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 P국 선교사 수련회4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과 삶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녹취자: 백지영, 조경훈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고백하게 되었는데 3절에서는 그 차원이 한층 더 높아집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생시키시고’라고 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하야’라는 동사인데 그냥 ‘살아있게 한다’ 그런 뜻입니다. “내 영혼을 살아있게 하시며 혹은 살아나게 하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나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어는 당연히 여호와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나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시인의 영혼도 언젠가는 죽은 것 같은 때가 있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설교를 할 때 ‘영적’, ‘영적으로’ 이런 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합니다. ‘영적’, ‘영적으로’, ‘영적인’ 이런 모든 말은 결국 거기에서 ‘영’이라고 하는 말은 기본적으로 영혼입니다. 이런 말을 많이 쓰면서도 사실은 영혼 자체에 대한 이해는 매우 적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영혼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목회자든지 설교자든지 아니면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의 중요한 의무는 영혼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그 영혼에 대한 긴 담론들은 모두 이야기할 시간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3절의 이해를 위해서 조금은 배우고 넘어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자, 맨 처음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더듬어 가 봅시다. 맨 처음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십니다. 그때에 최초의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보십시오. 그것을 보면 이 모든 다른 피조물들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 사이에는 아주 확연한 구별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명하십니다. 하늘은 새들이 날고 물속에는 고기들이 다니고 땅에는 짐승들이 낳고 이렇게 명령을 하시니까 그대로 다 되고, 각각 시내는 과목과 채소들을 내라 하니까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도 인간이 태어나라 하면 인간이 태어났을 텐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시고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흙으로 빚으십니다. ‘흙’이라고 우리들이 말하지만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아파르’라고 합니다. 아파르는 흙이 아닙니다. ‘흙’, ‘땅’은 ‘아다마’입니다. 거기서 ‘에돔’이라는 말이 나오고 ‘아담’도 거기서 나왔다고 봅니다. 흙이 아니라 아파르입니다. 아파르는 ‘먼지’입니다. ‘먼지’, ‘티끌’ 이런 것입니다. 먼지 같은 것으로 사람을 빚으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형체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이 ‘후’하고 숨을 불어넣으시는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독특한 영혼 창조를 위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후’하는 숨결이 창조행동으로 영혼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육체와 결합함으로써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영과 혼과 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다분히 그리스철학의 영향에서 온 것이고 성경은 영과 혼이라는 말을 교호적으로 사용을 해서 그래서 그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인간이 창조될 때에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존재에게 불어넣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독특한 영혼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은 그렇게 인간 속에 영혼이 들어와서 그래서 영혼과 육체 사이에 놀라운 결합을 이루면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아주 독특한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냐 하면 이런 무생물, 바위나 흙 같은 것들은 그냥 거기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식물은 거기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성장을 합니다. 동물을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성장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동물 위에 한 가지 기능을 더 가지고 있는데 인식이라고 하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이 안에서 도덕적인 판단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드시지만 그러나 인간 스스로가 선악을 선택하고 분별하고 결정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고 그렇게 나아가는 존재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만 흙으로 만드시고 그 다음 사람은 흙으로 만들지 않고 그 남자의 신체의 일부를 빼내서 그래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둘이 결합하여 부부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서부터는 그런 방식으로 아무도 만들어지지 않고 모든 인류가 두 남녀의 생식의 결합을 통해서 생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왜 그렇게 신비하냐 하면, 우리는 흔히 창세기 2장 23절에서 24절을 결혼식 설교 주례사 본문으로 많이 씁니다. “하나님이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3-24)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놀라운 신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자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직접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 의존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성이 훨씬 우월한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왜냐하면 남자는 원재료가 먼지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그래도 사람의 갈비뼈입니다. 질적으로도 원재료가 훨씬 더 좋고, 두 번째는 남자가 먼저 만들어지고 여자가 그 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자가 우월하지 않냐 생각하지만 그래도 신제품이 낫지 않겠습니까?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그리고 남성 신학자들이 아주 잘 쓰는 말이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그러는데 그것도 사실은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성들이 번역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여성신학자를 꼭 집어넣어야 합니다. 감수를 받아야 합니다. 아니 농담이 아니고 진짜입니다. 거기서 ‘그를 위하여’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케 네게또’라는 단어인데, 영어를 다 하시지 않습니까? 영어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for’가 아니라 ‘corresponding to’입니다. ‘corresponding’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파키스탄 외무부장관으로 한국의 커레스번던트(correspondent)를 만났다.’ 그럴 때에는 한국의 외무부장관을 만난 것입니다. 커레스번던트라고 하는 것은 펜팔하는 경우에는 ‘친구’라고 부르고, ‘대응하는’, ‘상응하는’, ‘맞먹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위하여가 아니라 그에게 ‘상응하는 배필을 지으리니’입니다. 이 ‘배필’도 우리나라 말로 ‘배필’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 ‘배필’은 옛날 조선시대부터 쓰던 말입니다. ‘배필’은 무엇이냐 하면 남자가 뜻이 있어서 갈 길을 가는데 여자가 곁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부속품처럼 딱 차고 남자는 그 여자가 있든지 없든지 자기 가야 할을 가는데 도움이 되는 존재로 여자가 붙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배필이라는 뜻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말로 ‘에제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제일 많이 쓰인 성경책이 시편입니다.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오”할 때 그 도움입니다. 이게 군대전쟁의 문맥으로 들어가면, 에제르는 적군과 싸우다가 판세가 완전히 기울어져서 이제 전멸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저 지평선에서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면서 마병을 이끌고 달려오는 응원군입니다. 그래서 그 응원군이 와서 전세를 뒤집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에제르의 개념은, 어떤 면에서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은 패배하는 군대지만 에제르는 그 패배를 승리로 엎어주는 군대입니다. 그게 에제르입니다. 사모님들에게는 굉장히 좋은 해석 같지만 엄청난 부담이 되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때문에 패배할 남편의 사역이 승리로 바뀌고 있는지 승리할 사역이 패배로 바뀌고 있는지 각기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 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더 오묘한 비밀이 거기에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한 10년 전에 이 사실을 발견하고 한없이 감격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오늘 이 얘기가 아닌데 곁가지로 좀 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유익합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개념입니다. 그러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도전적으로 묻고 싶은 게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이 뜻대로 되게 하셔셔 전 세계 선교사들의 사역이 다 성공을 거두고 있어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쳐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오셨다고 쳐보십시오. 그리고 이루어지는 이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맨날 기타들고 수십억의 사람들이 기타들고 밥도 안 먹고 하나님 찬송만 하는 나라이겠습니까?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만들어서 데리고 오십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고백을 합니다. 히브리문학에서는 ‘무엇 중의 무엇’이라고 하는 것은 ‘the best’, ‘the choice’를 의미합니다. ‘최고’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의 뼈나 살 중에는 있기는 있으나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들도 있습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치명적이지 않은 것들도 있다 이것입니다. 밥을 많이 먹어서 나온 뱃살 같은 것 없어도 됩니다. 떼어내도 괜찮고, 강남에 있는 아줌마들은 그것을 1kg 빼는데 2백만 원씩 돈을 들여서 뺀다고 합니다. 그런 살은 한 10kg쯤 빠져나가길 너무 원하고 항상 달고 있으면서도 만지작거리면서 ‘이 웬수’ 그러고 삽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담이 말하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은 그런 게 아닙니다. 심장이 있는데 손톱깎이로 한번만 귀퉁이를 떼어내면 죽습니다. 간도 손톱깎이로 탈칵하고 한 부분 자르면 죽습니다. 췌장이나 쓸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치명적인 살입니다. 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가 덜컥하고 아이들이 발목이 부러졌어도 상관없습니다. 한두 달 목발하고 다니면 금방 뛰어다니고, 그렇게 부러진 부분은 뼈가 더 튼튼해져서 그 다음에 부러질 때는 거기가 안 부러지고 위가 부러집니다. 그럴 정도로 튼튼해집니다. 그런데 척추 같은 것 한 마디만 탈칵하고 부러지면 온 전신을 쓸 수 없는 마비상태로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 종류의 뼈, 그런 종류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너 없이 나는 살 수 없다. 너 없이 나는 없다.” 그런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의 고백이 하나님이 두 사람이 한 몸이라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한 사람만 빚으시고 한 사람은 거기서 만들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자식들을 그 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 질문이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남녀의 사랑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남녀의 사랑고백이 그 안에 왜 없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것은 더 넓게 보면 모든 인류가 공유하기 원하시는 고백입니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서로 그렇게 사랑하다가 자식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아담이 하와보고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지만 이 새끼는 아니다.”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똑같이 그 아이를 보고 우리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동생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동생도 형을 향해 똑같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럼 타락하지 않았으면 지금 모든 인류가 서로를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갔을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모두 아담에게서 나와서 하와에게로, 하와에게서 나와서 가인이나 아벨이나 셋에게로, 그것이 다시 아담에게로 돌아가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 때문에 하와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와는 아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아벨은 가인을, 가인은 아벨을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랑의 모든 원천이 하나님에게 매달려 있는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이 온 인류를 휘돌아서 모든 인류를 감싸고 그 인류가 그 사랑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그것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이루어질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영혼을 주셔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사랑의 대상은 선교도 사랑의 대상일 수 없고, 목회도 사랑의 대상일 수 없고, 집에 있는 강아지는 더 더욱 사랑의 대상일 수 없고, 자기의 비전도 사랑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분명하게 하나님과 인간 이외에 사랑의 대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인간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고 인간은 결국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안에 형제 이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형제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하나님 말고 그 형제 안에 누가 있겠습니까?” 이 말은 단순하기는 하지만 명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그것이 참된 사랑일 경우에 어떻게 나누어질 수 없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 사이에 금이 가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사람이 이제는 그 여자와 결혼해서 그 여자의 남편이 된 것이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인류사회 속에 퍼져서 결국은 최초의 살인이 바로 자신의 아들들에게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살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살인은 너무나, 너무나 상대방이 존재하기를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래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 사회가 이런 식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이 모든 갈등을 극복하고 다시 모든 사람들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 그 사랑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앞당겨서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구별이 없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지체의 고통에다가 비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류를 거대한 하나의 몸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고의 조화를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인류사회 전체에서 이슬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슬람뿐만 아니라 이단도 그렇고,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를 비롯해서 흉악한 범죄들 이것들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인류의 몸 전체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됐는데 그 몸에 여러 가지 병적 증상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전체를 한편으로는 영적인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서 선명한 전선을 가지고 사역하면서 살아가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류 전체를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하나의 몸으로 보면서 인류애를 느끼면서 이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많은 고통과 병적인 증상들을 인간의 몸에서 생겨난 질병처럼 생각하면서 그런 것들을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의 몸에 난 병은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발에 무좀으로 30년을 고생하고 있습니다.” “도끼로 발가락을 잘라버리세요.” 그런데 그것이 자기 무좀일 경우에는 절대로 그렇게 안 합니다. 저는 무좀으로 30년을 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낫습니다. 한 번도 도끼를 들고 열 발가락을 정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약도 바르고 깨끗이 씻어주고 이렇게 해서 잘 보존하고 살아야지 생각하지 날려버려야 되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더 많은 철학적인 기반과 신학적인 기반의 이야기들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12까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정리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영혼을 창조하시는데 개별적인 영혼을 한 사람 한사람마다 창조하십니다. 그러면 그 영혼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영혼은 육체와 함께 작용을 하면서 육체의 삶을 지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의 기능에는 아주 고차원적인 기능부터 시작해서 아주 저차원적인 기능까지 하등의 기능과 고등의 기능으로 나뉩니다. 제일 높은 위에 있는 고등한 기능은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인식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사회를 이해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고 관계를 맺는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고등한 기능이고, 이 기능 안에서 인간은 도덕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등한 기능은 추위와 더위를 느끼고 그것에 대해서 인간이 반응하고, 때로는 이 두 기능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이 되 있어서 너무 춥고 배가 고파서 나의 몸은 빵과 따뜻한 곳을 너무 원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돈을 뺏을 것이냐 이런 문제까지 겹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영혼은 이런 작용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등한 기능은 큰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등한 기능은 그냥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기능인데,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와 연결될 때 어떻게 그 고등한 기능이 하등한 기능을 통제하면서 우리의 육체를 죄의 도구로 몰아가지 않느냐 라고 하는 그런 능력에 의해서 인간의 행복이 좌우되기 때문에 고래로부터 그렇게 인간을 교육하는 일에 인류가 철들기 시작하면서 힘쓰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슬람도 한때는 그런 점에서 탁월한 문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문명과 신학은 특히 10세기 이후에 이루어진 이 많은 것들은 사실은 이슬람사회에서 받은 영향 때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 한없이 긴데 어쨌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영혼에 대해서 시인이 이야기하면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그랬으니까 그것은 언젠가 자신의 영혼이 죽은 것처럼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불멸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그 영혼은 사라지거나 멸절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불멸합니다. 그래서 창조될 때까지는 없었지만 창조된 후부터는 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 유시무종한 존재입니다.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존재가 인간의 영혼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을 창조하시는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영혼이 죽은 상태, 죽어있는 것 같은 상태, 혹은 심지어 죽은 영혼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주의를 해야 할 것은 존재의 양식이 육체의 존재의 양식과 영혼의 존재의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영혼과 육체의 똑같은 단어라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육체의 죽음이라고 할 경우에는 육체가 호흡과 심장의 작동이 멎고 외부에 의해서 반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결국은 어느 순간에 멸절되고 썩고 소멸하는 것이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그런 식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영혼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죽음은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다르냐 하면,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영혼의 죽음이란 멸절되고 소멸 되어서 비존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 상태가 영혼의 죽음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죽은 영혼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고,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은 죽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인간의 영혼은 죽었을 때 더 활발하게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혼의 죽음을 가리켜서 죽음의 행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영혼이 수많은 악을 행해서 수많은 범죄들을 인간의 몸으로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영혼입니다. 특히 이런 영혼의 죽음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신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영적 침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디프레션(depression)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인이 여기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결국 뭘 의미하느냐 하면,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영혼이 죽은 상태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던 시인의 영혼이 죽은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인간이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는 이유를 근원적으로 딱 한 가지만 지적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죄 때문입니다. 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가 영혼이 살아있을 때가 언젠가라고 생각을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충만한 교제를 나누고 은혜의 감격 속에 있을 때와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러면 인정하기는 싫지만 확실히 지금 내 영혼은 죽은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왜냐하면 예전에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뜨겁고 감격이 있고 그랬는데 지금은 안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영혼에 침체가 왔다라고 하는 것을 인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죄 때문이라는데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을까? 일평생 목회하고 혹은 선교하고 살았는데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을까?’
(예화)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를 살아있는 놈을 잡아다가 납작한 접시 같은 비커 위에 올려놓고 찬물을 부었습니다. 당연히 개구리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밑에다가 램프에다가 불을 붙여서 1초에 0.01도씩만 온도가 올라가게 만들었습니다. 만약에 따뜻한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었으면 개구리가 들어가자마자 펄쩍 뛰어나왔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그러면서. 그런데 그렇게 차가운 물에다가 놓고 조금씩, 조금씩 온도를 올라가게 했더니 한 한 시간 반 후에 개구리가 푹 삶아진 채로 죽었다고 합니다. 천천히, 천천히.
(예화) 어느 시냇가에서 군인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군인 세 사람에게 포대자루 하나씩을 주며 명령을 했습니다. 50kg씩 바위를 담아오라. 한 사람은 50kg 바위를 찾아서 자루에다가 넣어가지고 왔습니다. 둘째 사람은 30kg, 20kg을 집어넣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아주 똑똑했습니다. 이 부대를 지고 어디로 이동을 할 텐데 그러려면 자잘한 돌멩이여야 한다. 그래서 공깃돌 같은 작은 돌멩이를 천개를 모아서 그래서 한 자루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울에 달아보니까 모두 50kg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명령이 아주 황당했습니다. 모두 이 돌멩이를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아라. 실시. 한 개가지고 온 사람은 정확하게 한 개밖에 안 가지고 왔기 때문에 갖다 놓았습니다. 두 개를 갖다놓았습니다. 그런데 천개 가지고 온 사람은 단 한 개도 제자리에 못 갖다 놓았습니다.
지금은 한국에는 건물이 몰라보게 발전하고 도시계획이 아주 많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큰 건물을 지으면 화장실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구청에다가 신청을 하면 와서 실사를 하고 관을 묻어줍니다. 그러면 변을 보면 그것이 전부 다 하나의 관으로 하수도처럼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한 달에 얼마씩 세금을 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있던 건물들은 그게 아니고 건물 지을 때 제일 먼저 똥통부터 파야 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맨 처음 지을 때 그렇게 팠습니다. 최소한 7백 명분의 똥을 저장할 수 있는 웅덩이를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하에다가 그것을 파고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완벽하게 하고 그것이 속에서 일 단계 이 단계 정화되고 마지막에 걸러지고 해서 그것을 1년에 한 번씩 구청에다가 신청을 해서 환경업체에서 와서 빼가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곰팡이 같은 종균을 집어넣습니다. 포대로 집어넣어서 속에서 부패해가지고 거의 물로 만들어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굉장히 메커니즘이 복잡합니다. 그런데 똥을 푸는 차가 오는데 그게 낮에 다니면 사람들이 너무 불쾌하니까 새벽기도 끝날 때쯤 옵니다. 그러면 파란 차가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는 모든 차들은 차임벨을 울리면서 오는데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띠리리리 띠리리리리...’, 베토벤이 살았으면 얼마나 짜증나겠습니까? 그런데다가 틀라고 작곡한 노래가 아닌데 최고의 고상한 노래를 똥차에다가 틀어놓고 옵니다. 그리고 와서 우리를 부릅니다. 우리가 나가면 “여기 몇 미터 눈금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푸겠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호스를 집어넣으면 그 차가 ‘푸욱’하고 빨아들입니다. 그러면 그 엄청난 찌꺼기들이 빨려 들어갑니다. 그래가지고 가득 채워서 여기에 예를 들어서 “2천 리터를 빼갔습니다. 그리고 요금은 얼마입니다.” 그러면 사인을 받고 찢어주고 가면 우리가 은행에다가 돈을 내면 그게 구청으로 들어가서 이 사람들이 정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그 다음 똥을 푸기 위해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면서 가는 것입니다. 뒤에 보면 유리로 된 측정기에 그 상상하기 싫은 지저분한 것들이 출렁거리면서 그게 다 보입니다. 그리고 지나갑니다. 너무 더럽습니다.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거기서 한국자만 퍼서 그래서 그것을 거름종이에 거르고 걸렀다고 칩시다. 그러면 노란 주스 같은 물이 유리컵에 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외국에서 수입한 아주 고급스러운 스프레이 통에다가 담고 그리고 딱 막고 그리고 아주 반짝거리는 좋은 집에서 아름다운 카펫이 깔려져 있고 이태리가구들이 많은 샹들리에가 으리으리하게 있는 곳에서 공중을 향해서 스프레이를 쏘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란 물방울들이 ‘솩’하고 퍼질 것입니다. 멀리서 보는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똥차가 출렁거리면서 갈 때에 ‘우웩’하던 그런 느낌까지는 못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덩어리가 해체되었고 아주 작은 물방울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집안에서 노란 물가루가 되어서 확 품어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인간의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것은 동일본질의 사물입니다. 동일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크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동일한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크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동일한 본질입니다. 그러면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에너머티(enmity)’ 하나님에 대한 적의,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자신의 원수라고 생각하는 게 죄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신자가 죄를 짓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그게 죄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해서 퉤하고 침을 뱉는 것입니다. 그게 죄라는 것입니다.
비교적 다윗은 정말 순결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많은 죄들을 지었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는 두 가지 큰 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인구를 조사한 사건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사단에 의한 충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럴 정도로 심각한 죄였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되어서 자기 나라의 백성들의 인구수를 조사하는 것은 행정적으로 문제 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인구조사는 지금처럼 단순한 센서스가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인구조사의 주목적은 그 인구의 절대적인 수를 세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징발할 수 있는 군인의 수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 숫자가 얼마인가를 두고 나라의 강함과 약함이 판별이 되고 거기에 동원할 수 있는 마필들까지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말 당신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신정국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이 그것을 참 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다윗의 마음이 교만해지면서 인구조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칠만 오천 명이 온역으로 죽습니다. 이것도 굉장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뒤흔들어놓는 엄청난 범죄였는데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사실은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까 말한 것과 같이 다윗은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아왔던 사람으로 그는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했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가족들 속에서는 다윗이 사랑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상처가 많은 사람이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한 눈에 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사건인데 간음을 하고 결국은 우리아까지 간접 살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다윗의 생애에서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했는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삼하 8:14) 그러더니 결정적으로 그 모든 것을 뒤집는 말이 나오는데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 그리고 다윗은 이제 깊은 추락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쓴 시가 22편, 51편 이런 시들입니다. 특히 51편은 참회시입니다. 6편도 그렇습니다. 거기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처음에 죄를 지었을 때는 ‘제사를 드리면 되지 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도 구약시대의 사람이니까, 제사장이 없었겠습니까? 예물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제사를 드려봤더니 이게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에 깨닫는 게 뭐냐 하면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6-17) 그리고 놀라운 복음적인 진리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라고 하는 신학자도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다윗은 이 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을 깨달았다. 그리고 변화된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에 새로운 이해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모든 영혼의 침체가 죄로부터 온다고 했을 때 그러면 해결의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침체의 원인도 한 가지, 그 침체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회개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회개할 죄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뭐하고 똑같으냐하면 온 몸에 때가 잔득 묻었는데 어두움 속에 희미한 불빛 아래 있으니까 모든 사물이 어둡게 보여서 자기 몸에 달라붙은 더러운 때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부시게 밝은 빛 가운데 나타나게 되면 그러면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파키스탄은 늘 이렇게 흐린 것 같으니까 좀 경험하기 힘들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 가면 겨울에 너무 추우니까 문을 꼭꼭 닫고 옛날에 막 이불을 폈습니다. 애들이 또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 속에서 막 베개 던지면서 막 싸우곤 하는데 엄마가 들어와서 커튼을 탁 엽니다. 햇살이 확 들어옵니다. 그러면 비로소 얼마나 많은 먼지가 거기 있는지 깨닫습니다. 그리고 입을 막습니다. 안 보이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보고나면 얼마나 많은 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의 교수가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서른두 살 우리나이로 서른네 살에 교수가 되었는데 한 클래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는 원래 제가 강의하는 데가 아니었는데 여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는 교육학과에 강의를 들어가라고 해서 별로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여튼 갔습니다. 거기를 가서 강의를 시작을 하는데 신약에 대해서 신학개론에 대해서 강의를 하다가 설명을 죽 하면서 신약을 공부하면서 이런 책들을 읽어야 된다고 한 60권 정도를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애들이 굉장히 말하자면 좀 야유 비슷한, 아주 나쁜 것은 아니고 그냥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책을 읽을 수 있느냐면서 ‘에이’ 그럽니다. 지금 같았으면 다 이해했을 텐데 한참 교수로 가서 이제 막 젊음이 불타던 때라 괘씸했습니다. 아주 막 혼을 내 주었습니다. 4분의 3이 여학생들이었는데 마음이 닫혀가지고 수업을 잘 안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점은 받아야 되겠으니까 억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학개론을 열심히 해 가지고 수업종료하기 한 달쯤에는 다 끝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야, 얘들아 너희들 모두 모여라.” 그랬더니 대열이 다 흐트러져서 가득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약성경을 펴서 한 구절 한 구절씩 중요한 구절을 한 챕터에 한 구절씩 읽으면서 설명을 하면 자기들이 열심히 필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마가복음 1장을 설명을 하면서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그 전날 그렇게 고생하시고 제자들이 잠자는데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나아가서 기도를 하셨다 그리고 이야기를 죽 하는데 성령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이 기도하자.” 그리고 어떤 여학생이 일어나서 기도를 하게 했습니다. 그 여학생이 기도하는데 갑자기 울먹울먹하더니 회개를 하는데 회개제목에 너무 놀랐습니다. “예수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너무 많이 자서 죄송해요.”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열심히 사시는데 나는 너무 많이 잤습니다.” 많이 자는 것을 누가 죄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말씀의 은혜가 들어가니까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자신들의 잘못된 삶이라고 하는 것이 확연하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저도 젊은 시절에는 미친 듯이 사역을 했습니다. 정말 온 힘을 다해서 특히 신대원 다니고 야간대학 다니고 할 때 신학대학을 다니고 할 때.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하지만 양심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다. 다시 7년이라는 기간을 줘도 나는 그 이상은 못산다.” 그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사역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이고 역사는 여러분들에게 어느 순간에 퇴장하라고 명령합니다.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래도 목회사역을 사랑하는데”,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물러날 때가 돼서 물러나지 않으면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영혼을 섬기고 싶은데”, 물러나서 그냥 기도로 섬기십시오.
역사 속에서 역사의 의자는 잠깐 앉는 것입니다. 선배인 누군가가 비워줬기 때문에 거기에 앉은 것입니다. 역사는 시간이 되면 그 사람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퇴장하라고 명령합니다. 아직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다 쓰고 빈털터리가 될 때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직도 젊은 사람보다 잘 할 수 있는데’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제 끝났으니까 자리를 비켜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그때 아름답게 퇴장을 해야 합니다. 다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모든 것을 향하여 ‘Say Goodbye’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면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를 사랑하지만 그 선교조차도 하나님 사랑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 안에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밖에서 하게 될 때 목회자가 목회를 떠나고 나면 자기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없어지는 것 같은 공허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흘러갑니다. 모든 것이 흘러가도 ‘그것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젊은 학생들에게 항상 얘기합니다. 어떤 남학생이 와서 ‘너 너무 사랑해. 너 없이는 못살 것 같아. 네가 나를 버리면 나는 죽어 버릴 거야’ 그렇게 말하는 남자하고는 절대 결혼하지 마라. 우리 인생은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외하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 인생의 밑바닥까지 흔들릴 만한 것들을 만들면서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회도 마찬가지이고 선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 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두려운 게 있고, 뭘 그렇게 무서운 게 있고, 무엇이 그렇게 두려움을 우리에게 가져 다 주겠습니까? 태어나서 정치인으로 살고 목회자로 살고 선교사로 살고 학교 선생으로 살고 혹은 군인으로 살고 공무원으로 살고 장사를 하면서 살고 사업을 하고 아주 높은 지위에 오르고 바닥에서 겨우 살고 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삶의 양상입니다. 양상은 본질이 아닙니다. 물이 어떤 때는 눈으로 쏟아지고 어떤 때는 얼음으로 얼지만 본질이 물인 것처럼 양상은 본질이 아니라 한 형태입니다. 목회자로서 살다가 목회를 접으면 결국 한 인간으로 돌아갑니다. 선교사도 마찬가지로 선교하는 동안에만 선교사가 아닙니까? 외국에서는 목사도 하다가 그만두고 나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목사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브라더(brother)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양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신자의 가장 큰 행복은 항상 하나님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목회는 자기 자신이 그 하나님 때문에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이고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런 관계로 돌아가면 깊이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죄가 클수록 사람들이 회개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옛날에 이렇게 말하는 상담을 많이 받아보지 않습니까? 저는 믿는 집안에서 곱게 자라서 주님을 깊이 못 만났는데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모두 한 때 타락했던 사람들인데 나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타락하면 어떨까요?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취면 우리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옳은 것 같아도 얼마나 깊은 죄악들이 우리 속에 배어 있는지 말씀이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말씀을 제대로 못 만났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선교사든지 목사든지 그의 사역의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크기를 보면서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서로 각기 다르게 대접을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럴 수 있는 일이고 우리 자신이 그 평가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흔들리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이 사역이 주는 즐거움보다 훨씬 커야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이 사역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나 기쁨보다 더 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너무나 부족한 인간이라는 그 괴로움과 갈등이 사역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조바심 보다는 훨씬 더 커야 됩니다. 청교도들은 안달복달하는 것을 죄라고 봤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신뢰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꽃과 같은 열정도 거기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하나님이 시인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의는 히브리어로 ‘쩨데크’ 혹은 ‘쩨다카(צדקה)’인데 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알아듣기 쉽게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불의한 길의 반대입니다. 구약시대 기준으로 돌아가서 한 사람이 ‘의롭다’ ‘의롭지 않다’라고 하는 데는 기준이 있어야 되는데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입니다. 모세오경 특히 모세의 십계명인 모세의 율법을 기준으로 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인지 의롭지 않은 사람인지를 판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는 이유는 회복된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의 율법의 명령을 따라서 살아가기 위함이라고 시인은 고백을 합니다.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론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회복하게 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거기서 오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우리를 충분하게 채우십니다. 그 생명과 사랑이 우리를 이기게 하고 견디게 하고 끝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을 자기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보다 더 기뻐하게끔 만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충만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정말 신앙이 있는 사람, 살아있는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살았던 사람은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그렇게 살게 했던 모든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그는 죄는 자기 때문에 스스로 지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길은 히브리어로 ‘데레크(דרך)’인데 성경에서 흔히 인생길로 많이 비유가 됩니다. 길은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상에 있는 것입니다. 시편 1편 에서처럼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이 구분이 됩니다. 악인의 길은 율법을 무시하고 파괴하고 저버리면서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 마지막 끝은 목적지가 없습니다. 악인이 그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루하루 기쁘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뜻을 세우고 하나님을 섬길 때는 목표가 있지만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분노하고 정욕을 따라 행할 때는 아무 목표가 없습니다. 한 순간에 불끈 불끈 솟아나는 육체의 혈기와 마음의 정욕으로 사는 것이 자신에게 쾌감을 주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성경은 그것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선은 분명하게 가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하나의 목적지가 있지만 악은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없고 목적지가 없습니다. 선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지만 악은 그 목표를 벗어난 모든 것이 악입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고 말씀을 붙들고 자기를 부인해야 하지만 악을 행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면 그것이 악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야기 하는 의의 개념은 신약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로 환치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의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감당하지 못한 그 모든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감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의 근원이 되셔서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의를 나누어 갖게 하시고 접붙여 주심으로써 그 의를 전가시켜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 영혼의 침체 상태에서 영혼을 소생시키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입니다.
(예화) 제가 지금은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래도 많이 가기는 가야되지만 할 수 있으면 안 가려고 하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저도 공부를 해야 하고 목회에 힘을 써야 하니까 절대적인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한때는 사명감을 가지고 전국을 엄청나게 많이 다니면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개척교회를 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고 아직 교수였었습니다. 충청도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나를 불렀습니다. 기사도 없이 나 혼자 일찍 출발을 해서 운전을 해서 갔는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차가 꽉 막혔습니다. 간신히 고속도로를 빠져나와서 지방도로로 들어섰는데 도착시간이 빠듯한 것입니다. 그래서 속도를 냈습니다. 요즘이야 안 그러지만 젊었을 때는 속도도 스트레스 해소의 수단이었습니다. 시속 80킬로 정도로 달려야 되는 지방도로를 한 100킬로로 달린 것 같습니다. 저기서 파란경찰복을 입은 경찰이 손을 딱 들어서 제가 속도를 팍 줄였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면허증 좀 봅시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속도위반하셨습니다.” “저 속도위반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위반을 안 하셨지만 산 뒤에서 위반하셨습니다. “내가 산 뒤에서 위반한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니까 자기 동료가 거기서 스피드 건으로 몇 킬로 인지 쏜 것을 찍어서 자기한테 무전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까지 얘기하니까 제가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했습니다. 그냥 빨리 끊어주십시오.” 그랬더니 “선생님 뭐하시는 분이세요?” “저는 대학교 선생인데 이 대학에서 나를 불러서 강연을 하러 가는 길입니다.” 그때만 해도 교수에 대한 존중심이 있었습니다. “아! 교수님이시군요.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벌점이 없는 싼 걸로 끊어드리겠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신경 쓰지 못하고 빨리 처리해 달라고 해서 받아가지고 햇빛 가리개에 꽂고 갔는데 다행히 간신히 제 시간에 도착을 했습니다. 집회를 하고 밤중에 차를 몰고 돌아왔습니다. 새벽기도 끝났는데 아침에 ‘아참! 범칙금 내야지. 교회 직원한테 얘기해야지.’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까짓 꺼 가지고 또 직원을 시키나. 내가 가자.’ 그러고 갔습니다. 그때에 범칙금을 띠면 2만 원쯤 벌금이 나오던 때였습니다. 굉장히 쌌습니다. 은행에 가서 볼일을 보고 범칙금을 내려고 처음으로 종이를 펴봤습니다. 그런데 금액이 6천원 밖에 안 적혀있는 것입니다. 범칙금이 이렇게 쌀 리가 없고 2만원은 되어야 되는데 하고 다시 봤더니 정확하게 6천원이었습니다. 자세히 봤더니 위법내용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다가 걸렸음’이라고 적혀있는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교통순경이 ‘아! 교수님이시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싼 걸로 끊어 드리겠습니다.’ 말한 것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만약에 교회 직원이 들고 갔으면 교회가 큰 시험에 들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목사님이 담배를 피다가, 그것도 경찰한테 걸려서 딱지를 끊어가지고 왔을까?’ 그것을 받고 가만히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원칙을 정했습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자. 그러나 위반했을 때에는 정학하게 법률이 지정한 벌을 받자.’
(예화) 한 번은 개척교회를 하는데 기사도 없을 때였습니다. 저의 제자이시고 연세가 저보다 많으신 여전도사님을 태우고 신방을 가는 중이었습니다. 유턴 신호를 정확하게 지켜서 유턴을 하는데 차들이 앞쪽에 쭉 서 있어서 할 수 없이 노란 선을 밟고 유턴을 했는데 거기에는 유턴 차선이 끊어져 있는 곳 이었습니다 . 경찰이 치사하게도 지하도에서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와 경례를 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도로교통법 몇 조를 위반하셨기 때문에 딱지를 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도로교통법 1조가 뭔지를 아냐? 이 법은 교통소통을 원활하게하기 위한 법이라고 그랬다. 내가 무슨 위반을 했냐? 이게 무슨 땅따먹기냐? 금 밟았다고 딱지를 떼냐? 저 앞에 있는 차들이 직진을 할 거면서 유턴하는 차선을 다 가로막았는데 어떻게 하냐?” 얘기하니까 경찰이 “그것은 선생님 사정이고 법은 그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됐다. 알았다. 포기할 테니까 끊어라.” 그랬더니 그 경찰이 또 똑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없는 싼 걸로 끊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지 마.”라고 그랬습니다. “네가 그런 것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지 않느냐? 너는 법대로 나를 적발하고 봐 달라는 것은 내가 법원에 가서 호소할 것이다.” 그랬더니 경찰이 짜증을 확 내더니, “알았어요. 끊으면 될 것 아닙니까?” 94년도에 벌점 10점에 6만원은 꽤 큰돈이었습니다. 그게 중앙선 침범이 되는 것이어서 꽤 큰 금액이었습니다. 그것을 받아 가지고 경찰서로 갔더니 거기 경찰이 컴퓨터에 입력을 해 보더니 막 웃는 것입니다. “선생님 축하합니다. 요걸로 딱 면허정지가 됐습니다.” 순진하게도 “제가 학교 선생인데 강의하는 데도 많고 차 없이는 안 되어서 어떻게 선처를 좀 해 주시면 안 됩니까?” 그랬더니 아주 봐 줄 것처럼 이야기를 하면서 “6시 지나서 다시 찾아오십시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때가 2시쯤 됐는데 ‘왜 바쁘지도 않은데 6시에 오라고 그럴까?’ 하고 그 얘기를 교회에 와서 우연히 만난 한 집사님에게 했더니 똑같이 막 웃는 것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순진하십니까? 6시 이후에 오라는 건 이거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10만원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됐구나.’ 하고 그냥 그대로 벌을 받고 면허정지를 받고 그 다음부터는 제가 교통위반을 한 20년 동안에 거의 안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10만원을 가지고 가서 내가 안가더라도 “집사님. 좀 갔다 오시오.” 하면서 이렇게 됐는데 “우리 목사님 좀 봐 주십시오.” 하고 경찰한테 슬쩍 10만원 줬으면 빼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까지 그렇게 살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화) 더 심각한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제가 교수가 돼서 셋방살이를 전전하다가 학교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새 대학에서는 내가 그 학교에 온 게 고맙다고 하면서 어떤 주거환경에서 사냐고 물어봤습니다. 작은 방 2칸이 있는 2층에서 아이 하나하고 아내하고 저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강의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5천 만 원을 10년 동안 무이자로 드리겠으니 큰 집으로 옮기십시오. 대신에 이 돈은 꼭 주거환경을 변화시키는데 사용하셔야 됩니다. 하면서 그 자리에서 10만 원 짜리 수표 500장을 쇼핑 가방으로 하나 주는 것입니다. 대학에서 등록금 바로 받은 돈 같았습니다. 그리고 가서 몇 년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앞집에 계신 분은 한국에서 일류대학교의 교수셨고 그 사모님은 기도를 굉장히 많이 하시는데 약간 신비주의 경향이 있는 사모님이셨습니다. 어느 날 그 분이 우리 집사람한테 “사모님 하나님이 우리 집을 사모님한테 팔라고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했습니다. “하나님도 정말 이상하시다. 살 사람한테 얘기하셔야지 팔 사람한테만 얘기하시는 거냐. 우리가 돈이 어디 있어서 그것을 사냐?” 그랬더니 자기는 하나님께로부터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한테 꼭 팔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출을 받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계산을 간신히 맞춰서 집을 샀습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집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세금이 그렇게 비싼 줄을 몰랐습니다. 법무사 사무실에 가서 세금이 얼마냐고 아내가 물었더니 얼마라고 얘기해서 우리 집사람이 놀라며 “아니 그 쪼그만 집이 세금이 많으냐?” 그러니까 여직원이 “왜 아줌마 너무 많아요?” 많다고 그러니까 “그러면 절반만 내세요.” “무슨 세금이 여직원이 앉아서 절반만 내라 하느냐? 무슨 이런 나라가 있나?” 그랬더니 “집 파는 사람하고 사는 사람하고 이면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집값을 2/3쯤 낮추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새 장관 청문회에 나오는 다운계약서입니다. 그 당시에는 사실 거의 90프로 이상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2/3 정도로 집값을 낮추면 세금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집사람이 들고 와서 “여보. 그거 이렇게 해가지고 오라는데 어떡해할까?”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게 말이 되냐? 그게 이중계약서인데 목사하고 집사하고 둘이 머리를 맞대고 가짜계약서를 쓸 때에 거기에 성령이 임하시겠느냐? 로마서 13장을 봐라.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했는데 세금을 내야지 무슨 소리냐?” 진짜 그때는 돈이 없었습니다. 거짓말 안 보태서 우리 아들 벙어리저금통까지 뜯어서 돈을 다 모아서 법무사 사무실에 가져갔습니다. 여직원이 “어. 아줌마 오셨네. 이중계약서 써 오셨어요?” “아니요.”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냥 다 내려고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 여직원이 어떤 표정이었겠습니까? ‘아직도 이런 정직한 시민이 살고 있구나. 이런 선량한 분을 내가 악한 길로 인도하려고 했다니! 내가 정말 나쁜 직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존경에 찬 눈빛으로 우리를 봤겠습니까? 아니면 ‘아유. 병신. 줘도 못 먹어. 꼴값을 하네.’ 했겠습니까? 돈은 두 배로 내고 인정도 못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직원은 서류를 받고 퉁퉁 도장을 찍고 쫙 해서 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였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정확하게 10년 뒤에 더 크고 심각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지하실에서 4년 동안 있으면서 7명의 성도들이 250명 쯤 모였습니다. 공간이 터질 것 같이 좁아서 앉을 수가 없고 예배를 드리는데 지하실 교회라 공기가 통하지 않고 산소가 모자라서 사람들이 졸도를 하는 것입니다. 부랴부랴 구멍을 뚫어서 지하실로 공기가 들어오게 하려고 난리를 쳤는데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겨가게 됐습니다. 그때가 1997년도였는데 건축업자가 큰 교회 하나를 사서 막 부시고 빌딩을 지으려고 했는데 IMF가 터졌습니다. 그 바람에 있는 빌딩도 반값에 팔려나가는데 누가 거기에 들어오겠습니까? 그것을 부시지도 못하고 전세나 세도 놓을 수 있다고 하여서 저희는 사글세로 들어갔습니다. 1,0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이었는데 새로 들어간다고 하니까 돈이 부담되어서 250명 중에서 50명 정도는 떠나가고 200명이 이사를 갔습니다. 거기서 정확하게 3년 반이 됐는데 교인수가 1,000명이 되었습니다. 애들은 한 350명 정도 되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더 들어갈 데가 없고 마당에는 20대 정도밖에 차를 못 대는데 차를 주차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매일 전도해 오면 차 끌려간 사람들이 입이 이만큼 나와 가지고 잠실까지 차를 가지러 가고 하는 상황이어서 이사를 다시 가게 됐습니다. 세상에 가기 싫은 싫었던 곳으로 첫 번째 교수 생활하던 안양시로 가게 됐습니다. 나는 전세로 가고 싶은데 그만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빌딩이 없는 것입니다. 땅을 알아봤는데 자리가 좋으면 너무 비싸고 가격이 맞으면 너무 딴 데 가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땅 하나를 발견하게 됐는데 그 땅 주인이 거기서 6, 70년대 에 가발공장을 하고 전자제품 공장도 하다가 나이 팔순이 되어서 사업을 다 정리하던 분이였습니다. 땅을 내 놨다가 다시 집어넣었는데 “우리가 거기에 가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복덕방 영감이 “거! 안 팔 것입니다.” 그래도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우리교회 집사님이 가서 그 땅을 좀 팔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안 판다고 해서 그대도 좀 팔아 달라고 했습니다. “아니. 내 땅을 내가 안 팔겠다는 데 왜 이렇게 귀찮게 하냐고 빨리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좀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도대체 내가 그 땅을 팔면 당신들 거기다가 뭐 할라고 그러우?” 그래서 “교회를 지으려고 그럽니다.” 그랬더니 “교회요? 일주일만 생각 해 봅시다.” 그래서 우리는 ‘아! 이거 뭐가 있구나.’ 하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사실은 “내가 한경직 목사님에게 26살에 안수를 받고 장로가 되셨는데 마지막에 사업을 은퇴하면서 여기에 교회가 들어서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을 하셨답니다.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의 어떤 감동이 할아버지에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할아버지가 나쁜 분이 아니라 너무 좋은 분이셨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36억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에 돈은 딱 1,500만원이 있었습니다. 그 때 교회에 돈은 없지만 믿음이 많았습니다. 돈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고 그래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다 가지고 계신다고 그랬습니다. 그 당시는 젊었으니까 그렇게 답했습니다. 36억에 계약을 하자고 했더니 이 할아버지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30억은 계약서에 쓰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고 해서 왜 그렇게 해야 되냐고 하니까 자기가 이 땅을 워낙 싸게 샀기 때문에 마지막에 세금이 어마어마하게 나오는데 이 땅을 가지고 이미 대출을 받았기 때문에 36억을 받고 세금을 내려면 대출받은 것을 다 갚고 여기에 돈이 모자라서 자기 돈 2억을 보태야 된다는 것입니다. “놔두면 계속 올라가는 땅을 내 돈 2억을 보태서 교회를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라는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이것에 대해서 교회 재직 중에 건축위원들 열 댓 명을 모아놓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건축업자들도 있고 다 있었습니다. “목사님. 그것 전혀 문제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대기업들도 95프로 이상이 다 그렇게 합니다.” ‘그런가?’ 그러다가 그리스도인까지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내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회계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한 가지를 하셔야 하는데 가짜 회계장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아! 됐다. 내가 정리가 됐다. 안 한다.’ 하고 재직들을 모아놓고 이것 때문에 흥정이 결렬돼서 우리가 이사를 못가고 길가에 나앉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는 교회를 짓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해서 그 할아버지한테 세금이 얼마인지 물어보라고 했더니 3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할아버지한테 39억에 사겠다고 전해라.” 그 사람은 36억만 달라고 했는데 우리가 39억을 주고 산 것입니다. 지금 세월이 다 지났으니까 이렇게 말하기가 쉽지만 그 당시에 3억은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는 돈이었습니다. 교인 1,000명 모이는 교회에서 그 돈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그래도 39억을 만들어서 갚았습니다. 교인들에게 ‘우리가 이런 고민이 있었는데 그렇게 교회를 짓는다면 후손들 보기에 얼마나 부끄러운 교회가 될까?’ 하고 정리했다고 교인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한 때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멕시코하고는 미국이 참 어려운 관계입니다. 그 전쟁을 교회에서 엄청나게 반대를 했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지만 그 전쟁의 마지막 목표는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나온 찬송가가 이것입니다.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이 생활 아니요
운명에 메여 사는 그 복종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 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결국은 전쟁을 못하게 됐습니다. 교회의 힘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일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참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고 참 인간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도(The Throne, 2014)’ 라는 영화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한국영화 가끔 보십시오. 영화 ‘사도(The Throne, 2014)’ 에 보면 왕이 사도세자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왕이 세자를 정리해 버리려고 합니다. “야. 얘들아 아무래도 사도를 잘라야 되겠다.” 왕이 이러면 너무 채신머리가 없는 것입니다. 왕이 신하한테 가서 “비서실장. 너 있지 회의할 때 안건을 내라.” 고 하는 것입니다. “뭘요?” 하니까 “사도가 아무래도 사도 자격이 없으니까.” “폐하. 그를 자르시고 딴 사람을 세우십시오.” 이렇게 얘기를 하라고 했더니 그 신하가 왕이 명령을 하는데 집에 돌아가서 그날 저녁에 “폐하. 그 짓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옵나이다.” 그러고 딱 목을 매달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왕이 ‘이 자식 봐라. 네가 그렇게 해라.’ 그랬더니 똑같이 다음 사람도 ‘폐하. 그 짓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옵나이다.’ 그러고 목 메달아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사람도 똑같이 목 메달아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선시대 선비의 결기입니다. 조선시대 선비가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학문에 뜻을 세우고 어른이 돼서 선비정신이 딱 들어가서 머리 올리고 서면 ‘옛 성현의 가르침대로 산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산다. 그런데 세상이 나를 싫어하면 뚜벅뚜벅 내 길을 걸어가다가 콱 죽는다.’ 그게 기본적으로 선비가 되는 것입니다. 15살에 학문에 뜻을 세운다고 한다는 것은 배운 학문의 진리로 살아가다가 나를 죽도록 요청하는 상황이 오면 그 자리에서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이 선비가 되는 결기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결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내가 사는 것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따라 사는데 그 대가가 죽음이라면 기꺼이 죽는 것입니다. 어저께 말씀드렸듯이 내가 도를 닦는데 내 등에 누가 와서 칼을 꽂아도 두렵지 않은 이유는 그는 나를 죽여도 내 안에는 죽임 당할 자아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나의 사랑은 하나님께 있고 자신이나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모두 가져 가셔도 나는 그것이 안타깝거나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거나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결기를 가지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 길을 쭉 걸어가는 것입니다. 선교나 목회나 똑같이 양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칼빈이 이야기 했듯이 교회의 중요성은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경험했는데 섬에서 배를 타고 출발을 했는데 딱 보니까 파도가 보통 높게 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주의보가 안 내리면 배는 출항을 합니다. 배가 인천 한 가운데까지 왔는데 평상시에 두 배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냥 바로 가면 될 것 같은데 빨리 돌아가라고 주의보가 내려진 것입니다. 중간까지 왔는데 배를 섬으로 돌려서 가는데 바다 위에서 한 4시간을 요동을 치는 것입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 토하고 250톤 밖에 안 되는 배 이쪽에서 파도가 쳐서 포물선을 그리면서 배 저 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파도를 헤쳐서 밤 10시가 넘어서 섬으로 들어가는 중이었습니다. 섬에 있는 성당에서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공급해 주는데 10시에 전기가 다 끊어집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인데 딱 등대 하나가 깜빡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배들이 항구로 피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의 배가 피하는 데 등불 하나면 됩니다. 조명탄을 수 백 개를 쏴서 대낮처럼 환하게 해도 되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등대 하나가 거기에서 반짝거리고 빛나는 그 불빛을 보면서 수많은 배들은 안전하게 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타락했다. 기독교가 욕을 먹는다. 그러는데 세상이 타락 안한 때가 언제 있었고 진리가 대중화되던 시절이 어느 시절이 있었고 기독교가 미움을 안 받은 시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것 욕할 시간에 자기 하나라도 똑바로 해서 참 인간의 사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말은 쉬워도 너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사시니까 경험 안 해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할 때 첫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냈습니다. 그 당시에도 돈을 주고받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진짜 학교 선생들 중에 나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아이는 절대로 봉투를 안 줬습니다. 교회에서 사례비 받고 학교에서도 월급을 받고 더군다나 작가로서 글까지 썼으니까 선생님들에게 2~30만원씩 줄 여유가 없겠습니까? 그래도 안 줬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엄청나게 큽니다. 애들을 남자 여자 짝을 세워서 앉히는데 학교 가보니까 우리 아들만 저 뒤에서 혼자 앉아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운 털이 박힌 것입니다. 애가 착하고 공부를 잘했습니다. 특히 국어에 아주 재능이 있었습니다. 생활기록부가 나왔는데 ‘국어는 매우 잘하지만 산수를 더럽게 못함’ 이라고 적혔는데 그게 선생이 쓸 수 있는 생활기록부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있었는데 6학년 될 때까지 죽어도 안 줬습니다. 걔는 거기서 엄청난 피해를 받았습니다. 딱 선생 한분이 그리스도인이었는데 놀랍게도 내 책자의 독자였습니다. 그 선생님만 잘 줬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니까 웃으면서 지나칩니다. 그런데 구김살 없게 집에서 자란 아이가 학교에 가서는 찌그러지는 것입니다. 선생이 공개적으로 타박을 주고 여학생하고 앉히는데 봉투를 갖다 준 애들은 예쁜 애들하고 앉히고 별 볼일 없는 애들은 코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애와 앉히고 그것도 차례가 안 와서 혼자 덜렁거리면서 뒤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진리를 말 할 때에는 입술에다 침만 바르면 말 할 수 있지만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는 때로는 피를 흘려야 됩니다. ‘여러분. 의롭게 삽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합시다.’ 라고 외치는 건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금을 제대로 냅시다.’ 하니까 3억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3억은 그때 먹고 죽으려고 해도 진짜 없던 돈이었습니다. 입술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쉽지만 자기가 삶으로 살아 내려면 때로는 불 가운데로 들어가고 때로는 폭풍 속을 지나야 됩니다. 기꺼이 외로워 져야하고 잘 지낼 수 있는 사람하고 서로 미워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영혼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죽은 영혼을 살아나게 하셔서 이 어두운 세상을 한 줄기 빛처럼 살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진리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오늘도 우리에게 영혼의 회복을 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