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온전하게 하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라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 1:8-11)
녹취자 : 김세나
오늘 다음 부분을 나가야 하는데 사실은 어제 ‘헤 아가페’에 대한 설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설명을 조금 더 드린 다음에 오늘 공부할 내용인 ‘그렇게 사랑을 풍성하게 해서 어디에 쓸 것인가?’ 이 문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꽤 긴 강의였지만 요약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 속에서 자신의 선교 사역의 비전을 놓고 기도하였는데, 그 일생 동안에 선교 비전이 목양에 의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고, 그것을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편지 속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 긴 세월을 살았지만, 성경 전체에서 목회의 비전에 대해서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글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 선교요, 목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교와 목회는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선교와 목회는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일어나게 해 주는 것이 선교적인 비전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신기한가 하면, 선교사와 목회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다른 것 때문에 선교사나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사랑’ 때문에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됩니다. 마르틴 루터 같은 경우는 그 당시 선교사가 별로 없었지만 목회자의 소명과 평신도의 소명을 나누는 것에 대하여 회의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견해가 상당히 옳다고 봅니다. 루터의 설명에 의하면, 목회자의 소명과 평신도의 소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의 소명이 극대화 된 것이 목회자의 소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아예 처음부터 종류가 다른 계급으로 부름 받은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을 드리면서 그 사랑(헤 아가페)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설명을 드렸습니다. 사실은 오늘 아침에 일어나 가만히 생각하니까 제가 너무 진도를 빨리 나갔습니다. ‘헤 아가페’에 대한 설명이 사실은 이 뒤의 모든 구절들을 좌우하는데, 다 잊어버리셔도 이 그림 하나만은 기억해 놓으시면 되겠습니다.
장작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불이 타 오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는데, 이 사랑의 불길은 두 가지입니다.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를 가지고 타오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이 타오를 때, 불을 지필 때 말입니다. 옛날에 시체를 태울 때 시체가 너무 안타면 뭘 사용했는가 하면 볏짚을 사용하였습니다. 볏짚의 불길의 세기는 다른 어떤 가연제와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산더미처럼 쌓아 두어도 불을 지르면 몇 분 만에 다 타 버립니다. 이처럼 사랑의 불이 계속 타오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이 ‘에피그노시스’는 단순히 지식 나부랭이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만물의 근원이 되는 하나의 로고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태어나고 지탱되고 붙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지식들이 연결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만물에 대한 지식으로 들어가는 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로마서 같은, 골로새서 같은, 에베소서 같은 유장한 사상을 풀어낸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베드로는 그런 대목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만난 예수가 더욱 위대하냐? 바울이 만난 예수가 더 위대하냐?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의 권위는 사도 바울의 권위와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놀랍게 오늘날 기독교 사상의 위대한 줄거리들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종교적으로는 쥬다이즘이 배경입니다. 그는 그러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수많은 지식에 찬란한 빛들이 들어오면서 빛들이 연결되는 어마어마한 지식의 밤하늘의 지식의 별들의 잔치를 본 것입니다. 은하수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지극히 일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고, 불행히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은 읽으면서도 그것이 이러한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에피그노시스’를 설명을 드렸습니다. 어제 ‘그노시스’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히브리어의 ‘알다’라는 것과 연결되며, 원래 성경 속에서 이 지식의 사상이 사랑과 절대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또한 ‘아이스데시스’를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총명이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너무 피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두루뭉술하게 끝냈는데, 이것을 붙들고 늘어지면 진도를 전혀 못 나가고 저는 아마 다음절을 다 하지 못하고 선교사대회를 마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 되기 때문에 목표한 데까지는 가보겠습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사물에 의한 온전한 지식이고, ‘아이스데시스’는 초월적으로 우리에게 들어오는 판단력, 지혜, 감각도 해당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두 가지를 계속 집어넣으면서 사랑의 불길이 타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나 목사, 혹은 평신도 선교사님들도 계시는데 똑같이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돌보는 사람의 사역의 형태는 다양할지라도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들 속에 사랑을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자신이 비즈니스로 선교를 하든, 무엇을 하든 마지막에는 결국 이 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헤 아가페’였습니다. ‘아가페’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이제 구약에서는 헤세드의 개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사랑의 개념은 지식과 사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어제 제가 잠깐 ‘에피그노시스’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된 것이 먼저입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관념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관념, 소위 이야기하는 이데아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 생각이 없다.’ 생각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관념에 있어서 논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가 당연히 먼저입니다. 존재가 있으니까 사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존재하신 그때가 영원한 것처럼 그 관념도 영원합니다. 그 관념 안에서 하나하나의 사물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완전히 아는 지식 속에서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세계를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맞짝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영적인 세계이고, 지상의 세계는 물질세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물질의 세계를 완전히 물질로만 만들어버리고 끝냈다면 두 세계는 맞짝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두 세계는 단절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놀랍게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만 영혼을 주십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네페시 하야’를 설명해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셔서 영이신 하나님과 인간이 교통을 하게끔 창조하셨습니다. 이 교통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하나님은 성삼위하나님으로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혼자서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관계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랑이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다(God is love)’ 할 때 사랑이 아니었다가 사랑이 된다든지, 사랑이었다가 아니었다가 되었다가 아니게 된다면 is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A는 B이여야지만, A는 B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이 교통하셨는데 이 교통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이렇게 삼위로 교통하시는 것 같이 이 모든 세계를 상호연관 속에서 존재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서로 연관을 이룹니다. 제일 먼저 최초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연관이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과의 교통을 힘입어서 인간은 생명을 누리고, 그 다음에 사랑을 받게 됩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에게는 육적 생명을 주시지만, 인간에게는 육적생명과 함께 영적생명을 주십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정의를 내릴 수 없지만, 생명은 기본적으로 메타볼리즘(Metabolism)입니다. 마치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고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무 것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있는 것처럼 작용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가 맛있게 식사를 드셨습니다. 집에 가면 출출하니까 간식을 주지 않겠습니까? 또 먹습니다. 그리고 잡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피로가 풀리면서 힘이 싹 솟습니다. 점심쯤 되면 다시 배가 고픕니다. 한술 떡 먹으면 힘이 쫙 납니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런데 스스로 있지 않은 것은 언젠가 끝나는 때가 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 생명이 내 안에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을 덕 입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육적 생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도 주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체처럼 영혼에도 또 다른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을 모릅니다. 이것은 오늘날 전개되는 이 세상의 비극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죽은 상태가 됩니다. 영혼의 죽은 상태를 이야기 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들을 창조하셔서 결국 만들고 싶었던 사회는 사랑의 사회입니다. 잘 보십시오. 맨 처음에 이렇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두 사람을 하나의 몸으로 창조하십니다. 두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두 사람은 한 몸입니다. 이것이 제일 먼저 계시되는 것이 바로 결혼을 통해서 계시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결혼의 원리를 정확하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어떻게 교회와 연결되고 마지막에는 온 인류로 이것이 연결되고 성취되어 녹아드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조금만 설명을 드리면서, 이렇게 해서 어떻게 가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 진도를 나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두 사람을 하나의 몸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누가 배운 것이 아니라 아담이 하와를 보았을 때, 물론 하나님이 만드셨을 때 아담도 예쁘게 만드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왕 만드시는데 하와도 괜찮게 만드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고백할 때 굉장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살과 뼈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설마 그 살이 뱃살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 뼈가 튀어나온 광대뼈를 말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무엇 중의 무엇’은 the best choice, 히브리어로 마호르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쉽게 설명 드리면, 우리 살 중에는 덜어내도 되는 살이 있지 않습니까? 돈을 주면 뱃살도 빼 줍니다. 아예 도려내 줍니다. 진공청소기 같은 것을 집어넣어서 기름과 피하지방과 세포 찌꺼기들을 확 빨아내 버립니다. 4-5kg을 빼서 핏덩어리들을 들어서 보여줍니다. 그러한 살은 살 중의 살 아닙니다. 없어도 괜찮은 살들이고, 많은 여성들이 없기를 바라는 살입니다. 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뼈를 잘라내도 되는 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질렀을 때 생명의 지장은 없지만 잘라내도 되는 뼈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발가락 하나 망가져서 도려냈다고 하였을 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척추를 형성하고 있는 신경과 연관된 중요한 뼈는 1cm만 깨져도 죽거나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전신마비상태로 들어갑니다. 살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진공청소기로 빼는 살 말고 심장의 살은 5mm만 흠집이 나도 죽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종류의 살의 뼈라고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하와에게 한 고백은 사람의 모양을 그려내고 육체미를 그려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헬라문화적인 마인드입니다. 히브리적 사유는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의 사유입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그냥 성경을 읽는데 조선 공학자들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읽어보니까 배의 치수를 말하는 기준이 배 속에서 본 치수라고 합니다. 기준점이 배 속에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히브리적인 사유입니다. 남자가 준수하다고 할 때, 남자다움이 가득한 사람이 준수한 것이고, 아리땁다고 할 때 아주 요염한 아이돌 가수 같은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적합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아담이 하와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이야기 하였는데, 이 여자가 같은 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와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하여 여자가 아내로 취하였다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아담의 개인적인 고백 뿐 아니라 하와와 한 몸을 이룬 이미 공동체가 된 사람으로서의 고백입니다. 그 뒤에 하와가 “나도!”라는 고백 하나 더 들어갔으면 좋았겠습니다. 그런데 굳이 성경이 그렇게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사랑의 고백에 동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남자는 강한 완력과 경제적인 능력,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우월한 힘을 가지고 여성을 폭압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선교사와 목회자 사이에도 면면히 그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웃을 일이 아니라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뭐냐 하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 결혼을 합니다. 아담이 이 고백을 할 때, 상태를 말씀드리면 상태가 깊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이 사람은 나님으로부터 충만한 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충만한 영적인 생명을 누리고 사랑으로 교통하는 가운데 지성은 아주 밝게 빛나고 있었고, 정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가운데 있고, 의지는 올곧았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으니까, 그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사랑에서 이탈한 한쪽으로 쏠려간 자의 자의적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 하나의 ‘헤 아가페’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evil. 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정말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청교도를 30대 때 아주 좋아했고, 지금도 청교도에 빚을 많이 졌고, 제가 청교도 서적을 4,000권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청교도 좋아하지만, 청교도 좋아하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은 하나님이 정한 질서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에게서 당신의 지혜로 만물이 태어나고, 당신의 사랑으로서 이 모든 것들을 은택을 입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결국 만물을 창조하고 당신과 관계를 맺으실 때, 그러한 관계 안에 질서가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있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정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복수의 질서입니다. 복수의 질서.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은 코, 눈, 입, 하나하나도 예쁘지만, 그것만 가지고 미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예쁘긴 한데 도저히 제자리가 안 되는 사람도 모델로 나옵니다. 부분 모델입니다. 얼굴은 못 나오고 코만 나온다든지, 손만 나온다든지, 귀만 나옵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가 예쁜 사람은 많지만 미인은 아주 드뭅니다. 여기에 몰려 있는 것입니다. 빈말 인거 아시죠? 여러분, 화장품을 영어로 뭐라고 합니까. cosmetics. 코스모스에서 온 것 아십니까? 희랍어로 우주, 질서입니다. 화장품은 질서가 깨진 얼굴을 질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들어서 화장 하지 않는 것은 실례입니다.
이러한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만물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현대 사상가들은 폭력이라고 합니다. 누가 감히 인간의 자리를 규정할 수 있는가 말합니다. 이것은 몇몇 특권 계층들이 자신의 지배를 염속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논리로서 이것을 종교에 투영하여 신앙으로 이용하고, 학문에 투영해서 인간의 사상에 이용하고, 윤리에 투영해서 자신의 이익이 되는 도덕의 질서를 만든 것이 기존의 사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때려 부수지 않으면 수많은 인간은 이 안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면서 반기를 들고 일어섭니다. 이러한 사상은 그리스의 루크레티우스 시절부터 있었지만, 이후에 그러한 것들이 면면히 흐르다가 폭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현대사상에서는 니체나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폭발적으로 일어나면서 그의 제자들이 철학자로 등장하고 이러한 것들이 세계 질서를 뒤 흔들어 놓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68년이었습니다. 프랑스 파리 학생 혁명을 통해서 이러한 사상들이 온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인류가 유지해온 성경이 이야기 해 온 것입니다. 그러면 ‘악’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질서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결국 악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결국 ‘헤 아가페’의 문제입니다. 왜 악이 사랑의 문제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랑을 경험적으로만 배우게 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에 사랑을 아예 주셨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성향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 그 자체를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주셨는데, 처음에 타락하기 전에는 사랑과 지혜가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떨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상하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지금 어제부터 한 저의 설명을 들으면 그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부터 면면히 흐르고 있는 이 지혜와 사랑의 하나 됨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나타남입니다. 그러한 지혜와 사랑이 나타나서 이 모든 것이 다 통합을 이룹니다. 그것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그러면 공의가 어디 있는가 물을 것입니다. 그것 또한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상 깊은 말을 남깁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안에 사랑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한 사람이 사랑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안에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사랑과 정의는 하나로 수렴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고 그리고 사랑은 정의에 의해서 사랑이 성취가 됩니다. 결국 악은 이렇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질서가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놓은 또 다른 질서에 대해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헤 아가페’와 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고통과 이러한 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헤 아가페’를 떠난 것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한 몸으로 창조하신 것이 어떻게 경륜이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타락 한 다음에 둘이 싸우지도 않았는데, 저 여자 때문에 내 인생 다 망쳤다, 아담이 단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과의 관계는 파경으로 이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타락한 다음에도 결국 이 인류를 한 사랑 안에 살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고 하는 경륜과 인간이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도저히 그렇게 살지 못하고 또한 살지 않는 현실과의 끊임없는 갈등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면서 유장한 구약의 내용들이 펼쳐집니다. 결국 뭐냐 하면 이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고백이 사실은 다분히 이러한 사랑 속에 들어간 고백이 아닙니다. 왜 입니까? 당연히 외모로 보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에게, 결혼할 때 외모를 너무 많이 보지 말고 유효기간이 6개월 밖에 안 되니까 신앙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라고 했더니, 형제 중 하나가 “저는 신앙이 좋고, 평범한 여자와 만나서 살기 보다는 예쁜 자매와 만나 연단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연단이 어떤 것이 어려서 잘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결국 그렇게 되면 안 되고, 남녀가 결혼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분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너무 예쁘고 사람이 괜찮아서 자기도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고 딱 결혼을 해 버렸습니다. 살게 될수록 상상할 수 없었던 약점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때에 ‘아, 내가 진짜 선택을 잘못했구나. 가전제품은 10년을 좌우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선택해서 60년이 좌우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아, 저 사람에게 저러한 결함이 있었구나. 만약에 나를 안 만나고 살았더라면 저 결함을 그냥 가지고 부딪히고 깨지면서 살았을 텐데,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게 해 주신 것은 저 여자가 가지고 있는 저 결함을 내가 보충해 주어서 온전한 여자가 되게 하라고 저 여자를 나의 아내로 주셨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도대체 아멘의 의미와 웃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내도 똑같이 남편을 보면서 남편에게 진짜 이상한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상하게 방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조상적부터 내려오던 이상한 것, 거의 운명입니다. 그때 생각합니다. ‘나를 안 만났더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겠구나. 얼마나 힘겨운 인생을 살아야 했을까? 그나마 나를 만나게 해 주셨구나.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을 주어서라도 저 남자가 저런 결함을 가지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부분을 내가 채워주자! 그러면 나는 어디 있는가?’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게 아닙니다. 교역자 중 한명이 얼굴 안색이 별로 안 좋았습니다. “너 요새 사모와 사이가 안 좋구나!” “네” 그래서 뭐 이렇게 이렇게 힘들게 한다고 해서,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아라. 나는 없다.”
그것이 한 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온전해 지는 것을 보며 충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게 순식간에 뿌지직 하고 타오르는 10대 20대 아이들이 이야기 하는 그 사랑이 그 사랑이 아닙니다. 나이가 얼마인데 철이 들어야지, 그러한 사랑을 찾아서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달아 가면서 비로소 내 안에 나 아닌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한 남편과 한 아내를 만나서 일생을 같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둘이 사랑해서만은 할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식으로 제한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아내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본다면 그것을 아내의 것이라 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못되게 굴 때도 있고, 용돈 안 줄 때도 있고, 괴롭힐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실망을 시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나님 때문에 아내를 사랑한 사람은 아내는 실망을 시키지만, 하나님은 실망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헤 아가페’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진짜 멋있다고 합니다. 몇 개월 가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설교할 때, 얼굴 예쁜 거 6개월 밖에 안 간다고 했는데, 어느 형제가 신혼여행 다녀와서 “목사님, 설교 다 동의하는데 한 가지 틀렸습니다. 6개월 아니고 4박5일입니다.” 신혼여행 가서 싸웠습니다. 4박5일 밖에 가지 않습니다. 남편을 보면서 남편에게 아름다움이 당연히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도 저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당신의 이러한 점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그 뒤에 무엇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편을 보면서 그러한 것을 봅니다. 처음에는 저도 성격이 까칠 했을 때는 “당신은 다 좋은데 이러한 때에는 당신이 진짜 몰라도 너무 몰라!” 그랬을 때, 제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여보, 내가 그것 까지 완벽했으면 당신에게 갔겠어?” 이렇게 못되게 굴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늘 감사합니다.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오래 참아주고, 이렇게 아직까지도 곰국 끓여놓고 어디 안 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옆을 보는 것입니다. ‘예쁜 점이 있구나.’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주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고, 그러면 남편이 실망시킬 때가 있습니다. 저도 얼마나 많이 실망시키겠습니까? 지금도 가끔 이야기 합니다. 어느 날 너무 외롭고 힘들다고 합니다. “오늘은 제발 나와 함께 있어줘.” 조용히 30분 자리에 앉았다가, 당시에 교회 가서 철야하던 시절이었는데, 30분 있다가 가방을 탁탁탁탁 싸가지고 털고 일어나 교회로 가는데, “나는 기도해야 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아내가 외롭다는데 말입니다. ‘아, 정말 힘들었겠구나.’ 생각하고 같이 있어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젊었을 때 융통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젊을 때 융통성이 너무 많았으면 문어처럼 흐물흐물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다 사랑의 부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그날 밤 아내를 위해서도 열심히 눈물로 기도하였지만, 그러나 그것 가지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정말 ‘가엽다’라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속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야 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남편을 탁 생각하면 너무 가엾어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야 합니다. ‘나의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이 여자가 온전히 행복해 질수 있다면, 나는 충분하다.’ 왜입니까? 나는 처음부터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아의 사랑인데, 무아가 곧 진정한 유아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랑이 결국 교회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러한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래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어집니다. 아들에게 부어지는데 그 아들이 교회와 신랑 신부의 관계입니다. 동시에 신랑 신부인데, 분명히 신랑 신부로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 무엇이라 표현합니까? 한 몸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처음 듣는 것처럼 하십니까? 예수가 신랑이시고 교회가 신부인 것,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 그 둘을 그 다음에는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 머리와 몸이라 표현하면서 한 몸을 그려냅니다. 이게 우연이겠습니까? 이게 두 사람을 창조하셔서 한 몸이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을 바라보시면서 구속사 속에서 흘러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아들에게 부어지고 아들에게 부어진 사랑이 그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지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로서 그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게 두 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으로서 입니다. 바보 같은 여자들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해 준 게 뭔데?” 사랑은 무엇을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유치한가 하면, 뭘 해줘야지 겨우 그것을 봐야지만, 사랑이 확인이 되는 것으로 봅니다. 그것은 애완견적인 사랑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뭐 하나 주면 겨우 그것으로 ‘남편이 날 사랑하는구나.’ 확인합니다. 그러한 연약한 부분이 있으니까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성숙해 지면 아무 것도 해 주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한 것과 상관없이, “당신이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나의 행복이고, 당신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기쁨이기 때문에, 죽어도 너무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용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입니다. 그게 아까 말씀드린 것이 그대로 교회에 적용됩니다.
잘 보십시오. 제가 목회를 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못 깨달았을 충격적인 진리들을 깊은 고난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워서 잘 안 읽지만, 『그리스도와 남은 고난』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푯대를 향해 막 달려가는데 그것이 바로 목표가 있는 삶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헤 아가페’에 대한 앎으로 달려갑니다. 그 ‘헤 아가페’가 무엇으로 나타났는가 하면,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푯대로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세 개의 등급으로 나오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입니다. 두 번째는 부활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자기 안에서 다시 사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헤 아가페’로 돌아가는데 마지막에 정점이 뭐냐 하면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A라는 크기의 고통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하는 것을 보는 것 보다 내가 당하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엄마는 죽을병에 걸렸는데 그 아이를 대신해서 자신이 죽을 수 있다면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죽음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탄식을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듭니까? 사랑이 그렇게 만듭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부활의 능력과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 몸이 되어서 그가 아픈 것이 나의 아픔이고, 그의 기쁨이 나의 것이다. 결국 그 한 몸이 하나님이 주신 많은 자연적이고 영적인 은사들을 공동의 소유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 교회의 일원이니까, 네 은사를 내 놔. 그리고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도 내 놔. 그러한 원리로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은사와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한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을 통해서 성화를 통해서 점점 더 순결한 사랑으로 하나의 아가페로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하나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지체들을 모두 사랑하면서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자신에게 부여된 자연적이고 영적인 은사들을 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을 누리면서 교회는 온전한 공동체가 되어가는 것이고, 그러한 점에서 교회 안에서 이렇게 사랑으로 교통하면서 서로가 서로 때문에 온전하게 되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이것은 종말에 이루어질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적으로 맛보는 것입니다. 선취적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결국 목회자가 선교사가 되는 부름은 단연코 아가페의 부름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어느 정도로 강조하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16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사랑 장을 조금 전에 써 내려갔던 사도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지로다” 13장에서 이야기 한 그 사람의 말인가 할 정도로 충격을 받습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만이 이 ‘헤 아가페’로 돌아가는 길이고, ‘헤 아가페’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크기만큼 자신이 고통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로 온 인류를 그러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먹고 마시고 숨 쉬고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랑이 한번 타오르면 안 되고, 울타리를 쳐 놓고 거기에 계속해서 볏단 같은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점점 올라가게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사랑이 가능하게 합니다. 점점 더 점점 더 강도를 더 하면서 불이 타올라서 웬만한 것들을 다 태워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불길로 타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 사역자가 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사명은 자신들이 모였을 때 선교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그 사회를 먼저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일 중요한 사명입니다.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선교사나 목회자나 복음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사명이 이 복음 사역을 통해서 완성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사회를 먼저 자신들이 구성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선취적으로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의 크기에 비례하는가 하면, 자기 안에 있는 잡스러운 사랑을 회개와 자기 깨어짐으로 죽이고 예수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크기만큼 각자 각자가 ‘헤 아가페’로 돌아가고, 그 돌아간 정도만큼만 그러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을 많이 할수록 자신 안에서 이러한 ‘에피그소시스’와 ‘아이스데시스’가 공급되고 사랑이 점점 풍성해져야 합니다. 정리가 끝났습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을 계속 불타오르게 하는데, 그러면 이것을 타오르게 하는데 이것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자가 있습니다. 신자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원래 이 세상에 성령 강림하셨을 때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우리는 예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말하지만 성령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성령님이 이 세상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보여주시는 중요한 사역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성부 아버지를 사랑하라는 말도 나오고, 성자 아들을 사랑하라는 말도 나오지만, 성령을 사랑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 뭐냐 하면 성령이 곧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랑을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책 『신학대전』에서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성령은 첫째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합니다. 지식으로서 우리를 진리로 도달하게 하는데 성령은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사랑이신데 이 사랑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이 사랑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인 동시에 완전한 진리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이렇게 그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산처럼 본다면 무한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이것을 철학 쪽에서 보면 하나님은 진리가 되고 윤리쪽에서 보면 하나님은 지고의 선이 되시고, 미학쪽에서 보면 하나님은 최고의 아름다움이 됩니다. 결국 아름다움과 진리와 선, 이것은 결국 한 하나님이 관계하는 것에 따라서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한 형태입니다. 결국 끝까지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랑은 진리를 향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대상의 궁극적 마지막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퀴나스는 이 사랑은 우리 안에서 성향을 형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냥 하기 싫은데 불쑥 하고 다음에는 다시 행동이 안 나오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이 안에서 자연스럽게 행동되는 것입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자꾸 어떤 행위나 눈에 보이는 행동들을 유난히 집착하는 이유는 성향의 차이입니다. 여성은 특히 여성성을 많이 가진 남자들은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끊임없이 이 사람 안에 있는 성향을 확인합니다. 작은 것에 배려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챙기고 끊임없이 액션을 취하면 그것을 통해서 예를 들면 반지 하나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사랑의 성향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성향을 형성합니다. 다섯 번째는 이 사랑의 성향 때문에 올바르게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는 아가페와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거의 900년 전의 신학자이지만 우리에게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뭔가를 던져 줍니다. 이것이 아퀴나스에게 독특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였고 그 후에도 기본적으로 이 사상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결국 사랑을 타오르게 하는 것이 선교사역과 목회사역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이렇게 불 타 오르는 사랑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오늘 성경 본문이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첫 번째 나오는 것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나옵니다.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을 점점 더 불타오르게 해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어떤 삶을 살아가게 하느냐, 그것이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분별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번째 것이 분별함입니다. 선한 것이라고 하는 표현이 희랍어의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디아페론타’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디아페로’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디아페로’라는 동사는 ‘다르다’의 의미입니다. ‘디아페론타’는 복수인데, 디아페론타가 무슨 뜻인가 하면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한다고 할 때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여기에 많은 것들이 있는데 가치가 뛰어난 것, 가치가 적은 것, 이러한 것들이 섞여 있는데 여기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어떤 것이 가장 가치가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식과 총명을 통해서 사랑을 풍성하게 한 후에 결정이 됩니다. 우리들이 판단을 잘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과 지식 때문에 판단을 못합니다. 에피그노시스와 아이데시스가 모자라고 사랑이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기 사랑에 의해서 혹은 판단의 오류로 인하여 잘못 결정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도덕적으로 죄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들에 에워싸여 있는데, 모든 우리의 선택 앞에 있는 것들은 우리의 마음이 끌리는 선택지들은 다 가치를 위장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문제는 어떻게 자기 사랑에 흔들리지 않고, 이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가 중요하겠습니다. 이것을 ‘분별하다.’는 단어가 ‘도키마조’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시험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서 숙소에 들어갔는데 가구가 있습니다. 저는 디자인과 건축에 관심이 많습니다. 여기 와서는 그러한 궁금증을 갖지 않았습니다. 딱 보면 ‘여기는 이 정도의 목조로 지어졌구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곳에 가보면 나무인 것 같은데, 진짜 나무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필름을 붙인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가 그러한 기술이 최고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급기야 너무 궁금하면 열쇠 같은 것을 장롱을 열고 한번 긁어봅니다. 긁었는데 찍 하고 비닐이 나오고 속에 베니아 판이 나오면 가짜입니다. 싸구려 나무에 입혀서 예쁘게 포장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해 보는 것을 가리켜 ‘도키마조’라고 합니다. 무슨 뜻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오류가 없는 분별력, 판별력을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하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설교를 계속 듣고 목양을 계속 받고 나면 관계가 깊어지고 목회자와 선교사를 존경해서 집안에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와서 기도해달라고 하고, 응답을 받고 지도를 받는 것이 목회가 아니라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럴 수 있지만, 결국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에피그노시스’와 ‘아이데시스’를 통해서 사랑을 함께 갖게 함으로써 그 세 가지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무엇이 가치 있는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판별을 정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누구이고, 세계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이고,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정확한 견해를 갖게 만들어 줍니다. 이곳은 선교지이기에 세계관공부에 대해서 관심이 많겠습니다. 세계관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세계를 보는 관점 자체를 달리함에 따라서 모든 관점들이 다 바뀌게 됩니다.
원래 세계관을 공부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세계관은 어떠한 식으로 전파되는가 하면 이렇게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들 쭉 읽어가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부터 시작해서 보면서 충격적인 가르침에 접하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셨구나! 그리고 세계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구나. 인류는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창조되었구나. 그리고 나는 여기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받는 많은 양떼들이 설교와 성경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세계와 인류와 사회와 교회를 볼 수 있는 분별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점을 가지고 이 관점에서 세계와 인간의 역사와 교회와 그리스도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 세상과 영원을 향해 잇는 의미 속에서 파악합니다. 그것이 한 사상으로서 삶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나는 바로 이러한 ‘에피그노시스’와 ‘아이데시스’ 속에서 거기에서 ‘헤 아가페’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 관점을 가지고 성경이 나에게 분명히 명하고 있는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라고 하는 두 가지 원칙, ‘레귤라이 프레들리’, 믿음의 규칙과 ‘쁘리께따이 비벤디’, 살아야 하는 교훈들입니다. 이러한 규칙과 교훈을 따라서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이러한 신념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그 어떤 것들이 나에게 닥칩니다. 그때 그냥 막말로 그렇게 내 신념대로 살지 못하는 세상과 상황과 맞부딪혀서 박살을 내고 장엄하게 피를 토하고 죽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더 먼 날을 기약하면서 인내하고 참으면서 자신이 이러한 세상을 개혁하고 더 이상 나의 후손들에게는 이러한 선택을 강요받음으로 고통 받는 더러운 세상이 되지 않도록 내가 이바지 하겠다고 하는 미래에 대한 안목을 가지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미래를 기약하느냐, 이것은 개인의 신념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러한 분별력을 가지고 이 신앙이 가르쳐주는 신념에 따라서 죽음과 삶 사이에 경계가 없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항상 죽을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아주 깨끗이 그 순간이 올 때 회피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흔들릴 수 없는 이 사상 속에서 ‘헤 아가페’로써 죽음의 경계를 지남으로 모든 육신을 벗고 완전한 아가페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것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하면 무한한 용기가 그 속에서 샘솟습니다.
두 번째는 ‘진실함’입니다. 이 단어는 희랍어로 ‘참되다’라는 뜻에서 나옵니다. ‘진실’은 감출 수 없고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알레디아’입니다. 진리. ‘레디아’는 감췄다고 하는 것인데, ‘아’가 붙었기 때문에 감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 자체는 그 자신이 진리임을 증거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이 있을수록 진리는 자신이 참되다고 하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찬란한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진실은 인간에게 적용될 때 이렇게 나타납니다. 인간이 존재하고,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인간이 동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여기에 있건 없건 상관없이 여전히 있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가 이것을 인식하는 주체인 자기와 관계를 맺을 때 이것은 이 사람에게 의미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진리는 객관과 주관, 사실과 인식 사이를 걸쳐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동북아철학에서는 ‘도’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거기에서 이야기 하는 ‘도’, 즉 길, 그 다음에 진리, 생명은 결국 ‘도’ 입니다! 철학이 이때까지 추구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도입니다. 이 사람이 마음속에 도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내가 살아야 할 기준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가 그 도에 대해서 자신의 영혼 안에서 그 도를 따라서 그러한 사람이 되고 그렇게 살려는 힘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비루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덕’을 뜻하는 ‘virtue’가 나옵니다. 동북아철학에서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도덕’이라는 말을 씁니다. ‘도덕’의 앞의 글자 ‘도’는 객관적인 진리이고, 뒤의 글자 ‘덕’은 주관적으로 거기에 합치된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면 네비게이션이 있습니다. 갈 길이 정해졌고, 운행합니다. 옆으로 가면 옆으로 갔다고 네비게이션이 말합니다. 두 여자의 이야기만 잘 들으면 남자의 인생은 편합니다. 하나는 집에 있는 여자, 다른 하나는 자동차에 있는 여자입니다. 두 사람 이야기만 잘 들으면 커다란 불행은 막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갈 길에서 틀어지며 갑니다. 다시 방향을 설정해서 이리로 갈 것 아닙니까? 그러나 만약 네비게이션이 없었습니다. 행로에 대해서 지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방팔방 헤맬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중심에 딱 도가 서 있습니다. 그러면 한번은 이렇게 운전했지만, 경험이 쌓이면 이 길 따라 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가야할 길인 레드와 가고 있는 길인 블루가 합쳐진 상태, 이것이 바로 진실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베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결국 진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를 설교하려고 하는 것 또한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깨달은 진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조금 깨닫고 배우고 나면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입술에 침만 바르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것을 살아내는 것은 땀을 흘리고 때로는 피를 쏟아야지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칼빈 시대에 선교사가 많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선교사와 목회자를 세우신 중요한 사명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에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동시에 사람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가, 보이는 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셨고, 동시에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참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면 어떤 사람일까, 파이널 모델(final model)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선교사를 부르신 것은 함께 선교받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 선교사의 가르침대로 예수를 믿으면, 내가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까,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교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교사가 행복해지는 것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찾아오는 행복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누구든지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고, 누구든지 갖추어지면 그 상태로 들어가니까 굳이 영적인 사역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한 것과는 상관없이 한없는 행복, 그게 뭐냐 하면 지고의 행복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모든 행복 중에서 지고의 행복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도성인신의 원리에 의해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선교사의 도리입니다.
타드 빌링스라고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속에서 선교사의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유용할 것 같아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어느 선교사가 도성인신의 원리에 어마어마한 감화를 받았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지에 갔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가서 안전과 모든 것을 위해서 조금 나은 집에 살지 않습니까? 이 선교사는 이것이 도성인신의 원리에서 어긋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원주민이 사는 똑같은 흙집을 선택하였습니다. 선교비를 많이 보내오지만 더 좋은 옷, 더 좋은 음식, 절대로 취하지 않고 똑같은 피선교지의 사람과 완벽한 원주민의 삶의 수준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 선교사역이야말로 도성인신의 사역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선교하였습니다. 존경도 받았는데 한 가지 사건으로 그 모든 꿈이 다 깨졌습니다. 아이가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헬기가 와서 실어서 비행기 태워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모든 도성인신의 환상은 거기에서 끝이 났습니다. 제가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리려는지 아시겠습니까? 선교적인, 목회적인 도성인신의 원리는 그러한 외부적인 기준 하나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로서 너무 화려한 생활 반대하고, 선교사들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도성인신의 원리면 그렇게 아이가 병에 걸렸을 때 원주민들이 어떻게 되는지 똑같이 따랐어야 마땅합니다. 자기가 돌보고 있는 수많은 원주민들이 그 병에 걸렸을 때 절대 헬기 못 불렸습니다. 더욱이 미국에 싣고 가서 수술을 받고 다시 살려서 데려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선교사가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겠습니까? 누가 자신같이 원주민 수준으로 사는 사람이 있겠는가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도성인신의 원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나’라고 하는 선교사 혹은 목회자로서의 삶의 근거를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이렇게 있어 보이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한 것들이 나를 움직이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규정하면서 아까 이야기 한 ‘헤 아가페’로 돌아갔기 때문에 끊임없이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키며 사는 것,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힘을 다 했습니다만,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이 없이” ‘아메포스’입니다. 티가 없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어서, 2천 원짜리 사과 만원에 다섯 개가 있는데 어떤 명절 같은 때 진짜 좋은 백화점에서는 사과 하나에 만 이천 원짜리가 나옵니다. 열 개 집어넣고 12만원에 팝니다. 그러면 그 사과가 6배로 큰가? 절대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리 돌려봐도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종자도 물론 다르겠지만 어떠한 티도 없는 완벽한 상태에서 그 제품의 가치는 최고로 상승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가나안에 심어 놓으신 것은 그저 그런 포도를 얻게 하려 함이 아니라 극상품의 포도를 얻게 하려고 당신의 포도원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무결점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면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고민하고 하나님 앞에 고뇌하는 가운데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그분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물없음’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에 있어서 허물이 없다는 뜻일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