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과 삶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녹취자: 김경애, 오희열
하나님이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한 후 이 시인은 2절부터 차례대로 왜 하나님을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논증합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죽음의 위협에서 자기를 건져주셨기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23편은 불꽃놀이에 비유한다면 5절은 가느다란 불꽃이 밤하늘 높이 올라 장렬하게 폭발하는 지점이 바로 5절입니다. 그것은 가느다란 연기를 뿜으면서 땅으로 떨어짐으로써 불꽃의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5절은 아주 시인이 가슴 벅차게 감격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잔치집의 문맥입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가 혼인을 하고 이제 혼사를 치르는 주인집에서 손님들을 모두 맞아들이고 음식을 잘 차려놓고 그리고 함께 즐거워합니다. 주인은 오랫동안 감추어두었던 잘 익은 질 좋은 포도주를 내어놓고 아낌없이 손님들의 잔에 넘치도록 그것을 부어줍니다. 그리고는 술잔과 술잔이 맞부딪히면서 그 결혼식을 한없이 축복하고 온 하객들이 함께 즐거워하고 있는 광경이 5절의 문맥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영혼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그 영혼은 빈 잔과 같아서 그 잔이 하나님과 영원한 것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영혼의 빈 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자신의 끊임없는 마음의 갈증과 영혼의 허기가 바로 그 영혼의 고향인 하나님이 자신 안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지식의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진리를 아는 지식의 빛이 없기 때문에 영혼의 갈증과 허기를 느끼지만 그것을 무엇으로 채워야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을 다양한 것들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빠지기도 합니다. 저는 폭탄테러를 자행했던 젊은이를 체포해서 신문하는 과정을 방송에서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 저렇게 멀쩡한 젊은이들이 대학교육까지 다 받고 앞길이 창창한 사람들이 폭탄을 짊어지고 그렇게 군중 속으로 건물 속으로 뛰어들어서 뼈 하나 살 하나 안남기고 다 분신해버릴 정도일까? 그래서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종교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 너무 놀랐습니다. 청년이 이제 교육을 받고 폭탄테러리스트가 되었는데 어떻게 교육을 받았느냐하면 ‘너 이렇게 죽으면 천국에 가는데 거기서 64명의 아주 아름다운 여자와 매일 매일 다른 사람을 바꾸어가면서 환희의 성교를 영원히 하게 된다.’ 이 청년은 그것을 아주 철썩 같이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현실에 희망이 없고 암울한 삶 너머에 있는 말할 수 없는 풍요로운 낙원에서 이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녀들이 64명인가 69명이 매일 매일 자신의 여자가 되어서 환락의 삶을 사는 그 소망을 가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빈 잔과 같은 영혼의 공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죽음을 택했지만 결국은 죽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 세상에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보면 사람들이 그 빈 것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종교에 몰입하고 어떤 사람들은 쾌락에 빠집니다. 그것이 어마어마한 죄를 짓는 쾌락은 아니더라도 엄청난 물질주의에 빠져서 자신의 허무한 것들을 메워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짧은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물질들을 사용하고 그런 산업들이 전 세계에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 보니까 미국의 한 호텔에서 새로 개발한 햄버거 하나를 출시했습니다. 그 햄버거가 650만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먹겠다고 수없이 예약을 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비행기가 에티하드(Etihad Airways)라는 항공기인데 아부다비에서 뉴욕까지 가는 1등석 항공권이 1인당 33,000,000원입니다. 그렇게 인터넷에 자기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호화의 끝판 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3등석을 타면 그 까짓것 150만원이면 가고 비즈니스를 타도 일반적인 비행기는 300만원에서 비싸면 500만원이면 갈 수 있는데 무슨 비용이 들기에 33,000,000원이 드는지 궁금해서 들어가 보았더니 비행기 예약을 하면 에티하드 항공사에서 집에 기다리고 있으면 최고급 리무진을 보내줍니다. 그래서 짐을 모두 실어주고 공항으로 옵니다. 데리고 와서 마시지 센터에 가서 우선 온몸의 피로를 모두 풀어줍니다. 그리고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미슐랭 3스타급의 요리사들이 최고로 호화로운 요리로 2시간에 걸쳐서 접대를 합니다. 접대를 하고나면 사람이 자신의 짐을 들고 비행기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수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걸어 나가서 리무진을 타고 비행기 바로 아래까지 데려다줍니다. 비행기 위로 올라가면 일등석의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파트가 비행기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들어가면 사무실 공간, 침대 공간, 뒤에 욕실이 딸려있습니다. 그것이 한 사람이 쓸 수 있게끔 된 것이라서 일등석의 별명이 Apartment입니다. 들어가서 거기서 일을 보다가 자고 싶으면 집과 똑같은 침대에서 자고 그리고 걸어서 밖에 나가면 10,000m 위에서 샤워를 할 수 있게끔 시설을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미국까지 날아가는 시간이 끽해봐야 11시간 정도입니다. 33,000,000원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이 그 비행기를 타기위해서 줄을 섰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들여다보면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 호화스러운 삶과 향락, 그리고 자기 취미에 빠지는 몰입 이런 것들은 그런 것을 잠시 잊어버리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라는 화란의 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참 불가해한 존재이다.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하나님을 떠난다. 찾으면서도 떠나고 도망가면서도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이상한 존재다.”
(예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서울에 가면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의정부 아래에 수유리라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경기도였는데 다 서울이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한 병원의 의사가 당직을 서고 있는데 새벽 4시 반쯤 되어서 택시 한대가 달려왔습니다. 신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업고 와서 이 사람은 방금 심장마비인 것 같은데 빨리 좀 고쳐달라고 해서 침대로 업고 와서 응급실에 눕혔는데 의사가 만져보니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얀 보자기로 덮으면서 이미 운명하셨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고 나니까 가족들이 울고불고하면서 택시에서 내려서 병원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그 사람과는 가족도 아니니까 눈물 날 일도 없고 의사로서 죽은 사람을 이렇게 보니까 세상에 이상한 폼으로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두 손을 움켜지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자연스럽게 두 손을 펴고 죽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뭔가 움켜잡으려고 왔다가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없이 간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한손은 꽉 움켜지고 한손은 펴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생활을 20년 이상했지만 이런 이상한 자세로 죽은 사람은 생전 처음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가족들이 오기 전에 시체가 있는 곳에 가서 신기해서 왜 한손에 주먹을 쥐고 한손은 펴고 죽었을까 하고 가서 주먹을 쥔 손가락 한 개씩 펴봤습니다. 그랬더니 화투 2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실화입니다. 의사가 화투 2장을 까보았더니 38광땡입니다. 스토리가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장사 집에 가서 밤새도록 화투를 친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돈을 잃은 것입니다. 화투놀이 가운데 화투 2장으로 하는 놀이가 있습니다. 잘 모르는데 화투 5장씩 주면 어떻게 해서 마지막에 2장을 가지고 랭킹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38광땡은 모든 끗발 중에서 제일 높은 끗발입니다. 예를 들자면 만원씩 배팅을 하면 세 번까지 배팅을 할 수 있는데 10명이 치면 300,000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패를 가지고 있습니다. 땡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규칙에 따라서 30,000을 배팅한 만큼 벌금을 냅니다. 그러면 그 판돈은 금방 자기 것을 빼더라고 30만원에서 57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38광땡은 그것의 3배를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300,000원이 깔렸으면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3배를 내야하니까 90,000원을 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래 있던 30,000하고 120만원이 되는데 자기는 빠져도 큰돈을 벌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쌓였는데 끗발이 오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것을 다 펴보고 ‘나는 죽었어.’ ‘나도 죽었어.’ ‘너는 뭐니?’ 그랬더니 딱 펴보고 38광땡이라는 것을 알고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느냐고 자손들이 물어보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 어떻게 돌아가셨어?’ 그렇게 물어봅니다. ‘할아버지는 왜 돌아가셨어?’ 그렇게 물어봅니다. 그런데 일생동안 선교를 잘 하다가 헌신적으로 살았는데 마지막에 ‘너희 아버지는 일주일 내내 선교하다가 토요일에 친구 선교사님들과 모여서 화투를 치다가 판돈이 많이 쌓였는데 38광땡이 나와서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 그러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웃었지만 이 사람은 화투 2개를 들고 까불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지만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집문서, 땅문서, 학위 그런 것을 들고 서로 자랑하다가 결국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은 허망한 것입니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 찾아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시편에서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갈망을 노래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영혼의 빈 잔은 세상에 있는 부귀영화, 가슴을 짜릿하게 하는 쾌락, 권력, 이런 것들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물론 사역에서의 성공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오래된 일입니다. 제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제 책을 읽어주던 때였습니다. 그때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라는 책을 읽고 어떤 사모님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 사연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러시죠. 누구세요?” “목사님 책을 읽고 은혜를 많이 받은 인천 지역에 사는 사모인데 그 이상은 묻지 마십시오.” “고민이 무엇입니까?” 자기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는데 대단한 여자입니다. 목소리가 40대 중반쯤 될 것 같은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답니다. 그리고 지금의 목사님을 만나 결혼을 했답니다. 뭐가 문제냐고 했더니 목회에 복을 주셔서 교인이 1700명 정도 모인답니다. 그때 저는 지하실의 교회에서 한 150명이 모일 때인데 굉장히 큰 교회입니다. “왜 전화를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우리 목사님이 문제입니다. 뭐냐고 했더니 어느 날 아침에 목사님이 특별히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볼일이 있다고 나갔는데 그런가보다 하고 자기는 동네 교인들하고 전도를 하는데 좀 멀리 나갔답니다. 멀리 나가서 전도를 하는데 가게가 하나 있는데 어른들이 빠칭코(파친코パチンコ )를 하는 가게였습니다. 그것이 본격적인 빠칭코가 아니라 성인오락실이라고 해서 돈을 내고 돈을 따는 곳인데 지금은 그런 것이 많이 없어졌는데 옛날에는 많았습니다. 여름이니까 문을 열어놓고 하는데 사모님이 이렇게 지나가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입니다.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담배를 계속 피면서 이것을 계속 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는 말씀드릴 수 없고 전문가로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이런 영혼의 빈 잔이 사역에서의 성공에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채워야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선거를 해서 당선이 되어서 얻고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고 신앙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는 채워질 수 없습니다. 시인이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그것이 내 마음에 가득차서 포도주를 가득 부으니까 잔이 넘치듯이 하나님으로 그렇게 넘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쁨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사역을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단어를 최근에 써본 적이 있습니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 환희, 희열, 가슴 벅찬 기쁨, 감격, 사실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느끼면서 살라고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목회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할머니가 내가 어렸을 때 자주 쓰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대장장이 집에 성한 칼이 별로 없단다.” 옛날 어른들이 쓰던 유명한 속담입니다. 원래 대장장이 집에 쓸 만한 칼이 없단다. 밖에서는 남을 위해서는 수없이 칼을 만들어 팔아도 자기 집에 칼은 신경을 안 쓰는 것이 대장장이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가장 소외될 수 있는 사람들이 목회자들입니다. 선교를 많이 말하지만 자신은 아직 선교가 안 되기 쉬운 사람이 선교사입니다. 사실 7명이 모여서 교회를 개척해서 24년이라는 세월을 오면서 교회를 배로 친다면 무슨 파도를 만나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이 나이에 노련한 선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별의별 시련과 폭풍과 파도, 삼각파도를 다 만났습니다. 헤치고 지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묻습니다. “목회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까?” 물론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목회가 참 재미있다고 하는데 짧은 순간을 보면 재미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도 보람이 있고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목회라는 것은 우리의 가지고 있는 본래의 본성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24년 전에 교회를 개척하고 5,400번의 공식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많이 한 것입니다. 동년배들에 비하면 제가 3배쯤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느 잡지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설교와 목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교는 나에게 영원한 이국의 언어이고 목회는 내가 절대로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다.” 그것입니다. 다시 태어날 일도 없지만 다시 태어나서 또 이것을 하라고 할 때 나는 ‘아멘’ 할 자신이 없습니다. 단 하루도 설교단에 올라가면서 나는 이 설교에 최적화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목회를 하면서 단 하루도 나는 이 목회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4,000명, 5000명 목회하는 것은 물론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일 어려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자신을 목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선교를 잘못하고 있으면 누가 와서 야단쳐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실제로 야단을 치면 여러분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림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설교를 끝까지 말 안 듣는 교인이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막 설교를 합니다. 교인들은 은혜를 받습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못합니다. 마지막까지 안 죽습니다. 그 다음에 어려운 사람이 자기 아내입니다. 아내는 ‘너나 해라.’ 그렇지 않으면 ‘말은 잘해요. 말은…….’ 여러분 선교사나 목회자의 마지막은 자기를 모르는 많은 사람이 얼마나 인정해주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설교하는 것만 봤고 선교 사업하는 것만 멀리서 봤습니다. 그런데 가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본 것입니다. 매일 24시간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가족이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긴 세월을 지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그렇게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왕이 되어서 승리의 소식을 들었을 때, 영토가 확장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반역자들의 무리를 소탕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그때에 내 잔이 넘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고 자신은 언약적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잔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가져다줄 수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훌륭한 선교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선교입니다.
아무튼 이 시인이 그렇게 영혼의 빈 잔이 가득차서 기뻐했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 성경이 두 개를 제시하고 있는데 ‘주께서’ 라고 되어있지만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께서’ 라고 나옵니다. 우리말에는 2인칭에 대한 높임말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라는 것은 제3자입니다. 우리말의 한계입니다. ‘당신이’ 그러면 우리는 깔보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영어에서는 안 그런데 할 수 없이 고민하다가 ‘주께서’ 라고 3인칭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혹은 ‘주께서 원수들의 면전에서’ 한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괴롭히는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옛날 성경에는 ‘상을 베푸시고’ 라고 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조사했더니 50% 이상이 그 상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 받는 상장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슈한’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밥상’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은 ‘밥상’이 식탁처럼 야트막하고 기다란 소파 같은데 다리 뻗고 누워서 비스듬히 누워서 먹는데 여기 사람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열 명이 밥을 먹으면 어디에 눕는지 궁금하기는 합니다. 어쨌든 비스듬히 소파 같은데 기대서 이렇게 게으르게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축문화에서 하루 종일 힘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합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야트막한 탁자가 ‘슈한’입니다 그러면서 그 상을 하나님이 차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1993년도에 개척하고 94년도쯤 되었을 때 내방에서 혼자 히브리어 성경으로 이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바로 이 5절을 읽으면서 너무 감격해서 성경을 들고 방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단어가 무엇이냐 하면 ‘차려주시고’ 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말로 ‘아라크’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 개의 사물을 질서정연하게 정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에 많이 나오느냐하면 전쟁의 문맥에서 많이 나옵니다. 군사들이 막 흩어져있는 것을 대오를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라크’입니다. 진을 칠 때에도 질서정연하게 진을 치는 것이 ‘아라크’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밥상이 어떤 종류의 밥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년하여 시집갈 때가 되었는데 연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 나 결혼할거야!” 깜짝 놀랍니다. “네가 연애를 했니?”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부모님도 너무 기뻐했습니다. 뭐하는 사람이냐고 했더니 어쩌고저쩌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한번 보자.” 그리고 데리고 왔는데 몇 마디 시켜보니까 이놈은 아닙니다. 꽝입니다. 그래서 추호도 마음에 들지 않고 직업도 확실하지 않고 이런 녀석하고 결혼시키면 우리 딸은 굶어죽기 딱 맞겠다고 생각하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하고 결혼하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어서 결국은 혼인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엄마” “응” “우리 신혼여행 갔다 왔어요.” “그래” “엄마 우리 김 서방이 인사한대요.” “장모님 안녕하셨어요.” “그래 수고했네!” 다시 전화를 바꿨습니다. “엄마 내일 인사갈 거야” “와라” 목소리에 힘이 없습니다. “우리 점심때 갈 테니까 우리 밥 줄 거지?” “그래 줄게 와라” 그리고는 아침에 눈을 떴는데 남편이 “나 배고파 밥 줘” 그러니까 “참아 조금 있으면 엄마한테 갈 텐데 엄청나게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릴 거야.” 아침하기 싫으니까 그렇게 이야기하고 선물을 하나 사들고 갔습니다. 집에 갔는데 전을 부치고 고기를 삶고 정신없을 줄 알았는데 조용합니다. 그래서 벨을 딩동, 딩동 눌러도 소식이 없어 문을 여니까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고 안방에 들어가니까 엄마 혼자 베개를 베고 계속 주무시는 것입니다. “엄마 우리 왔어” “그래” 그러면서 부스스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빠 어디 가셨어?” “볼일 있다고 나가셨어.” “장모님 절 받으십시오.” “절은 무슨 절” “그래도 받으십시오.” 절을 했습니다. 딸내미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엄마 밥 줄 거지?’ ‘그럼 기다려라’ 엄마가 나가더니 1분 만에 밥상을 차려왔습니다. 귀퉁이가 떨어진 나무소반에 먹다 남은 밥하고 시원한 물 한 그릇하고 그리고 숟가락 두 개가 올려져있는데 반찬이라고는 수많은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딱 하나입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들게” 내려놓는데 너무 덜컹 내려놓은 바람에 물이 찍하고 흘렀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다. 밥상이 손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싫다. 왜 왔니? 너라는 인간이 우리 집안과 인연이 엮인 것이 진짜 통탄할 일이다.’ 밥상이 소리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교인이 1,100명이 모일 때까지 빼놓지 않고 심방을 갔습니다. 1,100명이 되고나니까 일주일 내내 따라다녀도 도저히 등록한 사람에게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그래도 일이 있으면 심방을 갑니다. 나는 가정주부들이 가사노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압니다. 그래서 저는 웬만하면 우리 집사람 괴롭히지 않으려고 하고 교인들도 집에서 밥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여성도들을 모아놓고 신세진 일이 있어서 밥을 사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대들은 어떤 밥이 맛이 있냐?” 그랬더니 우리가 하지 않는 밥은 모두 맛있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 이야기를 할까 하고 밥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느 부목사님 한분이 “목사님 아무개 집사님이 꼭 심방을 받고 싶답니다.” “그래 그러면 가야지 그런데 집에서 밥은 하지 말라고 그래라. 그냥 갈비탕이라도 하나 먹고 들어가자고 해라.” 그랬더니 밥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해라.” 그래도 하겠답니다. ‘할 수 없지.’ 하면서 갔습니다. 그 부인은 50대 초반의 부인이었는데 우리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자신의 말로 인생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잘 사는 집안은 아니고 평범한 집안이었는데 들어왔습니다. 들어갔는데 11시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은혜롭게 예배를 잘 드리고 한 40분쯤 되었을 때 “목사님 이제 점심식사를 하셔야죠?” “네.” 좀 기다렸더니 세 명이서 밥상을 들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독주택이었는데 옛날에 쓰던 큰 교자상에 차려서 가지고 오는데 내 자리에 갖다놓았습니다. 반찬의 가짓수가 얼마나 많은지 젓가락을 들고 팔을 뻗어도 사정거리에 들어오지 않는 반찬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마음이 좀 상했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한 끼 먹고 가면 그만인데 쓸데없이 뭐 이렇게 많은 반찬을 차렸습니까? 이것 할 시간 있으면 기도하고 성경이라도 읽지…….” 그랬더니 그 자매님이 마음이 상했습니다. “목사님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드세요.” 자기는 가운데 앉아서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 반찬은 날라다주고 몇 명이 같이 앉아서 먹었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식탁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식탁을 준비했느냐고 했더니 한 끼를 위해서 한 달 전부터 준비했다고 합니다. 한 달 전부터 기도하면서 상을 이렇게 차려야겠다고 한 달 전부터 준비했다고 합니다. 한 끼를 말입니다. 한 달 전부터 기도하면서 이 상을 어떻게 차려야겠다고 계획을 완벽하게 세워놓고 열흘 전부터 김치를 담구기 시작해서 닷새 전에 해야 할 반찬, 삼일 전에 해야 할 반찬, 이렇게 밑반찬을 하고 당일에 신선한 재료를 위해 새벽에 시장을 보고 다 다듬어 놓고 언니들 두 분이 와서 식사 시간 직전에 한꺼번에 요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차려서 가져온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전라도 쪽으로 내려가면 음식 문화가 엄청나게 발달해 있습니다. 전라도 쪽의 어떤 교회에 갔더니 장로님께서 점심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오전 집회를 마치고 나니까 열두 시쯤 되었는데 그때 나를 차에 태우고 한 시간 가까이를 가는 것입니다. 50분 정도를 가니까 한식집이 나오는데 좀 짜증이 났습니다. 먹으러 그렇게 멀리 다니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새벽기도도 인도하고 아침에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렇게 가서 앉으니 밥상이 나오는데 8명이 앉아서 코스의 3분의 1을 먹었는데 배불러서 더 이상 못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앉아서 접시가 몇 개인지 세어보았습니다. 200개가 넘었습니다. 그 당시 한 사람 앞에 1만5천원 정도였습니다.
그런 밥상을 시인이 받은 것입니다. 그냥 소박하게 빵 한 덩어리와 요구르트나 하나 있는 그런 밥상이 아니라 왕의 성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 앞에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문학적인 상상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어느 날 낚싯줄에 밥상을 달아서 거기에 온갖 한정식을 차려서 구멍을 뚫어 지상으로 내려 보냈더니 배고픈 김에 이 시인이 미친 듯이 허겁지겁 먹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 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시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밥상을 차려주셨는데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죄인에 불과했는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마치 왕족처럼 대우해주신 것입니다. 그 식탁을 하나님과 마주하면서 대하고 있는데 수많은 원수들이 에워싸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다고 그렇게 하나님께 밥상을 받고 있는 시인을 보면서 그가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감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차려주시는 말씀의 식탁, 말씀의 섬세함, 그 말씀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해주시는가를 이 시인이 깊이 느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식사’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함께 식탁을 나눈다는 것은 형제가 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보면 식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공동체의 한 의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했을 때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십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광야에 나가서 만나를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하나의 밥상의 공동체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죄인들과 함께 밥을 잡수신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눈에는 엄청 거슬렸습니다. 의로운 선지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죄인들과 함께 밥을 퍼 먹을 수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옛날에는 양반의 상황이 어쩔 수 없으면 종들과 함께 같은 방에서 잠을 자긴 하지만 굶어 죽어도 밥은 같이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은 상전의 가족일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한 가족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당신께서 죄인들과 밥을 먹는 것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멀리서 거룩한 척 하면서 너희들은 더러운 인간이니 회개하고 깨끗하게 된 다음에야 우리와 사귈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들어가셔서 그들과 한 가족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사랑하시고 그것이 그들을 회개시키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일이 생명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이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하시면서 이 생명적인 연합은 결국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그림이 짧은 5절 앞부분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명의 양식을 자신에게 먹여주심으로 상처밖에 없는 인생을 살면서도 그 상처를 신앙으로,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극복하면서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에서 오는 힘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선교지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떠나면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아직도 계획이 없으실 것입니다. 본국에 가보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자신을 파송한 교회도 있지만 이미 담임목사가 한 번, 두 번 다 바뀌어서 그 선교사를 알지 못하는 새 담임목사가 와서 마치 개 닭 보듯이 합니다. 선교비도 보내주고 알았던 성도들은 다 늙어서 대부분 죽고 살아남은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교회에 간신히 나옵니다. 그때, 애들이 있다고 해도 다 미국가고 자기들 밥벌이 한다고 바쁘게 살고, 그때 여러분 가운데 여유가 있으신 분은 전원주택이라도 짓고 가서 사시겠지만 그런 분은 극소수일 것이고 대부분 선교사 양육시설이라도 가면 선택받은 사람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경쟁률이 여간 높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있다가 사모님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몸도 아픕니다. 다리도 절뚝절뚝하고 지팡이를 짚고 보조기도 차고 간신히 다닙니다. 그리고 빈 방에 혼자 누워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찾아옵니다. “선교사님, 그 젊던 얼굴은 어디 갔습니까? 선교여행도 다니고 참 보람 있었는데 외롭지 않으세요?” 물을 때, 그때 말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외롭긴 뭐가 외롭습니까? 내가 여기 혼자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이것은 그냥 결심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고백이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적금을 들어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우리의 중심은 일이나 세상에서의 성공에 두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두는 것입니다. 그것에 자신이 농익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질병과 연약한 것들이 옵니다. 화내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그냥 끌어안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치료도 받지 말고 어느 한 구석에서 죽어가라는 뜻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자기를 불행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관계의 기쁨이, 내 잔에 넘쳐흘러서 거기에서 오는 관용과 사랑과 위로가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절대 어떤 사람이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은혜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성례전적인 사랑의 관계가 시인의 잔에 넘치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고 깊이 사랑하며 말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나쁜 일을 해도 그것이 충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럴 수도 있지.” 악을 용납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왜 그 잔이 넘치게 되었는가?’ 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습니다. 왕이 있었지만 나라는 왕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고백을 합니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왕의 제도를 허락하셨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기뻐하시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 13:11)
어쨌든 이스라엘에 왕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근본적인 이상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였습니다. 신정 국가적 왕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통치를 이스라엘에 구현하시기 위해서 세 개의 솥발 같은 직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 직임의 첫 번째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사람이었고 그들의 주요임무는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을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문제에 직면할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하듯이 그 당시 경건한 사람은 ‘주전 15세기의 모세가 주전 8세기에 살아있다면 어떻게 판단했을까?’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 생각을 선지자들이 설교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예언은 그의 사역의 아주 적은 일부분이었고 특별한 때에만 하나님이 앞날을 알게 하셨습니다. 왜? 인간의 미래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도 5년 후에 여러분이 어떻게 되실지 모르지 않습니까? 모릅니다. 저도 모릅니다. 대충 예상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관성에 의해서 생각하는 것이지, 내년에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 “김남준 목사를 다시 모십시다.” 하시면 “그분 벌써 돌아가셨답니다.” 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을 인간에게 알려주시면 좋은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미래가 승승장구하는 미래를 보여주셨다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 앞에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낙심해서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지식에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가끔 문을 열어서 보여주시지만 그것은 아주 드문 경우입니다. 그래서 “봤다”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그렇게 설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두 번째로 제사장은 반대로 백성들의 편에 서서 죄로 더러워진 백성들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이 문제 대한 답을 들려주었습니다. 마지막 왕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왕이 되셨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 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질서가 타락한 백성들 속에서도 구현되도록 만드는 것이 왕의 임무였습니다. 이 임무는 여러분이 생각해도 매우 특별히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 이상의 그 어떤 능력과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붓습니다. 기름을 부으면 그냥 기름만 붓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성령의 능력이 함께 부어져서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 탁월한 지혜와 결단, 용기, 능력, 판단, 이런 것들을 갖게 하셔서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그 성령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십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일평생에 세 번의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긴 기름부음은 첫 번째,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서 받은 기름부음이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임하시고 그를 충만하게 하셔서 다윗에게 놀라운 기쁨과 성령의 감격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탁월한 능력과 용기, 지혜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구약시대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경륜이 신약시대의 경륜과는 좀 다릅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님께서 믿는 자 안에 한 번 오시면 떠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그 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고 일이 끝나거나 그가 패역할 때 하나님께서 그 영을 거두십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메시지를 보면서 깨닫는 것은 진짜 우리의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희열이 넘치게 되는 것은 역시 성령에 충만한 경험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결핍이 가득한 세대를 살면서도 하나님의 천국의 놀라운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저는 엄마 아빠가 예수를 믿지는 않았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다른 가족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고모들의 손에 이끌리고 업혀서 그렇게 예배당을 다녔고 제가 45세쯤 되었을 때는 제가 기어 다니던 그 예배당에 가서 설교를 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초등학교 때에도 다니고 중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 저는 구원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제가 유치부 때부터 계속 교회를 다녔지만 진심으로 나를 한 영혼으로 생각하며 사랑해준 선생님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육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을 만났겠습니다. 그 중에 단 한명이라도, “남준아, 너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믿어지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니?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너는 믿어지니?” 그렇게 따뜻하게 질문해주는 분도 없었습니다. 제 기억에 그분들은 영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받고 신앙을 가졌더라면 제가 방황을 덜 했을 것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나이로 따지면 태어난 지 14년 2개월 되던 해였습니다. 주일에 교회를 가던 길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변두리였기 때문에 둑길을 걸어서 한참을 가야 교회가 나왔습니다. 논둑길을 따라서 걷다가 갑자기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논둑길에 엎드려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2월의 어느 날이어서 추울 때였습니다. 물론 그때 우리 집이 가난했지만 가난 때문에 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 울었겠습니까? 너무 두려웠습니다. 질문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그 질문에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를 괴롭힌 질문은 네 가지였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한참을 울고 나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무신론자로 산다. 하나님이 있건 없건 나는 상관없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나는 살 것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을 돌봐주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참견할 권리도 없다.” 이렇게 중대결심을 하고 교회를 끊고 무신론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이 열네 살 2개월, 중학교 2학년 때였으니까 누구와 얘기를 해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선생님과 얘기를 해도 공감 가는 이야기를 해 주시는 선생님이 없었습니다. 한두 분은 계셨지만 저를 자꾸 불교로 인도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어차피 신을 버렸는데 이제 와서 무슨 종교의 힘을 빌어서 위로를 받아보려고 하겠는가? 하면서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읽은 책들은 문학작품들이었습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너무 기뻤던 것은 내 친구들과 주위의 사람들을 만나면 내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문학의 세계 속에 들어가니까 나와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런 사실이 저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구나!’ 한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쯤 되니까 그 다음에는 문학작품을 계속 읽으니까 공감은 되는데 그 안에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냥 고민을 보여줄 뿐이지 답이 없었습니다. 답을 하면 그것은 문학이 아닐 것입니다. 읽는 동안은 뭔가 내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데 책장을 덮고 나면 다시 허무해졌습니다. 이런 삶의 끊임없는 질문들을 어떻게 해결했을 지를 생각하면서 그 다음에는 사상, 철학, 이런 쪽으로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우리 때에는 실존주의가 광풍을 일으키던 때였습니다. 그런 책에서는 답을 찾았다고 큰 소리는 치는데 그 사람들도 별로 행복해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제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그 책을 읽고 어찌어찌하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되었습니다. 나를 그렇게 인도했던 작품 두 권이 있는데 톨스토이의 『인생론』과 『부활』이라는 소설이었습니다.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마음에 평화를 느낀 적이 없고 도피라고 생각했는데 그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신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975년도쯤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를 다닐지가 고민이었습니다. 천주교회를 갈 것인가? 아니면 개신교로 갈 것인가? 말입니다. 개신교는 왠지 약간 사기성이 있어 보이고 허접해보였습니다. 천주교는 뭔가 아우라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마지막에 천주교가 아니고 개신교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예배당을 찾은 것이 아니라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이 공간 3분의 1정도 되는 작은 크기의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수요일에 갔더니 한 20여명이 앉아서 톱밥 난로를 태우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삐거덕 거리는 풍금소리에 맞춰서 수요예배를 드리는데 찬송가가,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찬송가를 부르니 세상에 철들고 나서 처음으로 평화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는 교인이 20명 정도 모였는데 목사님은 50세가 넘어서 신학을 하셔서 할아버지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당신은 설교를 엄청나게 잘 하신다고 생각하셨지만 저는 무슨 설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재미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그만큼 설교를 통해서 유익을 받은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가장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 설교를 알아듣지 못하게 재미없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할아버지 입장에서 저를 보시기에 얼마나 대견하겠습니까? 말끔한 청년 하나가, 전도를 하지도 않았는데 이 교회를 다니겠다고 하니까 얼마나 귀엽습니까? 10월인가 9월에 등록을 했는데 어느 날 뜬금없이 목사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이번 11월 추수감사절에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학습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세례를 받느냐고 여쭈었더니, 너는 오래전부터 다녔으니까 이미 학습이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제 눈에는 목사님이 하나님 다음이었으니 어느 안전이라고 그것을 거역하겠습니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교회당에 나와서 전기세를 아끼려고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하는데, 내가 예수를 믿은 것까지는 이해를 하지만 어떻게 주님을 그렇게 멀리 떠났던 사람이 예수님과 혼인을 할 수 있겠는가? 하며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주일을 기도하다가 결국은 토요일에 세례문답을 받고 주일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11월 15일 경이었는데 엄청 추웠습니다.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는데 목사님께서 세례를 주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생전 처음으로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위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쭉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셨다는 사실이 감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위로부터 쭉 내려오더니 그 다음에는 몸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중력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흐르고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제 꿈이 영문학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하고 이런 시련 저런 시련을 겪으면서 대학을 떨어지기도 하고 붙었는데 돈이 없어서 못 가기도 하고 떡 장사도 하고 배추장사도 하고 별의 별 고생을 다 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꿈이 다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다가 죽든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눈을 떠 보니까 사람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너무 추워서 유리창에는 성에가 끼었습니다. 거기에 아침햇살이 쫙 비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성령을 경험한 최초의 체험이었습니다. 순수한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참게 만듭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특별한 성령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항상 똑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외에 나머지 것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시인이 그런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그런 충만한 은혜를 경험했을 때, 그때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며 누군가가 자기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 때,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너무 기뻐하게 됩니다. 그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날 때 인간은 허탄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세상의 가치들로 채우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과 실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대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6-17)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과 함께 이 시인은 동행하면서 그분께로부터 오는 그 모든 기쁨이 적군에게서 빼앗은 수많은 보화, 탈취물들이 주는 기쁨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왕궁의 수많은 궁녀들과 후궁들, 첩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주는 기쁨보다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겨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너무 슬픈 사람이고 자기를 선교하는 일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 주님은 인해서 한없이 즐거워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우리의 빈 잔을 가득 채우는 포도주라면, 그것이 흘러넘친 결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섬기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도와주고 가엾게 생각하며, 우리 자신이 이 세상을 지나면서 흐르는 강물처럼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용을 당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물길이 나면 강물이 흐릅니다. 그러면 온 땅은 그 강물을 빼앗으면서 생태계를 만듭니다. 그것이 강이 되려면 엄청나게 많은 물이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마른 땅에 풀들이 나기 시작하고 어디서 생겨나는지 모르지만 고기들이 다니기 시작합니다. 풀이 생기면 열매가 맺히고 새들이 와서 먹고 그러면 거기에 숲이 생기고 동물들이 와서 깃듭니다. 이윽고 기름진 땅이 되면 사람들이 와서 동네를 건설하게 됩니다. 모두 사막 한 복판을 지나는 강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막의 한 복판을 흐르는 강물 같은 존재들이 되어서 나는 흘러가고 나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나를 빨아먹으면서 또 다른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풀, 나무, 꽃, 집, 숲, 모든 것들은 자기들이 흘러가는 강물 때문에 덕을 입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물은 그것을 한탄하지 않습니다. 흘러가고 나면 그 다음 강물이 흘러 들어와서 그 땅을 또 새롭게 합니다. 흘러가는 강물이 잊히고 내려오는 강물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그 강물이 흐름에 흐름을 계속하며 그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우리는 그 속에서 그 강물 줄기 중간의 한 물이 되어서 어느 시점에 보태어지고 어느 시점에 흘러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해보십시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렇게 분에 넘치는 은혜의 대접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렇게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