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예배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골1:1~12)
녹취자: 김경애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쓴 것인데 제일 먼저 그가 기도하는 것은 골로새교인들의 지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크게 영혼의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총명의 기능, 생각의 기능, 마음의 기능이라고 보는데 이 세 가지가 또렷하게 나뉘어져 있다기보다는 그 영혼 안에 있는 동일한 능력으로써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이야기하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그런 초월적인 진리들에 대한 지식입니다. 결국 어제 우리가 이야기하면서 정집사가 그 말도 안 되는 것이 믿어지더라고 했는데 다른 합리적인 사람들이 보면 우리들이 예수 믿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인데 저 사람은 저렇게 믿어지는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의 비밀들을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가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신령한 지혜와 총명의 눈을 뜨고 여기에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우십니다. 예전에는 그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없기 때문에 세계를 돌아보아도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들을 교회에 잡아두고, 타이르고, 잘 지내면서 사람들이 예의 바르게 행동하도록 만들어 놓는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새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는 진리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런 변화가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담고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이 그런 지성을 말씀하신 후에 그런 다음에 의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진리를 안 다음에는 ‘주께 합당하게 행하고’ 그 다음에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그리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고’ 왜 그랬습니까? 예전 같으면 하나님께 합당하게 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따라 살던 사람인데 범사에 자기를 기쁘게 하며 살고, 범사에 자기 눈에 좋은 육체와 욕심을 따라서 사는 사람인데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의 목적과 방향이 전환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선교적인 삶을 살자는 것은 아웃리치를 열심히 다니자는 그런 정도의 뜻이 아니라 인생의 목표 자체가 하나님이 나를 지으시고 세계를 창조하신 위대한 계획의 물줄기와 함께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몇 개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제일 먼저는 한 사람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커다란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빛을 뵈오며 예전에 몰랐던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보고 이 모든 만물이 그분에 의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이제 이 모든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그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그 다음에 흘러넘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면 교회에서 분명히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교회를 건너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교회를 건너뜁니다. 그리고는 선교적인 삶을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선교는 항상 선교현장에서 고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목회현장은 후방이고 선교지는 전방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1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렇게 평화로운 곳 말고 목숨이 위태로운 곳에서 선교하는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선교의 현장이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 간다는 점에서는 이렇게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곳에서 목회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사역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보면 선교사는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너무 곤란하겠지만 비교적 자기가 죽는 것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선교사들은 나의 이야기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수없이 그런 케이스를 봅니다. 목회자에게서는 그런 것이 일반적이냐?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어지럽겠습니까? 그러면 마찬가지 아니냐?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상황과 환경적으로 볼 때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체 이것이 왜 이럴까 생각해보았더니 교회를 너무 모릅니다. 표준적인 목회자들의 경우 목회를 하면서는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상황이 너무 많습니다. 돈이 없어서 안 되거나 사람이 없어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이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실은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 포기해야 되는 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 열린 교회가 걸어온 길은 모두 내가 앞서서 선택하면서 걸어온 길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진리를 양보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내가 만약에……. 그런 것은 신앙이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을 깨달으면서 생각들이 훨씬 유연해지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자가 아무리 성품이 좋고 개념이 많아도 시집을 가서 자기 자식을 낳아서 진짜 셋을 낳아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자기를 희생하며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속에 남편과 어떤 관계를 맺고, 둘이서 한 식구만 이런 데에 와서 삽니까? 시집식구들과 다 얽혀서 지지고 볶는 것을 경험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배우듯이 역시 똑같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을 보면 돈이 없어서 고생할 수도 있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데 뜻대로 안돼서 힘들 수도 있고, 원주민들이 말을 안 들어서 힘들 수도 있고, 때로는 원주민들 중에서 자기가 믿었던 사람이 살인을 하고 강도를 하고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납니다. 그런 점에서는 늘 목회자와 유사한 고난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선교지에서는 선교사가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필요한 것을 갖다가 공급해 주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런 구조이지 머리를 맞대고 원주민과 고민을 하면서 그렇게 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꺾고 그러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디인들 고난을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그 고난을 통해서 선교사들이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모두 인정하면서 두 번째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게 부어주신 그 신령하고 충만한 은혜와 사랑이 교회를 이롭게 하고 그 다음에 그 교회에 기반을 두면서 그러면서 그 교회를 가정처럼 사랑하면서 선교적인 삶으로 점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회, 그다음에 자신의 선교적인 비전의 삶, 이 선교적인 비전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선교지에 가서 돈을 좀 쓰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선교를 위해 바쳐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이스라엘의 마음에 비치고, 그 빛이 이스라엘에 넘치고, 이스라엘에 넘친 빛이 열방들에게 확장되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이렇게 모든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입니다.
우리가 어제 무안신학교의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세상에 보람 있는 일이 무안신학교 하나겠습니까? 우리가 동시에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으니까 한때 결국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못하고 접은 가운데 있지만 캄보디아 젊은이들을 길러내는 계획 같은 것들은 누군가가 여유가 있고 에너지가 있는 교회에서 만약에 한다면 아마 20년 후나 30년 후에 우리가 무안신학교를 해서 보람을 느끼는 것 못지않은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 있는 사람은 꿈이 없고, 꿈이 있는 사람은 돈이 없습니다. 그리고 꿈이 있는데도 그 꿈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선교적인 삶을 한 사람이 결심을 하면 그것을 통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선교의 혜택을 누리면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 갑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쓰다가 왔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은혜의 요람에서 전수되지만 은혜의 요람에서 전수된 그 지식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자라지 그 요람에서 자라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요람에 눕히는 것은 불과 몇 개월이지 아이들이 앉아서 돌아다닐 때만 해도 요람에 안 앉힙니다. 요람이라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신생아는 태어난 지 일주일 미만이지만 태어나서 불과 몇 달될 때의 아이들을 특별히 돌보기 위해서 넣어놓는 것이 요람이지 그냥 밖에 내어놓고 키웁니다. 여름에 두툼한 이불을 펴놓고 구석에 밀어놓고 아이들을 재웁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은혜의 요람에서 전수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전수되면 그 전수된 것들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시간에 그냥 노트가 새카맣도록 필기를 하면 뭐하겠습니다. 왜 그것을 쓰는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도피라고 하면 너무 심하지만 설교를 강의를 듣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듣고 나면 이 정신과 모든 것들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That’s All.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어느 히브리 회당에 들어갔는데 노트를 들고 들어가니까 랍비가 못 들어오게 하더랍니다. ‘두고 들어가십시오. 여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지 공부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열린 교회에 와서 충격을 받았다고 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자기 인생이 바뀌었다고 하고 그랬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스울지 모르지만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아주 분명하게 받고 설교를 하기 시작한 것이 1980년도 7월이었는데 물론 그 이전에도 당연히 설교는 했지만 그러나 그냥 그랬습니다. 그리고 진짜 다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일이 있었고 설교를 했는데 진짜 열렬하게 설교했고 교수를 하면서 설교 준비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여러분 믿으시겠습니까? 설교를 하는데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졸도를 합니다. 여러분! 파리넬리를 쳐보면 파리넬리가 나오는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는데 여자가 책장을 넘기고 찻잔을 내려놓습니다. 굉장히 귀족인데 2층 발코니에 와서 책을 넘기면서 보는데 너무 몰두한 것입니다. 음악을 귀로 들으면서 하다가 찻잔을 내려놓는데 그 소리가 울려 퍼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노래를 멈추었습니다. 이 여자는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저 사람이 노래를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중지한 것입니다. 똑바로 정신 차리고 앉으니까 그때야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 여자가 거기서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깨집니다. 깊이 깨지게 되면서 음악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물론 그 사람은 전부 거세된 사람이지만 그러면서 연주에 몰입하게 될 때 사람들이 졸도를 하는 것입니다. 유투브에 들어가서 보십시오. 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음악적인……. 설교를 하면 매주 선생님들도 그렇고 애들이 졸도를 하는 것입니다. 졸도라고 하면 웃기지만 설교를 듣다가 ‘아’ 하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지 인식의 충격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뭔가 하늘의 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엄청나게 깨달아졌는데도 배교자들이 나오니까 하늘의 빛을 받고도 그렇게 된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히브리서에서 그 변증이 나오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의 경험,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절대로 과신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주님을 만난 깊이와 크기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그것을 그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느냐는 것이 말하자면 더 중요해서 적은 지식을 가지고 치열한 삶을 산 사람과 큰 지식을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 사이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차이는 너무나 현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이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채우시고 삶으로 그것들을 모두 나타내며 살아갈 때 이 사람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위 이야기하는 선교적인 비전이라고 할지라도 궁극적인 비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앎이 있어야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정을 강력하게 느끼는데 그 사람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그것은 정욕이지 그것이 어떻게 진실한 사랑일수 있습니까? 어디서 온 여자인줄 알고 누구인줄 알고 유물론자인지 유신론자인지 아니면 식인종인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것을 느낀다는 것만 가지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지식과 떨어질 수 없어서 그 사랑이 완성된 나라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치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선교적인 열정은 풍부한데 너무 지식이 없습니다. 그것은 선교지에서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것이 공통적인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더 풍부하게 가르쳐져야 하고 그리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치열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큰 죄를 짓지 않고 그냥 인생을 살아가고 예의를 갖춘 사람이 되어서 체면적으로라도 교회가 하는 일에 협조를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인생이겠습니까? 불신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개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제법 훌륭한 삶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속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그런 정도의 삶이 어떻게 우리에게 충분한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평신도들 중에 진짜 불꽃처럼 사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정말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온갖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붙들고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강물이 흘러가면 물이 개울이 들어오기도 하고 흘러가던 물이 수변가에 있는 곳으로 흘러가서 혹은 땅에 의해 흡수되어 혹은 증발되어서 사라져 버리기도 하지만 강물은 도도히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완성을 향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보면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그랬습니다.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원대한 소명인데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난관이 많을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주님의 일이 항상 내 마음대로 되고, 내 기분대로 되고, 그리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그리고 말만 하면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딱딱 갖추어지게 된다면 그것이 무슨 고난입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인데 그것이 왜 고난입니까? 자기가 하고 싶 것을 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고 그것이 인간의 보람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의 일의 묘미는 안 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오라고 하는데 진짜 오기 싫어요. ‘안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무슨 3천만 원이야? 안가!’ 그런데 3일 4일을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시면서 ‘불쌍하지 않냐?’ 본인들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돌이켜서 옵니다. 항상 조심하고 힘들지 말라고 하는데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일들은 순풍의 돛을 단 배 같이 갈 수 있지만 그러면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신약의 사도들이 순교하고 죽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서 살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이번에 사도 바울의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으로 선대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는데 마지막에 목이 잘리는 것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원래 하나님 당신이 하시는 위대한 일들이 이렇게 난관과 어려움에 많이 부딪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너무 잘될 때에도 교만하지 말고 안 될 때에도 너무 낙심하고 좌절하지 말고 그리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될 때에는 목숨을 걸고, 자기 뜻대로 안될 때에는 하나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그런 일들은 신앙이 우리에게 시키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허황된 꿈들을 버리고 현실이 그렇게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될 사람은 목사의 영광과 보람, 기쁨,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만 얼마나 어려운 길을 가야 하는가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장가를 가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될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공정하게 인식해야지만 그것을 견딜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갈 때 그런 어려움을 주시지 않으시고 참아야 할 이유가 없게 하신다면 누가 그렇게 자기의 뜻을 펼치면서 살지 누가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며 기도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그렇게 우리를 이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 분이고 우리들이 몸부림을 치면서 사역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진리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만이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가치를 안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섬김을 통해서 그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그런 삶을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