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 26; 42)
녹취자: 표명희, 정윤미
몇 일전부터 이 본문이 제 마음을 많이 사로잡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유월절 만찬을 드신 것은 유월절 만찬이 해가 진 이후에 시작이 되니까 시간상으로 몇 시 쯤 될까요? 우리 시간으로 일 곱 시나 그때쯤 될까요? 그리고 만찬을 하신 후에 그 유명한 다락방 강화를 하십니다. 다락방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그 마지막 나누신 성찬이 이제 오늘 우리가 기리려고 하는 그런 성찬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아시다 시피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르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나아가셔서 다른 제자들은 내버려두시고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거기 두시고 좀 더 나아 가셔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장면이 오늘 성경에 나옵니다. 우선 우리는 이 방대한 기도에 관한 보도를 한번 설교로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42절에 초점을 맞춰서 그리고 몇 가지 놓치기 쉬운 중요한 점들을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보면서 실질적인 교훈을 한번 얻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먼저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셨고 특별히 당신이 긴밀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하실 때에 특별히 사랑하시던 세 제자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말하자면 여러 겹의 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편애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시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주님 곁에는 세 명의 제자들이 있었고 또 세 명의 제자들 바깥 원에는 열두 명의 사도들이 있었고 그 바깥에는 칠십 여명의 전도대원들이 있었고 그 바깥에는 전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는 팔로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더 많은 군중들이 간헐적으로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예수의 사역에 영향권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그중에서 특별히 기억하시던 이 세 제자들을 데리고 굳이 당신이 기도하시던 곳까지 데리고 올라가신 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 의문점을 던져줍니다. 우선 첫째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기도를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하셨습니다. 오히려 고요히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가치를 많이 부여하셨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넷이서 손잡고 통성 기도하려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제자들은 떨어뜨려 놓고 예수님께서는 좀 더 떨어진 곳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조금 모순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 결정적인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 앞에 이제 잠시 후면 자기에게 다가올 그 십자가를 지기위하여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을 함께 동행 하고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의 실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데리고 가셨을 때 무엇을 원하셨는지는 명백히 나옵니다. 너희는 여기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기도하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렇게 데리고 가셔서 바로 그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기도에 함께 동참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셨지만 이 제자들은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을 혹은 세리를 부르시고 비천한 자들을 택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이후 주님은 한 번도 홀로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제자들에게 에워 쌓여 이었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예수를 옹위 하였습니다. 기적이 나타나는 곳에 더 많은 군중들이 모였고 오병이어의 역사로 물고기와 보리떡을 먹을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괴로운 이 시기에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홀로 서셨습니다. 복음서를 한번 찾아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께서 언제 제자들을 붙들고 간절히 너희는 어디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서 함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신 적이 있습니까? 복음서 속에서 이렇게 간절하게 장소적으로도 당신을 떠나지 말고 함께 기도해달라고 간청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을 보여주시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이 순간이 그리스도예수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송)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주님의 생애였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깃 들 곳이 있고 여우도 머리 둘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저녁이 되면 새들은 깃 들 곳을 찾아 날아들고 짐승이 자기의 굴을 찾아도 예수그리스도는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도 그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주님 곁을 따라 왔습니다. 그분에게는 진리가 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거룩한 표징이 그의 말과 교훈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조차도 너무나 무서운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고통스럽지 않을 수 정도로 처절한 고난의 고통이 예수그리스도에게 다가오고 있는 이때에 예수그리스도는 철저히 홀로 버려진바 되셨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신 주님이실 텐데 처절한 외로움을 느끼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적마다 항상 짝으로 생각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죽기가지 따르겠다고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제자들에게 결코 자신의 생명이나 미래를 의탁하지 아니하시고 의연하게 목자를 치리니 양들은 흩어지리라. 당신이 홀로 될 것을 의연하게 예고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여기 나와 함께 있어 깨어 있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비록 불완전하고 죄 있으신 분은 아니지만 인성을 입으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연약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할 때 너무 신파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찢으신 그 손, 못 자국, 흘리는 피, 곽 눌러쓴 가시관 그리고 상처 난 이마 이런 것들입니다. 물론 그것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진정한 고난은 ,영적인 고통의 십자가는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히기 전에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앞두고 누구도 도와 줄이 없는 그 외로운 기도의 싸움을 홀로 하시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영적인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밤에 그 십자가를 지고 이미 승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주시던 그 밤에 그리스도예수께서 홀로 계시던 장면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르치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손으로 아픈 곳을 싸매어주고 치유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앞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권능을 주셨던 제자들은 어디로 갔고 언제가 달려가서 기쁨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마귀의 범죄를 깨뜨렸노라고 선교의 승리를 보고하던 그 용감하고 영광스러운 용사와 같은 사도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 사라지고 고난의 순간에 그리스도예수 홀로 남았습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그 밤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처절하게 가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픈 일을 두 가지를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야바의 뜰에서 진리 때문에 모욕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빌라도의 뜰에서 모진 채찍을 맞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욕설과 모욕을 받으며 브라이도리온으로 끌려가서 구타를 당하시고 조롱어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홍포를 입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찢어지는 고통은 그 고통스러운 기도의 싸움에 홀로 그 밤을 지새우셨던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극히 사랑하던 제자에게 존경의 표시인 입맞춤을 통해서 원수들에게 자신의 생명이 은 삼십에 팔린 그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육체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시련이나 그리고 결핍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이미 각오하신 일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하실 때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처한 그 비참함과 그리고 몸부림치도록 외로운 그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한시라도 하루 밤은 그만두고 잠시 동안 만이라도 순간이라도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할 수 없었단 말인가? 당시에는 사람들이 하늘을 높이 우러러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파격적으로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아버지께 눈물과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유대인의 맥락에서 보면 얼굴은 존귀의 상징이고 땅은 비천함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얼굴을 땅에 대었다는 이야기는 사람에게 있어서 존귀의 상징인 얼굴이 존귀를 잃어버리고 티끌과 같이 비천하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의 의미를 드러내주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잡히시던 그 밤에 우리는 그분을 홀로 기도하게 내버려뒀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떠나갔고 그분께로부터 생명을 얻었던 사람들도 그분을 홀로 버려두고 모두 게으름이나 역심이나 안위를 위하여 떠나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 밤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고 당신을 의뢰하던 모든 제자들이 떠나간 그 밤에 그 외로움을 삼키며 아버지 앞에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는 이미 그리스도예수의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끝났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 전에 홀로 그런 처절한 외로움으로 기도하게 내버려드린 것을 아무리 후회 하여도 우리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서 그분의 눈물을 씻겨드리거나 땅에 떨어지는 그 핏방울을 닦아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흘러갔고 그리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도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시시때때로 홀로 기도하십니다.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 홀로기도하시고 때로는 교회를 위해서 모두들 버려두고 간 그 시점에서 하나님아버지 앞에 당신이 피로 값 주고 세우신 거룩한 교회와 그 공동체의 염원들을 보존하게 하시려고 모두들 떠나가 버리고 텅빈 교회당에 홀로 남아서 기도하십니다. 겟세마네 기도에는 우리가 이미 동참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시작되고 있는 영적인 겟세마네 동산에서까지 예수그리스도를 홀로 기도하게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예수의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끝내 땀과 눈물로 쩔었던 고난의 시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일생동안 세상의 사람들에게 샬롬 주시려고 자신은 하나님과의 샬롬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마구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분이 아끼신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우리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천사와 함께 있기도 거절하고 아버지와 있기도 거절하고 겟세마네동산에서 육신의 부모조차 멀리하고 형제들조차 버린 채 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매우 강한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을 당해보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미줄과 같고 그리고 우리의 신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푸라기와 같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실제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소수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예수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시는 이 시간 이 외로움을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나님 한분 앞에 대면하는 시간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깊은 영성은 처절한 고독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때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아가 앉아 있다는 느낌이 들거나 혹은 애지중지 하던 인연들을 죽음으로 말미암아 떠나보내고 상실하게 되어서 홀로 있게 되었을 때 여러분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독은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르는 거룩한 수단입니다. 제자들조차 이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하지 않고 자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더 처절하게 이제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기가 바라보아야 할 분이 오로지 하나님 한분뿐이시라는 사실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느꼈습니다. 그분이 제자들을 의지하고 제자들을 의지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만을 덜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도 인성을 가지신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기 때문에 당신이 가장 믿고 사랑했던 제자들조차도 이 결정적인 순간에 깊이 잠들어 있고 자신을 위해 전혀 기도하지 않는 것을 보시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이 엄청난 고난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추스렸을 것입니다. 그렇다 나를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 보낸 것도 하나님이시고 나로 고난과 시련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믿음을 따라서 한 가지 구속의 소명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하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순간순간 자신의 생애가운데 아버지만을 의뢰하며 살아왔던 인생을 회고하셨을 것입니다. 시시 때때로 죽을 것만 같고 세상의 모든 도움이 끊어진 것 같아서 이제는 살아있는 것조차도 힘겹게 느껴질 그때에 우리를 이끌고 지켜주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이 결정적인 십자가의 고난을 위해서 마지막 기도할 때에 영혼이 온전히 시선이 하나님 한분 앞에 고정되어서 살든지 죽든지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의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을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 보내신 자신에게 소명을 주시고 파송하신 유일한 하나님 바라보게 하시려고 자기를 이 처절한 외로움에 두신 하나님을 더욱 찬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틀림없이 히부리서 5장이 기록하고 있는 그가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 하셨다고 하는 이 보도는 바로 이러한 해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사랑하는 제자들조차도 결정적으로 기도해야할 그 순간조차도 기도하지 못하고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인 섭섭함에 호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 십자가가 자신이 혼자 져야할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더더욱 처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한분을 향하여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 하나님 한분만을 앙망하는 그 마음이 처절한 통곡과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화되어서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보든 관계들이 끊어지고 그리고 내가 믿을 수 있었던 모든 도움이 사라지고 그리고 홀로 가슴이 시리도록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아버지 앞에 대면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줄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람을 원망하거나 혹은 미워하는 것으로 이 기도의 시간을 바꾸어 놓거나 혹은 떼어 놓으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 시간을 더 그 외로움으로 인해서 처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순결한 분이시지만 이 십자가를 지고 일찍이 감당해 본적이 없는 이 어머 어마한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고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자신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더 철저하게 순결하게 하나님께 쏟아 부어지는 영적인 세계가 준비되지 아니하고는 그 고난의 십자가를 감당 할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죽으시기 전에 이처절한 고독과 외로움의 시간들을 오직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한분께 더 매달리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런 장면들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세변 기도하신 사실을 읽을 수 있는데 세 번째 기도는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셧다고 하니까 두 번째 기도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를 하셨고 그렇다면 첫 번째 기도는 따로 있고 두 번째 세 번째 기도는 동일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면밀하게 본문을 살펴보면 첫 번째 기도와 두 번째 기도가 동일한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기도에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노골적으로 아버지께 요구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 아주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 이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시고 돌아와서는 예수님이 당신 곁에서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심히 안타가워하시고 제자들이 잠들어 있는 것을 문제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나아가서 기도하실 때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내가 그 잔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보다 진전된 기도를 아버지 앞에 드렸습니다. 첫 번째 기도와 두 번째 기도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을 갖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똑같이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해달라는 기도로 맺었지만 두 번째 기도에서는 개연성을 거의 모두 걷어버렸습니다. 노골적으로 피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잔을 피할 수 없거든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적극적인 순종을 위해서 기도 하셨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아가신 태도를 보면 첫 번째 기도하신 후에 혹은 기도 하신기전에 제자들에게 나아가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던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던 것과는 다른 어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바는 그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져야 할 그 십자가를 어떤 개연성도 남겨놓지 않으시고 적극적인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기꺼이 그 잔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을 때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조금 전까지 문제가 되던 제자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잠들어 있는 것이 예수그리스도께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세 번째 기도를 마친 이후에는 담대하게 제자들에게 오셔서 말씀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이제 가자" 끝났다는 것입니다. 너의 기도 없이도 아버지는 내 기도를 들으셨고 나는 이제 이겼다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을 때 제일 처음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지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가장 많은 기도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기도는 이 기도가 끝나고 나면 사랑하는 자에게 팔려서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고 하는 그 숨길 수 없는 예고된 현실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시고 그리고 묵묵히 그 십자가를 져야 되겠다고 깊이 자신을 헌신하셨을 때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잠들어 있는 제자들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중보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그 처절한 외로움을 통해서 그 응시된 자신의 시선 앞에 서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시고, 그리고, 묵묵히 그 십자가를 져야 되겠다고 깊이 자신을 헌신하셨을 때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잠들어 있는 제자들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중보 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할 때에 그 처절한 외로움을 통해서 응시된 자신의 시선 앞에 서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분이 영광된 천국을 버리고, 더럽고 추한 이 세상에 고난과 시련이 약속되어있는 수욕된 생애를 당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은 사람의 동의를 통해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결정적인 시점에 홀로 마셔야 할 잔의 의미를 알았고, 홀로 계셔야 할 그 순간이 어느 때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진리를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실 때에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좋은 교회를 두셨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유난히 상처가 많은 사람들끼리, 서로 기대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고통과 슬픔을 같이하고 마음에 있는 숨길 수 없는 쓰라림을 나누면서, 그렇게 서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두셨습니다. 홀로 있고,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에,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위안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도 온전한 가정이 되고 싶어 합니다. 우리에게는 또한 친구들을 두시고, 믿음의 동지들을 두셔서 고난을 당하거나 시련을 당할 때에 나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나보다 더 고난을 받으며 분투하고 있는 내 동역 자들과 형제들을 생각하며, 내 몫에 메인 십자가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면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상호작용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가끔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주 가끔은 “하나님, 내 마음에서 아내조차 떠나가게 하시고, 남편조차 딴사람처럼 느껴지게 하시고 이제껏 까지 그렇게 사랑하던 동역 자들조차도 남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그러한 절대적인 고독의 시간에 우리를 두실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흔히 도대체 이 결정적인 고독한 순간에 나를 홀로 버려두는 우리의 지체들은 정말 예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인가? 내가 가족을 위해 그 오랜 세월을 시간을 수고하였지만, 가족이 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와 함께 피로 맺어진 형제들은 도대체 이 결정적이고 괴로운 순간에 내 곁에 없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생각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범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예수의 정신으로 우리를 가득 차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게 하시므로, 그러나 그 고난으로도 충분히 변화되지 않는 우리자신 속에 있는 예수의 성품을 만드시려고, 주님이 이 세상을 사실 때에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생애를 사셨는지를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절한 외로움 속에 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바로 그 사랑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평소에 문제가 많고 투명하지 못한 관계에 있으면, 떠나가는 사람들과 무너지는 관계를 보면서 그는 자아를 상실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산 사람들은 매 순간 순간 허물도 있고, 그리고 연약함도 있고, 때로는 알면서도 잘못된 일에 굴복할 적도 있지만, 그러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섬기며 사는 생애가 아니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시시때때로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하나님 앞에 고하고, 용서 받으며, 투명한 관계 속에서 주님을 붙들고 살아갔던 사람들은 오히려 그 처절한 외로움의 순간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아버지와 그런 관계를 맺으셨던 것처럼 사람들이 떠나가거나, 홀로 있어야 되는 상황이 될 때에 오히려 그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 자신으로 위로와 소망을 삼고 살아가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예화) 저는 몇 달 전에 한 서너 달 되었는지, 여러분들은 잘 모르는 명백하게 옳은 일 때문에 아주 깊은 그 인격적인 비난을 그것도 정면에서 받아야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제가 거의 이틀저녁을 잠을 못 잤습니다. 분명히 옳은 일인데, 누가 봐도 다 동의할 수 있는 일인데, 인격적으로 심한 그 모독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 이틀 동안 잠을 잘 못 잤는데, 나중에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하나님이 특별한 만져주심이 아니면, 나는 결코 내가 꿈꾸던 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 내가 비록 옳은 일을 했지만, 그 일에 연루 될 수밖에 없었던 사실 자체가 나는 너무 싫은 것입니다. 내가 옳아도, 내가 왜 그 일에 연루가 되어서, 내가 왜 사람들에게 그런 정면에서 그런 인격적인 모독을 받아야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틀 동안 내 모든 관심의 초점은 오직 그것입니다. 내가 왜 거기에 연루되었는가, 내게 아무런 이익도 없는데, 내가 왜 거기에 연루 되어야 되는지, 삼일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내게 깨닫게 해준 것이 그것이었습니다.”너는 전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저는 그것이 최근 한 2년 동안의 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발견한, 충격적인 자신의 발견이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고난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혹은 받게 다고 고백하는 것과, 실제로 받을 때에 내 마음이 기쁘지를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고난을 받고, 인격적으로 모욕을 받아도, 나 때문에 나를 연루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모습에 경악했습니다. 저는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저를 설교자로 불러주신 이후로, 기도의 제목은 오직 하나입니다.”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부름 심을 받고 태어나서, 하나님이 명하시던 그 기간 동안에 이 땅에 살아있으면서, 하나님은 제 마음에 이 시대의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주셨습니다. 소원이 있다면, 내가 모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제약들을 버리고, 그리고, 마지막 최후의 순간까지 내가 이 시대 속에서 처절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 세상을 살다가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제 꿈이 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후세와 당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던지, 그것은 한 번도 저는 고려해 본적이 없습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게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안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기울어가는 이 민족의 역사의 한 마당에, 주님이 주신 일, 그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너무나 분명하게 이 시대를 향해서 말씀하고 싶어 하는 그 하나님의 음성, 이것이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이 원하는 생애를 살아가게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존귀하게 되는 것과 무명하게 되는 것 목회하는 교회가 커지는 것과 작아지는 것은 우리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수중에 있는 일이라면 성취되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 경악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왜 나를 아직까지도 이렇게,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곳에 그리고 설교해도 듣는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 묻어두시고, 세월을 지나게 하시는 지에 대한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아버지 한 분 만을 앙망하며 기도하셨던 것은, 결코 우연히 나온 정신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적인 처절한 외로움을 이기고, 오히려 그것을 살아계신 하나님 한분 앞에 대면하면서 살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만들었던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뚜렷한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의 원대로 삶이 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가장 처절한 소원은 오직 그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도, 아버지 원하셨기 때문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신 것도 아버지의 원이였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사랑은 두 번째입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원하셨고,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대속 제물로 죽으신 것이 아버지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충성스러운 아들은 아버지의 그 마음과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오직 그것 하나 믿고, 붙들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오로지 한 가지 소원에 불 탈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이면 기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간절하고 절박한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바로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의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 기도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를 위해서 처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십자가를 지고 안지고가 주님의 관심이었지만, 정리가 끝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이 땅에 남아있는 양떼들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머리 둘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도, 오히려 자기를 인하여 염려하시기 보다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며 염려하시는 마음으로 요한복음 17장의 장엄한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올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 외로움도 이기고, 홀로 있는 것도 견딜 수 있었던 위대한 힘, 그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어떤 그 희망이나 목표가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이것을 이기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벗어서 아팠지요. 두루마리에 기록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왔나이다. 이렇게 외로운 동산에 홀로 고독가운데 하나님 앞에 대면해야 하는 이 처절한 기도의 몸부림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자기가 그것을 감당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여기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 그것을 주목하기보다는 우리의 생각과 그리고, 우리의 뜻을 주목할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 뜻 가운데 무엇이 깨트려져야 된다면, 언제든지 아버지의 뜻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지닌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입으로 나오는 그 모든 고난에 대한 약속과 그리스도예수의 뒤를 쫓아가기를 원한다는 모든 희생을 각오하는 결심과 모든 약속들은 단지, 주님의 뜻을 준행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자신의 불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스스로 위안하기 위한 결심일 때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예화) 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은 것이 1월 달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에 여러모로 저에게 충격을 많이 주셨습니다.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잘 모를 겁니다. 목회자들도 모릅니다. 자기는 안다니고 사람들을 불러다가만 집회를 하니까, 잘 모릅니다. 그런데, 월요일 날 이제 집회를 갑니다. 월요일저녁에는 거의 잠을 못 잤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아주 이상합니다. 집을 떠났고, 그다음에 또 아무리 내가 그 감정을 설명할 말을 찾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 감정을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튼 여러 가지가 믹스된 이상한 감정입니다. 그래서 집회 많이 다니는 사람들은 참 조심하셔야 됩니다. 어쨌든 간에 감정적으로 많이 이상야릇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잠자리입니다. 더 문제가 됩니다. 한번은 그런 교회도 흔치않지만, 저를 숙소라고 하면서 집어 넣어주었습니다. 그 숙소에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는 여기 와서 잘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관의 구석이 이만큼이 무슨 오줌을 쌓아 놓은 것처럼 젖어 있고, 거기가 새까맣게 썩고,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고, 누가 와서 자고 갔는지 여자들의 머리카락이 굴러다니고, 들어가는 그 순간에 구역질이 나는 그런 여관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저녁때가 되니까 남녀가 희희낙락거리며 들어와 가지고, 못된 짓 하는 소리가 다 들렸습니다. 어, 단숨에 라도 집에 뛰어와서 자고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웠는데, 이렇게 벽에 들어 누웠는데, 그렇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교회당에 올라가서 기도나 할까했는데, 교회문은 또 굳게 잠겼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분노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 정말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런 곳에다 갖다 집어놓고, 자기네는 절대로 와서 안잘 방에다가, 방도 보지도 않고 집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 더러운 여관에다가 집어놓고, 그러고도 설교자를 설교하라고 올려 보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아 정말이자, 첫날이니깐 앞으로 나흘 밤을 더 자야하지 않나요? 막막해요. 별의별 소리가 다 들리는 것입니다. 여관에서, 대낮에도 그래요. 미친놈들입니다. 말하자면 싸구려 러브호텔, 러브여관에다가 집어넣은 것입니다. 호텔도 아닌 여관, 그러다가 잠이 올 리가 있나요? 드러누워 있는데, 찬송가가 하나 떠올라요?
(찬송)
복음 들고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니
종의 몸에 지닌 것도
그날 은혜 받은 이후로, 최초로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머리 둘곳 없는 생애를 사시고, 이 고장 저 고장 피해 다니시면서, 피 뭍은 그리스도의 예수의 복음을 전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조차 버림을 받으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홀로 엎드리신 예수그리스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지막에는 쏟아지는 주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고,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의 도끼아래 깨뜨려지도록 내어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피 묻은 복음을 위해서 소명을 받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매 순간순간 마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용기와 아버지께서 내 인생을 통하여 기뻐하실 수만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그런 기도가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서 숨 쉬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수없이 받아먹는 그 성찬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완전하고 더러운 인간들입니다. 더더욱 우리는 우리자신을 믿지 않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누구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매달려서도 때문도 아니라, 누구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아버지의 뜻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이 겟세마네 동산에 그 존귀한 얼굴을 더러운 땅바닥에 대고, 자신을 죽여서라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시면서, 오늘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중보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애가 일평생 기도하며 살아오셨던 생애였기 때문에, 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조금도 깨어있어 주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서 내가 너에게 베푼 은혜를 기억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면서 이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대신에 오히려 제자들로 부터 버림받은 그 시간을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시간으로 사용하면서, 오히려, 그 하나님 앞에서 더 깊고 처절하게 기도하며 아버지 앞에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도록 온 밤을 기도로 지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때로는 여러분들의 삶속에도 사랑하는 가족도, 그리고 지체도 때로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목자인 저도 동참할 수 없는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죄송합니다만, 혼자 견디십시오. 그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 세상에 의지 할 분은 하나님 오직 한분 밖에 없고, 그리고, 내 인생의 살고 죽는 것이 그분의 손안에 있고, 내가 그분의 손에 붙들기기만 한다면, 어디로 주께서 나를 이끄시든지 그 길을 걸어가리. 라고 하는 거룩한 확신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어야지만, 우리는 이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다 죽은 사람으로 하늘나라에 기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께서 잡히시던 밤, 이 밤에 저는 여러분과 제가 함께와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우리 모두 서로 상관없는 사람처럼, 그리고, 오히려 예수그리스도 그분처럼 그렇게 겟세마네에 오르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산에서 죽기 까지 외로워지시고, 통곡하시기 까지 홀로되시면서 그 모든 마음을 아버지 한분께 드리셔 자신이 매달려야 할 그 십자가의 잔을 마시도록 도와달라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던 그 예수그리스도의 그 모본을 본받아야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에, 의연하게 그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면서도 올라가실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구차한 변명이나, 혹은 논쟁도 마다하시고, 오히려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이렇게 죽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고난의 잔을 모두 마시실수 있었던 의연하고 담대한 비결도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에 아버지의 뜻 하나를 붙듣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지체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시던 예수그리스도의 이 기도를 처절할 정도로 외로워지신 가운데 기도하시던 주님, 사람들은 그를 버렸지만, 주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밤에 주님이 아버지와 나누었던 그 깊은 고난을 앞둔 위로의 교제를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동일한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쫓아가면서 고난 받을 때마다, 아버지를 의뢰하면 살아오던 사람은 성경을 침묵하고 있어도, 주님이 아버지와 이 결정적인 시간에 나누셨던 그 교제의 깊이와 즐거움을 알 수 있습니다. 다 알 수는 없지만, 맛보고 추측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을 지나가면서도, 그 힘으로 시련을 이기고, 고난도 이기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십자가를 지고, 승리한 사람들로 한세상을 살아가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볼 때에 한편의 피를 토한 한편의 노래가 되고, 아버지 앞에 살았던 우리의 생애가 순간순간 연약하지만, 신령한 하늘의 거룩한 나라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신과 그리고 이 세상에 이루어질 나라에 하나님 아버지 음성을 들려주시는 외침으로 얼룩진 인생이 되게 다음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 오늘도 서있는 것입니다. 그 정신으로 그 사랑으로 기도하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