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따라서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6-28)
녹취자: 안두현
시작한게 어제 같은데 벌써 그제입니다. 여러분 삶으려면 푹 삶아야 합니다. 그래서 집어 놓고 뜨거운 물을 한 솥 집어넣고 뼈다귀를 집어 넣고 푹 삶아야지만 그것이 제대로 곰탕이 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제 세째날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이시간에는 제가 한번 따라해 보십시다. 눈물로 따라간 예수. 이것이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23장에 그림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죄를 지은 사람을 죽도록 형벌을 내리는 말하자면 사형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선 이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시기에 앞서서 예수님이 이렇게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재판이 행해져야 했습니다. 그 재판에 대한 이야기가 23장 앞에 죽 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법을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와 같은 초신자들도 예수님의 재판을 보면 이 재판은 대단히 부당한 재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첫째는 이 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죄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얼만큼 형벌을 줄 것인지를 결정을 하는 것이 재판인데 끌려온 이 죄수는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강행되었습니다. 또, 혹시 인간이 실수를 해서 죄가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재판에 회부하는 경우가 있다손 치더라도 사실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심문해서 그래서 죄가 없으면 방면을 해주는 것이 재판의 목적인데 재판장이었던 빌라도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끔 내어준 재판장이 피고의 무죄를 확신했는데도 사형을 언도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이 법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이 재판은 전혀 잘못된 재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없는데도 사형을 받으신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재판의 결과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하는 대신 진짜 사형시켜야 할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바라바라고 하는 강도를 살려주었음이 이 재판이야말로 공의가 죽은 재판이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빌라도가 세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느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되 저희가 큰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고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그러니까 빌라도의 법정에는 그저 몇십명의 방청객과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을 고소하는 유대인들이 모여서 재판을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빌라도 앞뜰뿐만 아니라 빌라도 앞뜰에 있는 동산까지도 다 뒤덮었다고 합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아니 왠 예루살렘에 이렇게 사람이 많았을까요? 많을수 밖에 없지요. 이때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은 어디에 흩어져 살든지 간에 이 유월절에는 모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보여야 하는 절기였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이때 대개 80만에서 100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복잡거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한때 요술을 행하고 죽은자를 살리고 병든자를 일으킨다고 하던 그 유명한 예수가 이제 이단으로 찍혀서 사형 언도를 받는 이 시점에 어찌 관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빌라도의 법정을 매웠고 빌라도의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먼 동산을 완전히 뒤덮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판결이 어떻게 나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판장인 빌라도가 보니까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들이 이말저말 하는 것들이 도데체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인 빌라도가 하는 말이 하는 말이 무슨 나쁜 일을 이사람이 했느냐. 나는 그를 죽일 죄를 그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 말하면서 그를 놓아주겠다고 말을 했을때 이사람들은 무력으로 시위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못박으소서. 그러고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래서 결국은 법적인 도리가 이긴 재판이 되는 것이 공의로운 재판인데 법이 이긴 재판이 아니라 소리가 이긴 재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목소리를 크게 지르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하는 예수를 당신이 놓아준다면 당신은 충성스러운 가이사의 종일수 없습니다 하면서 시위를 벌이자 그만 이 빌라도는 예수그리스도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강직하고 정직하시며 의로운 것을 추구하며 살던 그리스도께서 왜 이렇게 잘못되고 그리고 그릇된 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항의하지 않고 그대로 복종하시고 그래서 그 십자라를 지고 오늘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십자가를 지게끔 만든 이 빌라도의 재판은 공의를 어긴 재판이었고 엉터리인 재판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불법한 자의 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는데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빌라도를 사로잡고 유대인들을 사로잡고 대제사장들을 사로잡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작에 못박아 죽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힉이 좌절될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단의 한계였습니다. 사단은 인간보다 훨씬 지혜로운 자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깊이 있는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충동질 하였는데 사실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불법한 자의 손에 죽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사단의 사슬과 죄악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는 바로 유일한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 십자가에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받은 다음에 사람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매워서 그리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갈때에는 유대인들에게 두가지 규례가 있었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은 십자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에게는 두가지 규례가 있었는데 하나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채찍을 맞는 것이었습니다. 채찍을 맞는데 이 채찍은 대개 40의 하나 감한 39대 정도를 때리는 최근에 이 예수님 시대의 형틀을 연구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조사된 바에 의하면 그 채찍은 우리들이 말을 달리게 하거나 소를 몰때 쓰는 그런 채찍이 아니라 가죽으로 되었는데 한가닥이 아니라 아홉가닥으로 된 채찍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닥에는 각각 말하자면 쇠붙이나 혹은 뼈를 깍은 그러한 재료들을 낚시바늘같은 것들을 죽 매달았습니다. 그래서 때리면 살점이 후두둑 떨어질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채찍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죄수들은 십자가를 지워 끌려가기 전에 이 채찍을 맞다가 살이 뜯어지고 뼈가 들어나고 채찍을 맞다가 십자가를 져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매를 다 맞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 십자가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인데 먼저 세로 막대를 세우고 두번째 가로 막대에 죄수를 못박은 다음에 도르레를 들어올려서 끼우는 이러한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사람은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가야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규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셨던 것이니다. 이 십자가의 무게는 대개 80Kg에서 120Kg까지 나가는 그러한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가지신 인간의 몸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이셨습니다. 오래 걸으시면 행로에 권하셔서 우물가에라도 앉으셔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천한 여인에게도 물 한잔을 청해서 드셔야지만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 있는 연약한 인성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전날도 복음을 전하시고 그리고는 저녁 시간에 목요일 저녁이지요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드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만찬이 그저 유월절 만찬정도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바로 이 지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나누는 저녁식사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셨을 것입니다. 제대로 식사를 하셨을리가 없지요. 그리고 그 식사를 끝마친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잠들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건 영적인 투쟁에 들어가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요일날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미 목요일날 다 이겨 놓은 영적인 승리의 보증을 따라서 희생과 고난을 실천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할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질 십자가를 위해서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기도를 바로 갯세마네 동산에서 드렸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그가 육체에 계실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아버지께 들으심을 입었느니라 말했습니다. 큰 울부짖음과 말하자면 가슴을 찢는 통곡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이겨야 할 것과 또 당신이 가고 난 다음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공동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보호를 계속 받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애의 마지막 남은 밤을 온전히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들을 위한 증보의 기도로 온 밤을 새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육신의 입으시고 마지막 보내신 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밤에 하나님 앞에 갯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미 시간을 넘고 공간을 넘어서 갯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기 하루 전에 머리릴 숙이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고개를 들어 여호와 앞에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 속에 그림자처럼 드리우면서 밀물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 속에 밀려왔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철저한 버림당하는 것과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처절하게 외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하나님으로 부터 철저히 버림 받은 이러한 느낌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죄짐을 짊어진 어린 양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이 세상에 임하여야 할 하나님의 진노가 당신 자신을 향하여 쏟아 부어질 내일의 고난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 속에 밀물과 밀려 들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갯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잠깐 여기 있어 나와 함께 있어달라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 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언제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와 함께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나를 위해 기도를 해달라 부탁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이것으로 미루어볼때 겟세마네 동산에 맞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밤은 인간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처절한 외로움과 그리고 영적인 깊은 고뇌와 십작가가 육신의 고통이었다면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하나님과 담판을 짓는 이 몸부림 친 기도는 영혼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과 같은 고난을 동반한 순간들이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장작을 피우고 모닥불을 피워서 추위를 모면해야 하는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시자 땀이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이 되는 육체의 고뇌도 또한 드러났습니다. 이렇게 생사를 건 기도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렇게 매달린 다음에 간악한 로마 병정과 그리고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배반한 유다에 의해서 병정들에게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병정들에게 팔려가서 대제사장의 뜰로 끌려가고 그곳에서 갖은 심문을 다 받은 다음에 바야바의 뜰이었지요. 그리고 그 궁병들에게 이끌려서 이번에는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빌라도에 받은 갖은 고초를 다 받다고 이사람이 귀찮으니까 이 사람이 갈릴리에서 부터 왔다는 소리을 듣고 갈릴리 지방의 총독이던 헤롯에게로 보냈는데 헤롯은 마침 휴가를 즐기기 위해 마침 예루살렘에 와서 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헤롯에게로 끌려가셨습니다. 헤롯에게서 온갖 모욕과 치욕을 받으시고 매맞으시고 요술을 행해보라고 하는 주문을 받고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도 하지 아니하자 또 많은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빌라도의 뜰로 끌려왔고 빌라도의 뜰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장시간 심문을 받으시고 마지막에는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금요일날 7시나 8시 아침쯤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갖은 고욕을 다 당하면서 오늘 80Kg내지 120Kg이나 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데 쓰러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갈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꾸 아마 쓰러지시고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행렬이 아마 쳐졌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병정들은 옆에 지나가는 시몬이라고 하는 구레네 사람을 무조건 붙잡아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만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도 아니었고 예수님께로부터 병나음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가 죽는다니까 그게 무슨 일인가 하고 구경을 나온 그저 평범한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시골 사람을 이 병정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라고 끌어들여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쫓아가게끔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전설에 의하면 이 구레네 시몬이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후에 은혜를 충만히 받아서 인도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 이것을 가르쳐서 억지 은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예수를 믿는 것이 언제나 강권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면 그보다 더 유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 죄로 가득한 존재가 되어서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냉담하게 식어서 도무지 가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그리고 하나님과 생상한 교제를 기대하는 영적인 간절한 열망도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살아갈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 하나님은 가끔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억지 은혜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 일을 놓고 세상에 가서 재미 좀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집사라는 직분을 강제로 씌우시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교사라는 직분을 주셔서 교사를 맡았기때문에 주일을 빼먹을 수가 없게끔 그렇게 우리의 발목을 잡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나 보십시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스스로 버려두면 타락할 수 밖에 없고 예수께로 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나가버릴 수 밖에 없는 그 죄인들을 하나님은 이렇게 억지 은혜로라도 부르셔서 우리의 발목을 붙잡으시고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믿는 형제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도록 우리를 붙잡으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금년에도 여러분들 가운데 본인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억지로 주위의 권유에 못이겨서 교사를 맡거나 성가대를 맡거나 청년들 리더를 맡거나 집사를 되신 분들이 있거들랑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억지로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달게 지고 그것을 계기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을 다해 섬길려고 애를 쓰고 그 억지 은혜의 매여서라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려고 애를 쓴다면 잠시 후에 그 억지 은혜가 바뀌어서 자원하는 은혜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가 교회에 코 끼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그저 가끔씩 와서 설교나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그러한 마음의 정함이 없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물어보나 마나 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내가 코 끼었다고 하면 말하면 그렇게 신이나서 좋아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이제 제가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그래도 꿈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혹시 나를 한 천명되는 교회에서 한번 안불러주나, 혹시 누가 교회를 다 차려놓고 좋은 목회자가 없다고 해서 나보고 한번 오라고 하는 그런 건수가 없나, 아니면 또 혹시라도 누가 큰 땅과 건물을 지어줄테니 와서 말씀만 전해달라고 그러는데는 없나. 뭐 바라는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나님이 인도해주신다면 싫다 소리는 안할 작정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더 어느날 하나님이 11월 15일까지도 개척의 '개'자도 생각을 안했는데 15일 아침에 일어나 기도를 하는데 얘야 네가 교회를 하나 세워야하겠다. 하나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하게 하십니까. 얘야 그것이 농담이 아니다. 다 기도하고 나서 이것이 아마 복날의 개꿈 꾸는 것도 아니고 이럴리가 없지 하고 지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하나님이 한단계를 높이셨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세워야 되겠다. 하나님이 세워라. 뭘로 교회를 세웁니까? 나같은 사람이 교회를 한다면 누가 쫓아와서 이 설교를 듣겠다고 모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누가 교회를 하자고 와서 한 20명이 와서 개척교회를 누가 하자고 돈도 대고 땅도 대고 한다고 해도 내가 할까 말까 하는데. 아무도 하자는 사람이 없는데 저보고 개척교회를 하나님이 하는데 하나님 오늘도 농담이시겠지요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는 잠을 안재우시고 침대 머리 맡에서 철야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이것은 더욱 확실해. 하나님 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좋으실대로 하십시오 하고 이제 11월 15, 16, 17일날 응답을 받고 12월 12일 의자를 다 들여놓고 마이크 설치하고 예배를 들였습니다. 콩 볶아 먹은 것입니다. 그렇게 다 들어왔는데 개척교회를 한다고 하니까 7명이 있었습니다. 저와 저의 집사람, 그리고 전도사님 두분, 교역자가 여섯명이고 깍두기 하나 해가지고 7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를 시작을 했습니다. 그것도 지하실에 냄새나는데 거미줄 다 뜯어가지고 그리고 이제 시작을 해서 교인들이 이제 20명, 30명, 40명... 그때에 어느 교회에서 1200에서 1300명 모이는 교회에서 후임자를 거론하는 가운데에 정식으로 청탁이 온건 아니지만 제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제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어휴 어차피 물건너 갔다. 진작 이야기를 하지. 교인들한테 와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저는 인생 끝났습니다. 이제 이 열린교회에 코 끼였습니다. 제가 이제 어디를 가겠습니다. 수많은 교회에서 절 오라한들... 오라할 일도 없겠지만 오라한들 올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저를 거기에다 코를 끼여놓셨으니 이제 저는 나올수도 없고 도망 나올 수도 없고 교회를 옮길 수도 없습니다. 전도사님때에는 그래도 교회를 옮겨다닐 제목이라도 되는데 이제 애를 낳아 놨으니 이제 길러야죠. 이제 코 낀거죠. 이제 저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무슨 교회가 뭘 이야기를 하든 뭘 하자고 하든 저는 이제 소망이 없고 주일날도 못 가고 수요일날도 못 가고 이런 특별한 날은 방학이라서 허락하는 것이죠. 이제는 코를 완전히 끼였습니다. 교인들이 이제 자기네는 돌아다녀도 목회자가 코 끼였다고 하니깐 어쩔줄을 몰라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얀 이를 열개씩 다 들어내놓고 좋아서 웃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일군이 코를 꿰고 거기에 메인 바 되니깐 성도들이 안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 참 좋구나. 지금도 제가 이력서를 들고 이교회 저교회를 다니면 교인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님 저도 이 교회에서 임종을 맞이하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한사람 두사람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를 다 믿지는 않지만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렇게 코 꿴 사람들, 억지로라도 코 꿴 사람들. 전에는 솔직히 말해서 저녁에 11시 30분에 강의를 끝내고 나서 돌아와서 너무 피곤하면 어떻게 4시에 일어납니까. 그래서 조금 자다가 6시나 7시쯤 일어나서 기도했는데 이제는 몇시에 자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4시반에는 교회 종이 치는 것입니다. 그러고 어떻게 합니까? 주여 코 꿰었나이다 하고 비몽사몽간이라도 옷을 줏어 입고 그리고 교회를 갑니다. 처음에 한 석달동안은 속에서 신물이 나오고 막 토할 것 같아서 못견디겠었습니다. 나중에 3개월 4개월 지나가자 마지막에 결론 내리기를 주님, 이 코 꿰어 주신 것이 주님의 은혜이옵나이다 생각하니깐 체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 하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깐 처음에는 고달프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억지로 코 꿰서 여기 있는 사람들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구레네 시몬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육신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이유가 없고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그 복음을 자랑할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 십자가를 지고 억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좇게된 것을 계기로 해서 자기의 영혼이 구원을 받고 자기의 인생을 가장 고결한 일에 바치게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억지로 끌려서 코 꿰어서 여기까지 온 분들 있거들랑 오늘 이 설교를 듣고서 아, 이것이 어찌 은혜라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사랑이었구나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 돈 많은 자, 지위가 높은자, 낮은자.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노인이나,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학식이 많은 사람, 무식한 사람. 수많은 사람이 다 섞여서 덩어리가 지어져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따라오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나뉘어서 줄을 서서 올라오는 것도 아니고 대열을 지어서 올라 오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가난하고 부한자, 배운자, 못배운자, 남녀노소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한데 무리가 지어져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오는데 성경은 오늘 그렇게 예수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을 아주 날카롭게 두 부류로 잘라놓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27절입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35절입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48절입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리 때에 뒤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 오고 있었지만 성경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님의 뒤를 쫓아온 사람들을 칼로 두부를 짜르듯이 정확하게 두동강 내었습니다. 한동강은 백성들이라는 사람들이었고, 또 한동강은 슬피 우는 여인의 큰 무리라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여러분 보십시오. 이 백성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많은 무리도 그 뒷일을 보고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때에 예수의 뒤를 따라오던 많은 백성들은 그야말로 십자가를 어떻게 지시고 죽나 보기 위해서 따라왔던 방관자들이요 구경꾼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으로 올라가다 기운이 진하여 쓰러지자 그 십자가는 구레네 시몬에게 대신 지어주고 그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은 이제 저는 다리를 이끌고 피흘리며 가시면류관을 쓰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고 있는 이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서 끌려가고 있는 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던 이 백성들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목격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나 보자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쓴채 어떻게 못박혀 하늘 높이 매달려 얼마나 목숨을 부지하다가 숨이 넘어가나 보자 구경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구경꾼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가시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온몸을 채찍으로 맞으신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조차도 구레네 시몬에게 맡기고 쓰러지듯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그가 거기서 주저앉지 아니하고 힘을 다하여 그리고 기어서 혹은 걸어서 골고다 언덕까지 기필코 올라가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해서 못박히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쓰러지면서도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죄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시면류관까지 쓰고 채찍을 맞으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 그 뒤를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구속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을 향한 진노를 거두게 하시고 하나님과 원수된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이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온 세상을 지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지은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박해와 멸시를 받으시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생명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이 스스로 죽음을 차취하시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건지시고 죄사함을 입게 하기위해서 이 골고다 언덕으로 지금 올라가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사건은 객관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후일에 골고다 언덕에 박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한사람이 재판을 받고 그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이렇게 죽으셨던 것은 바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서 모인 이 사람들을 위한 죽음이었음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구경하는 백성들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면 올라가실수록 더 피어린 통곡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 그중에는 갈릴리로부터 온 여자들고 있었습니다. 백성이라는 말은 간단하게 되어 있지만 이 여자들은 복잡하고 긴 수식어구가 붙어 있습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퍼하며 우는 여자의 큰 무리였다고 성경은 오늘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때에 백성들은 구경했지만 이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잘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구경을 위해서 이자리에 나온 사람들이었지만 이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여기에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뒤를 그냥 따라갔지만 이들은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저렇게 죽은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슬피 울며 가슴을 치며 이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고난을 받으며 죽음을 눈앞에 둔 십자가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그는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늘의 영광과 천사의 합창 소리가 깃든 하늘의 천국의 보좌를 놔두고 낮고 천한 이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이세상에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온 것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었습니까? 보좌를 받기 위해서였습니까? 영광을 받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말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마지막엔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찬양) 하늘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네~
그는 육체를 입고 이땅에 내려와서는 안되는 분이었습니다. 하늘에 영광과 천사들의 경배와 신구약 성도들의 합창소리를 들으며 천사의 경배를 받으셔야 합당한 분이었으나 하나님의 사람이 그를 낮고 천한 이땅에 보내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모두 버리고 자기가 지은 땅에 왔지만 사람들은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올때에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창칼을 갈면서 그 아기를 죽이기 위해서 창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그분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들레햄에 낮선 여관의 마굿간에 그것도 말구유에 오셨으니 그가 오실 때에 그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거친 강보 한벌이었으니 그것을 입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모두 버리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시면서도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를 먹이시며 소외된 자를 찾아가시고 지친 자를 위로하시고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자들을 구원하셨으니 이 일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생애를 아낌없이 다 소진하였으니 마치 한동강의 촛불이 자신을 깍으면서 빛을 발하여 어두움을 비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물질도 모아놓은 것이 없으셨고 명예도 저축하신 것이 없으셨습니다. 오실 때에는 벌거벗은 몸으로 오셨고 거친 강보에 쌓여서 구유의 누웠읍니다만은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베옷 하나도 벗어서 군병들에게 제비 뽑아서 갖도록 빼앗기시고 벌거벗은 몸으로 오실 때에 그대로 빈 몸으로 마지막 남은 것이라고는 육체밖에 없는데 그 육체마저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제물로 깨뜨려 드리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나님 아버지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눈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낮고 천한 이땅에 오셔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그리고 언제나 가난한 자로 사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없는 자들의 친구가 되 주셨습니다. 고통하는 자들의 고통을 헤아리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기 위해서 하늘을 향하여 거친 보리떡과 물고기 두마리를 놓고 축사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낮고 천한 이땅에 오셔서 자신을 다 버리셨지만 그러나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도전과 질시와 미움과 원망과 핍박에 직면하는 생애를 살아야 했던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은 일생을 그렇게 선하게 사시고 마지막에는 그 한때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자를 고치던 위대한 권능이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지고 이제는 초라한 죄수의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 갈때에 누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시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조금도 귀하게 여길만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그러한 생애였습니다. 오늘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는 힘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가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힘없이 죽어가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단지 힘없이 매달려 죽어가는 실패한 한 인간의 모습 밖에는 읽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이 그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합니다. 힘없이 이렇게 악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골고다 언덕으로 힘없이 하늘의 영광과 권능을 포기하고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야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능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가슴 속에서 멸망을 눈 앞에 두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찾을 줄 모르는 멸망에 이를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심장 속에 역사하셨고 그 사랑이 그리스도를 강권하심으로 오늘 우리를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때에 이 여인들은 예수를 위하여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이제 예수의 뒤를 따라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여인들의 흐느낌은 변하여 울음이 되었고 울음은 변하여 피어린 통곡이 되었습니다. 여인들이 이렇게 운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지 아니하실 수도 없었고 목놓아 울고 매달린들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줄리가 없었습니다. 소용이 있고 없고는 이 여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를 안지실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들이 마음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이 여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뒤를 도저히 침묵하고 방관하면서 구경을 하며 그렇게 하지 않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어떠한 핍박과 저지가 따른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었입니까? 바로 어저께 말씀드렸던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마음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이 여인들의 가슴을 움직이고 그 사랑이 이 여인들의 인격을 사로잡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이 여인들은 비록 이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겠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는 저렇게 죽을 이유가 없는 분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찌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이유가 있습니까? 그는 선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어떤 나쁜 일을 행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이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고난을 지셨고 하나님을 떠나고 죄가운데 살면서 소망이 없는 인생들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우는 자를 위하여 함께 우시고 고통 받는 자를 위하여 자기의 평안을 포기하셨습니다. 시련 받는 자를 위하여 자기의 편안함을 포기하시고 귀신이 들려 죽게된 나를 살리시고 나를 정결케하시고 소망이 없는 창귀와 같은 삶을 사는 나를 고치시기 위해서 찾아오셔서 아무 것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의 인생에 사죄하며 은총을 베푸셨던 그리스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우리를 위해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진리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버림받은바 되어서 지금은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그분. 자기를 위하여 아무 것도 모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수는 놓아주고 죄없으시고 사랑 자체이신 진리이고 생명이신 그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을때 사실은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죽인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때 이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의 뒤를 따라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때문이었습니까? 이 여인들이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이었습니까? 이 여인들이 많이 배웠기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가운데는 창녀와 같은 자들도 있었고 일곱 귀신이 들려서 버림받은자와 같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이 구경하며 예수의 뒤를 따라갈때 이들은 통곡하며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무엇이 이 여인들의 가슴속에 역사하는 예수를 향한 그 처음 사랑.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이 이 여인들의 가슴에 역사하자 그들은 그 십자가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리스도 예수는 저렇게 죽임을 당하실 이유가 없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고난은 부당한 것이었으니 그가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전혀 합당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이제 골고다 언덕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그 십자가는 무었이었습니까? 이 여인들에게 있어서 여인들의 눈 앞에 골고다 언덕에 기다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광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치와 모욕과 버림받음과 징계와 저주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은 그 십자가가 저주의 십자가였지만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멸시와 천대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는 골고다 언덕이었지만 가슴을 치면서 이 여인들은 그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를 따랐습니다. 이 여인들은 쫓아갔습니다. 그것이 저주의 십자가든 버림받은 십자가든 멸시와 천대를 받은 십자가든 사람들에게 저주거리가 되든 그것은 상관없었습니다. 그 저주받은 십자가 그것을 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골고다언덕으로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십자가가 멸시와 천대와 저주의 십자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명예와 육신의 안위를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천한 십자가의 뒤를 따랐다면 오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는 이 여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멸시의 십자가입니까? 이 여인들이 상상했던 것과 같은 저주의 십자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 알게된 십자가는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영광스런 부활의 능력이 깃들여 있는 우리의 자랑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가슴 벅찬 맘으로 말했습니다. 내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내가 세상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또한 세상이 나를 대하여 그러하니 그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의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여러분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임에도 이 여인들은 그리스도를 향항 사랑이 있길래 가슴을 치며 슬퍼하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만약에 이 여인들이 멸심와 저주의 십자가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가슴에 역사하자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십자가의 뒤를 따라 갔다면 오늘 선한 싸움을 다 싸우며 당신의 십자가를 향하여 나오는 사람들, 그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한 그 놀라운 십자가의 약속들, 그 놀라온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와 그 마르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언약들을 보증받고 있는 우리들이 그 영광의 십자가를 뒤따라 가고 있지 못하면 우리야말로 사랑을 잃어버리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른 몸을 가지고는 천국을 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늘 예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그 사랑을 인하여 감격하며 이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 십자가의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전하며 살아가는 이러한 고난 받는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가슴 속에 이러한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향한 사랑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쫓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십자가가 오늘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며 쫓아가야 하는 가치가 있는 십자가임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십자가에서 비로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모였던 그 수많은 인파들도 흩어졌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 전에는 서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끌어내려졌고 십자가는 지워졌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이스라엘에 가면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던 그 곳에는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셨던 흔적은 사라지고 이름모를 집들이 빼곡히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푯말이 새겨져 있는데 첫번째 쓰러지신 곳, 두번째 쓰러지신 곳, 세번째 쓰러지신 곳, 모두 여섯개의 푯말이 골도다 언덕까지 이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제 그 십자가도 사리지고 골고다 언덕도 사라졌으니 그리고 모였던 사람도 흩어졌으니 그렇지만 여러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라졌지만 그러나 지금도 교회 속에는 보이지 않는 골고다 언덕도 그대로 서있고 거기에 피묻은 십자가도 굳게 서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뒤를 따라 오던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교회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십자가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주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바라보시며 아파하시는 그 십자가의 고통을 오늘도 부여안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여러분들에게 이 두사람 중 어느 한부류에 속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고난의 십자가는 사라졌지만 지금 이 세곡교회에도 골고다 언덕도 그대로 있고 피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도 그 언덕 위에 그대로 서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웃고 떠들고 구경하며 예수의 뒤를 따라간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아픔을 간직한채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예수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고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오늘 성경은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