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배 견디기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요 4:23-24)
녹취자: 이은정
이제 봄이 오는 게 느껴집니다. 오늘 밖에 잠깐 나갔더니 버드나무 가지가 약간 색이 변해가는 게 벌써 느껴질 정도고 저 남쪽에서는 벌써 산수유 피는 소식들이 들립니다. 어김없이 겨울은 물러가고 결국 봄이 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힘들고 어려운 날이 있으면 결국 언젠가 물러가는 날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이 계절에서 많이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자 오늘은 드디어 대망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제2장 예배 견디기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입니다. 표지 정말 예쁘지 않습니까? 그렇죠? 봄기운을 좀 이렇게 마음껏 한번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은 어떤 내용일까요? 먼저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을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시작”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렇게)나옵니다. 개정 성경 판에 예전에 개혁 때는 ”신령과 진정으로“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그거는 좀 번역이 문제가 있는 번역이었습니다. ‘영과 진리로‘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헬라어에서도 그리스어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똑같이 여기? n은(2:14) 무엇 무엇 안에서 이고 프뉴마티가’영 안에서‘ 그리고 ’카이 알레데이아‘ 는 ’진리 안에서’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in sprit and truth 거의 모든 번역이 이렇게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그런 예배를 기뻐하신다. 이것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럼 한번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실 때 왼쪽에 있는 그림은 구약의 제사입니다. 그렇죠? 이 구약의 제사는 신약의 예배의 그림자입니다. 물론 이제 구약의 제사의 모든 의미가 전부 다 신약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기본적인 구속사의 그림이 신약시대에 예배가 어떠할지를 먼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알기 쉽게 묘사를 합니다. 그래서 구약은 그림이고, 그림이라기보다는 동영상이고, 그리고 신약은 자막이다. 그래서 구약은 우리에게 상징과 어떤 예표로 우리에게 그림처럼 보여주지만, 신약은 그것을 말로써 설명해 주어서 그래서 그것이 보여주고 있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그래서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볼 때 의미를 잘 알 수 있고, 또 신약은 구약성경의 조명을 받으면서 볼 때 신약의 의미들이 풍부해지는 것 입니다.
구약을 기록한 언어가 대부분 히브리어로 돼 있고, 그다음에 아람어로 아주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7장까지 그다음에 조금씩 에스라서 몇 장 이렇게 되어 있는데 대부분 히브리어로 돼 있습니다. 근데 그 히브리어나 아람어나 마찬가지로 그 산문을 쓰기에 적합한 언어라기보다는 시를 쓰기에 적합한 언어입니다. 굉장히 그림처럼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구약을 기록하게 하시고 또 신약의 헬라어, 우리들이 아는 건 그리스어입니다. 그리스어는 아주 이 세상에서 인류가 발견하는 언어 중에서 아주 정확한 언어입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매우 정확했기 때문에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에서 철학이 일찍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리스어가 가지고 있는 정확성 때문이다. 이렇게들 설명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유는 언어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또 언어는 사유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언어가 제한돼 있으면 사유를 하기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약은 그림이고 신약은 그림에 대한 해설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도표로 다시 돌아가 보면, 그런 점에서 그 제사를 드리잖습니까? 지금 양을 이렇게 바치는데 근데 그 짐승을 이렇게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는데 이거는 사실은 하나님이 짐승을 태워 드릴 때 짐승을 죽이고 태우는 그 자체를 즐기신 것이 아니라 이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헌재 자라고 하는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 전부를 드리는 표로써 제물을 하나님 앞에 죽여서 각을 뜨고 태워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제사 드리러 온 사람이 이렇게 제물을 드릴 때는 반드시 삶의 일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삶과 삶이 하나님께 자기를 다 드리는 그런 언약과 율법에 합치한 삶의 고백으로서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는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전부 다 드리는 표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방인의 제사 개념에서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전부 신에게 드린다는 그런 의미가 그렇게 강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헌재 자가 이방 신을 정말 사랑하는지 삶이 일치되는지 이런 거에 대한 그런 도덕적인 요구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말하자면 뇌물 개념의 예배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면은 그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만약에 우리가 예배를 드려도 삶의 일치가 없고 마음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면 그것은 이제 고대 근동에서 이방인들이 드렸던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종 그랬던 뇌물의 개념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은 뇌물을 기쁘게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책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런 그림을 가지고 신약시대의 예배를 본다면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주일날 그저 가책을 덜기 위해서 예배드리러 나오고 이러는 것들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다음 보겠습니다. 구약의 제사에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죄에 대한 깨달음과 그다음에 용서였습니다. 이건 은총입니다. 그렇죠? 이거는 깨달음. 자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구약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이게 처음에는 사람들이 자기가 기르던 짐승 가운데 가지고 와서 성막에 와서 혹은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나중에는 이제 그 근처 와서 사가지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이제 굉장히 상업적으로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사건도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짐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데, 기본적으로 제사장이 없으면 제사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제사장이 이제 안수함으로써 이 헌재자의 죄가 짐승에게로 전가되고 그 다음에 그 양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럼 만약에 그 양이 자기가 기르던 양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굉장히 끔찍한 장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집에서 기르는 그 강아지들 있잖습니까? 늘 주인 졸졸졸졸 따라다니고 언제든지 집에 들어가면 막 좋다고 짖으면서 따라와서 막 안기고 그러는데 개를 데리고 그 하나님 앞에 만약에 제물로 바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물론 하나님이 개를 받으시지는 않으셨지만 이제 관계를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양이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알듯이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는데 그거를 가지고 가서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짐승은 이 주인을 신뢰해서 따라갔는데 근데 웬 이상한 곳에 가서 이상한 행위들이 이루어지고 그다음에 양은 자기가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양을 데리고 간 그 헌재 자의 심정에 한 번 대보십시오.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집에서 기르고 사랑하던 그 강아지를 데리고 가서 개가 나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그다음에 칼로 각이 떠지고 그게 재단에 받혀져서 불태워진다고 한번 생각해보라 이것입니다. 이건 엄청난 경험입니다. 여기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도표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의 심각성을 깨달으면 거기서 회계가 나오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용서를 빌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잠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 구약의 제사입니다.
그러면은 오늘날 예배의 가장 큰 문제는 뭐냐 하면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죄를 깨닫게 한다고 해서 모두 그 모인 성도들을 쥐 잡듯이 잡아서 정죄하고 그러는 것만이 죄를 깨닫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들이 아이들을 교육할 때 보면은 네가 어긴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 죄를 어긴 그 사람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쓰리고 아픈가 하는 것을(아랫줄과 중복이 돼서 생략해도 될 것 같아요.13:46) 그 자식이 죄를 범한 것을 부모가 얼마나 쓰리고 아파하는지를 알게 할 때 아이들의 마음에는 부모 못지않은 아픔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를 깨닫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겸비해지게 되고 그리고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나게 되는 거잖습니까? 근데 오늘날의 예배는 사람들이 죄에 대한 설교도 싫어하는 것도 있지만 설교자들에게 의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의지가 있어도 그들의 마음에까지 다다라서 죄를 깨닫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은 이제 많은 어려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리면서 죄를 깨닫고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때 사람들은 겸비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데 이런 은혜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거를 별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서 간절함이 없는 것입니다. 용서의 경험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은총도 잘 못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다음, 보겠습니다. 이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 그런데 그 성령님이 결국은 그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 죄인이 물론 이 사람이 원래 마음은 이렇게 검은 게 있었겠죠? 그렇죠? 이 사람을 회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죠?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고 그때 여기에서 영적인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근데 이 회복의 경험의 한복판에는 결국은 자기의 의로 그렇게 회복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대속의 피로 자기가 이렇게 그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회복하게 되었다는 거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때 이 사람은 이제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면서 그래서 이 성령이 결국은 이 사람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죄는 속박을 가져다주었고 그 죄를 성령께서 깨뜨리심으로 속박에서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예배 속에서 일어나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라고 할 때 그것은 죄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셔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는 그 모든 일들의 저자, 모든 일들을 그렇게 되도록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예배라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영혼의 회복도 없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지도 못하고 충만해지지도 못하고, 은혜도 못 받고, 영혼의 죄의 속박을 끊어버리는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 예배라고 할 때, 그건 사실은 예배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식 건물일 수도 있고 오래된 건물일 수도 있습니다. 디자인이 예쁠 수도 있고 후질 수도 있습니다. 노인들만 모인 교회일 수도 있고 젊은이만 모인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지방에 있을 수도 있고 서울에 있을 수도 있고 단독 건물일 수도 있고 새 들어 사는 건물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성령이 함께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로서의 기능을 거의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한 번 다시 도표로 돌아가서 그러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다라고 할 때 이것은 예배 전체를 지배해야 하는 어떤 영적인 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이렇게 예배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심. 이게 불신자일 경우에 뭐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에게 일어나는 것이고, 그다음 불신자의 마음에 믿음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냉담해진 마음에 거룩한 불을 지피시고, 이 성령은 하나님의 인격의 인격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어떤 성품을 가지신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서 그다음에 새로운 인격과 그다음에 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입니다.
그다음 보겠습니다. 결국은 이 성령님이 하시는 이 모든 역사,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회복을 시키시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고, 자유를 충만하게 하시고, 자유를 주시는 이 모든 일은 성령이 사용하시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회복되고, 보혈의 능력을 힘입고, 충만해지고, 자유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리 안에서 드리는 배와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 그곳에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조명해 주시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그 진리의 빛이 없으면 우리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 없이 인간이 자기가 죄인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 비로소 사람들은 선포되는 진리의 말씀을 자기가 깨닫게 되고, 또 믿게 되고, 그것을 사랑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표로 돌아가서 우리 내용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이 생생하게 믿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전에 믿을 수 없던 진리를 믿게 합니다. 지성으로는 파악할 수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는 내용들을 믿게 합니다. “왜 파악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다고 그러냐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 있는 그런 초월적인 진리들에 대해서 그것들을 이성으로서는 파악할 수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는데 그걸 믿음으로 믿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같이 진리를(부터 읽어봅시다) 시작, ‘진리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생생한 정동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게 합니다.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이 이 일을 하십니다.’
더 설명 붙일 건 없습니다. 다음에 이제 보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보실 때, 오른쪽에 있는 그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면 예배당 안에 지금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설교자가 성경을 들고 설교를 하고 있고, 그리고 사람이 이제 손을 들고 있는데 설교자나 예배자나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거는 예배를 통해서 이렇게 된 건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가 할 때 이제 왼쪽 도표가 그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설교자,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말씀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고 하는 어떤 영적인 긴박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말씀에 사로잡히는 설교자가 있고 그다음에 말씀을 통해 은혜받기를 사모하는 청중들이 있어야 됩니다. 회중들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에 이 두 관계에 복을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자, 청중, 성령. 말씀에 사로잡히고 말씀을 사모하고 그다음에 성령이 축복하시고 할 때 이런 살아있는 예배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나올 때 그렇게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게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든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런 비유를 제가 가끔 드리는데, 여러분 대통령 직접 만나보신 적 있습니까? 없으십니까? 없으시구나. 저는 한 번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일이었는데 서울대학교 졸업식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친척이 졸업식을 해서. 근데 거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오셨더랍니다. 근데 그때는 굉장히 젊었습니다. 근데 옆에서 경호원이 탁 이렇게 팔짱을 끼고 그리고 모시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제 단단한 체구의 작은 분이 얼굴이 까무잡잡하신 분이 연설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뭐 굉장히 멀리서 본 것입니다. 그때 아니 그래도 그때는 뭐 이런 무슨 비디오나 이런 게 없었으니까 그냥 이렇게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꽤 가까이서 봤습니다. 생애 한 번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을 존중하지마는 우리와는 종류가 다른 어마어마하게 높으신 분이다. 그런 왕정 시대의 그런 생각은 안 하잖습니까? 그냥 특별한 일을 맡으셔서 고생이 많으시겠다. 뭐 그 정도고 또 뭐 그렇게 만나서 인사라도 한다고 그러면은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뭐 아닐까? 뭐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뭐 어쨌든 그렇게 특별할 거 아닙니까?. 그렇죠? 못 만나보시잖습니까? 여러분 못 만나보지 몇 명은 있을 것입니까? 청와대에 초대받으신 분이 있겠죠. 근데 대부분 못 봤습니다. 그러면 이거 왕정 시대로 한번 가보자 이겁니다. 한 나라의 왕이 있는데, 아니 뭐 더 실감 나게 하기 위해서, 황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황제를 뵙기 위해서 갔는데 막 황제가 지금 얘기를 하는데 계속 좁니다. 졸고 그러거나 아니면 계속 손톱을 만지면서 뭐 장난을 하고 있다든지 핸드폰을 보고 계속해서 네이버를 보고 있다든지 그러면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참수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황제 있는 곳에 가서 뭐 기지개를 켜고 좀 졸았다고 해서 무슨 황제의 뭘 뺏어간 건 아니잖습니까? 근데 황제의 위엄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황제를 우습게 본 것입니다. 의미에 관해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나왔는데 도대체 누가 예배에 가라고 그렇게 등을 떠민 것입니까? 아무도 그렇게 그 협박한 사람 없습니다. 자기가 나오기 싫으면 안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야 되겠다고 생각을 해서 나온 것입니다. 근데 전혀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그런 갈망이 없습니다. 교회 나올 때의 목표는 빨리 끝나고 집에 가는 것입니다. 재수 좋은 날은 아주 일찍 끝나는 거고, 재수 없는 날은 더럽게 길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겠습니까?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세는 예배 오기 전에는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예배에 와서는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으려는 간절함이 그 예배 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래도 좀 낫습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인데 그냥 예배 시간에 아주 소수의 사람이지만 매우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그 설교의 얼개는 만들어 가지고 가지만은 원고를 대부분 안 보고 설교를 하잖습니까? 거기서 즉석에서 말을 만들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근데 눈에 그렇게 거슬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설교에 조금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방해가 됩니다. 정말로 많이 방해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설교를 덮고 내려오는 적도 있었습니다. 남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되잖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올라가 있으면 한눈에 여러분들 모두 눈에 들어옵니다. 머리 이렇게 흩어진 것까지 눈에 들어옵니다. 제가 안경 쓰고 1.0 그리고 1.1입니다. 다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들이 막 비칠 때 이 속에서 막 마음이 산란해지면서 언어를 만들기가 되게 힘든 것입니다. 제가 정신을 집중하기가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졸지 마십시오. 그렇게 손으로 부채질을 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이유가 조금 설교에 방해를 받는 게 아니라 설교를 망쳐놓을 정도로 방해를 합니다. 진심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2시 예배드릴 때에는 제가 특별히 부탁을 했습니다. 나를 좀 편안하게 설교할 수 있도록 좀 도와달라고 그랬더니 정말 놀랍게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거는 본인만을 위해서가 남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다가 너무 졸려오면 나가십시오. 뒤로 가셔서 서서 예배를 드리시든지 아니면 예배 시간에 그런 거는 안 되지만 무엇인가 잠을 깨는 뭐 조치를 취하십시오. 그런 말 있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그럼 졸리실 때가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데. 근데 한 방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제가? 이게 실습인데 여기에서 팔뚝서부터 이렇게 내려오면 여기 알통이 있습니다. 알통이 양쪽에 다 있잖습니까? 너무 졸려오면 이 알통 약간 아랫부분을 이렇게 알통 아랫부분 그다음에 위에 부분을 특히 위에 부분이 여기입니다. 여기를 양쪽 손으로 꽉 눌러보십시오. 지금 한번 해보십시오. 이렇게 꽉 엄지손가락으로 꽉 누르는 것입니다. 미는 것입니다. 양쪽으로. 그러면 약간 아픕니다. 근데 이거를 장소를 옮기면서 몇 번을 누르면 이 정신이 쇠락해집니다. 이게 지압에도 나오는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똑바로 자세를 바꾼다든지 그리고 특히 심호흡을 하는 게 굉장히 이 정신을 맑게 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다가 좀 졸려오면 이렇게 이렇게 해서 피로를 풀어주고 좀 정신을 쇠락하게 해주고, 두 번째는 자세를 가다듬어서 똑바로 안고, 그다음에 심호흡을 하십시오. 그러면 이게 산소가 많이 들어가면서 정신이 쇠락해집니다. 그래도 견딜 수가 없을 경우에는 일어나시는 게 낫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기도 하는데 그것까지는 바닥이니까 그렇지만 옆으로 가시거나 뒤로 가셔서 똑바로 서서 예배드리십시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성숙하셔서 어떤 성도들이 옆에 가서 이렇게 서서 예배를 드려도 그걸 쳐다보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사정이 있겠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정신이 다시 맑아지면 다시 내려오시고 앉으셔서 그러고 예배드리시면 됩니다. 그거는 너무 매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다 보니까 제 얘기를 했습니다. 잔소리처럼 됐는데, 다시 표로 돌아가시면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예배는, 우리 같이 읽읍시다. 시작.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예배는 마치 국경일에 거행되는 기념행사와 같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죽음의 침묵이 무섭게 깃들인 교회당을 뒤흔들어 생명의 함성으로 가득 차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님들 그 중고등학교 다녔던 기억납니까? 제일 짜증나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집에 가려고 책상 위에다가 책 보따리를 다 싸놨는데 그 담임 선생님이 종례하는데 하여튼 그렇게 잔소리가 길 때 짜증나잖습니까? 근데 학생들 누가 듣습니까? 아무도 안 듣습니다. 이러고 있습니다. 집에서 엄마가 잔소리할 때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잔소리하지 마시고 굵은 소리를 하십시오. 굵은 소리. 다 모았다가 사소한 거는 그냥 부모로서 다 감당하고 이거는 꼭 얘기를 해줘야 하겠다는 거를 모아서 한 몇 달에 한 번 정도만 얘기해주면 됩니다. 일 년에 한 번 얘기하든지 그렇게 굵은 소리를 하십시오. 뭐 마음에 쿵 하는 그 여운이 남는 그런 얘기를 하십시오. 이게 잔소리를 하면 굵은 소리도 안 듣습니다. 굵은 소리라도 들리게 하려면 잔소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종래와 같은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되겠다. 그런 뜻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죄입니다. 그래서 죄는 영혼의 무감각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사람의 죄의 지배를 받을 때는 이런 예배를 드리고 특히 기도하고 말씀을 깨닫고 하는 일이 너무 힘겹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때는 그 일만큼 기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죄가 가득하면 신령한 것을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자기의 영혼을 위해 거룩한 욕망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결해지고 싶다든지 순결해지고 싶다든지 주님을 더 뜨겁게 섬기고 싶다든지 그런 욕구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회개 없는 예배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비극입니다. 그죠? 근데 예배를 드리잖습니까? 그때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우리에게 신령한 체험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신령한 체험은 은혜로운 정서를 동반합니다. 은혜의 정서를 동반한다는 것은 은혜로운 정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게 마음이 움직이면서 분노와 분노, 슬픔, 기쁨, 신비함 이런 것들이 이렇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변화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우리의 영혼의 변화는 우리의 마음에 느껴집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삶을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삶이 결국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에는 자 시작.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거룩한 감화가 있습니다.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진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은혜로운 정서가 깃들고 거룩한 열정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는 은혜의 증거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찬양과 감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인데 이것이 바로 죄인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은총의 근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그 성령이 역사할 때 거기서 자기들의 죄를 깨닫는다 그랬잖습니까? 근데 그 죄를 깨달을 때 반드시 깨닫게 되는 게 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이잖습니까?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부활이잖습니까?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을 현재적으로 다시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의 가장 커다란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용문을 우리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실 때 예배자들은 지금 자기들 앞에 재연되고 있는 십자가 사건을 경험합니다.’
문제1) 4장 23절이 알려주는 두 가지 사실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 있다. 둘째, 그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이다. 2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어가는 제물을 바라보며 깨달아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죄. 그리고 죄의 심각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걸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3번)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 안에서 드려져야만 죄를 깨닫고 믿음을 갖고 또 영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번) 예배 가운데 성령이 임하시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봅시다.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게 하십니다. 세상 욕심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5번) 성령 안에서 들여지지 못하는 중요한 요인이 무엇입니까? 죄로 인한 영혼의 무감각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령한 것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대도 없이 예배당에 나오고 기대가 채워지지도 못한 채 예배당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어떤 변화도 없고 영혼의 변화도 없으니 일주일 동안 살아가는 삶에도 변화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온 사람이 다시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종합을 하면 결국 오늘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으로써 오늘 제2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