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잠근 동산으로 오라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 4:12)
녹취자: 이새봄
자 새로운 책,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 구역장 공부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1장입니다.
1. 솔로몬이 여인과의 사랑의 경험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체험을 대비해서 신앙의 진리를 풀어나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성간의 사랑과 하나님과의 사랑 사이에 닮은 게 참 많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라 우리는 생각합니다. 상세히 설명을 보겠습니다. 아가서는 원래 제목이 ‘song of solomon’, 즉 ‘솔로몬의 노래’로 되어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야고보서, 구약성경에서는 아가서가 ‘이게 과연 하나님의 성경 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의심받았던 대표적인 책이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거기에 나오는 많은 성적인 묘사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영적으로 해석할 때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고 이제 우리들은 이해해야 합니다.
서술의 배경은 정치적으로는 아마도 솔로몬 집권 초기였을 것이고, 깊이 타락하기 전 아주 순수하던 그 시기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영적관계가 아주 뜨거웠던 시기였을 것이라 보고 경험적인 배경으로는 여인과의 사랑의 경험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체험을 녹여내면서 이 아가서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소위 술람미 여인이라고 하는 여자와의 이야기가 나오고서 많은 주석가들이 ‘아마 이 술람미 여인은 흑인이었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이 흑인의 정체가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을 이야기합니다.
솔로몬과 여인과의 그것이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않았든 그녀의 피부색깔이 어떻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솔로몬이 아주 놀라운 사랑의 경험을 그 여인과 함께 경험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단순하게 ‘솔로몬과 여인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서로 어떤 사랑을 나누어야 할까’ 하는 것을 우리에게 예표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하는 해석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준적인 해석입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보면 굉장히 낯 뜨겁지만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사랑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볼 때에는 그 사랑이 얼마나 체험적이고 열렬했는가 하는 것을 보게 해줍니다.
2.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의 공통점을 무엇이며, 이것이 주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 동산은 왕만 산책할 수 있도록 허락된,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왕의 비원과 같은 것입니다. secret garden, 즉 왕의 휴식과 왕에게만 허락된, 정원을 누리는 은밀한 즐거움을 함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나오는 ‘잠근’, ‘덮은’, ‘봉한’ 이 표현들은 모두 공통된 것을 의미합니다. ‘잠근’ 것은 사람이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고 ‘덮은’ 것은 눈에 안 띄게 하거나 혹은 불순물이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고 ‘봉한’ 샘은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그 샘에 접근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공통점은 결국은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성격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순결한 사랑의 조건은 배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설교시간에도 한 적이 있습니다만, 너무나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모두 주는 희생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나 말고 한 사람 더 있을 경우에는 갑자기 그 사람이 더러운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집사람이 <새롭게 하소서>라는 CBS 방송을 듣고 하나의 에피소드를 얘기해주는데 얼마나 웃음이 나던지, 지금은 아주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을 열심히 잘 섬기고 크게 쓰임 받는 어느 목사님 부부가 있었답니다. 이 근처에서 섬기시나본데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가 그렇게 싸웠답니다. 너무 싸워서 결국 이혼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장로님들이 하루는 그러더랍니다. “사모님, 목사님하고 싸우지만 마시고 교회를 몇 주 다른 교회로 가보시는 것은 어떠세요?” 그래서 이 분이 열린교회로 왔답니다. 2시 예배, 청년들이 드리는 예배였는데 설교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이혼을 안 하기로 하고 다시 돌아가서 목사님하고 사이좋게 지내면서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처럼 사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재밌습니다.
결국은 이 모든 묘사의 핵심은 배타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드리는데, 남자로 살 때에는 이 세상에 수많은 여자들이 있지만 누구 한 사람을 사랑하고 나면 그 여자 한 사람하고 그냥 사람만 있는 것입니다. 성의 평등을 위해서 반대도 이야기합니다. 한쪽만 이야기하면 성차별입니다. 어떤 남자를 좋아하기 전까지는 세상의 수많은 남자들이 동서양에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한 사람의 남자와 나머지는 다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성격입니다. 어느 언론기관에서 조사를 했는데 ‘연애하는 사람이 가장 잘 쓰는 말’이 뭐냐 하면 1위가 ‘우리끼리’, ‘우리만’ 이게 1위랍니다.
진정한 순결이란, ‘잠근 동산’, 왕 이외에 접근이 안 되는 것입니다. ‘덮은 우물’, 눈에 띄지 않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봉한 샘’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것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미래의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열쇠를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반대로도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잠근 동산’ 같은데 유일한 한 분에게 오셔서 문을 열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덮개를 여시도록 허락을 하고 봉한 샘을 개봉하실 수 있도록 그렇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는 배타적입니다.
배타적이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이냐면, ‘(찬양)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요즘은 거의 안 부르는 찬송가지만 한 30년 동안 한국교회에 널리 불리는 찬송, 복음성가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슨 얘기냐 하면 ‘예수 외에는 모두 관심이 없다’ 이런 뜻이 아니라, ‘최종적인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형제들도 사랑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최종적 사랑에 대해서는, 그 사랑만큼은 다른 사랑에 대해서 배타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독점적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문을 열어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 혼자 우리를 독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점령된 상태, 이것이 결국 순결입니다. 그래서 순결은 사랑해야 마땅한 대상을 향해 가득 찬 사랑의 상태가 순결입니다.
3. 신앙의 세계에서 순결이란 어떤 상태를 가리키며, 순결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음이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지배당하기를 즐거워하는 것,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접근을 거절하는 배타적인 사랑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지조가 없고 그 사랑이 가변적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회개할 것이 없잖습니까? 회개는 그릇된 사랑에 대한 뉘우침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기 때문에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순결하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지배당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점유되는 것, 이것을 즐거워하는 상태가 순결입니다. 왜 그렇게 순결을 높이 생각하느냐 하면 그렇게 순결한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잖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이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8복 중에 가장 최고의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 나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 ‘청결한 자’라고 하는 그리스어 원어가 ‘마까리호이 호이 카탈로이(Μακάριοι οἱ καθαροὶ)’ 라고 나옵니다. ‘마까리호이(Μακάριοι)’는 ‘복이 있는’ 뜻을 갖고 있는 ‘마까리우스’의 복수이고, ‘호이 카탈로이’는 ‘청결한 자’인 ‘카탈로스(καθαλοσ)’의 복수입니다. 그래서 ‘청결한’이라는 형용사도 되고 명사도 되는데 ‘청결한 자’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단어가 옵니다. 그래서 원래 ‘카타르’라는 말의 희랍어는 ‘타헬’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타헬’이라는 단어는 물이나 깨끗케 할 수 있는 무엇으로 씻어낸 것, 특히 물이나 피 같은 것으로 씻어낸 상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불결하던 것들이 받아들여지는 상태가 된 것, 그것을 ‘타헤르’라고 부르고 ‘카탈로스’라는 단어가 거기서 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최상의 복이라고 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행복한 것인데 그 통치의 정점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아주 훌륭한 임금이 통치하는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영광이지만 그 왕이 사시는 도시에 들어가는 것은 더 큰 영광이고 그 왕궁에 들어가는 것은 더 큰 영광이고 그 분을 직접 알현하고 뵈옵는 것은 더 큰 영광이잖습니까?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것이오”라고 하는 이것이 팔복 중에서 최고 정상에 있는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청결한 자에게 당신을 보여주시기 때문인데, 이것은 결국 청결한 마음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식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그 향유의 옥합을 깨뜨려 붓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 옥합에 관하여 두 기사가 나오는데 신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서로 다른 기사라고 말을 합니다. 어쨌든 한 기사에 보면 그 옥합의 가치를 300데나리온 정도로 보는데, 그 금액은 우리로 말하자면 휴일을 제외한 노동자의 1년 치 임금입니다. 지금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의 임금을 10만원으로 잡는다면 약 3천만 원이 넘는 액수의 돈이고 많이 잡는다면 4천만 원도 되는 그런 액수의 향유를 그리스도께 부은 것입니다.
그 여자에게 예전에는 그 향유가 사실은 재산을 축적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가 금 모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랬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죄 용서를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형태가 향유를 붓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향유 자체의 값어치보다는, 이 향유가 예전에 이 여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안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향유가 최고의 가치였던 이유가 뭡니까?
예를 들어 통장에 만약 10억이 들어 있다면 통장 그 자체가 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출했을 때 그 돈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많은 어떤 효과들, 결과들 때문에 우리가 그 통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잖습니까? 마찬가지로 이 여자가 향유를 모았지만 사실은 향유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향유를 팔아서 누릴 수 있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을 사랑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인하여 만족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돌이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 그는 매우 불결했던 여인이었다 할지라도 순결한 여자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관념들이 우리의 육체적인 순결의 개념과는 훨씬 다른 차원 높은 개념의 순결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세상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커다란 이유는 좋아하는 것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 두개는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끊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하나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잃어버리고 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소비하고, 향락, 이 세상에 있는 명성, 세상에 있는 것들 등 그것을 만족의 기반으로 삼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들을 인간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사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모두 다 잃어버려도 무섭지 않을 그 무엇을 실제적으로 자기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모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최근에 깨달은 사실인데 의사에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좀 겁이 났습니다. 인간이 통증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대개 신경 다발이 모이는 곳이 등 쪽이기 때문에 거기서 통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약간의 통증부터 시작해서 도저히 죽을 것 같은 통증을 1에서부터 10으로 놓고 본다면, 9에서 10 사이를 오가는 통증이 하루에 14시간 이상 계속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의사들을 ‘지옥불’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러면 그것은 진통제로 주입을 해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기구를 보여주는데 라이터만합니다. 지포라이터만한 것을 몸에다 집어넣고 그 관을 주사바늘같이 생긴 것을 연결해서 통증을 일으키는 부위 근처에다 꽂아놓는 것입니다. 통증이 오면 여기서 전기적인 자극이 가면서 이 자극 때문에 통증이 오는 것을 못 느끼도록 신경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영원하지 않잖습니까? 집어넣었다 뺐다가 복부를 가르고 어딘가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그런 통증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한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인간이 얼마나 갈대같이 연약한 존재이고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얼마든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겪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아주 사소한 것, 내가 집착하고 좋아하는 것을 단순히 잃어버리고, 누구와 헤어지고 하는 것, 그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그런 죽음을 오가는 격렬한 고통에 이르게 되는 것까지 수많은 가능성들에 에워싸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지러질 정도로 감동을 받게 만들고 까무러칠 정도로 행복하게 할 잠재적인 요소보다는 우리를 그렇게 고통스럽고 아프게 할 수많은 요소들에 의해서 에워싸여 살아가는 것이 그게 우리의 실존에 대한 정직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제가 드렸잖습니까?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내게 왜 이런 일이, 내게 왜 이런 일이?’란 질문을 몇 번이고 물을 수는 있지만, 이것을 일어날 때마다 계속 반복해서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삶의 태도입니다. 아무것도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무에 돋아난 작은 이파리처럼 그렇게 힘이 없는 존재인가, 그리고 과연 나는 그 9와 10 사이를 오가는 통증이 14시간 이상 계속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 때에도 과연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 <교회오빠>를 보면 그 주인공이 진통제를 놓지 말아달라고 하는데 그 고통이 좋아서 진통제를 놓지 말아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의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으니까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과연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삶의 극단적인 일들이 일어날 때 그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나는 모든 일에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의 설명을 들으면서 삶에 대한 생각이 너무 비관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비관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오전에도 설교했습니다만, 행복은 누구에게 사랑을 받음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는 한 과정이고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행복하고 거기에서 멈춘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이 아닙니다. 진짜 자유한 사람은 누가 나를 사랑해준다고 하면 더 불쌍한 사람을 사랑해주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사랑하며 사는 일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에게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에 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무원이었던 어떤 젊은이가 있었는데 남편이 체육대회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남편을 너무너무 사랑했기에 그와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호텔 17층에서 투신해서 여자는 죽음으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소설로 그리면 아름다운 사랑일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야 하잖습니까? 이러한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제 홀로 남을 지도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세상에 대한 인연을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그러나 세상과 종속관계에 있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 완전한 은혜,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완전한 사랑, 은혜를 소유하고 두려움을 내어 쫓고 쾌락에 빠지려는 마음을 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사랑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신 뜻을 성취하고 계획들을 드러내며 살고 싶어 하고 부패한 죄를 이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5. 한 번 순결을 잃었던 자들을 대하는 세상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법은 어떻게 다릅니까?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설명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서서 우리 주님께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우리는 세상에서 낙인찍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이 자신의 설교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겠느냐” 이런 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항상 순결하게 사는 게 아니라 이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잃어버려도 다시 하나님은 회개할 수 있는 길을 주십니다. 회개해서 다시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래서 불결한 우리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새롭게 하셔서 다시 순결한 자로 여겨주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방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글을 쓸 때 저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지금도 나는 신학적으로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세상을 사랑하던 사랑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갔을 때 그것은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세상)을 버리고 간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변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고, 세상에서는 이미 배신한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지막에 고멜과 호세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멜은 끊임없이 타락하고 남편에게 함부로 하는 여자였습니다. 이 고멜은 호세아를 추호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아픔을 동반한 사랑을 느낍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를 새롭게 하고 새로 용납하면서 살았던 것은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대해주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이였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고쳐서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과 같이 다시 순결한 사람으로 만들어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고 불러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주님을 멀리 떠나고 그 사랑을 잃어버렸어도 우리에게는 다시 돌아갈 기회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이것으로 구역장 공부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