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감격에 빠져라(2022.03.27._온라인구역공과5)
5. 밤나무의 추억
-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0)
녹취자: 황인준
예화에 나오는 것인데 아들이 학교에 가면서 엄마에게 쪽지를 놓고 갔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집안일 한 것, 공부 잘한 것에 대한 돈을 달라고 청구했습니다. 청구했는데 그다음 날 엄마가 청구서를 또 썼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들아, 엄마는 너한테 청구할 게 없다. 사랑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아이가 엄마한테 야단을 맞는 장면이 거실 창밖에서 보였습니다. 그러니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는데 그러기 때문에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공과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야기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왜 가나안 땅에 보내셨는지 그 뜻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삶과 예배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십니다. 당시의 가나안 땅은 발달한 문명을 누리던 지역이었습니다. 가까이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있고 여러분들이 알고 계신 것처럼 히타이트 족속이 철기를 발명하면서 엄청난 문명을 구가하게 됩니다. 그리니 애굽의 문명 세계를 본 사람들은 덜 하겠지만 광야에서 자라나고 생활했던 신세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받았을 문명사적인 충격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또한 비옥한 농지들이 있어 부를 축적했을 것입니다. 자연스레 풍요로운 문명을 일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셔서 이스라엘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에 무엇인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바라셨습니다. “무릇 만군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이사야 5:7)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원에 비유하십니다. 포도나무를 정성껏 심고 가꾸는 농부의 바람은 그 포도원에서 아주 아름다운 포도가 맺혀서 비싼 값에 소출을 팔 수 있으면 그것이 정성껏 포도원을 가꾸는 주인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 우상 숭배가 심한 땅에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이유는 거기서 그들이 불의한 삶을 살았으나 이제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정의로운 삶을 살고 저들은 포악한 삶을 살았으나 오히려 공의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구원과 예배에 관련지어 이야기해보면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그것은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설교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라는 이 가난한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 안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움을 누렸듯이 신약의 백성들이 그 풍요를 누리게 될 그 예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농부들에게 마음씨 좋은 주인이 포도원을 잘 만들어 주고 편안하게 포도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소작료는 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로 말하자면 삶의 소작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거저 구원의 은혜를 주셨지만 우리는 그 구원의 계획을 잘 알고 감사하면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의 소작료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삶이 무엇일까요? 천하가 하나님의 것인데 돈일까요? 세상 모든 임금의 영광을 모두 쌓아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텐데 세상의 영광을 바라실까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그렇게 하며 살면 그 사람이 모든 이웃에 대해서 신실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질로 섬기고 시간을 들여서 봉사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우리의 중심을 드린 구원의 은혜에 너무 감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고백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유할 때 삶의 소작료라고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 맞추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설교자의 소명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소작료를 내지 않는데 처음에 안 그랬을 때 마음이 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결국 부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이들도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이 가서 주인의 뜻을 전합니다. ‘너희들이 추수하게 되었으니 소작료를 받쳐라.’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하는데 그렇게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두 착한 소작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할 때는 그 삶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지만, 은혜가 떠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나면 자연스럽게 우상을 숭배하고 자기만을 위한 이익과 욕심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셔서 ‘너희는 이 가나안 땅을 주님으로부터 은혜로 받았다. 너희가 의로워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셔서 주신 것이다. 그러니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오늘도 너희는 삶의 소작료를 드려라.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라.’ 이것을 선지자들이 생각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처럼 똑같이 오늘날에는 하나님이 설교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작료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주의 선지자가 후예가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목회자입니다.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사도들이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했는데 이것이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본질에 충실한 교회를 이루어 가길 힘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참 어려운 소명입니다. 똑같이 연약한 형제이면서 그 형제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어서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되새기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줘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하자면 설교자는 요리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종이 소작인에게 가서 소작료를 내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주인에게 가서 잘 얘기해서 당신들이 왜 소작료를 못 내는지를 주인을 설득해 주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종이 아닙니다. 언제나 주인 편에 서 있는 게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는 교인이 원하는 것을 들려주는 요리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의사와 같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세 가지가 너무나도 절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독수리의 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성이 필요합니다. 독수리가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올 때에 아래에 있는 작은 짐승들이 먼지만 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확하게 보고 Close_up 시켜 돌진하여 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저런 놀라운 지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자의 심장입니다. 담대함을 의미합니다.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겁내지 않고 덤벼들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다음은 여인의 손길, 기술을 의미합니다. 특히 바느질이나 요리 같은 것을 아주 익숙히 해온 여인들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요리와 바느질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술이 베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성과 담대함과 기술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되새기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입니다.
누가복음 20장의 이야기는 이렇게 됩니다. 첫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보낸 종은 소작료를 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작료를 주지 않고 몹시 때리고 거저 보냈습니다. 두 번째 종은 몹시 때릴 뿐만 아니라 욕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수치스럽게 해서 보냅니다. 세 번째는 상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때린 것보다 훨씬 더 농도가 더한 폭행입니다. 강도를 더한 폭행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내쫓습니다.
그다음 아들이 오게 됩니다. 이러한 종들이 결국 올바른 이야기를 한 것인데 ‘너희가 주인으로부터 거저 포도원을 받았으니 약조에 따라 소작료를 내는 것이 맞다’라는 진실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하는데 만약에 이 말씀을 들어서 결국 설교자가 원하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되새겨 주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리고 나를 얼마나 사랑하셔서 나에게 은총을 베푸셨는지 이것을 깨닫게 해서 마지막에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인데 그 삶을 살게 하는 그 설교를 안 듣는다고 하면 앞에 나오는 그림과 같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계속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듣는 것입니다. 경청입니다. 경외의 가장 중요한 큰 표입니다. 예배 시간에 졸고 그러면 안 됩니다.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지만 늘 그런다면 그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예배 시간에 듣지도 않고 안 졸더라도 듣지를 않고 생각을 안 하고 그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이것이 어떻게 적용될까를 지적인 활동을 하면서 설교를 빨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과 똑같이 엄청나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도 이런 일들을 교인들이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된 순종으로 되돌아가려면 우리가 보혈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또 잘못한 것에 대해선 죄의 용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후에는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악한 농부들처럼 잘못했던 죄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회개하고 다시 새로 출발할 수 있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췌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문제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거저 주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래서 짙지 않은 집에서 살고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열매를 먹게 해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십니다. 저 사람들은 어떠한 이름다운 삶을 살까, 아!, 하나님이 다스리는 사람들이구나. 세 번째는 그래서 이스라엘이 행복을 누리게끔 해주십니다.
문제2) 구원받은 우리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든 이웃과 함께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대로 그러니깐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목적은 일렬 상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의 목적을 인간이 타락함으로 잃어버렸기 때문에 구원을 통해서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받은 우리의 소명은 이웃과 함께 창조의 목적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문제3) 설교자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선포하는 것. 불신자들은 예수를 믿게 하고, 신자들은 예수를 더 잘 믿고 더 잘 사랑하게 그래서 더 순종하면서 살게끔 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설교자들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가장 큰 자격은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
문제4) 누가복음 20장 9절~13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굉장히 충성스러운 종들이니깐 그러한 중요한 심부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얻어맞고 돌아왔는데 군대를 딸려 보내거나 무기를 들려 보내던지 해야 하는데 또 비무장 상태로 다음 종을 보냅니다. 또 다른 종을 보내고 더 많은 종이 죽어옵니다. 심지어 마지막엔 아들은 공경할 것으로 생각해 아들을 보내니깐 그 아들을 죽이면 이 땅이 상속자가 없으니 우리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들까지 죽이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는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를 설득하시고자 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5) 설교를 듣는 사람이 기억해야 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고 두 번째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진리에 대한 이해고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면서 지성은 부지런히 깨달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은혜를 받아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붙게 되는 것. 그때에 깨달은 데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