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적용과 교훈 1
녹취자: 백지영
1. 사변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은 각각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흔히 사변적 지식 그러면 쓸데없는 생각이라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가 않고, 사변적 지식은 자연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사물의 인과관계, 인과관계가 무엇입니까?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원인과 결과의 고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뉴턴 이후의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혹시 (주파수대역을) 아십니까? 이렇게 많이 소리가 발생하잖습니까? 그런데 이것들을 모두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주파수 대역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른쪽 대역은 너무 높은 것, 왼쪽 대역은 너무 낮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 듣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가청대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들을 수 있는 대역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보는 것도 마찬가지고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의 폭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폭 안에서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가청대역 밖에 있는 것은 못들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그것이 이성의 범위가 미치는 한도 안에서 이성이 생각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의 고리로 계속 이어져 있는 것이 이 사물들의 체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에 변혁이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입니다. 얘기하면 너무나 긴데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모든 사물을 보고, 시간을 재고, 거리를 재고하는 것들은 빛에 의해서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제가 보이는 것도 빛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사람들은 눈에서 뭐가 막 나간다고 봤습니다. 그것이 나가서 사물에게 부딪혀서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이해한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전혀 아닙니다.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비췸으로서 사람이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전달됨으로써 어떤 사물의 크기나 모양, 색깔, 부피, 이런 것들이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빛이 중력에 따라서 휜다는 것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시간은 시간대로 논의하고, 공간은 공간대로 논의했는데 이제는 시간과 공간이 떨어질 수 없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시공간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 떨어질 수 없고 시간은 공간에 의해서 상대적인 것이 된다고 하는 것이 상대성원리입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 이론이 옳다는 것을 사실 입증을 못 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입증했는데 후에 천문학적인 관측을 통해서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첫 번째 변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1927년도, 그 이전에 이미 있었지만 1927년도에 솔베이 학회에서 확장된 양자에 관한 이론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분자 이후, 그러니까 원자 이하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법칙과는 전혀 다른 법칙들이 적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 법칙들 중에서 아주 일부분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고 대부분은 안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여러분들이 이야기하는 오늘날의 양자TV 같은 것입니다. 그게 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상 열차나 스캐너 같은 것들도 양자역학을 이용한 것인데 원자 이하의 세계에서는 법칙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인과의 법칙에 대해 우리는 굉장히 융통성 있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변적인 지식은 자연적인 지식이며, 결국은 하나님이 자연세계를 총괄하시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어떤 규칙이라 이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물들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규정짓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변적인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천적인 지식은 무엇이냐? 실천하는 요령인가보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실천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실천적인 지식은 실제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데에,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데에 꼭 필요한 지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결국 영적지식이고 말씀을 통해서 자기화한 지식입니다.
설명을 들어봅시다. 먼저 사변적 지식입니다. speculative knowledge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지식이고 사물의 인과(因果)에 대한 지식입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지식입니다. 사물의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그 결과는 또 다른 사물의 원인인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계들이 이 ppt에는 그림이 하나만 그려져 있지만 사실적으로 이것들은 수많은 연관 속에 이루어져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서로 물고 물리듯이 이렇게 이어질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이성으로 생각하는 데 이것을 가리켜서 사변적인 지식이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실천적인 지식인데, 실천적인 지식은 영적지식입니다. 영적지식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몇 가지 점에서 영적이라고 부르는데 우선 첫째는 지식의 대상이 영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지식을 획득하는 수단이 영적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이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영적입니다. 우선 첫 번째, 대상이 영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컵을 안다’라고 하면 파악을 하면 될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아, 이것은 자기(瓷器)에다가 뼛가루를 집어넣어서 만든 것이다.’라고 알 수 있는데 그게 바로 본차이나(bone china)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자기를 써보니까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게 흙을 덜어내고 거기다 뼛가루를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차이나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본차이나(bone china)’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지역에서의 흙과 색깔 그리고 거기에 무엇을 섞었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것이 나오고, 백자, 청자, 흑자, 황자, 수많은 색깔에 따른 종류들이 나올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배우면 원인과 결과를 터득하게 되지 않습니까? 대상 자체가 공간 안에서 크기와 무게를 가지고 있는 이러한 대상들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지식입니다. 그리고 공간을 안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와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사회가 아니라 떨어져 있어도 아이티(IT)로 서로 소통을 하고 살아도 어느 정도 사회의 요건을 구성하지 않습니까? 완벽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 사회라고 하는 것도 분류상으로 하나의 추상명사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회의 현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공부합니다. 예를 들자면 경제학에서 ‘물가가 오르면 민심이 불안해진다’와 같은 법칙, 물가가 많이 오르고 살기가 힘들어지면 정치는 불안정해진다는 것과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게 원인과 결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찾아내는 모든 것들은 자연적인 지식, 사변적인 지식입니다.
그런데 도덕적 지식은 대상 자체가 영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하나님의 역사와 같은 것들은 그 대상이 영적인 것입니다. 신령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수단도 영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연적 지식은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며 많이 공부하고 그 다음에 많은 연결 관계를 찾아낸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독창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배우기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 또 하나의 기술입니다. 사변적인 지식은 수단이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가지고 이것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단이 영적이라는 것은 믿음과 직관 이런 것을 통해서 그 지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누구에게 설득을 해서 무신론을 포기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지식으로 설명을 해서, 또 성령의 역사 없이, 믿음 없이 그것이 그 사람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받아들이는 수단이 영적인 것입니다.
또 전달하는 것이 영적이라는 것은 그런 초월적인 것들에 속한 지식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의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와서 혼란을 느꼈던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전달하는 주체가 성령이라는 점에서 대상, 수단, 전달에 있어서 모두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적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천적인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냐? 잘 들어보십시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무의 크기가 얼마인지 자로 재 보았고 그래서 그것을 알고 나무의 성질이 무엇인지를 다 연구해서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그 사람보다는 그것을 몰라도 그 나무를 내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아는 자가 더 슬기롭게 사나이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야지만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안 한다고 예수를 잘 믿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항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것을 실천적인 지식이라고 부르는데 이게 그냥 단순히 무슨 기술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니라 영적 지식입니다. practical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practice입니다. 그것을 실천적인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개념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으로서 초월적인 사물을 아는 지식, 초월적인 사물은 하나님 그리고 개념도 그 속에 들어갑니다. 사랑, 은혜, 감사, 이런 것들을 아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지식은 영적이고 경험적인 결과를 자신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연적 지식의 경우는 그 대상이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잘 알고 있으면 모르는 사람보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잔 하나를 보면서도 그냥 ‘음, 시장에서 사온 잔이군.’이라고 하는 것과 그러질 않고 그것을 만져보고 심지어는 두드려보면서 ‘아, 이거 본차이나네. 뼈가 섞인 거네. 아, 이것은 영국산 토질이네. 영국산 규토네. 아, 이것은 남미 쪽에서 나는 재질이네. 그리고 이 금박은 처음에 언제 생겼는데 성분이 뭘까’라고 알아가면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들을 몰라도 인생 사는데 있어서 별로 큰 문제없습니다. 그냥 그 잔에 물을 따라주면 마시면 됩니다. 뭘 그렇게 따질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알면 재미있지 않습니까? 알아도 몰라도 그렇게 해로울 건 없습니다. ‘아, 이건 정말 진귀한 것인데.’ 그러면 모르는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있겠지만 아는 사람은 이게 왜 진귀한지를 설명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럴 정도이지 인생사는 데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할머님이 늘 할아버지를 원망하실 때 한 번씩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6.25때 산으로 도망을 갔는데 식구들이 배고프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버섯을 끓여먹자고 그냥 기분 내키는 아무 거나 막 따신 것입니다. 그것을 온 가족이 먹고 죽을 뻔했다고 합니다. 독버섯을 먹은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모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잘못하면 목숨이 오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변적인 지식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객관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지식은 자기에게 적용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획득해서 자기가 소화해낸 지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성령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령은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가르쳐주고, 그것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깨닫게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지를 깨달으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실천적 지식은 매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초대교회 때 한 선교사가 수염을 길게 기르고 긴 담뱃대를 빨고 있는 한 할아버지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전도를 했더니,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지 말고 이게 뭘 얘기하는 거요?’ 그래서 죽 설명을 했더니 이 선비가 무릎을 치면서 ‘인간 사는 도리가 여기 있네.’ 그리고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순간에 들어오는 지식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실천적인 지식이 풍부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주위에서도 보면 옛날에 예수 잘 믿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 -특히 할머니들이 많습니다- 권사님들은 지식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아는 것도 없는 듯하나, 또 때로는 성경 해석도 약간 이상한 것 같아 보이나 하나님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열심히 믿지 않습니까? 그분들에게는 사변적인 지식은 별로 없어도, 촌스럽지만 실천적인 지식이 많으니까 자신도 올바르게 살고, 자식들도 다 올바르게 키우고, 종국에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평안하게 죽는 것입니다.
2. 은혜의 세 가지 성경적 용례는 무엇입니까? 신자 안에 있는 은혜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은혜의 세 가지 용례는 구원의 길이라고 보는 것, 하나님의 객관적인 호의, 사랑의 감화 이 세 가지인데, 이 세 번째를 조나단 에드워즈는 곧 성령이라 이렇게 보았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의미를 그려놓았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길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줄을 그으면 말하자면 이쪽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저쪽은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설명하겠습니다.
첫째는 디도서 2장 11절에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라고 할 때는 이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길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 들이고와는 상관없이 예전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주셨다고 하는 것, 이것을 은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가치가 없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호의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속량은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착할 양(良)자 속할 속(贖)자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노예제도의 그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몇 번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노예 시장을 지나가다가 노예가 채찍질 당하는 것을 보면서 부자가 돈을 대신 지불하고 그들을 사서 그래서 자신은 그 노예를 원하지 않고 자유인으로 풀어줄 때에 그 행위를 속량(贖良)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이지요. 속량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속량시키기 위해서 지불한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제도의 그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심으로 죄의 노예 되었던 우리를 자유하게 풀어주시는데, 그런 하나님의 아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었느니라, 그게 하나님이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호의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안에 일어난 은혜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우리 바깥에서 일어나지만 이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의 세 번째 용례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압도적으로 이 세 번째가 아주 많고, 두 번째도 많고 첫 번째도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라고 이야기할 때 이 은혜가 이 세 가지 용례 중 어디에 해당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3. 에드워즈의 정동 이론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정동(情動)은 이렇게 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정’이 출렁거리듯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정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때에 정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그것은 사랑의 감화를 일으켜서 1번, 2번, 3번의 순서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서 돌멩이가 하나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이것을 호수라고 한다면 당연히 딱 떨어지는 순간에 이렇게 파도가 일어나겠지요. 그리고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파문이 일 것입니다. 몇 번 설명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돌멩이가 수면에 딱 떨어져서 부딪히는 것, 이것이 결국은 ‘인식’입니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럴 때에 이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출렁거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렁거리는데, 이것이 사랑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미움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아름다운 것을 본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추한 것을 본 것입니다. 추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미움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에드워즈가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정동들은 마음에 대한 영향과 작용들 안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신적이다.” 이 신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연적인 본성으로는 영적이고 은혜로운 정동들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결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육으로 말미암아서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일어나는 정동은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원리를 가지고 말하자면 사실은 모든 것에 있어서 대부분 여기에 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생전 안 먹던 어떤 음식을 먹게 되었다라고 할 때에는 누군가가 그 음식에 대해서 아주 친절하게 이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설명하고 그것이 여러분들의 입맛에 맞게 되면 정동이 일어나고, 전혀 가까이 하지 않았던 음식을 먹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거기에 아주 깊이 그 음식을 너무 좋아하는 그런 애호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문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인 지식은 신적인 것들의 거룩함,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속한 거룩함 그리고 도덕적 완전성에 대해 최고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느끼는 마음의 감각 안에 있다.” 에드워즈가 말을 어렵게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사고의 구조가 라틴어구조입니다. 그리고 철학자이기 때문에 너무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가 생각한 것이 전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를 읽는 것은 좀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저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내가 영어를 모르는 건지 아니면 이 사람이 말하는 내용을 모르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에드워즈의 영어는 비교적 고급영어이고 또 18세기에서는 아마 식자들의 영어였음에 틀림이 없지만 우리들의 화법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어쨌든지 간에 좀 어렵게 합니다. 그래서 에드워즈 얘기 듣는 것보다 제 얘기 듣는 게 훨씬 쉽습니다. 제 얘기는 이 정도로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것, 실천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거룩한 것, 즉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에 관해서 그분이 최고로 아름답고 그것이 최고로 달콤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영적인 지식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문장은, “또한 신앙에 속한 일에 대한 모든 인식과 지식은 그런 감각에 의존하며” 이게 무슨 감각이지요? 당연히 영적 감각입니다. “- 거기로부터 흘러나온다.” 그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지식은 일차적으로 영적 아름다움을 아는 마음의 감각 안에 있다.” 담임목사인 제가 입이 닳도록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령한 아름다움을 보고 그게 얼마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세상 사랑을 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타락하는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육신에 속한 것, 물질에 속한 것이 얼마나 예쁜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절대 가만히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는 안 되지만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거기에 눈을 뜨게 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이럴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반문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유명해 지는 것도 관심 없고, 좋은 것 보는 것도 관심 없고, 그냥 아무 것도 안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있습니다.” 게으르게 사는 것이 제일 아름답다고 그렇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가장 만족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중립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든지 진리를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문장은, “영적으로 조명된 자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그 거룩하심은 선하다는 사실에 대해 이성적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의 거룩하심을 사랑하는 감각도 갖는다.” 아주 쉽습니다. 하나님이 영적으로 조명된 사람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그 거룩하심은 선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것을 못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주 하나님이 잔인하다라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심을 진정으로 느낄 뿐만 아니라 자기도 그렇게 거룩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3번까지만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