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영적 삶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녹취자: 박은희B, 정윤미
유대인들이 성경본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존중심은 그야말로 감탄할 정도로 탁월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하다가 하나님의 존함이 나오면 쓰던 글을 멈추고 붓을 빨아서 다시 잉크를 묻혀서 하나님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어렵게 양피지에다 글자를 써 내려가다가 일정개수이상 틀린 것이 나오면 그 커다란 새카맣게 쓴 양피지를 모두 찢어서 태워버렸습니다. 그만큼 일점일획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할 수 없다라고 하는 신념이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들이 정직하지 못하게 대하는 본문이 딱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사야 53장입니다. 이것은 실로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커다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볼 적마다 이 53장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찔림은, 그가 상함은, 그가 담당 하였도다, 그로 말미암아, 삼인칭 남성 단수가 나오는데 이것은 성경을 아는 사람이면 삼척동자라도 한사람의 공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영적이든 육적이든 어쨌든지 간에 구출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사상이 유대인들에게는 없단 말입니다.
남자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서 다수가 구속을 받는다는 그런 속죄의 개념이 없단 말입니다. 그들의 신약이 없는 것이지 성경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구약학의 역사를 보면 어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말입니다. 유대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 나가다가 그런 사람들은 랍비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그 누굽니까? 사울이 성경을 연구하던 방식으로 그런 식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보일 리가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유수한 신학교 중에서 구약의 그리스도가 예고 되었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학위논문을 써서 통과할 수 있는 학교는 3% 정도 밖에 안 된다고 그럽니다. 물론 후진 신학교야 아무렇게나 써도 학위를 주겠지마는 그래도 아카데믹한 그 분야에서 레벨이 있는 학교에서는 이미 그런 것은 꿈같은 이야기란 것입니다.
저한테 구약 가르쳐주던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분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는데 모세오경을 모세가 썼고 그리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가지 예표가 나온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그러더랍니다. “그 몇 년 전에도 왜 이상한 놈이 하나가 와가지고 모세가 오경을 썼느니 뭐 예수가 어쨌느니 그래가지고 나를 골딱서니 아프게 하더니 너까지 나를 귀찮게 구냐고 그러더랍니다. 그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그래서 이제 그걸 피해서 대개 논문을 씁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보이면 큰일 납니다. 신약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그러면 유대교는 설 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53장을 봐 내려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근데 왜 아멘을 안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데 (이상하다 안 되겠는데 할렐루야) 만났습니다. 만났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 ‘그가 그가’ 라고 하는 것을 해결을 하고 나니까 이제는 그 전제를 가지지 않고는 구약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수분자 유대인 학자가 변화되어서 개신교 신학자가 되거나 가톨릭 신학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 이게 53장이 바로 그 본문입니다.
근데 이제 여기에서 앞부분을 너무 길어서 이제 우리가 읽은 그 본문만 좀 설명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지금 오늘 우리가 읽어드린 그 부분이 대속의 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어떤 면에서 황금과 같은 그런 본문을 오늘 우리들이 읽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명백하게 허물은 우리의 것이고 죄악도 우리의 것인데 그 죄악에 대한 벌을 그가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라고 할 때에 우리를 위해서라고 하는 말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선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소극적으로는 우리를 향해서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구속받은 자들이 맛보고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축복과 그리고 그 참된 은혜를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게끔 그 기업을 보증해 주시는 의미가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허물과 죄악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허물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성품 때문에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짓게 되는 범죄, 혹은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하게 되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이야기한다면, 죄악은 하나님을 향한 고의적이고 의도적이고 그리고 의지적인 대적이요 그리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그 거룩하심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서 오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죄악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속하셔야 했던 우리의 죄가 얼마나 많고 또 양적으로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쩜 이렇게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것을 이렇게 훌륭하게 묘사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의문이 가는 게 꼭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가시면류관을 쓰고 나무에 매달려서 못 박혀 죽는 것은 그것은 사실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나오는 형벌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후대에 만들어질 로마가 야만족이던 시대의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그 잔악한 형 집행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이 그런 로마라는 나라가 생기기도 전에 이렇게 찔리고 그다음에 상하실 것을 그대로 보도함으로서 마치 이사야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을 것뿐만 아니라 어떤 방식의 형벌을 받고 고난을 당하실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본문을 적어 내려간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자신도 그 의미를 모두 몰랐다고 할지라도 성령께서는 분명하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떻게 비참하게 십자가의 형벌로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언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찔리셨고 그리고 상하셨습니다. 죽기까지 두드려 맞으시고 그리고 또 죽기까지 못 박혀서 나무에 매달리신 것을 우리는 상하였다라고 하는 말, 그것보다도 더 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할 수 있는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수많은 말들을 해왔고 또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정의를 세워보려고 몸부림치다가 치어죽은 사람으로서 묘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거룩한 감화와 정신을 끼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의로운 삶, 사랑하는 삶의 모본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정치적인 이유에서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두고 관측되어왔던 역사적인 인간의 모든 사상과 사고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는 수많은 십자가에 대한 편견을 오늘 못 박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과 지혜는 십자가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해왔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 모든 사상을 십자가에 못 박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고 그가 죽기까지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두고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그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분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구속받아야 하나님 앞에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우리같이 낮고 천한 인생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분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달리실 십자가의 의미를 의심할 여지없이 밝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의 감화를 기초로 건축 되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전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매일 십자가를 인하여 우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야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그 거룩한 속죄의 작정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흐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부족한 상태에 있거나 혹은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오늘 하나님께서 존귀하신 그 분이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까지의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이라고 밝히 말하고 있는데도 우리들이 여전히 우리의 손에 죄악을 들고 놓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몰고 온 그 죄의 베개를 베고 그 허물에 이불을 덮고 여전히 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이 친근한 감정을 가지며 말로는 거절하면서도 뒷거래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잘 배우지를 못해서 그러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공부하지 않아서 그럴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기독교신앙에 대한 경험이 아직 어려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 마음이 자기의 허물과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여 굳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비밀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역사적으로 기독교에는 수많은 영성운동들이 있어 왔습니다. 고통하고 영적으로 생기를 잃어버린 시대에는 항상 무엇인가 생기발랄한 것을 찾고 그리고 무엇인가 살아 있다라고 느껴질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하여튼 찾고 싶어 하는 갈증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성경을 펴려고 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갈증은 꼭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성운동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어리석게도 기독교역사는 영성운동의 번성, 그러다가는 그것을 다시 비판하고 주저앉고 다시 지성주의에 빠지고 다시 또 영성운동이 일어나고 다시 또 비판하고 빠지고 하는 바보같이 어리석은 일들을 되풀이 하였습니다. 그런 모든 문제가 어디 있었는지 아십니까? 진정한 기독교의 영성,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그 진리를 이해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체험하는 것을 토대로 쌓아지지 않는 모든 영성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를 말해도 사람들은 마음이 감동받지 않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말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어린 고난이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해도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마음에 가책을 받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다. 그 위에 무엇을 쌓으면 온전한 사람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지키면서 고난을 이기고 유혹을 뿌리치며 시련을 당하면서 인내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안일한 삶을 기꺼이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는 이런 결단과 모든 아름다운 용기는 그리스도 예수를 그 십자가의 의미와 그리고 자기가 바로 예수를 나무에 매달아 죽인 장본인이라는 속죄의 교리를 매순간마다 깊이 느끼는데 그 모든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역사적으로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깊은 감격을 가지고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면서 과연 자신과 이웃이 구원 받았는가 하는 중생의 문제를 십자가 앞에서 다시 물었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대부분 이단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언제든지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 이러 할진데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수시로 들으면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영적인 삶도 후딱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데 거의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떠하겠느냐 말입니다. 평범한 십자가의 도를 전하면 충격으로 받아지는 시대가 오늘날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1989년도에 우리나라 최초로 마틴 로이드존스의 ‘십자가’ 가 번역이 되어서 나왔습니다. 그때 그것을 읽은 수많은 신학생들이 충격이라 그랬습니다. 근데 그 내용이 뭡니까? 십자가의 도리를 다 기억합니다. 일장서부터 시작을 해서 죽 몇 장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것까지는 구원받을 수 없고 죽어야 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의 죄 사함만 준 것이 아니라 권세와 능력도 아울러 주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아주 평이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을 읽은 우리나라의 교회의 목회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게 최초의 십자가라는 이름을 들고 나온 최초의 책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공부 하기 전에는 모르겠는데 신학 공부한 이후로. 그리고 두 번째 나온 책이 누구 책입니까?
(찬양)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어라
여러분들이 만약에 복음의 의미를 알고 조국교회 강단에 거룩한 복음을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바로 그때 말씀드린 그 문둥이들입니다. 몇 가지가 바로 잡히는 것 가지고는 한국교회가 하나님 앞에 설 길이 없습니다. 윤리운동이나 해가지고 이세상이 변화되기를 기다린다면 차라리 콘크리트에다가 구슬을 심어놓고 싹이 나기를 바라는 것이 낫지 영혼들이 듣고 싶어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없이는 진정한 영적인 삶이 형성될 수 없고 진정한 영적인 삶이 형성되지 아니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찾아나갈 수 없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며 자기가 누구이고 그리고 어떻게 구원받은 인생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야하고 이 땅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부지하게 버려두시는 동안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아무런 대답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수없이 오랜 동안 교회생활을 해오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들으면서 눈물 흘려본 것은 공교롭게도 집사 때 제가 어린아이들에게 설교하면서 흘린 눈물이 그것이 뜨겁게 흘린 눈물의 최초였습니다. 세례 받을 때도 물론 흘렸지만 뼈 속 깊이 파들어 가는 그 십자가의 감격을 느껴본 것이 그때였단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 싸우고 분투하고 이기고 승리하고 실천하고 애쓰고 살아가는 모든 우리의 인생을 한줌에 꽉 짜면 수세미같이 딱 한 움큼이 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불변의 구원 이것입니다.
다른 모든 신령한 정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정서도 정결하고 순결한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아래 있을 때 우리는 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그 생명도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날마다 이기고 분투하고 승리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원동력인 이 십자가에 대한 구속의 도리를, 구원의 도리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고 믿음의 생활을 해나갈려고 하니 굴삭기를 버리고 호미로 우리의 삶에 공사장을 파헤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처지가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이 위대한 교리의 뚜껑을 이렇게 열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겸비해지는 길은 우리보다도 더 훌륭한 사람을 만남으로서 겸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겸비해지는 것은 날마다 우리는 우리의 손을 보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그 손,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으나 여전히 우리 손에서는 예수를 죽인 피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삼으셨으나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면 그 십자가를 깨닫게 되고 십자가를 깨닫고 나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아들로 불러주셔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셔야 했던 죄와 더불어 싸우고 우리의 허물과 더불어 싸우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한때 고통가운데 두었던 그 모든 불법과 불의와 그 모든 옛 죄악들을 도말하는 도구로서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사 당신의 친 백성으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과거를 이렇게 돌아봅니다. 그러면 제 생애 가운데 비교적 깨끗한 영적인 삶을 누리던 때가 언제였나 했더니 십자가에 대해서 무시로 감격한때. 여러분, 평소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서 잘 들어보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던 사람이 고난주간에 금식을 한다 뭘 한다 하면서 지지궁상을 하면서 뭔가 한번 가슴 속에서 뭔가 슬픔을 짜내보려고 하는 것처럼 바보 같고 어리석고 한심해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영적인 삶의 근원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에는 그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죄인들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때 존귀하게 쓰실 때에는 전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쓰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보며 확인하고 고난을 받을 때에는 우리같이 불결한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해서 고난 받게 하신 것을 인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모든 이 힘은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지식과 경험과 감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그 사람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그리고 영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 사람 속에 진정한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다면 저는 그 영성을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일단은 믿지 않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영적인 은혜는 오로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는데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오가는 샬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경험 없이 이런 것들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늘날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커다란 문제인지 보시길 바랍니다. 아니 문제라고 말하기보다도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기초서부터 다시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문제를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이 그 십자가에 대해서 보여준 병적일 정도의 그 집착은 말입니다 결코 개인의 독특한 개성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뛰어난 모본을 그 설교자가 보여준 것입니다. 그의 설교는 하나의 커다란 두 개의 타원형의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무슨 본문을 설교하든지 간에 결론은 항상 꼭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는 성경의 해석은 온전한 해석일수 없다 이겁니다. 성서가 의미하는 해석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개의 타원인데 중첩되는 부분에 그리스도 예수가 있고 한쪽은 고난이고 한쪽은 부활입니다.
어느 날 찰스 스펄전이 자기의 서재에서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우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참 지혜롭고 감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문학을 알고. 문을 열어보니까 남편이 우는데 기도하면서 우는 것과 그냥 우는 것은 살을 맞대고 살아온 부부니까 본능적으로 알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보니까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그러니까 교회도 하고 하니까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사람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은 너무 이상해” “왜요?” “기도하기 전에 고요히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수난의 사건을 묵상하는데 도저히 내 마음에 감동도 없고 눈물도 나오질 않아. 내가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살았길래 매일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것일까 라는 것을 생각을 하니 내처지가 너무나 불쌍해서 지금 울고 있다오.”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어느 젊은 신학생이 찰스 스펄전에게 “목사님, 목사님은 실망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할 때에 그는 한마디로 딱 잘라서 말했습니다.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형제님, 저는 단 15분도 그리스도 예수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예수 죽이는 것, 그리고 내가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 나 같은 사람을 형벌 받을 종말의 운명에서 건져내어서 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늘 그 그리스도 예수를 느끼며 살아간 삶을 읽으면서 아, 제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갑자기 나의 설교는 삼류 가수의 모창처럼 생각되고 찰스 스펄전의 설교, 육성으로 들어본 적이 없지만 파바로티의 테너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 비수와 같은 깨달음을 하나님이 하나 주셨습니다. ‘남준아, 네가 죽어야 네 안에 있는 나 그리스도가 사느니라. 날마다 날마다 예수 죽인 나는 죽고 내가 피 묻은 손으로 못 박은 예수는 사셔서 그분으로 내안에 일하게 하시고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시고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말하게 하신 이런 거룩한 사랑 속에서 살지도 못하고 죽으면 이 슬픔이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눈을 감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선지자 이사야는 그리스도 예수가 오시기에 700여 년 전에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그토록 오랜 이스라엘의 역사에 죄와 징벌과 타락과 용서와 방탕과 허물과 또 심판과 이런 불순종과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실 그 미래의 전망을 인하여 가슴 벅차는 감격으로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말했는데 만약에 이미 밝히 우리 앞에 있는 십자가에서 눈을 감으면 떠오르고 책을 펴면 다가오는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의 형상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이사야처럼 감격하지도 않고 시인처럼 울지도 않는다면 아마 이사야가 일어나서 우리를 책망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자꾸 제 얘기해서 미안한데 최근에 한 두어달 동안에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설교자의 길이라는 것이 복잡하고 굉장히 많은 준비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요새 제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지혜가 없고 그리고 말씀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보고 가슴 아파 하시고 눈물 흘리심에도 불구하고 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의 그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버리고 치워버리고 가슴에 다가오고 느껴지는 것을 붙들고 사니까 우리는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가슴은 세속주의 같고 삶의 방식은 유교적이고 그리고 행동하는 것은 불교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오늘도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을 인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에 그 십자가를 보면서 그 고난과 그 형벌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인정하더라도 우리들이 그것을 인격적으로도 깊이 감동 받으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머리에 지배를 받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생각일 뿐이고 무엇이 있든지 그 가슴에 지배를 받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현재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영적인 삶의 방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은 내가 이전에 경험했기 때문에 오늘날은 반복될 필요가 없거나 아니면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은 신앙과 영적인 삶의 도에 초보에 속한 것이고 지금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사건 하나를 가지고 감격하기에는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의 진리와 너무나 광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메마르고 피폐한 영적인 삶이 유행하던 시대는 그런 식으로 복음의 진리를 비껴간 것입니다. 비껴간 것입니다.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말입니다. 이 문제를 여러 번 설교 했는데 나의 가장 훌륭한 회중들이 있다고 하는 열린교회서도 조차도 설교자의 저 말이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하고 그리고 저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인 삶의 이 실패를 타개하는 키워드일 것이다라고 깊이 빨아들이면서 받아들이는 느낌을 거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증거를 대볼까요? 댑니다. 우리가 말하기에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입니다. 지금은 그렇든지 말든지 그건 그만두고 어느 한 순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앞에 피할 수 없게 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 때가 없다면 그건 좀 생각을 많이 해야 됩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할 때에 가슴에 밀려온 것은 그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패스보드를 얻은 것 때문에 감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은 뭐냐 하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 면류관 쓰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고난당하는 주를 먼저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깊이 회심할 때 부르던 찬송가는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는.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그런 찬송가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처절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깊이 느끼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2000년 전에 성취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차가운 역사적인 사건이 그 회심하는 순간에 자신의 가슴속에 최대의 사건으로 떠오르면서 그 십자가에서 당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처절한 고난은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누군가 회심하는 장면을 봤는데 그렇게 회심 안하면 구원을 못 받는다 그런 뜻은 아니지만 막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전율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앞에서 막 전율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강심장인지 모르는데 좀 끔찍한 상상을 하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만약 여러분이 홀로 있는데 그 앞에 한사람이 있고 누군가가 나타나서 도끼로 그 사람을 처참하게 짓이겨 죽인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 거기서도 껌 씹을 수 있으면 여러분은 정신병자들입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막 처절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딱 느끼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뭐냐 하면 티끌만한 죄가 있고 크게 호떡만한 죄가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죄가 동일하게 치를 떨리게 무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깊이 회개하고 정결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그 마음에 비추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니까 그 통로를 타고 그리스도 예수의 2000년 전에 이루어진 십자가의 고난이 성령을 통해서 오늘 자신의 마음속에 처절하게 각인 되는 것입니다. 이게 거룩한 삶의 이르는 모든 원동력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것입니다. 죄인의 가슴에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지금은 우리 눈앞에 반복되지 않는 2000년 전에 그 사건이 오늘 우리의 가슴속에 다가와 가지고 우리를 깊이 감격시키고 그것을 현재적으로 그 고난에 동참하는 체험을 느끼게 해주시는 것은 사람이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하실까요? 성령이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깊이 회개하고, 정결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그의 마음에 비추어, 하나님과의 진정한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니까, 그 통로를 타고, 그리스도예수의 2천 년 전에 이루어진 십자가의 고난이 성령을 통해서 오늘 자신의 마음속에 처절하게 각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에 이르는 모든 원동력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것입니다. 죄인의 가슴에 그러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지금은 우리의 눈앞에 반복되지 않는 2천 년 전의 그 사건이 오늘 우리의 가슴속에 다가와 가지고, 우리를 깊이 감격시키고, 그것을 현재적으로 그 고난의 동참하는 체험을 느끼게 해주시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하실까요? 성령이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우리가 죄가 사라지고, 정결한 심령이 되면, 활발하게 우리를 지배하시면서 활동하시지만, 우리가 죄가운데 깊이 빠지게 되면, 성령을 통해서 신적인 것들을 느끼는 감각들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퇴화됩니다. 이런 배경이 아까 말씀드린,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감격을 간직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죄 때문이라고 단언한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최대의 해결이고 열쇠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나는 다른 데에서는 물론이고, 우리의 교회에서 조차도, 설교자의 이 발언이 굉장히 심각하고 무게 있게 받아들여 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저는 깜짝 놀랍니다. 그러니까, 다른 방법으로 영적인 삶의 어떤 변화를 도모해 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러다보니까 미혹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단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고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후에 이스라엘의 나라가 무너지고, 완전하고 영원한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질 때에 그 나라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그리고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체험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이 대속의 교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제주도에 내려갔는데, 제주도의 목회자 한분이 그런 이야기를 저에게 물었습니다. 강연을 다 듣고 나서, “그러면 목사님, 목사님은 향후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제가 서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60년 후에는 정확하게 2 세대입니다. 참된 기독교의 형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으리” 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수난의 교리가 단지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교리로 전해지는 것 가지고는 교회의 참된 생명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대해서 경험하고, 느끼는 일들이 그치기 시작하면, 그리스도예수의 참된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어도, 어떤 식의 반응을 보이냐 하면, “그래,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어, 누가 아니래, 우리 중에 누가 그것 부인하는 사람 있어”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소위 이야기 하는 지식으로 만족하는 주의입니다. 이것들은 교회의 타락과 그리고 그 모든 기독교 사상의 오염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된 기독교의 신앙은 십자가에 깊이 감격한 사람들, 그 사람들에 의해서 그 참된 순수성이 유지되고, 보존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가 징계를 받은 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위에 우리의 샬롬이 있고”, 여러분이 우리위에 무엇이 임했어야지 만 마땅합니까, 사도바울이 이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더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었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우리위에 샬롬이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평화고 사람들 사이에 오는 평화입니다. 그 완전한 샬롬이 저주와 징벌대신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이 바로 무엇 때문이었다고 말합니까? 그리스도예수께서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에 그의 징계를 받으시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그 끔찍한 징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샬롬이 머물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위에 이전에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머물렀던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위에 쏟아 부어졌던 것입니다. 허물을 저지르고, 죄 가운데 빠져서 하나님을 원수처럼 대적 했던 것은 우리인데, 우리에게는 화목이 임하였고, 우리위에 쏟아져 부어야할 하나님의 불붙는 진노는 그리스도예수 위에 쏟아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형벌인 십자가에 예수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게 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사람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가장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으시므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비껴 같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이제 내가 내 아들을 죽이는 것을 보면서, 너희는 죄의 무서움에 대해서 알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앞에 실현을 해 보이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그리스도께서 평범한 죄인이었더라면, 그가 받으시는 고난이 그렇게 극적으로 우리의 가슴에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에 매달려서 처참한 고난과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는 분은 죄 없는 어린양,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흠없고, 티 없는 그리스도 예수 머리위에, 그 육체위에 쏟아 부어지는 그 처절한 고통과 그 진노를 통해서 우리는 새삼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담을 쌓게 만들었던 이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에 대해서 예민한 정도만큼만 죄에 대해서 민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에 대해서 예민한 것만큼만 죄에 대해서 민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이나 도덕적인 가책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가슴속에 십자가로 말미암는 감격이 샘솟듯 솟아난다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죄는 우리의 인격, 우리의 존재와 구별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기도의 세계는 엄청난 변화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고는 진정한 부흥이 임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흥이 일어날 때 그 핵심적인 메시지는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위에 쏟아 부어져야 할 그 진노가 샬롬으로 바뀌게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지불하셨던 대가를 기억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 모든 사랑을 기억하기는 좋아하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지불하셨던 진노는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그 죄에 대한 형벌 때문에 무서워 떨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감격할 권리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형벌 받으실 것을 미리 예고하면서, 샬롬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께서 주신 이 샬롬은 단번에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이루신 샬롬이지만, 그러나 이 샬롬이 계속 지켜지는 유일한 길은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의미가 우리 삶과 하나님아버지와 우리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지배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샬롬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회개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아주 그 회개의 의미를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잃어버렸던 십자가의 정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별로 안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제 마음에 뜨겁게 아멘으로 와 닳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설교자가 느끼면서 말해도, 그것이 우리의 가슴속에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불 붙여져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한 가지를 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라고 말하는데 미르파라는 분사가 쓰였습니다. 이것은 치료하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다는 말에서 온 수동형 분사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십자가는 그 자체가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는 소극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깊이 질병 들고 망가진 것을 고치는 적극적인 치유의 힘이 있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이사야의 글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 전에 병든 자였고, 찢긴 자였습니다. 마음도 그러했고, 우리의 몸도 그러했습니다. 우리의 정신도 그러했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찢긴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9장에서도 입증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던져지고 그리고 잃어버린바 된 존재들, 그들이 맹수들의 밥이 되고, 그리고,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어서, 수시로 약탈을 당하고 찢기고, 그렇게 뜯기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뜯기고, 찢기는 일들이 반복되는 가운데, 그들이 그렇게 찢기고 뜯긴 그 상태 몸으로 그리스도예수 앞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왔을 때,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도 우리의 영혼의 상태도 모두 그렇게 찢긴 자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온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어도, 모두 찢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십자가가 그에게 감격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이처럼 쏟아지는 진노만 거두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진정으로 체험하고,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와 그 은혜를 아는 지식의 빛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독특한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를 잘 안 믿습니다. 모두 독특한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사람들에게 치유책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 상처보다도 훨씬 큰 그 병든 영혼의 상처보다도 훨씬 커다란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을, 치유하시는 능력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위에서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말이죠, 정직하게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그리고, 우리의 이웃이나 지체들의 영혼의 상태를 바라보면, 여러분은 바라보면서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내리고 계시는지 한번 마음속으로 대답해보십시오. 여러분 머릿속으로 논리적으로 말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을 치유하는 십자가의 능력이 더 권능 있다고 받아들여집니까? 아니면, 십자가 정도 가지고는 잘 고쳐지지 않는 모진 것이 상처다. 병든 마음이나, 영혼의 상태다. 여러분은 둘 중에 어떤 생각의 암시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십자가의 도가 전해지고, 이 십자가의 도리가 사람들에게 이해될 때에 깊이 역사하시면, 그 역사하심의 깊이만큼, 이 십자가의 진리를 통한 더 크고, 광대하고 강력한 치유력이 있는 그러한 치료의 권세를 십자가를 통해서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같은 것이 아닙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심지어는 진리를 깨닫고 흘리는 눈물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지나가는 것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가 차를 타고 다니거나, 시장을 가거나 학교를 가거나 직장을 향해서 걸어가면서도, 문뜩 예수님의 사랑이 놀랍고, 고마워서, 울컥 감사하는 느낌이 들고, 눈물이 흐를 수 있습니다. 흐르는 눈물은 무엇이든지 똑같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십자가의 도는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고, 우리의 영혼을 파헤치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영혼 그 자체를 처절하게 파헤치면서 지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좀 끔찍한 비유를 들어서 안됐지만, 비무장지대 같은 데에서는 실탄 사격을 많이들 하는데, 새 같은 것이 날아가면, 두두룩하고 갈깁니다. 요즈음 총이 얼마나 잘나오는지, 총을 탕 쏘면, 똑바로 들어가서 팔에 탁하고 꽂히는 것이 아닙니다. 총알이 쭈욱하고 달려가서, 살갗에 탁 닫는 그 순간에 총구를 이렇게 들여다보면, 총구가 똑바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꽈배기처럼 속에 나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총을 만약에 총알을 회전시키지 않고 탕하고 쏘면 똑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고무공 세게 던지면, 바람에 불려서 막 딴 데로 가듯이 총알도 바람을 타고 막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총알이 날라 갈 때에 굉장히 빠르게 회전하면서 나아가도록 그런 메커니즘으로 총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결과가 나오냐 하면, 총탄이 좀 커다란 총을 가지고, 웬만한 새를 꽝하고 쏘면, 총알이 날아가서, 새의 몸에 맞는 순간에 몸속에 들어가면서, 거기에서 돌개바람처럼 총알이 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 살을 파헤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새는 쏴봐야 다 거덜이 나버렸고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그런 식으로 영혼을 파헤치고 지나갔는가, 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이 얼마나 교회의 십자가의 도, 정리된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느냐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십자가의 도가 전해지고, 매일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도구들을 벌여놓을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을 사용하셔서 사람들 속에 치유함을 주시고, 그리고, 형벌 받을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샬롬을 가져다주시고, 그리고, 그 샬롬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단호하고 거룩한 십자가의 정신을 사로잡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설교를 하고 하면할수록,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부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설마 열린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가끔 들었다고 말 할 수 없겠죠?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할 저와 우리교회의 한계입니다. 사람들이 머리는 정리가 되고, 가슴에 감동도 받습니다. 그러니깐 가끔 보면, 제발 좀 코풀고 눈물 닦은 것은 주머니에 넣고 가야합니다. 어제도 어떤 지체가 저 뒤에서부터 다 걷었습니다. 자기가 푼 거야 자기가 코를 마시기도 하니까 더럽지 않지만, 남이 어떻게 그것을 만질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거기까지입니다. 그것이 제자신이 하나님 앞에 느끼는 고통입니다. 만약에 여기서 저나 여러분들이 “우리교회는 십자가가 선포되고 있어, 저는 십자가를 선포할 때 우는 사람도 있어”, 이런 것을 가지고 만족하면 조국 교회는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몇 사람들이 서울시내 한 구석에서 종교적인 복음을 빙자한 종교에 감상에 빠졌다가 사라진 사람들이 있었더라, 그것도 역사는 기록 안 해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전할 때마다 뼈저리게 느끼데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 역시 장작은 우리가 정성껏 벌려놓고, 주위에 두루 파고, 그리고 그 흙 주위에, 물도 뿌리지마는 그러나, 그것을 불태우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이시라고.
그전에 김윤길 목사님 교회에서 십자가 사경회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김 목사님이 교인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참, 성도여러분 이상해요. 뭐가 이상하냐하면. 말로는 막 박수치고, 그러는 부흥회 싫다고 하면서도, 거기에는 사람들이 지금도 모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설교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틀째 집회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한없이 마음이 비감했습니다. 내려와서 제가 김 목사님한테 그랬습니다.”목사님 내가 부흥을 바라보고, 눈물만 글썽거리다가 죽으면 억울해서 어떻게 눈을 어떻게 감지“ 그러니깐 목사님을 고개를 푹 숙이더니,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정말로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늘 바라보고, 그리워하고 눈물만 글썽거리다가 죽으면, 얼마나 비극일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장엄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깨트려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치유하고, 자신을 향하여 무너져 내린 관계를 고쳐서, 그래서, 상처에 연연해하지 않는, 건강한 군사들로 진리를 위해서 살면서, 얼굴에 가득히 악마의 손톱이 할퀴고 지나갈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그렇게 한 세상을 용사와 같이 살다 죽을 그런 꿈들을 우리는 이 십자가의 도리 앞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