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제3장 죄와 은혜의 계획 (2)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녹취자: 이새봄
안녕하셨습니까? 성도여러분. 날씨가 매우 쌀쌀해졌습니다. 벚꽃 날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눈이 올 것 같은 그렇게 추운 날씨가 되었습니다. 정말 봄부터 가을까지 너무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변함없이 저희들이 이 성경공부를 통해서 주님을 붙들고 산다면 모든 시련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죄와 은혜의 지배 제 3장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한 번 보겠습니다. 죄와 은혜 모두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우리가 죄의 계획에 대해서 공부를 했는데, 죄의 계획의 큰 그림은 영혼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림에 보면, 지성, 정서, 의지가 있습니다. 영혼의 기관 혹은 영혼의 기능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주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을 때에는 지성과 정서, 의지 사이에 아주 가지런한 질서가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지성은 참되고 거짓된 것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의 합당하도록 정서는 느낍니다. 그리고 열정 혹은 욕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서 의지는 선택하고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성이 제일 큰 어른입니다. 맏형입니다.
그래서 질서가 쫙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제 죄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 여기 보면 마음이 검게 칠해져있습니다. 이렇게 칠해져있고 지금 이렇게 검게 되어 있잖습니까? 죄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럼 이런 것들이 순서가 엉망진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정서가 훨씬 더 위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지성이 밑바닥으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정서가 들끓으면 하고 싶어 하고, 하고 싶어 하는데 지성이 양심의 가책을 주니까 지성보고 합리화시키도록 요구를 하는 이런 혼돈과 무질서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된 상태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혼란스럽게 되고나면 유리한 것은 누구에게 유리하겠습니까? 진리와 죄 중에서 진리에게는 이런 사람의 마음이 매우 불리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제대로 알아보지를 못하니까. 그런데 죄에게는 매우 유리합니다. 숨어있을 곳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자기를 잘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이 지배력을, 죄의 지배력을 계속 확장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과 뜻, 성품, 삶 전체에 죄가 지배력을 갖게 되고 이러한 죄의 모든 영향력을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을 통해서 구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 사랑의 질서는 간데도 없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서 움직이고 행하게 되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그러면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 발단에 대해서 이제 성경이 야고보서 1장 14절에서 15절에서 아주 이것을 기가 막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다 같이 읽어봅시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렇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첫째 미혹됨이니, 이게 1번입니다. 1번 미혹. 그 다음에 욕심이 잉태한즉 이렇게 나오잖습니까? 두 번째가 욕심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가 장성입니다. 뭐가? 죄가 장성하게 되고. 그 다음에 이제 욕심인데 이것은 결국 정서잖습니까? 정서에 욕심이 잉태가 되는 것입니다.
미혹되는 주체는 뭘까요? 지성이 미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생각이 미혹이 되고 여기에서 욕망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은 죄의 성향이 점점 강한 성향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런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죄는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결국은 여기 모두를 죄로 물들이는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살아서 이 땅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다른 그런 죄 된 질서들을 만들어내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죄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자 그 다음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지금 죄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이것은 표현이 된 게 뭐냐 하면 자 아주 잘 표현했는데, 이렇게 죄잖습니까?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도 사랑이 남아있고 그렇죠? 여기에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사람에게도 역시 죄가 남아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죄의 지배, 그렇게 해서 죄의 성향이 점점 강해져 가면 그래서 이 사람이 결국은 지성적으로는 결국은 이제 이게 영적입니다. 당연히 영혼이 어두워지게 되면 지성이 제대로 판단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적 어둠이라고 얘기하게 됩니다. 영적 어둠에 이 사람을 가두어 놓습니다. 그럼 결국은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으니까 욕심에 이끌리는 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러한 죄를 계속해서 짓다가보면 그게 습성이 되고 이것이 인격화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이것이 성향이 되어서 안팎으로 인간이 이 죄에 순종하고 종노릇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삶은 구원계획을 따라서 사는 것 같습니다. 교회 나오고 그 다음에 주일을 지키고 또 성경이 금하고 있는 매우 커다란 죄들에 대해서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고 이미 자신이 그것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댐의 물이 댐이 약한데 물이 찹니다. 여러분 물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아시죠? 어마어마한 힘으로 물이 수압을 한쪽아래로만이 아니라 사방으로 다 압력을 가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뚝이 연약한데 물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이 밀려옵니다. 그러면 뚝을 파고들어가면서 점점 침식해서 약해집니다. 그러다가 그 뚝이 결국은 허물어지는 것처럼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서서히 잠식되면서 죄의 힘이 강화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양심의 뚝, 그 다음에 자신의 개인적인 도덕적인 신념의 뚝, 이런 것들이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물이 그 뚝을 파괴하고 확 쏟아서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 그런 것 보잖습니까?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저렇게 끔찍한 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그러니까 어떻게 말하면 죄에 굶주렸다고 할까요? 오랜 동안 말하자면 경건한 사람을 흉내 내기 위해서 죄의 욕망을 가두어두다가 그게 매순간 은혜를 받으면서 통제를 되어야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청산하지 않고 놔두니까 그게 쭉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둑이 터지듯이 확 터지면서 죄를 짓게 될 때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일단 한 번 경건의 뚝이 무너지고 나면 그 다음에 그 죄들 쏟아내는 것은 신자, 불신자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 이러한 상태까지 가지 않도록 신자가 늘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의, 일생을 주님께 바치는 일도 너무 중요하지만 그게 성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십자가를 지는 이런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제가 기도하라고 강조 드리는 바가 그것이고 또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살 수 있다고 하는 것도 다 그것입니다. 오늘 하루 기도안하고 하루 말씀의 은혜 안 받는다고 우리가 죽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것들이 쌓여가면서 어느 순간에 죄를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이 약화되면서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설교시간에도 말씀드렸잖습니까? 어느 교수님이 세미나를 하다가 수염을 제대로 안 해가지고 남자는 코털이 이렇게 자라거든요. 한 세 개 정도를 보기 싫으니까 세미나 시간에 확 뽑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불과 3일 안에 죽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코털 서너 개 뽑는다고, 그것 안 좋은 것입니다. 남자 여러분들. 코털 뽑는 것 매우 안 좋습니다. 가위로 뜯든지 아니면 코털 정리하는 기계로 깎으셔야지 잡아 뽑는 것은 매우 안 좋습니다. 그분은 왜 그랬을까요? 자기는 코털을 뽑았는데 뽑으니까 핏줄하고 다 드러나잖습니까? 쉽게 얘기하면 피부에 점막이 그대로 드러나잖습니까? 그게 감염이 된 것입니다. 면역력이 완전 제로인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균이 침투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느 신문기사인가 어디선가 읽었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직장인이 바닷가에 놀러갔답니다. 잘 놀고 저녁때 왔는데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다음날 죽었습니다. 패혈증, 급성패혈증. 바닷가를 거닐면서 조개껍질에 상처가 난 것입니다. 상처 속으로 세균이 침투한 것입니다. 보통 건강한 사람은 그것을 이길 수 있거든요. 저항력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는 아주 작은 공격도 못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경건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그래서 이제 이런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사람이 은혜의 지배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러면서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은혜의 감화가 있게 되고 그 다음에 죄를 이기게 되는 생활을 하게 되면서 그러면서 이제 이렇게 은혜가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증가하고 죄가 감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죄의 지배 아래에 있던 사람이 은혜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진리의 빛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총체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삶에서 있었어도 온전히 구원계획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인간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겠습니다. 영혼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런 명언을 남깁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보다 위대하고 정의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껏 인류의 구속을 위해 일어났던 사건들 가운데 더 위대한 사건은 하나밖에 없으니 곧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세계의 창조는 위대했으나 그리스도의 성육신보다 위대한 것은 아니었다.” 왜? 구속하지 않았더라면 목적도 잃어버린 채 갈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신 것은 위대하셨으나 창조주 자신이 피조물이 되신 것은 더욱 위대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제 네 가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창조가 있고 창조된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서 타락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구속하십니다. 그 다음에 이 세상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이 크게 네 가지의 전개로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고 하는 네 가지의 단계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타락한 세계를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겠습니다.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게 『A History of the Works of Redemption』이라고 ‘구속사’에 나오는 제 구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전 세대에 걸쳐 성취된 수많은 위대한 하나님의 일들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이 되신 것은 그 어떤 사건보다 위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나셨을 때에 그분은 이제껏 이 세상에 있었던 어떤 인간보다 위대하시며,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들보다 위대하신 분이셨던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역사가 창조가 있고 그 다음에 인간이 타락하잖습니까? 이렇게 계속된 인간의 수많은 역사가 여기 예수 그리스도께로 달려오고 그 다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펼쳐 나가서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그 다음에 구속과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모든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 문제 3번입니다. 죄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다가와 자기의 계획을 이루어갑니다. 이 일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은 무엇이며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정답은 유혹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할 때 시련이라는 것은 영어로 test라고 하고 유혹은 temptation이라 합니다. 이렇게 그래서 이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이것은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두 가지가 우리 흔히 설교 속에서 들었을 때에는 처음부터 기원자체가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시련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해서 마련하신 것이고 이것은 마귀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설명은 옳은 설명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 시련이다 유혹이다 하는 것은 사람이 결과적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 사람이 여기 이렇게 있으면 여기에 시련과 유혹이 따로 오는 게 아니라 이것이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이 사람 마음속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이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사건을 믿음으로 해석할 것 아닙니까? 은혜로 해석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결국 이것은 마지막으로 이 사람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사람이 이러지를 못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죄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이 이렇게 되면 결국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믿음과 은혜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시련이 될 수 있는 것도 유혹으로 바꾸어 버리고 믿음이 있으면 유혹이 될 수 있는 것도 오히려 시련으로 바꿔서 결국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 드리잖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도 좋은 일이 되고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좋은 일도 결국은 나쁜 일이 된다.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셨는데 그 복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행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복을 쓰는 사람이 불행을 자초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겠죠? 네.
그러면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죄의 경향성 혹은 죄의 성향을 자극해서 범죄의 욕구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맨 선두에 서있는 게 호기심입니다.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육욕의 지배를 받게 되면 죄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은혜의 지배를 받게 되면 죄를 짓게 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알고 싶지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고 싶은 것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삼위일체를 다시 읽다가 나왔는데 거기에 보니까 그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 어려운 삼위일체를 탐구하는 이유는 그 하나님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얻기 위함이다.” 우리가 일단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자 하는 열망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할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왜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시는지 그게 궁금할 것 아닙니까? 그런 궁금한 마음이 우리를 탐구하게 하고 탐구해서 무엇을 발견할수록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삼위일체를 공부하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그 반대의 일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들고 일어나게. 그렇게 해서 결국은 죄를 범할 강력한 욕망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 유혹입니다. 그래서 누가 유혹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유혹이 자기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하면 사실 자기 속에 그 유혹받은 대로 죄를 짓고자 하는 성향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신자들은 유혹을 받을 때에 자신 안에 있는 줄 몰랐던 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각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어느 시기에 집중적인 유혹이 찾아올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매우 특별히 기도할 때임을 명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 이해되시죠?
그 다음 문제 4번입니다. 죄가 신자의 영혼에 대하여 지배력을 갖게 되면 신자의 삶은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혼에 대해서 지배력을 갖게 되면 그러면 영혼의 기능이 지성, 정서, 의지인데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결정하고 행하고 알고 하는 모든 인간의 정신작용이 이 세 가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의 기능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죄는 그 세 가지 기능에 모두 영향을 주어서 더군다나 지배력을 갖게 되면 더 강력한 영향을 주어서 신자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삶 전체에 대하여 죄가 지배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무엇을 보든지 죄에 의해서 해석을 해서 죄를 지을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던 신자들을 배교에 가까운 삶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자만하지도 말고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너무 절망하지도 않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의 긴장을 느끼면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능히 이 죄를 믿음과 성령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믿어야 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직 완전히 거룩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잘 믿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죄에 떨어져서 쓸모없는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경계를 하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신앙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들어온 글 좀 볼까요? 채팅창에 들어왔는데, “간만에 집에서 대기타고 있습니다.” 대기 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모든 분 덕분에 집에서 편안하게, 고생하시는 분들 덕분에 편하게 구역공과합니다.” 요새 우리 홍보실이 참 고생을 많이 합니다. “목사님 셔츠는 벚꽃입니다.” 예, 셔츠만 벚꽃입니다. 낙엽이 거의 다 떨어졌더라구요. “죄가 감소하려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네, 정확한 표현입니다. 죄, 저항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작은 상처가 치명적일 수 있는 것처럼 은혜의 저항력이 사라졌을 때에는 작은 죄가 매우 커다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인가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공과공부 좀 일찍 마쳤죠? 다음 시간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