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적용과 교훈 2
녹취자: 이경순
드디어 마지막과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공부가 조금 어렵다고 그러는 구역장들이 좀 있으신데 원래 책은 자기 조금 이해를 약간 못한 책을 읽어야 발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30%쯤 이해하지 못하면 아직은 책을 읽을 수준이 안 되는 것이고요 제 생각에는 5%정도 이해 못하면 딱 좋을 것 같아요 긴장감도 있고 그런데 한 10% 넘어가면 자존심이 상할 거 같습니다. 5%정도면 어떻게 좀 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3%정도 이해가 부족할까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마지막 대 결론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그렇게 사랑의 신학을 해서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과입니다.
4. 인간은 왜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게 됩니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오늘 비 내리는 길을 오면서 그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에 행복해지고, 불행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은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게 됩니까? 결국은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며, 그것도 실제로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아하는 자기 자신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실은 왜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게 될까에 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야기는 사실은 어거스틴의 정밀함에 못 미칩니다. 어거스틴은 오히려 조나단 에드워즈보다는 1400년 전에 살았는데도 훨씬 더 정밀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냥 이기심으로 퉁 쳤습니다. 물론 그의 정동 이론이나 감각 이론에서 미에 대한 인간의 착시현상 같은 것들을 설명하면서 인간이 왜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지를 특별히 그의 미셀러니에서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미셀러니는 작품이라기보다 메모 조각들을 모두 모은 것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조나단 에드워즈가 기본적으로는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식으로 자기가 집필한 작품 속에서는 이 문제를 아직 그렇게 정밀하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정리하면 이기심(利己心)이라는 것은 영어로 selfish 입니다. 자신이라는 뜻인데 어쨌든 여기 한자에서 보면 자기를 이롭게 하는 마음입니다. 결국은 이기심 이라고 하는 정체는 자기사랑입니다. 자기애입니다. 이 자기가 우리가 이미 배운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이 하나님이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이 질서를 따르는 사랑이 아니라 이것에 거슬리는 저항하는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거스틴이 이 문제를 크게 지성과 의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합니다. 결국은 어거스틴은 지성적으로는 자기사랑에 빠지는 이유가 ‘교만’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훨씬 근본적인 죄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판단에 굴복시킬 때에는 자기사랑이 최소한 발현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판단하는 것을 하나님의 판단보다 훨씬 더 앞세웁니다. 그럴 경우에는 하나님의 판단을 오류로 보고 자신의 판단을 정당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데서 결국은 자기사랑이 생긴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기사랑이 생긴다기 보다는 자기사랑으로 나아가도록 통로를 열어주는 일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의지에 관해서는 ‘자기 사랑’이라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기본적으로 사랑을 감정이라고 보지 않고 의지라고 봅니다. 사실은 지정의라고 하는 이 구분이 정확하게 말하면 지성과 의지 두 가지인데, 의지가 호(好)쪽으로 많이 가게 되면 사랑이 되는 것이고 불호(不好)쪽으로 가게 되면 오(惡)가 됩니다. 그래서 이 둘을 애오(愛惡)라고 합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혹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구토증이 나는 것을 오심(惡心)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두 가지로 아주 날카롭게 분석을 합니다. 에드워즈는 이것을 전부 다 이기심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기심은 결국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모든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는 세상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웬의 용어로 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든 세상을 사랑하든 둘 중에 하나라고 보고, 어거스틴의 용어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세상을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인데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보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나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모두 결국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성적 요인은 교만이고 의지적 요인은 자기사랑입니다. 자살이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이 이기심을 하나로 묶어 버립니다. The Mind라는 에드워즈의 글이 있는데 거기에서 “종종 자기사랑이라고 언급되는 그 사랑은 몹시도 부적절하게 불리는 사랑이다.” 무슨 뜻이냐면 에드워즈는 자기사랑이라는 이 두 말이 병립이 가능하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야기할 때는 성경이 제시하는 사랑이라는 고유한 맥락에서 보면 자기라는 말이 붙으면 고유한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말이 안 되는지 설명해 봅시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관계적입니다. 자기가 그 사랑의 대상일 경우에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회귀적 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들어낸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에게 나와서 모든 인류와 우주를 감싸고 당신자신으로 돌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이기적일수록 이타적인 사랑이고 우리의 사랑은 이기적일수록 이타적일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적절하게 불리는 사랑이라고 얘기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에 사랑할 만한 어떤 것을 볼 때 곧 그것이 어떤 기쁨을 줄 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즐거움에 이끌리고 고통스러움을 피하는 것을 자기사랑이라고 부른다’고 말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에드워즈가 굉장히 날카롭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랑은 어떤 예쁜 것을 보아야 사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게 착각이든 아니면 진실이든 예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애들이 내일 기말고사인데 오늘 밤새도록 리니지 게임을 합니다. 왜 그럽니까? 리니지가 중간고사의 우수한 성적보다 더 예쁘게 보이니까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설명에 의하면 자기사랑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에서 어떤 예쁜 것을 발견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게 아니랍니다.
증명을 해보겠습니다. 자기는 남과 비교해서 조금도 나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지독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할까요?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자기 학대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그렇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사랑은 자기 안에 있는 아름다움의 발견이나 이런 것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오늘 조나단 에드워즈 공과를 6주에 걸쳐서 마쳤는데 많은 구역장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해가 쑥쑥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진짜 나는 너무 똑똑해. 목사님이 인정하는 1프로에 들어갈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런 자기를 좋아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사실은 그 정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짜 저의 제자들은 조용히 삽니다. 그런데 내가 제자라고 생각 안한 사람들은 돌아다니면서 다 자기가 제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교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어떤 좋은 점을 발견하면 어거스틴은 당신이 누군가에게서 좋은 것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칭찬하지 말고 그것을 그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랍니다. 자신에게 그것을 발견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을 사람 보는 앞에서 기도하면 교만입니다. 자기 혼자 골방에서 그렇게 기도해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잘 못 알아듣는데 나에게 이것을 알아듣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나에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골방에서 조용히 기도해야합니다. 그게 교만의 죄를 면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냥 예쁜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그냥 즐거움에 이끌리면서 생각할 것 없이 예쁜 것이라고 그냥 툭툭 자기 마음이 질러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사랑의 정체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꽃을 보러갈 것인가, 아주 웅장한 산을 보러 여행을 할 것인가, 결정을 할 때에 사진과 정보를 다 보면서 마음이 어느 쪽으로 계속 끌릴 때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서 쾌락에 빠지는 것이 안 좋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들어보세요. 마약을 합니다. 아니면 지독한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래서 마약을 아니면 술을 선택하게 됩니다. 쾌락에 빠지는 것은 마치 술 중독과 같이 ‘지금 시간에는 술을 한잔 마시는 게 이 모든 분위기와 잘 어울리겠구나. 와인 한잔 하고 싶네.’라는 식의 공정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안 먹으면 금단 현상이 나오고, 술이 보이면 확 끌리고, 아니면 돈을 훔쳐서라도 술을 사와야지만 금단 현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옳고 그름, 적합함과 적합하지 않음, 적합한 시간과 장소와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인간은 주체성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쾌락을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쾌락을 즐기는 것을 알릴 때 율법주의적으로 “어디 그런 걸 하니?” 하면서 지시하지 말고, 잘 앉혀놓고 “네가 그런 감각적인 쾌락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라고 하면서 이를 쭉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당히 많은 수의 아이들이 그 의식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할지 모릅니다만 그렇게 쾌락을 즐기는 것이 옛날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최근에 제가 배운 것인데 캠프파이어할 때에 쿠킹호일에다가 감자, 고구마 싸서 집어넣는데 그러면 안 된답니다. 알루미늄이 열을 받으면서 식품에 스며들어가서 알루미늄 섭취 과다 증세가 나타난답니다. 중금속의 일부랍니다. 아예 먼지 묻은 것을 구워서 껍질을 까서 먹더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일부터 아마 쿠킹호일에 싸서 뭘 구울 때마다 저의 이 얘기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내일부터 절대 쿠킹호일을 이용하여 굽지 않겠다고 그럴 수는 없겠지만, 또 여전히 그것에 올려놓고 고기도 굽고 버섯도 굽고 할지 모르지만 찝찝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잘 설명해주면 딱 끝낸다는 보장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벌써 많이 중독이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찝찝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약간의 충격이 가해져도 그것을 그만둘 수 있는 여건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지성적으로 설득하는 것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쾌락에 빠지면 안 됩니다. 무엇이든지 끊을 때 금단현상이 나타날 정도의 것에 빠지는 것은 오락이든지 취미든지 쾌락이든지 미디어든지 절대 안 됩니다. 그것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5. 에드워즈를 통해 배우게 되는 다섯 가지 목양적인 교훈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21세기에도 사람들이 전 세계를 다녀보면 에드워즈 학회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런 현실과의 접촉점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실은 어거스틴도 열심히 공부하면 사실 어마어마한 접촉점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럽니다. 다섯 가지 교훈입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사랑의 신학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를 읽으면서 깊이 감동받은 것은 사실 저에게는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새롭지는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이 이미 다한 이야기였고 어거스틴을 이미 읽었기 때문에 그러했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기독교 신학 속에서 사랑을 그렇게 중심주제로 삼고 방대하게 펼친 신학자는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가히 당대에 천재라고 부를 정도로 뛰어난 학문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수를 안 하고 그냥 목회를 했다는 것 자체가 아주 신비합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지성의 크기를 자신의 설교 속에서 녹여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어느 설교를 읽어도 헛방 치는 설교는 없습니다. 어느 설교를 펼쳐도 아주 깊이가 있는 설교들을 펼쳐나갑니다. 설교를 모든 교인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들었을지는 저는 많은 의구심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깁니다. 그 아버지에게 배운 것입니다. 미국 갔을 때 한 학자가 이야기하는데 에드워즈 아버지 설교를 자기가 한번 봤는데 first, second, third 등 하면서 40번까지 나간답니다. 제 설교가 약간 지루하고 긴 것 같다고 생각될 때 그 할아버지를 생각을 하세요.
두 번째는 지식의 힘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확고하게 종교개혁자들이 붙잡았던 이론, 그리고 교부들이 붙잡았던 이론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지식의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일수도 있고 나무나 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인간의 논리 속에서만 실재할 수 있는 사랑이라든지 정의라든지 그런 개념일수는 있는데 어쨌든 지식의 대상들입니다. 이 대상에 대해서 이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이나 수단이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미 칼빈이나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성’과 ‘신앙’(혹은 믿음) 두 가지입니다. 전자는 사변적인 지식을 얻는데 사용된 것이고 -이것은 지난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_ 후자는 실천적인 지식을 얻는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말씀 드렸듯이 에드워즈가 실천적인 지식이라고 할 때는 항상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쓰는 이런 의미에서 이론이 아닌 실천입니다. 실천은 사실은 논리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이 물건을 잘 만든다고 할 때에 재료분석까지는 못해도 그것을 깎아낼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다. 기술자입니다. 그게 실천이라고 보는데 에드워즈의 개념은 그게 아니라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데 직접 써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이렇게 지금 밖이 매우 춥다, 그리고 잠시 후에 바람이 불 것이라는 사실을 몰라도 내가 좀 불편할 뿐이지 내 인생이 죄의 길로 가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변적인 지식이라고 봤고, 인생에 있어서 어떤 도덕적인 문제를 판단하는 것을 실천적인 지식이라고 본 것입니다. 자기 삶에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이라고 본 것입니다.
셋째는 아름다움의 신학입니다. 아름다움의 신학이 왜 중요할까요? 인간이 사랑하게 될 때 자기 사랑과 같이 특수한 예도 있지만 결국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은 자기 아름다움 안에서 설명이 됩니다. 인간이 결국은 감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작용이 거의 작동을 안 하고 기계적이 될 때 그때 인간은 굉장히 위험한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선한 것, 이런 것들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름다움이 어떻게 해서 사랑의 이유가 되고 또 인간이 그런 아름다운 것들을 올바르게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면 신미라면 이 신미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속사역과 성경과 자연의 모든 세계에 걸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녹아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발견하게 될 때 거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어 결국은 이 아름다움들을 어떻게 하나님과 연결시키느냐 하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굉장히 중요한 지식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넷째는 정동의 신학입니다. 호떡 같은 것을 하나 그려놓았는데 이게 아니라 물결이 칠 때 떨어지는 돌멩이를 그려 놓은 것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발견한 아름다움이 어떻게 마음 안에서 작용이 일어나서 사랑을 가져다주는가에 대해서 아주 놀라운 통찰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죄에 대한 탐구라든지 죄가 인간에게 들어갈 때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작용과 같은 것들은 청교도 존 오웬이나 리처드 십스나 존 프라벨이나 17세기의 청교도들의 작품에 못 미칩니다. 못 미치는데 그렇게 주목받는 것은 아마도 그가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쨌든 이 사람의 관심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것들이 인간의 마음에 작용을 해서 그것들이 사랑을 불러일으키는가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만큼은 청교도들에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탁월한 안목으로 설명을 합니다. 18세기에 당대에 일어났던 그런 경험주의적인 운동들과 학문적인 그 당시의 결과물들 때문에 사실은 아주 현대화된 설명을 그 당시에서는 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조화의 신학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시작할 때도 하나로부터 시작해서 셋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셋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로 옵니다. 이것은 동방교부들의 전통이라고 우리가 부릅니다. 그리스 쪽에 있던 교부들을 동방 교부들이라고, 아프리카 쪽에 있었던 교부들을 서방교부들로 부르고 그렇게 나눕니다. 전자는 그리스어로 글을 쓰고, 후자는 라틴어로 글을 썼습니다. 어거스틴 같은 경우에는 서방계열에 속한 학자입니다. 법학 중심적이고 철학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동방교부들은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신비주의에 대한 사고를 갖게 되었습니다. 신비주의에 대한 사고는 그 이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다양성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그런 말을 안 하지만 에드워즈에게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다움” 때문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다름다움”입니다. 너와 나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너에 대해서 다름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름다움이 아름다움의 원인이라고 본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것, 예를 들어서, ‘나는 너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인간이야. 그래서 나는 너와 달라.’이런 식의 이야기 말고 ‘너는 공부를 잘하지만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라든지 ‘너는 얼굴이 예쁘게 생겼지만 나는 머리가 너보다 좋다’라든지, 아니면 ‘넌 운동을 잘하지만 난 글쓰기를 잘한다’와 같은 다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을 창조해서 다름다움이 서로 연결된 가운데 그 세상이 다름다움이 없는 세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셨다고 보는 겁니다. 오늘날은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굉장히 다른 것들과 함께 융합하며 살아야하는 그런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화의 신학이 오늘날 아주 뛰어난 적응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직 심각하지 않지만 지금 시작되고 있습니다. 다인종 사회에서 아시아의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라고 하는 그 다름이 열등한 이유가 될 수가 있는가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노예시대에 살았던 에드워즈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우리에게 새롭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역사적 증거를 보면 에드워즈가 노예를 5명 혹은 6명 거느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도 전해 내려옵니다. 그들을 그렇게 친절하게 후대해 주었답니다. 에드워즈는 개인적으로 노예제도를 지지했답니다. 그래서 어느 흑인이 글을 썼는데 “내가 좋아하는 에드워즈는 노예제도를 찬성했다. 그런데 그 당시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사람에게로부터 내가 받는 학문적인 유익보다는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받는 학문적인 유익이 훨씬 크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