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풍성하게 하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9)
제가 3일 동안 다룰 주제는 “목양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흔히 목양은 목회와 많이 관련되고 선교는 전도와 많이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이치를 살펴보면 그런 구분은 잘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모든 목회 사역이나 선교사역은 한 가지 정신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가 전도되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사의 몫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의무입니다. 사도들은 당연히 목회자인 동시에 선교사였습니다. 후에 이 임무들이 나뉘기 시작합니다. 그 긴 이야기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말씀 사역자들의 중요한 임무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좀 긴 묘사가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이것은 한 신자를 만든 후에 신자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즉, 선한 사람이 되게 하고, 그가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된 대로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복음 사역자들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선교에 관심이 없는 목회는 목양에 관심이 없는 선교만큼이나 무지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선교를 하면서도 이 선교를 왜 하시는지, 그리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후에 그때 이루어질 세상은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지를 꿈꿔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게 자신의 중요한 복음적 목회 사상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약과 구약 모든 성경을 통틀어서 이처럼 우리의 목양 사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료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속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사도 바울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모두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예수 믿게 해달라고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있다.’라는 것은 그것이 아직 현실로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주기도문을 생각해보십시오.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의 요약 중에 또 다른 요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기도문을 펼치고, 펼치고 펼치면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고 예수님께서 꿈꾸셨던 초대교회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이고, 그 공동체를 통해 이루고 싶으셨던 세계의 회복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했는데 이것은 어쩌다 생각나서 한 번 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고 어쩌면 사형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쉴 수 없는 기도가 그의 마음속에서 복받쳐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메섹에서의 체험으로 뿌려진 씨앗이었고, 이 씨앗이 점점 자라면서 처음에는 오직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신을 드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전도된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고 그렇게 하려면 교회가 왜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한 사랑으로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사도 바울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목회 사역, 복음사역의 전망을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이제는 교회를 목양하고 마지막에는 순교의 날이 가까이 다가온 이 상황에서도 쉼 없이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선교하고 무엇을 위해서 목회하는 것입니까? 사도는 이렇게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여기서 ‘사랑’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희랍어 ‘아가페’이고 정관사 ‘헤’가 붙어서 ‘헤 아가페’입니다. 따라서 ‘그 사랑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이고, 목회입니다.
위대한 사상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전도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 사람이 구원받게 하려고 전도한다는 말보다는 훨씬 더 종합적이며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운명적으로 무엇인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것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랑을 집약하면 ‘하나님 사랑이냐? 세상 사랑이냐?’로 나누어집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왕국 이론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이고, ‘세상 나라’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묻고 싶습니다. 왜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합니까?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요한1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요한사도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것이 곧 자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모든 죄의 뿌리를 지성적으로는 ‘휘브리스’ 즉, ‘교만’에서 찾고 본질적으로는 ‘아모르 수이’ 즉, ‘자기 사랑’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전도는 자기를 사랑한 사람들을 설득해서 그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물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만 있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동물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방향의 차이일 뿐입니다. 모든 사랑의 근본적인 시작은 자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고, ‘자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고, ‘자기 때문에’ 세계를 사랑하고, ‘자기 때문에’ 자연을 사랑합니다. 언제나 그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의 파문을 그리면서 삽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파문과 만나 서로 부딪칩니다. 내가 사랑하는 질서와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질서가 부딪칩니다. 개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다툼이 되고, 나라 간에 일어나면 갈등이 됩니다. 심지어 나라 간에 아무도 양보하지 않으면 전쟁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그 사랑에 수많은 중심점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은 하나로 통합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재편되고 있는 세계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봐도 이것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전개했던 두 왕국의 이론이 사랑의 이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전도와 선교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한 사람만’ 흙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그 사람 몸의 일부를 취하여 만드셨고 그를 ‘여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자는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고 여자는 남자의 덕을 입어 창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우등하고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명백하게 남성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번역한 성경해석의 문제입니다. 저는 신학교를 다닐 때부터 히브리어를 매우 좋아했고, 나중에는 히브리어 교수가 됐습니다. 어느 날 창세기의 구조를 면밀하게 검토하면서 ‘흙’에 대한 잘못된 번역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아담을 먼저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십니다. ‘흙’의 정확한 의미는 히브리어로 ‘아파르’이고 ‘먼지’입니다. 성경에 ‘먼지’라는 말을 모두 뒤져보면 왜 하나님이 인간을 ‘먼지’로 창조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먼지’를 ‘가치가 없는 것’으로 표현하고, 그야말로 ‘티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회개할 때 티끌을 뒤집어씁니다. 자신은 “I am nothing.”이라고 고백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흙으로 창조된 것이 ‘육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생기’를 불어넣어 영혼을 만드십니다. 이 때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는 방식이 창조의 행위이고, ‘생기’는 영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후~’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부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는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는 것처럼 창조의 행위입니다. 인간은 육체(바사르)와 영혼(네피쉬)로 나누어집니다.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네페시 하야’가 됩니다. 즉, ‘살아있는 사람’, ‘산 사람’입니다. 당연히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면 죽은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육체를 흙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지상의 자원을 소비하면서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에 비해서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자원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한 생명처럼 보이지만 두 개의 생명의 원리로 하나의 사람이 지탱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보양하려고 먹고, 마시고, 입는 것 등은 당연히 이 지상의 자원들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보존이 됩니다.
이렇게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만들 때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십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남자는 창조의 주된 목적이고 여자는 그 남자에게 이바지하기 위한 보조적인 임무를 띠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여자를 ‘돕는 배필’이라고 하는데, 히브리어 ‘에제르’가 쓰입니다. ‘돕는 배필’은 두 단어가 아니라 한 단어입니다. 해석을 ‘돕는 배필’이라고 해서 두 단어로 생각합니다. ‘에제르’는 시편에서 많이 쓰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며”,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오” 할 때 ‘도움’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정확하게 ‘에제르’입니다. 그러면 시편에서 ‘도움’을 나타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조해 주시기 위해 있는 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에제르’는 군대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전쟁이 패배로 기울 때, 저 지평선에서 뽀얀 먼지를 날리면서 우군의 응원군들이 달려옵니다. 그래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투가 이 응원군으로 인해 승리로 바뀝니다. 그 때 ‘에제르’를 이야기합니다. 또한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도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남자의 원재료는 ‘먼지’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원재료는 ‘사람의 갈비뼈’입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나중에 창조돼서 ‘신제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옛날 제품보다 신제품은 뭐가 나아도 좀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그를 위하여”입니다. 이것은 영어 ‘for’가 아닙니다. ‘for’는 누군가를 종속적으로 위한다는 의미인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를 위하여’는 정확한 의미로 표현하자면 ‘correspondent to’이고, ‘~가 …에게 맞먹는, 상응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Korean prime minister meets with correspondent a country.”라고 표현할 때 쓰입니다. 즉, “한국의 수상이 저쪽 나라의 수상을 만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는 결코 종속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for’가 아니라 ‘아담에게 대응하는, 상응하는’, 혹은 ‘아담과 맞짝이 될 수 있는 돕는 자’를 창조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단어들을 남성우월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성경해석자들이 잘못 번역하여 잘못된 가르침으로 내려왔고, 한국에서 유교문화와 만나면서 불꽃처럼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튼 제가 말씀드리려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헤 아가페’ 즉, ‘그 사랑’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것은 어떤 학자도 명백하게 학술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는 저의 새로운 이해입니다. 저는 그것이 성경의 신학에 확실하게 부합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발견한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그 사랑’의 신학을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우리의 목회와 선교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후에 무엇으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가르쳐드림으로써 오늘 강의를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왜 한 사람만 흙에서 창조하시고 두 번째 사람은 그 사람의 갈비뼈에서 창조하셔서 후에 이렇게 복잡한 남성우월주의와 소위 요즘의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적 충돌을 모두 아셨을 텐데, 이렇게 오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이런 질문을 쉽게 던져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흙이 모자라지도 않으셨을 텐데, 만드시는 김에 하나 더 만드셔서 두 덩이를 만드시고 “후, 후!” 하고 불어넣으셨으면 문제가 없으셨을 텐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몸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십니다. 여기에서 여자가 나옵니다. 하와의 고향은 남자의 갈비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었던 말씀의 요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너희는 둘이다. 그러나 사실은 한 몸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한 몸’ 사상입니다. 결국 인간의 자기 사랑은 필연적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랑은 너무 필연적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자기 사랑이 자기 전체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원리였습니다. 나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고, 나 때문에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말이 됩니까? 사랑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나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남을 위해 나를 주는 사랑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랑’, ‘The love’, ‘헤 아가페’이기 때문입니다. 단수입니다. 하나입니다. ‘헤 아가페’가 없어도 나를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 선교사가 사역을 하다가 죽게 생겼습니다. 아내 선교사의 심장을 떼어주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고 하면 기꺼이 심장을 떼어 줄 아내 선교사 분들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는 아니라도 말입니다. 더구나 남편이 생명보험을 크게 들어놓았으면 떼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을 것입니다. 신장이 아니라 심장입니다. 재밌는 예화가 많지만 진도를 나가야겠습니다. 기꺼이 떼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헤 아가페’인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려고 한 사람만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열의 문제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정도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한 몸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데 처음의 상태는 무죄 상태입니다. 창조되자마자 학습에 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이 안에 주셨습니다. 창조되자마자 하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몸에서 갈비뼈를 취해서 여자가 창조되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라고 고백합니다. 대개 우리는 이것을 주례사로 많이 사용합니다. “너희 둘만 살과 뼈다.”라고 합니다. 이 문맥은 절대 주례사의 문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당시에 인류 전체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부부인 동시에 모든 인류로서 하나님 앞에 이 고백을 하고, 이 고백 속에서 결혼이 실행된 것입니다. 히브리 문학에서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의미는 ‘최고’, ‘the best’라는 의미입니다. ‘마호르’라고 하는데 영어의 ‘choice’도 ‘최고’라는 뜻입니다. ‘choice coffee’ 라는 제품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에서 온 것입니다.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국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깨어집니다. 두 사람이 서로 한 몸이라는 것이 깨어지면서 이 사람의 존재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매우 해로운 존재로 인식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창 3:12). 이 표현에는 모든 원망이 다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타락하기 전까지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다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언약을 파기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깨어지자 이 두 사람의 사랑도 깨어진 것입니다. 마치 집안에 들어오는 전기선에서 전기가 끊어지자 집안의 가전제품의 전기가 끊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깨어지고 이 사람의 사랑, 라틴어로 ‘아모르 수이’라고 하는데 ‘자기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 후손이 생겨납니다. 그 중에 라멕이라는 인간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 4:23) 하며 자랑합니다. ‘나에게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가인에게 나쁜 일을 한 사람보다 더 큰 벌을 내가 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큰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라멕 자신이 벌한다고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사람에게 작은 해를 끼치고 손해를 끼치면 그보다 엄청나게 커다란 복수로 갚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죄와 비참이 실질적으로 전개되는 역사가 펼쳐집니다.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가인이 태어나고 두 번째로 아벨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셋이 태어납니다. 그들의 자손들은 번성했습니다. 만약 처음 두 사람의 사이가 깨어지지 않아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라는 고백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하와가 가인을 낳았을 때 “우리 둘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지만, 가인 너는 아니다.”라고 이야기했겠습니까? 아니면 똑같이 가인도 이 고백에 참여하면서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고 너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이야기했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사회’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사회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라는 고백을 나누는 완전한 사랑의 사회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회 안에서 하나의 사랑 속에 모두 들어와서 그 한 사랑을 누리며 사는 사회가 되게 하려고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온 인류가 서로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자연만물을 선의로 대하게 하심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당신의 영광을 풍성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인간의 문명은 끊임없이 발전했을 것입니다. 수 만년 동안 이파리 하나 걸치고 과일이나 따먹으며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분류하고 도구를 만들면서 발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를 가슴에 새기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이 직접 하나하나 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지상의 세계를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상세계와 천상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과 짝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의 사랑이 깨어지고, 인간은 천지사방으로 다 찢어집니다. 그리고 서로 죽고 죽이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복음의 구원의 약속을 주신 후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하십니다. 그 중에 중요한 인물 하나가 등장하는데,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문을 택하시고, 이 가문을 서로 특별한 사랑의 관계로 묶는 일은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사이에 있었던 완벽한 사랑의 관계를 100% 반영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 가문에게 특별한 은총과 계시를 주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이 서로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여기며 살아갈 때 어떤 것들이 사라질 것인지를 율법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죄’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영어로 ‘crime’이 아니라 ‘sin’입니다. ‘crime’은 법적 책임을 져야하는 형법상의 죄이지만 ‘sin’은 ‘crime’의 뿌리입니다. 그리고 ‘sin’은 정신적이며 영혼의 문제에 속합니다. ‘sin’은 끊임없이 사랑의 관계를 절단시키며 이스라엘을 하나의 사랑으로 묶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전면적으로 도전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많은 심판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할 때마다 소위 ‘헤세드’가 회복됩니다. ‘헤세드’는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헤세드’의 은총을 받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깹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다시 이 사랑의 은총을 부어주셔서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까지 이 지상의 나라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이스라엘이라는 육적인 껍질을 깨고 영적인 이스라엘을 탄생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율법 중에서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율법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율법사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뭔가 균열을 내기 위해 물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었습니다. 무엇과 같이 라고 하셨습니까? ‘네 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2장을 배경으로 ‘네 몸’을 말씀하신 것이며 예수님의 새로운 고안품이 아닙니다. 그 당시 알아들을 귀가 있었던 사람들은 제가 지금 하는 강의처럼 연결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도 이것이 인류의 한 계획으로 연결되어 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오랫동안 잊혔던 창조세계에 관한 하나님의 중요한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끊임없는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안정한 상태에도 선지자들에 의해서 얼핏얼핏 드러났지만 결국은 묻혀버렸던 창조세계에 관한 하나님의 중요한 가르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류 전체를 하나의 몸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개혁신학자들은 인류를 하나의 몸으로 보는 것을 세 dimension(관점)으로 나눕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두 번째는 ‘칭의’에 의해서 연합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세 번째는 ‘성화와 영화’에 의해서 연합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지금은 그런 강조점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개혁신학의 유구한 전통 속에서는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을 ‘본성적 연합’이라고 합니다. 이미 개혁신학자들은 큰 구도 속에서 한 몸 사상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불신자도, 이교도인도 여전히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해야 하는지,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토대를 여기서 찾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불신자라고 해도, 심지어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존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로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을 때 그 이웃은 이스라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독교에 박해를 가하는 이교도들, 불신자와 같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몸으로서의 인류를 생각하면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사도 바울이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논리적으로 보면 예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바라보며 믿었던 사람들, 구원받도록 선택된 사람들, 지금 믿고 있는 사람들, 앞으로 믿을 사람들, 구원받도록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여기서 제한 속죄인지 보편 속죄인지에 대한 논쟁이 나오지만 그것은 논외의 문제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당신이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자기와 하나 된 가운데 대신 죽으셔서 그 죽음이 그 죄를 지은, 혹은 짓게 될 모든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한 형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내포적 대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모두 끌어안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으신 것은 내가 받은 것이 됩니다. 그것조차 ‘한 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구속’에서만 ‘한 몸’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서도 ‘한 몸’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새로운 이름이 부여됩니다. 그것은 ‘주’입니다. 이것은 희랍어로 ‘퀴리오스’입니다. 구약에서는 ‘아도나이’입니다. 구약에서 ‘아도나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성함을 쓰고 읽을 때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계와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실질적인 ‘아도나이’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부활과 함께 일어납니다.
그 후에 교회론이 등장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너희는 몸의 지체라” 이렇게 묘사됩니다. “너희에게 각각 은사를 주셨는데 이것으로서 몸, 팔, 모든 기관들이 몸을 위해 봉사함으로 한 몸이 되듯이 너희도 그렇게 서로를 위해 봉사하고 재능을 따라 섬김으로써 이 몸을 온전케 하라” 이것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있고, 지역에 모이는 교회도 있고, 이렇게 우리가 모이는 것도 교회입니다. 중남부 아프리카 선교사들이 모인 하나의 교회입니다. 하지만 껍질입니다. 마지막에는 이 모든 교회는 하나의 밀알처럼 사라집니다. 마지막에는 교회와 세상이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멸망 받을 사람들은 지옥에서 정리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섞인 세상과 하나님의 교회 사이의 격차가 없어지고 교회는 곧 세상이 되고 자연스럽게 교회는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통합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일관되게 전진하는 것이 ‘하나의 몸’, ‘하나의 사랑’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보시는가?’ 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자기’는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 ‘자기 사랑’이 강조되면서 ‘yolo(You Only Live Once)’부터 시작해서 자기를 위하는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기사에 보니까 1인 패키지 여행상품이 그렇게 잘 팔린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비하면 거의 50%의 신장률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중에 한 프로그램을 예로 들자면, 좋은 호텔에서 1박을 묵는 70만원 짜리 패키지가 있습니다. 70만원을 내고 혼자 가면 피트니스를 1대 1로 가르쳐주고 전신을 마사지 해주고 코스 요리를 혼자 조용한 곳에서 앉아 먹고 좋은 호텔에서 목욕을 하고 하루 푹 자고 나온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마음이 들겠습니까? 저는 70만원 주고 하라고 해도 안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여행 상품들이 계속 발전되면서 시대의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거스를 수 없습니다. 이번에 BTS, 방탄소년단이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그리고 UN에 가서 연설도 했습니다. 거기 멤버 중 하나의 이름이 김남준인 것을 아십니까? 예전에는 인터넷에 제 이름을 검색하면 제 이름이 도배를 하고 그 친구는 저 밑에 하나 나왔는데 지금은 제 이름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도 밑에 있어서 말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셔서 UN에서 했던 그 젊은이의 짧은 연설이 왜 그렇게 전 세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는지 분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너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하셨겠습니까? 인간은 각각 다르게 존재하고 남자일 수 있고 여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을 각자 사랑의 질서를 만들면서 충돌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사랑을 하나씩 다 버리고 하나의 사랑으로 통합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그 하나의 사랑 안에서 인간은 자신은 이미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은 외로울 이유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소외되지 않습니다. 왜? 그 하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거룩한 삶은 결국 사랑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끊임없이 버리고 ‘헤 아가페’, ‘그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룩한 삶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처음에는 자기의 사랑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함으로 자기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아주 많이 한 사람들이 목회의 소명을 받고 선교사의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슬금슬금 자기 사랑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자기 사랑이 고개를 들고 이 목회를 통해서 자신이 그 중심에 서고 자신의 중심으로 질서를 형성하면서 자기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엮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선교를 하면서, 왕국을 건설하면서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회개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자기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 초대교회의 교부가 인간의 본성에 깊이 뿌리박힌 죄의 심각성과 일상성에 주목한 것입니다. 사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렇게 정통적인 신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그 사람은 순교하기 위해 안달이 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자신의 책속에서 고백합니다. 나쁜 선교사는 일을 잘 못하는 선교사가 아닙니다. 나쁜 목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다 자기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죄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자주 죄를 회개하고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된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온 인류가 서로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사랑이 하나로 집약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헤 아가페’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목회란 인도주의적인 사랑의 열정을 갖게 만들고 이웃에게 선한 행실로서 미담을 남기는 감동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헤 아가페’로 돌아간 하나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고 ‘헤 아가페’로 돌아가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윤리가 거룩함을 낳는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함이 윤리를 낳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의 영광, 선교의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을 결국 얼마나 그 사랑이 자신의 사역 때문에 사람들 속에서 그 사랑으로 풍성해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도네시아의 스티븐 텅이라는 목회자이며 선교사인 분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도시 하나가 액상화 되어서 떠내려가는데 전도하러 갔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무슬림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400대의 경찰차가 그 선교사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되었습니다. 거기서 8000명에게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오기를 설교했는데 1400명이 주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가 감동을 받는 이유는 결국 인간의 소망은 ‘헤 아가페’로 돌아오는 것 이외에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고 무엇이 풍성해진다고 해도 그것은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영광, 선교사의 영광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그 사랑’을 ‘한 번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말합니다.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는 헬라어로 ‘말론 카이 말론’입니다. ‘풍성하게 한다’는 ‘프로세이 오’인데 테두리를 둘러놓고 어떤 물건을 산처럼 쌓아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랑이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고 믿은 사람들은 계속 뒤로 물러나게 합니다. 저는 한 교회에서 25년 설교했습니다. 약 5,500편의 설교를 남겼고 그것이 모두 가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게 하는 일은 어렵지만 이미 예수 믿은 사람들이 계속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이유가 분명한데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유가 정말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심리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선교를 경험하셨으니 아실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죽어가는 전 세계의 영혼에 대해 가르쳐주면서 결단하고 “내 젊음을 예수를 위해!” 하며 피를 토하듯이 이야기해서 선교사가 되게 하는 것이 소중합니까, 소중하지 않습니까? 소중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일어나야 합니다. 옛날에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고 헨리 마틴이나 짐 엘리엇 같은 사람들이 일어났듯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맨 처음 선교지에 와서 유서를 쓰던 그날 밤의 정신으로 죽을 때까지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전자가 어렵습니까, 후자가 어렵습니까? 후자가 어렵다고 말해야 솔직한 것입니다. 열린교회를 목회하며 25년이 흐르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수천 명을 목회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 힘을 안 들이고 일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를 목회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자신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선교가 안 되는 사람은 식인종이나 원주민이 아닙니다. 자기자신이 바로 가장 선교하기 어려운 ‘난공지역’입니다. 우리는 선교지를 탐사하면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지만 선교사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지 자신도 모릅니다. 30년을 선교했는데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헤 아가페’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목회사역과 선교사역에는 두 가지 보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 사람이 회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회심한 사람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은 선교사인 동시에 ‘선교 비즈니스맨’만 될 것이 아니라 ‘설교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 원주민들을 놓고 깊이 있는 설교를 해서 그들로 하여금 주님께로부터 붙은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전입니다. 마지막에 우리는 죽고 혹은 순교하고 잊히고 사라져가도 우리가 몇 십 년을 이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고 그 사람들이 부패에서 보호되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으면 그것이 우리의 존재의 목적에 충실하며 산 것입니다. 그 성과에 따라서 각자는 하나님 앞에 이 지상에 사는 동안에 평안과 주님과의 동행을 누리고 하늘나라에 가서는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절대 일의 크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 가지를 정리했고 이제 중요한 주제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사랑이 말론 카이 말론 할 수 있는가?’ 입니다. 앞으로 가르칠 내용들이 우리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잘못된 사상을 많이 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성과 사랑은 대치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성적인 것’과 ‘사랑에 속한 것’, 저의 표현으로 하자면 ‘애성적인 것’은 두 개가 대립관계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덜 지적일수록 더 사랑이 많아지고, 사랑이 많아질수록 그것은 덜 지성적이기를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성경은 우리의 이러한 방황하는 질문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줍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여기서 ‘지식’은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이 단어는 ‘에피’와 ‘그노시스’가 합쳐진 것입니다. ‘에피’는 ‘~에 관하여’, 혹은 ‘~ 위에’이고 ‘그노시스’는 ‘기노스코’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알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니”라고 할 때, 그 ‘지식’이 ‘그노시스’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10개 중 하나이며, 이 단어에 대한 연구가 신약에 대한 이해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비중이 있습니다.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덜컥 생겨난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구약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야다’입니다. ‘야다’는 우리말로 ‘알다’라는 의미이고, 영어로 ‘know’입니다. 이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은 창세기인데,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에서 ‘동침하다’라는 단어에 ‘야다’가 쓰였습니다. 따라서 영어의 ‘know’는 ‘동침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또한 ‘knowledge’는 ‘선교’라는 뜻이 있습니다. 지금도 히브리에서는 어떤 여자가 그 남자를 향해서 ‘아노키 예다 에토’라고 하면 시집을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저 남자를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안 다는 것은 경험했다는 것이 아니냐?’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야다’는 단순한 ‘information(정보)’가 아닙니다. 이미 구약은 ‘알다’를 처음부터 그렇게 쓰지 않습니다. 아는 것에 관해서 그것이 지식에 속한 것인지, 의지나 감정에 속한 것인지를 분석하려는 시도들은 그리스철학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히브리 사유에 뿌리를 두고 채용된 것입니다. 이것이 명사로 쓰이면 ‘다아트’가 됩니다. 그러므로 ‘다아트 엘로힘’이라고 하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호세아 4장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호 4: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지식을 버린 것이 얼마나 큰 벌인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제사장의 나라로 삼겠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하실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과 동의어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는 그 어떤 원천’입니다. 그것을 버린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서는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형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선지자, 예레미야선지가 같은 사람은 “이 백성이 지식에서 멀어지는구나!”하며 통탄했던 것입니다. 그때 이야기했던 지식이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분석적이고 개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경외하며 살게 하는 총체적인 원천입니다. 인류가 타락한 후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그 지식은 첫 인류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계속 언약의 백성들을 통해서 이어져서 이스라엘까지로 옵니다. 이것이 바로 ‘다아트 엘로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지식과 사랑이 쪼개지지 않는 것입니다. 쪼개지면 참 사랑도 참 지식도 아닙니다.
11세기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rnhard von Clairvaux)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류역사에서 그를 신비가로 배웠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그의 전집이 라틴어로 남아있을만큼 어마어마한 신학의 대가였습니다. 그의 신학은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에도 영향을 주었다고도 이야기합니다. 그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amor ipse notitia est”, “사랑 그 자체가 앎(지식)이다.” 빌립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그노시스’는 ‘아모르’와 나누어질 수 없는 ‘노띠띠아(지식)’입니다. 즉 ‘지식’이 성경이 바라보고 있는 사랑의 특성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지식과 함께 있는 사랑입니다. 사도는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으로’는 ‘by’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in’입니다. 지식과 총명 ‘안에서(in)’ 사랑은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즉, ‘에피그노시스’가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가 지식을 가르쳤는데 사랑이 증가했느냐?”라고 질문을 했는데 “아니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 지식은 ‘그노시스’의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아트 엘로힘’을 끊임없이 버리면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회개하면 ‘다아트 엘로힘’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아트 엘로힘’을 가져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가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합니다. 신약 시대로 넘어오면서 ‘다아트 엘로힘’은 중요한 신학적 전환(Theologycal conversion)을 이룹니다. ‘그노시스 크리스투’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식’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노예(둘로스)’가 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노예’를 ‘servant’ 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의도적인 오역입니다. ‘노예’는 헬라어로 ‘둘로스’인데, 이 단어는 ‘servant’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servant’는 계약관계에 의해서도 ‘servant’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둘로스’는 ‘slave’입니다. ‘slave’는 신분도 변할 수 없고 주인의 집을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servant’는 출퇴근할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표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servant’로 번역을 했을까요? 1611년에 킹 제임스 버전이 나올 때, 영국 신학자들이 이것을 놓고 고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제도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죽어도 ‘slave’라고 번역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페미즘(euphemism)을 써서 의미를 완곡하게 표현하여 ‘servant’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로스’는 원래 ‘slave’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운명적으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펄펄 살아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해치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소위 ‘아낭케(ananke 운명, 숙명)’에 사로잡혀서 민족과 동족들에게 버림을 받고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유대교의 지도자가 되는 영광 대신 예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는 ‘그노시스 크리스투(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때문에 어떤 운명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운명에 사로잡혔습니다. 왜 그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대교를 믿었지만 이 세계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누구이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흙으로 창조하셨는지,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한 것들, 그런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조각, 조각 돌아다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까 이분이 오는 세대, 그리고 앞으로 올 세대, 흘러간 세월의 모든 비밀이 여기에 집약되었고 전개될 시대의 비밀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The mystery(비밀)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계의 창조와 구속과 완성의 모든 경륜이 비밀처럼 감추어져있는데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면 알수록 이 세계의 경륜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년에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쓰면서 그 비밀이 단순히 형벌, 구원, 속죄, 이런 것을 뛰어넘어 온 우주를 휘감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하나의 영광과 천지 창조의 계획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역사가 어떻게 흘러오고 마지막에 어떻게 가는가, 왜 육적인 이스라엘은 궁극적인 관심사가 아니어야 했는가에 대한 모든 비밀들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깨달았던 것의 10분의 1도 아직 펼치지 못했습니다. 오늘 조금, 여러분이 보시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아주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던 사도 바울의 위대한 지식의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다아트 엘로힘’은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지 않으시고 선지자, 왕, 제사장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이 3직이 통합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이 이루어집니다. ‘카르네(carne)’는 ‘고기’입니다. ‘고기, 살’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믿음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는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모든 사람이 감각으로 예수와 접하게 하시고 그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서 상상으로만 그리던 하나님의 성품을 한 인격 안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실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아야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육신 생애가 있었기 때문에 복음서가 남았고 복음서가 남았기 때문에 그것을 재구성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당신의 이 세계를 향한 단 하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탐구함으로써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에피그노시스’ 안에서 사랑이 ‘말론 카이 말론’한다고 했는데, ‘에피그노시스’가 무엇입니까? ‘에피그노시스’는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입니다. 희랍철학에서 이야기하는 두 지식이 있습니다. ‘독사’와 ‘에피스테메’입니다. ‘독사’는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에피스테메’는 근거가 있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물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쪽 방향으로도 역방향으로도 모두 말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여기서 ‘에피그노시스’는 그런 식으로 경험과 지식, 논리, 연관관계, 이 모든 것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키면 사랑이 증가하느냐?’ 라고 물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가르치면 사물에 대한 지식은 사랑을 증가시킵니다. 자, 하나님이 계십니다.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있는데 세계가 창조된 것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의 지성 속에 있는 세계에 대한 관념이 먼저입니까? 논리적으로 말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마음에 관념이 있을 것입니다. ‘이데아’라고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관념에는 하나님이 창조하고자 하시는 모든 만물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연관을 이루면서 어떻게 하나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변을 둘러보시면 전기부터 시작해서 벽체, 마이크로폰, 빔프로젝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물이 있습니다. 이곳을 지을 때부터 이런 강의를 하려고 이렇게 지은 것입니다. 이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목적 없는 것을 여기에 둘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실 때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요? 인류가 서로 살 중의 살처럼, 뼈 중의 뼈처럼 사랑함으로써 영광을 드러내고 모든 사물과 사회와 인간들이 서로 협력하여 새롭게 문화를 건설함으로써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이 연관되게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연관을 맺으며 이 세계가 ‘확!’하고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면 한 인간이 있습니다. 이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면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무가 여기 왜 서있는지, 왜 여기에 시냇물이 흘러가는지, 왜 하늘에는 태양이 빛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기면 이 모든 만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됩니다. 이 연결은 신학적으로는 설명할 때, 삼위일체에 의해 창조라고 말합니다. ‘By the Father’, 성부에 의해 창조되고, ‘Through the Son’, 성자를 통해서 창조되고, 마지막에 ‘In Holy spirit’, 성령 안에서 창조되게 하십니다. 두 번째로 나오는 ‘성자를 통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소위 ‘Logos’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각 사물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물을 각 사물 되게 하는 개별자뿐만 아니라 이 사물 하나하나가 연결되어서 그 사물로 체계를 이루며 존재하게 하는 모든 만물들의 존재의 원리를 심으셨습니다. 그것을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만물이 말씀 없이는 창조된 것이 없고, 모든 만물은 그 안에서 지탱되고, 그 안에서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갑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는 이런 원리가 학문이 성립하는 근거라고 봤습니다. 그런 원리를 하나님이 모든 만물에 심어놓으셨기 때문에 지금도 식물을 연구하는 식물학이 가능하고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이 가능하고 천문학이 가능한데 결국 그 원리를 찾아가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기서 이야기하는 ‘에피그노시스’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온전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선교사는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지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안 후에는 치열하게 학문을 공부해서 이 만물을 지탱하고 있는 원리가 어떻게 한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을 학교 다니는 동안에 단 하루도 학교 가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공부에 취미가 없었습니다. 14살 2개월 되었을 때, 주일날 교회 가는 길에 갑자기 슬픔이 확 밀려왔습니다. 논두렁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울었던 이유는 세 가지 ‘질문’때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이 저에게는 너무 절박한데 교회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단 한편의 설교도 내 마음을 울린 설교는 없었습니다. 귀담아 듣지도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14년 2개월 되었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말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제 머릿속에 찍혔습니다. 어른들은 박수를 치면서 예수를 믿지만 도덕적이지도 않고 신실하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왜 예수를 믿는지도 잘 모르고 믿는 사람들처럼 열네 살 2개월짜리의 눈에 비쳤습니다. 그렇게 울면서 떠올랐던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신은 있는가?’ 그런데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펑펑 울고 난 후에 눈물을 씻으며 일어나서 결심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무신론자로 살 것이다. 하나님은 없다.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내 인생은 내 나와바리다. 하나님이 있다고 해도 자격이 없다. 나를 이렇게 내팽개쳤는데 무슨 자격으로 내 인생에 주인권을 행사하려고 하는가?’ 생각하고, 그 후부터 문학을 읽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친구와 선생님, 아무도 내 고민에 동참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문학작품을 읽어보니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너무 위로를 받았습니다. 한참 읽고 보니까 계속 공감은 하는데 답을 말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상, 철학자들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는 프레드리히 니체, 까미오 카프카 같은 사람들이 휩쓸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이것이 길이구나!’하며 박수를 쳤는데 아무도 행복해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신론자가 된 것도 내가 행복해지려고 무신론자가 된 것인데 이렇게 해봐야 무엇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깊이 생각하다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의 한계입니다.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나고 사물들에 대해서 배우지만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도대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후에 제가 혼자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고 비로소 이런 원리들을 위대한 신학자들의 도움으로 깨달으면서 위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에피그노시스’입니다.
따라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첫째, 지식의 근원은 그리스도니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시고 그 만남을 일상 속에서 유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공부하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몇 권을 썼는지 잘 모르겠지만 80권에서 100권정도 될 것입니다. 선교지에 수많은 책을 보냈습니다. 너무 재밌는 일은 선교사님들 가운데는 제 책의 팬들이 별로 안 계신데 사모님들 중에는 많습니다. 선교사님께 보내드리면 선교사님은 사모님께 패스하십니다. 실제로 제가 보낸 책을 읽는 분은 사모님이십니다. 책을 읽다가 인터넷으로 들어와서 저의 설교를 듣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부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는 기본적으로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들이고 사상이 없다면 전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도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보내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이고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게 하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는 그렇게 살도록 회심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중심에 세운 깊은 지식들을 새롭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들의 사랑이 풍성해지도록 선교사역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선교만 하고 목양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선교가 아닙니다. 마치 목회를 하되 전도를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국은 부지런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모든 것에 한계는 있지만 힘닿는 데까지 끊임없이 성경을 탐구하고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책을 읽으셔야 합니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지는 별도의 또 다른 커다란 세계입니다.
따라서 ‘에피그노시스’는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로부터 왔기 때문에 모든 만물의 지식을 환원하면 그리스도께로 귀속되는 것입니다. 빅뱅을 통해서 만물이 태어났다면 스티븐 호킹 박사는 그것을 거꾸로 모든 만물을 하나의 지점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만물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이런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아직까지도 죄에 의해 가려져있고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에 이런 피조물들 하나하나가 가지는 영광이 최초만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렇게 우리의 맨 정신으로 사물만을 탐구해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연관되는지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과 성경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학문을 탐구하여,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선교사님들께 신신당부합니다. “선교지라서 책을 살 수가 없습니다.”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하고자하는 의욕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그토록 원하는 일은 결국 합니다. 즉, 원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의 집을 갔는데 제자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책을 보내주었습니다. 가서 보고 배신감을 느낀 것이 자기는 다니면서 내 제자라고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 책장에 꽂힌 책이 20여권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권을 꺼내서 펼치니까 책이 이야기합니다. “아, 오늘 처음 햇빛을 보는구나!” 차라리 다른 사람을 주지 그것을 왜 가지고 있습니까? 성도들의 아까운 돈으로 사서 보낸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아!” 하고 깨닫는 것이 있어서 3년 전에 선교사였던 나를 이 앞에 두고 지금의 내가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지적인 성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 지식에 매여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헌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총명’입니다. 헬라어로 ‘아이스데시스’입니다. 영어로는 ‘understanding’입니다. 이 단어는 고전 철학에서 ‘오성’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오성’의 의미는 칸트 이전과 칸트 이후에는 사뭇 다르게 사용됩니다. 칸트 이전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를 깨닫는 것, 혹은 논리와 상관없이 감각으로 확! 확! 찍히는 것이 오성의 기능이었습니다. ‘아이스데시스’가 라틴어로 ‘센수스(sensus)’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영혼론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어서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기능은 고등한 기능과 하등한 기능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등한 기능은 그야말로 보고 듣고 감각을 통해서 우리가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이라면, 고등한 기능은 지성에 속한 기능입니다. 지성에 속한 능력을 가리켜서 지적능력이라고 부릅니다. ‘멘스’라는 이 지적 기능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라티오(ratio)’라는 기능과 ‘인텔리겐띠아(inteligentia)’로 나누어집니다. ‘라티오’는 추론입니다. 추론을 담당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성’입니다. ‘오성’은 추론이 아니라 변증의 능력을 담당합니다. 변증은 논리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빛이 들어오면서 예전에 있던 것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정, 반, 합, 그리고 부정, 반, 합, 이렇게 나가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오성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추론해나가는 것이고 이것은 그야말로 초월적인 것들이 빛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아이스데시스’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아이스데노마이’라는 ‘깨닫다’, ‘놀라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합니다. 이것은 초월적인 세계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총명’은 판단력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성경은 총명의 중요성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합니다. 또한 총명은 ‘지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종합하면, ‘아이스데시스’라는 단어의 의미는 어떤 사물들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모든 만물들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관되는지, 그리스도는 만물과 어떤 연관을 갖는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그렇게 이해해도 알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것을 단박에 깨닫는 지성의 빛입니다. 따라서 총명을 받아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에피그노시스’가 끊임없는 지식의 활동을 이야기한다면 ‘아이스데시스’는 믿음의 활동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그 하나님의 위대하고 거룩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기의 말로 할 수 없는, 논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면서 ‘헤 아가페’는 ‘말론 카이 말론’되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할 때 그의 전임자는 캠벨 모건(G. Campbell Morgan)이라는 아주 유능한 설교자였습니다. 제가 그분의 책을 몇 권 번역했는데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캠벨 모건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전쟁에서 사람을 죽입니다. 그는 사람을 죽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던 트라우마 상담을 받았습니다. 상담자가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이 일어난 것이고 당신은 정당하게 하나님께로부터 권한을 받고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고 고전적인 답을 주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상담가와 목회자를 만나서 상담을 받아도 이 사람은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군목을 찾아가서 모두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군목은 아무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당시 청년이던 모건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모건은 “수많은 말을 했던 그 사람들에 의해서는 치료되지 않았지만 나를 끌어안고 울어주던 그 목사님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그분에 의해서 나는 그 사슬에서 놓였습니다.” 군목의 모습이 ‘아이스데시스’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근거를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평화가 쫘악 옵니다. ‘아이스데시스’입니다. 원래 우리 집사람은 정말 건강했습니다. 아프리카로 아웃리치를 갔다가 저녁 비행기로 도착해도 다음날 새벽기도에 나올 정도로 강철 체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쓰러졌습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3일 동안 온몸을 진찰했는데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점점 증상이 심해지니까 아내는 매일 저녁에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때 저도 굉장히 아팠을 때라 심각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도 나가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진 상황이었는데 침대에서 똑바로 앉아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셨다고 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와 유사하게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셨습니다.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네 아내는 죽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이 밀려오고 아내가 매일 유언을 남기는 것이 짜증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이야기했습니다. “여보, 내 이야기 잘 들어. 나의 하나님이 당신 안 죽는다고 하셨어. 그러니 제발 그런 짓 그만 좀 해. 내가 확신하는데 절대 안 죽어. 당신은 김남준 목사 천국 소천 20주기를 할지도 몰라. 죽지 않으니까 걱정 하지마.” 그 후 단 한번도 “우리 집사람이 죽지 않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라치오’, ‘이성’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명으로 들은 것은 자꾸 의심이 가는데 이것은 설명은 할 수 없는데 한 순가에 훅! 하고 들어옵니다. ‘죽지 않는다.’ 그것이 번개처럼 들어오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어왔는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평강을 줍니다.
종합해서 정리하면, 목회자와 선교사의 사명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그것이 시덥지않은 오만가지 사랑이 아닙니다. 114에 전화하면 안내원이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는데 사랑은 그런 데에 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왜 아무한테나 합니까?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김용옥씨가 책을 한 권 썼는데 창가에 서서 한 권을 다 읽었습니다. 읽다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지 말자』라는 책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사랑을 펼치면서 이 나라를 망가뜨렸다고 설명하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만약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 사람의 말에 현혹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안타깝습니다. 도올 선생님, 당신이 믿는 기독교가 전파했다는 그 사랑은 원래 기독교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기독교의 사랑이 무엇인지 당신이 제대로 이해했다면 당신의 이 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게 쓴 책이었습니다.
목회자와 선교사의 사명은 사람들이 ‘헤 아가페’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와 온 땅과 모든 만물을 하나로 묶는 단 하나의 사랑으로 온 인류를 돌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의 대사로 우리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 “너 파송교회는 있느냐?”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는 무슨 돈으로 세울 거니?” 묻지 않으셨습니다. 똑같은 것을 세 번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존경하는 선교사님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은퇴하셨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역을 많이 하셨고 저는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주변의 선교사님들의 말씀이 그 집 아이들이 너무 훌륭하게 자랐다고 합니다. 은퇴하실 때가 돼서 후배인 여자 선교사님들이 물어봤다고 합니다. “사모님, 어떻게 아이들을 저렇게 길렀기에 저렇게 예쁘게 기르셨습니까?”, “난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어. 돈도 없고 선교지는 계속 옮겨 다녀서 아이들을 제대로 기를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일평생동안 아이들에게 하나만 가르쳤어.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그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인간은 사랑의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살다가 태어나고 자라고 한껏 아름다움을 발산하다가 죽음을 향해 갑니다. 여자는 23살, 남자는 25살부터 늙기 시작합니다. 완전성에서 점점 더 멀어집니다. 결국 인간은 나중에는 늙고 마지막에 죽고 소멸되어서 불과 몇 백 년이 지나고 나면 원소로 다 돌아가고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인간은 마지막에 하나의 사랑이신 그분께로부터 온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을 남겨두고 그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그 사랑 안에 영원히 있는 것으로 그 사람의 인생은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떠나온 주님께로부터 돌아갈 주님, 지속될 영원한 나에 비하면 어둠속을 가르고 지나는 한 마리의 반딧불의 반짝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따라서 선교사와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 사랑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령함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모든 선교적이고 목회적인 비즈니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다 두고 갑니다.
제가 결혼한 지 38년 되었습니다. 가벼운 말다툼을 마지막으로 한 것이 22년 전입니다. 사랑하지만 잠시의 인연입니다. 같은 날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그것은 사고로 죽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것입니다. 같은 날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런 끔찍한 기도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은 모두 떠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갈 수도 있고 아내가 먼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는 20년 후나 30년 후에 불행히도 중증 치매에 걸려서 가족도 알아볼 수 없이 요양원에 보내지고 거기서도 감당이 안 되어 왼쪽 손에 수갑을 차고 침대에 묶여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며 죽음을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개되는 모든 삶의 여정 자체가 그 자체만을 보면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겠지만 그것이 결국 단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빛나도록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 때문에 내 가슴이 시리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그 사랑이 내가 매일 발견하는 지식 때문에 ‘말론 카이 말론’하며, 어둠을 뚫고 내게 들어오는 초월적인 믿음의 인식과 계시의 빛 때문에 내가 이유는 말할 수 없고 근거는 설명할 수 없지만, 톨스토이가 『참회록』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구름 위에 있지만 아무리 뛰고 굴러 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기둥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모르고 모레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목회에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고 선교지에서 선교역사가 내 이름을 기억할 정도의 위대한 기념비를 남기지 못했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 하나의 사랑으로부터 태어나서 그 사랑 안에서 살다가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다 쓸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즐거워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이 통과해야할 모든 이별과 슬픔, 고통을 지나면서 오히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찬란히 빛나는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꽃놀이 할 때 불꽃이 터지면서 온갖 아름다운 불꽃을 내는 이유는 발화매체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가 가슴 저리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을 때는 모두 나쁜 일이 있었을 때였음을 조금만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었을 때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쁘고 힘든 상황을 통해서 우리는 예전에 몰랐던 ‘에피그노시스’, 예전에 받지 못했던 ‘아이스데시스’를 깊은 기도와 하나님께로 모아진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그 반짝이는 불빛처럼 혹은 번개처럼 느끼면서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삶과 죽음은, 아이들이 땅따먹기를 하기 위해서 그어놓은 선보다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3). 즉, “너희를 떠나서 그리스도께 가는 것이 나는 더 좋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그렇게 사랑을 외쳤지만 그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습니다. 그의 삶의 결말이 믿음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단순히 목이 잘리고 순교하는 것이었겠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거기에 갈 때까지 수많은 다양한 일들을 겪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론 카이 말론’할 것입니다. 우리는 ‘헤 아가페’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더 잘 믿고 그 사랑을 더 충만하게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체득되고 그것을 양떼들에게도 그렇게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