 예배는 의무인 동시에 또한 신자의 놀라운 특권, 아니 예배를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놀라운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 3번. 하나님께서는 헛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거짓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평가하시고, 자기기만과 신성모독을 행하는 형식적인 예배자로 평가하십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사람들의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예배의 형식 속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 4번. 예배의 목적과 목표는 무엇입니까?
너무 쉽습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문제 5번. 교회는 예배 공동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기관이고,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예배할 줄 모르던 사람들을 예배하게 만드는 것이 선교의 목적이 됩니다. 선교가 모두 완성이 되고나면 온 세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류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는 단지 사회 개혁을 위한 매체가 아닙니다. 진리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진 성도들이 함께 사귀고, 그 사귐 안에서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모임. 이것이 바로 예배 공동체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오늘 공과는 여기까지 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첫 번째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여러분, 이 책을 가지고 즐겁게 공부하시면서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기를 바라고 또 예배에 더 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지인에게 선물도 해주시고 카페에, 블로그에 글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조금 늦게 도착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공과공부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