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예배와 헌금
-모든 것을 드린 예배입니까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노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고후 8:1)
녹취자: 장미연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벌써 한 주가 지나갔네요.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벌써 개나리가 군데군데 많이 피었더군요. 그리고 목련도 막 터지기 직전이고 부산에는 이미 벚꽃이 활짝 피었더군요. 이렇게 봄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봄처럼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자, 오늘 어느덧 6장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예배와 헌금”입니다. “모든 것을 드린 예배입니까?” 예배에 있어서 헌금 생활이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우리가 감격이 있는 예배 생활을 위해서 헌금 생활을 어떻게 해야 될지 보여줍니다.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8장 1절을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노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그랬습니다. 보면 마게노냐 교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갈라디아 교회 혹은 고린도 교회 그러면 지금처럼 이렇게 큰 건물로 크게 서 있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에 있는 작은 가정교회들. 그것들의 영적인 연합을 통틀어서 갈라디아 교회, 고린도 교회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게노냐 교회들이라고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작은 공동체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냐하면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농사에 의존하고 목축에 의존하여서 살던 땐데 큰 재해가 일어나고 나면 목축도 어려워지고 가뭄이 들면 농작물도 안 되겠지요. 그때는 직격탄을 맞은 것입니다. 큰 흉년이 들어서 고통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교회들이 우리가 복음을 어쨌든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전파되어서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되었으니 그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가 돕자 이런 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거기에 참여했던 많은 교회들 중에 하나가 마게노냐 교회였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성경을 보면 환난과 시련을 많이 당하고 더군다나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시련이 복수로 나오는데 환난과 시련을 한 번 겪은 것이 아니라 많은 환난과 시련을 겪었고 특히 박해가 많았고 또 교회가 가난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경우에는 아주 부자 동네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렇고. 그런데 정말 가난한 지방이었습니다. 당연히 교회도 가난하겠지요. 그래서 환난과 시련과 가난을 벗 삼아서 사는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많은 헌금을 드릴만한 조건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이 볼 때에 감격스러울 정도로 풍성한 연보가 나온 것입니다.
이게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이야기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한다는 사실을 염두 해두십시오.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항구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아주 부자였습니다. 지금도 고린도 지방에 가보면 커다란 국제 시장의 흔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무역을 하면서 그렇게 돈을 많이 벌고 또 많은 사람들이 뱃길에서 고린도에 들리면서 유흥을 비롯해서 많은 돈들을 썼을 것 아닙니까? 당연히 물질적으로 풍성한 지방이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별로 헌금을 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마게노냐 교회의 헌신을 다시 한 번 말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일깨우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환난과 시련과 가난밖에 없는데 크고 풍성한 연보를 하게 되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본문에 이렇게 나옵니다. 8장 2절을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이상하지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극심한 가난이” 그랬습니다. ‘극심한 가난이’가 주어가 되어서 ‘연보를 넘치게 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무슨 의미겠습니까? 가난이라는 것은 연보를 많이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 생각에 아마 이 마게노냐 교회가 겪은 끔찍한 가난의 고통. 그 기억이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이 들어서 고통을 받을 때 깊이 공감하게 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십니까? “없는 사람의 심정 없는 사람이 이해한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없어 본 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흉년이 들었을 때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를 아주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그 공감을 공감만 한 게 아니라 거기에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기쁨은 무엇일까요? 신령한 기쁨입니다. 은혜로 말미암는 기쁨이 있었고 가난의 비참에 대해서 깊이 공감했기 때문에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아주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드리게 한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예화) 그래서 작년에 제가 가장 목회에 보람 있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상가 교회를 도운 것이었습니다. 애틋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좀 도와야 되겠다. 그래서 한 3천만 원 들어오면 한 2천만 원 교회에서 보태서 한 5천만 원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이럴 때 좀 더 풍성하게 도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는데 헌금이 1억이 들어왔습니다. 노회에서 아주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돈으로 상가의 어려운 교회들을 돕고 있습니다. 더 도와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번에는 산불이 나가지고 그 집을 태우고 잃어버렸는데 나라에서 거의 다 보상해주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몇 백만 원, 돈 천만 원씩 밖에 안주었다고 합니다. 그 돈 가지고 어떻게 집을 지었겠습니까? 또 어떤 동네는 그렇게 돈을 받아서 대출을 받아가지고 집을 지었는데 또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건 너무 마음 아픈 일 입니다. 나라에서 좀 더 도와야 되는데. 어쨌든 다음 주부터 주간 딱 맞아떨어지네요. 우리 마음에 있는 데로 정성껏 헌금해서 우리 한 번 산불 당한 사람들 도와주도록 그렇게 하십시다.
도표로 돌아가 보면 가난한 교회였지만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했던 것입니다. 또 가난의 비참에 대해서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랬더니 넘치는 헌금이 나온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넘치는 헌금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의 원리가 얼마나 명료합니까? 그렇지요? 은혜는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역대하를 읽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고 복을 받으니까 넘치도록 하나님 앞에 헌금해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마음의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역시 사랑은 끊임없이 필요를 알고 섬기려고 하는 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 재물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종종 재물. 그러면 그것이 뭔가 세속적이다 그렇게 생각을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정신하고는 다릅니다. 심지어 신앙을 잘못 적용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그렇게 포장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을 덕으로 미덕으로 가르치지 않는 것처럼 똑같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돈을 벌고 잘 사는 것이 말하자면 그 사람의 신앙이 인정받은 것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도 안 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복을 못 받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중립적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인 방종주의와 비성경적인 금욕주의 둘 모두를 경계하면서 우리는 중심을 잡아서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무엇인가? 도표로 돌아가 보시면 성도들이 신앙을 따라서 삽니다. 이 사람이 마음에 은혜가 가득합니다. 그러면 탐욕이 있을까요? 없겠지요. 탐욕이 아니라 정당한 동기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야 될 필요는 너무나 많잖아요.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뿐만 아니라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업이 잘 되서 수입이 계속 있어야지만 고용을 유지하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고 그렇게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탐욕이 없습니다. 탐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바깥에서 어떤 기쁨과 영광을 누려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있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면 사랑하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앙을 따라서 모은 재물은 땀과 눈물의 결정체입니다. 자기가 일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열심히 이렇게 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으로 아름다운 헌금을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는 헌금의 의무를 설교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인격과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돈을 번 것이 자기의 탐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헌금만이 아니라 이렇게 있으면 모든 돈을 수입을 하나님을 위해서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일부를 교회에 직접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람과 교회에 모든 것들을 경영해 나아가고 하는데 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이러한 성도들의 많은 헌신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 있는 예배당을 보시잖아요. 처음에 시작할 때 제가 부었던 적금 천오백만 원짜리 깨뜨려서 사글세를 얻어서 지하실의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여기 이만큼 오기까지 우리는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물론 거기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사랑했기 때문에 이 교회를 사랑하고 이 교회를 위해 헌금했기 때문에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은 여러분이 짓지도 않은 예배당에서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혜택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헌신 때문에 다음에 오는 교인들이 그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예배당에 앉아서 한번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교회를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했던 사람들을 다 이렇게 돌아보면 눈물이 확 쏟아집니다. 진짜 무슨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무슨 보상이 있었겠습니까? 나를 구원해주시고 은혜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그 사랑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겼던 것입니다. 말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님의 교회가 이렇게 서온 것입니다.
그다음 보겠습니다. 헌금을 한다는 것은 결국은 자기가 물질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로 산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7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그랬습니다. 향유입니다. 당시에 이것은 재산을 축적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걸 3백 데나리온쯤 된다고 다른 복음서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1데나리온이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장정 남자가 일하는 품삯이었으니까 지금 얼마쯤 될까요? 아마 아무 기술이 없어도 15만 원은 줘야 되지 않을까요? 인건비가 보통 비싼 거 아니에요. 그렇게 따져서 3백 데나리온이면 4천 5백만 원. 20만원을 잡으면 6천만 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나가는 향유였습니다. 그것을 식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어버린 것입니다. 하나의 섬김입니다. 예전에는 그 향유를 다 모아서 뭔가 제 2의 인생을 꿈꾸었을지도 모릅니다. 창기였던 그 여자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죄의 용서를 받으면서 자신의 삶의 목표가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 도표에 보면 두 그림이 나오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사용을 그리스도를 섬기는데 온전히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물질을 아까워하는 것입니다. 틀림없는 얘기입니다. 결국 ‘헌금을 한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물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물 받으실 때 있잖아요. 때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선물을 받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 선물은 그 사람을 매우 크게 생각하는 일 없이는 할 수 없는 선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누군가에게 선물할 때에는 특별한 마음이 있을 경우엔 특별한 선물을 하지만 특별한 마음이 없으면 특별한 선물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몇 번인가요? 지하실에서 올라오면서 한 번 헌금하고 거기에서 평촌으로 오면서 한 번 헌금하고 그리고 교육관을 사면서 또 헌금을 하고 또 여기 교육관 두 개를 사면서 많이 하진 않았지만 헌물 하는 걸로 하고 그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특별한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돌아섰을 때 그 기쁨은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 교회가 내 교회구나. 그리고 내가 이 교회에 한 지체구나. 하는 마음이 깊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도 함께 깊어져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입니다. 헌금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헌금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것이다. 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최고의 것을 바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진정한 의미의 헌금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헌금의 한 원리를 발견하는 게 뭐냐 하면 성도가 바치는 헌금은 교회에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헌금이 하나님께로 바쳐진 것이고 하나님이 다시 교회에 당신의 창고를 열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게 없고 만약에 우리끼리 돈 모아서 우리가 쓰는 거다. 라고 하면 그러면 동호회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의 헌금은 동호회를 위해서 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갖지 말아야 될 생각이 목회자나 직원이나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이 성도의 헌금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월급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월급 받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일꾼은 성도들에게 월급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그 사람에게 돈을 준 게 아니라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천국의 곳간을 열어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보내주시고 그래서 우리는 받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활비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더욱 주님을 섬겨야 하고 성도들은 그 헌금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생각을 함으로써 그것을 쓰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바친 헌금이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교회는 잘 써야 합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는 사실은 그 헌금을 사람들이 나는 그 헌금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쳤으면 그다음엔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나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그 천국의 곳간으로부터 공급해주시는 것을 받은 교회의 청지기들이 일체의 신실함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효과적으로 그 물질을 쓰도록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기 바치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 평가를 받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지요? 결국은 바치는 사람도 하나님께 바치고 그걸 받은 사람도 하나님께 받아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 헌금을 두고 사람들이 파워게임을 벌리거나 아니면 누가 누구를 의존하는 것처럼 더군다나 교회가 그런 눈치를 보는 그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화) 그래서 교회를 하면서 어떻게 보면 감사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교회들 보면 부자들이 있잖아요. 엄청난 헌금을 합니다. 심지어 교회 전체의 헌금의 50%를 한 사람이 하는 교회도 제가 봤습니다. 워낙 부자니까. 그럴 경우에 만약에 그 사람이 교회를 떠나든지 변심을 하게 되면 교회는 어마어마하게 타격을 입겠지요. 다행히 저희 교회는 그런 식으로 눈치 봐야 될 정도로 그 거액의 헌금을 하시는 분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들이 교회를 운영해올 수 있었던.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의존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상황에 들어가면 많이 눈치를 보게 된다고 그러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교회의 운영비 전체의 몇 십 퍼센트를 책임지고 있다고 그럴 때에는 그 사람이 헌금을 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사업이 잘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교회의 헌금이 출렁거리겠지요. 그러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겠지요. 다행히 없었습니다. 그냥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해서 그런 큰일을 할 때에 그런 분들의 도움이 있는 교회에는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우리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한 줄로 알고 감사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않겠습니까?
헌금 생활의 3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3절과 5절을 쭉 보고 하면 첫째 원리가 “힘대로 혹은 힘에 지나도록” 그랬습니다. 첫 번째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힘대로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주일 헌금 액수를 미리 정하는 것입니다. 주중 헌금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십니다. 그런데 아직 열린교회 오신지 얼마 안 되고 또 잘 정립이 안 되신 분들은 안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 등록한 숫자하고 주정 헌금하는 숫자하고 일치해야하는데 아직 그렇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 공과를 하면서 아직 주정 헌금을 안 하고 계시다면 여러분들 이제 주정 헌금을 하시기 바랍니다. 금액이 어느 정도냐 하면 금액이 너무 적어서 부담을 주지 않는 금액보다는 많아야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보다는 적은 금액이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자기의 마음이 담길 수 있을 테니까. 신경 쓰지 않고 마련할 수 있는 금액보다는 많고 신경을 써도 준비할 수 없는 금액보다는 적어야 된다. 그래서 1년 동안 작년 한 해 동안에 주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매주 정성껏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 이것이 아름다운 헌금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릴 것.” 여기 보면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 보고 헌금해라. 통지를 보낸 게 아니라 마게도냐 교회들이 소식을 듣고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해 우리에게 간절히 구했다.” 뭘 구한 것입니까? 참여할 수 있도록. 자기들도 이 헌금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하나님만 의식하고 바치는 헌금이며 성도로서 헌금의 의무에 대해 인식하며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없는 헌금이나 헌금이 없는 마음 모두 최선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에 나를 맡기면서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이 주님의 선물이고 저 자신도 주님의 소유로 삼으시옵소서.’ 이렇게 자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 생활이 풍성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바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 합니다. 결국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의 고통은 바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탐욕은 나만 위해 살게 하고 사랑은 이웃을 위해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사랑을 생각하면서 헌금해야 하는 것입니다. 헌금이 헌금 보다 먼저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마게도냐 상황은 어땠습니까? 가난하고 환난과 시련이 많았습니다. 풍성한 연보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을 따라 살면서 얻는 재물에는 무엇이 농축되어 있습니까? 땀과 눈물, 그 사람의 노력이 녹아있기 때문에 그 물질을 헌금으로 드리는 것은 자신의 인생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다. 그랬습니다. 죄인인 여자가 향유를 부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서입니다. 삶의 가치가 변하니까 사랑의 대상이 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세 가지 원칙. 힘대로 혹은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먼저 드림으로. 이상입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 따뜻한 봄과 함께 여러분들의 신앙도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생명력이 충만한 은혜 생활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공과 공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