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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란 무엇인가? (1)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1:8-11)
녹취자 : 박인탁
Ⅰ. 본문해설
제가 3일 동안 다룰 말씀은 “목양이란 무엇인가?”입니다. 흔히 목양은 목회와 많이 관련이 되고 선교는 전도와 관련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우리들이 이치를 살펴보면 사실 그 구분은 잘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목회사역이나 선교사역은 한 가지 정신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주신 목적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딤후 3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가 전도되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교사의 몫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우리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목회자인 동시에 선교사이었습니다. 아무튼 우리 말씀 사역자들의 주요한 임무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긴 묘사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 하며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한 신자를 만든 다음에 신자의 인격을 예수닮아 온전한 사람 즉 선한 사람이 되게 하고 두 번째는 그가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창조된 대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복음사역자들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선교에 관심이 없는 목회는 목양에 관심이 없는 선교만큼이나 무지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선교를 하시면서 항상 이 선교를 내가 왜 하고 마지막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후에 그 때에 이루질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를 항상 꿈꾸어야 합니다.
오늘 감옥에 있는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에서 자신의 중요한 복음적 목회사상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 속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구원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주기도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생애전체의 요약중의 또 다른 또 하나의 요약입니다. 예수님의 주기도문을 펼치고 펼치면 예수님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셨고, 예수님이 꿈꾸었던 초대 공동체가 어떤 것이었고, 세계회복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쩌다 생각나서 한번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쉴 수 없는 기도가 북받쳐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메섹에서 뿌려진 씨앗이었고 이 씨앗이 점점 자라면서 처음에는 오직 복음 전파하는데 자신을 드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전도된 사람들을 어떻게 사람을 세우고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왜 필요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한 사람으로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사도바울 마음에 불타고 있는 목회사역과 복음사역의 전망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이제는 교회를 목양하고 마지막에는 순교의 날이 가까워지는 상황에서도 쉼 없이 그의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는 무엇일까요?
답은 이것입니다.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희랍어 아가페입니다. 그 사랑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것이 목회입니다. 위대한 사상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전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종합적이며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운명적으로 무엇인가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것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랑을 집약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냐’로 나뉩니다.
어거스틴은 왕국이론에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이고 세상나라는 세상을 사랑하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할까요?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사도가 요한1서2장에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것이 곧 자기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인간의 모든 죄의 뿌리를 지성적으로는 큐브림(교만)에서 찾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아무르스인(자기사랑)에서 찾습니다.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그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물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사랑과 하나님 사랑만 있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자연 동물들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것들은 모두 방향의 차이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시작은 자기 때문에 이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중심에는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파문을 그리다가 사랑의 파문이 부딪칩니다. 개인끼리 이런 일이 일어나면 개인간의 갈등이 되고 나라끼리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나라끼리 갈등을 일으키게 되어 심지어 도저히 양보되지 않을 경우에는 전쟁상태에도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끊임없이 평화로워야 되겠지만 평화가 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수많은 중심점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은 하나로 통합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재편되고 있는 세계의 갈등과 균열을 보아도 이것은 사실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
어거스틴이 신국론에서 전개했던 왕국의 이론은 사랑의 이론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도하고 선교하게 하신 목적이 궁극적으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과 관계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한 사람만 흙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그 사람의 몸의 일부를 취하여 만드셨는데 그것을 여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남자는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고 여자는 남자를 덧입어서 창조되었으니 남자는 우등하고 여자는 열등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부터 히브러어를 매우 좋아했고 나중에 히브리어교수도 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히브리어의 창세기를 면밀히 검토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번역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창조하십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흙’으로 번역된 그것은 히브리어로 ‘아파르’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먼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먼지로 사람을 창조했을까요? 성경의 모든 것을 뒤져보면 ‘먼지’의 특징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티끌’로도 표현됩니다. 그래서 회개할 때에 티끌을 뒤집어씁니다. 그런 행위는 ‘자신은 nothing,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티끌로부터 사람을 창조하시는데 그 창조된 것은 육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데 그 창조된 것은 바로 영혼입니다. 이때 기억할 것은 이 생기가 영혼이 아니고 ‘숨을 불어넣는 행위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행위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말을 하나님의 일부가 들어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같이 인간은 육체인 나사로와 레피쉬로 나뉘어집니다. 이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레페쉬 하야’ 즉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 둘이 분리되면 죽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는 먼지로부터 왔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자원을 소비하면서 살게 되고, 반면에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늘의 자원을 사용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개가 한 생명체로 모이게 되지만 사실은 두개의 생명의 원리에 의해서 하나의 사람이 지탱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땅의 것으로 보양하게 되고 영혼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보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한편 여자는 갈비뼈를 취하여 만들어집니다. 성경에 ‘그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주리라’라고 나오는데 이 문구를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해 창조된부속물’ 혹은 ‘남자가 주된 창조물이고 여자는 보조적인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돕는 배필’의 히브리어인 ‘에제르’는 시편에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며’.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요’ 등에서도 정확히 ‘에제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많이 사용된 용어로, 그 뜻은 전쟁이 패배로 기울었을 때에 나타나 절망에서 소망으로 바꾸어주었던 ‘응원군’을 일컬을 때 사용되던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남자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들었다고 했을 때, 남자를 만든 재료는 ‘먼지’였던 반면에 여자의 원재료는 훨씬 고급인 ‘사람의 갈비뼈’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신재품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를 위하여’에서 ‘위하여’는 ‘종속적인 for’의 의미가 아니고, ‘correspondence to’ 즉, ‘-에 상응하는, -에 비견되는’의 의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인데 ‘헤 아가페 = 그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학술적으로 여지껏 언급한 적이 없는 것으로써 본 설교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애기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성경의 신학에 아주 확실하게 부합한 견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흐르고 있는 ‘그 사랑’의 신학을 설명해 보고 그것이 왜 목회의 목표와 선교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드린 다음, ‘무엇’으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강론하고자 합니다.
<‘그 사랑’의 신학과 목회의 방향>
하나님이 왜 한 사람만 흙에서 창조하고 두 번째 사람은 그 사람의 갈비뼈에서 창조하셨을까? 하나님께서 흙이 모자라지도 않으셨을 것이므로 처음부터 두 덩이 흙을 만드셔서 생기를 불어넣으셨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하신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둘이다. 그러나 사실은 한 몸이다.” 이것을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사랑은 필연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사랑은 너무 필연적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자기전체를 지배하는 자기 사랑이 단 하나의 원리입니다. 사도바울도 언급하기를 ‘내가 나를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는데 나를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느냐? 그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후자]이 남을 위해 나를 주는 그 사랑[the love, 헤 아가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선교사)중에도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 신장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헤 아가페’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두 사람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한 사람만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열의 문제가 아닙니다.
둘째, 한 사람이 그 파트너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은 창조되자마자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경향을 하나님께서 그 안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같이 고백합니다. “이는 내 뼈중의 뼈요 내 살중의 살이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대표자들이었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이 고백속에서 결혼이 실행된 것입니다.
히브리문학에서 ‘이는 내 뼈중의 뼈요 내 살중의 살’이라고 하는 것은 ‘최고’라는 뜻입니다. ‘마오’라고도 하는데 영어에서 CHICE는 최고라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두 사람의 관계는 깨어지게 되고, 그 남자의 그 여자를 향한 사랑도 깨어지고 자기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손중 라멕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가인을 위하여는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을 터인데 라멕을 위하여는 자신이 벌을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깨진 것들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죄와 비참이 세상에서 전개되는 역사가 펼쳐집니다.
한편 이 이전에 아담과 하와의 두 사람 사이에 가인과 아벨과 셋이 태어납니다. 만일 그때 두 사람사이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최고의 사랑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면, 가인을 낳았을 때 아담과 하와가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고백하고 가인도 동일한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셨을 때에 모든 인류가 모두를 향하여 너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나누는 완전한 사랑의 사회를 만들고 그 한 사랑을 나누는 사회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경륜이었던 것입니다.
이같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온 인류가 서로를 뼈중의 뼈 살중의 살처럼 사랑하고 그 사랑안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자연만물을 선의(善意)로 대하게 하기 위하여 그래서 당신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처럼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인간의 문명은 끊임없이 발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의도를 가슴에 새기며 하나님이 직접 지적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지상의 세계를 만들어서 하나님이 게시는 천상의 세계의 영광과 짝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인간의 관계가 깨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된 인간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복음의 구원의 약속을 주신 후에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십니다.
아브람이 등창하고 아브람의 가문을 택하여 서로 특별한 사람의 관계로 묶는 일을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사이에 있었던 사랑의 관계를 완전히 반영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럴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계시를 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로 탄생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은 지향하는 바가 이스라엘이 서로를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여기면서 살았을 때 어떤 것들이 사라질 것인가 입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이유는 단 하나 ‘죄’때문입니다. 그 죄란 Sin이며 crime이 아닙니다. crime은 개별적인 죄를 말하며 Sin은 개별적인 죄의 뿌리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이고 영혼에 속한 문제입니다. 이 Sin은 끊임없이 관계를 끊어내는 것을 말하고,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많은 심판을 받게 되고 이스라엘이 회개를 할 때에는 소위 ‘헤세드’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헤세드’란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것을 입은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라 부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헤세드의 사랑을 끊임없이 깨며 하나님께서는 은총으로 끊임없이 이 사랑을 부어주어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결국에 그 자체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이스라엘이라는 육적인 껍질을 깨고 영적인 이스라엘을 탄생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한 율법사가 ‘제일 큰 율법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너희 여호와를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네 몸’이라는 가르침은 이 창세기 2장을 배경으로 나온 것이며 예수님의 새로운 고안품이 아닙니다. 그 당시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제 강의의 내용과 같이 연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선지자들 속에서 얼핏얼핏 드러났지만 묻혀 버렸던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는 인류전체를 하나의 몸이라고 보시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자들은 이것을 3개의 차원으로 나누어서 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칭의에 의해서 연합되고, 세 번째는 성화와 영화에 의해서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의 유구한 전통속에서는 분명하게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것입니다. 이것을 본성적인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불신자인데도 심지어 이교도인데도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해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토대를 여기에서 찾습니다.
모든 인간이 비록 불신자라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존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성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로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서 네 이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이교도들까지 모두를 포함하시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신 후에 사도 바울로 넘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누구를 위하여 하셨습니까? 논리적으로는 예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었던 사람들, 구원받도록 선택된 사람들, 지금 믿고 있는 사람들, 앞으로 믿을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는데 그 의미는 죽으셨을 때 당신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고 대신 죽으셔서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내포적 대신’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끌어안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으신 그것은 내가 받은 것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상은 여기 속죄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부활에서도 한 몸으로 나타납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시는데 그것은 ‘주(主) =퀴리오스(신약) =아도나이(구약)’라는 명칭입니다. 그 아도나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기록할 때는 여호와라고 쓰고 읽을 때는 아도나이라고 읽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승천하신 후 ‘여호와’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계와 모든 만물을 다스리실 수 있는 실질적인 아도나이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이같이 부활과 함께 일어납니다.
그 후에 교회(敎會)론이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너희는 몸의 지체라. 그리고 너희들에게 각각 은사를 주셨는데 너희도 재능을 따라 섬김으로써 몸을 온전케 하라. 이것이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결국 이 교회는 무엇이냐? 지역교회들 각각은 껍질인데 마지막에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사라지고 교회와 세상은 더 이상 구별되지 아니하고 하나가 됩니다. 그 이유는 멸망 받을 사람은 지옥에서 정리되고 여기 세상과 교회는 격차가 없어지고 교회는 곧 세상이 되고 자연스럽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일관되게 전진하는 것은 하나의 몸 그리고 하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라고는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보셨습니까? 그 해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는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에는 자기사랑이 강조되고 욜로부터 시작해서 자기를 위하는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1인 패키지 상품이 많이 나오고 있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으로 정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셨을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각자 사랑의 질서를 만들면서 충돌하게끔 만든 것이 아니라 각각의 중심사랑을 버리고 하나의 사랑으로 통합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인간은 이미 자신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은 외로울 이유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소외되지 않습니다. 왜? 그 하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얼마나 끊임없이 버리고 ‘헤 아가페’ - 하나의 사랑 -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거룩한 삶)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룩한 삶의 핵심입니다.
자기의 사랑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함으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으로 시작하고 이러한 경험을 아주 많이 한 사람들이 결국은 목회 소명을 받고 선교사의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슬금슬금 자기사랑이 다시 고개를 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결국은 자기사랑이 고개를 들면서 자기중심이 서고 자기를 중심으로 질서를 형성하면서 자기사랑으로 사람이 엮어지게 만들어 갑니다. 선교를 하면서 왕국을 만들어 가는데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전[방해물]이 됩니다.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전[방해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회개”입니다. 그래서 페르툴리아누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같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 초대 교부가 인간의 본성에 깊이 뿌리박힌 죄의 심각성을 그리고 일상성을 주목한 것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모두 자기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모습은 온 인류가 서로를 뼈중의 뼈 살중의 살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랑이 하나로 집약되는데 그것은 ‘헤 아가페’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목회란 인도주의적인 사랑의 열정을 갖게 만들고 이웃에게 선한 행실로서 미담을 남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헤 아가페’로 나가면서 생긴 결과물들이고 ‘헤 아가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윤리가 거룩함을 낳는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함이 윤리를 낳는 것입니다. 즉, 거룩함이 한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의 영광, 선교의 영광이라는 것은 “자신의 사역 때문에 사람들 속에서 얼마나 그 사랑으로 풍성해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도네시아의 스티븐 통이라는 목회자이자 선교사가 인도네시아에서 전도하러 갔던 일을 직접 들었습니다. 무슬림들이 에워싸인 가운데 400대의 경찰차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동원되고 거기서 8천명에게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오라고 설교했는데 1,400명이 주님을 영접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감동을 받는 이유는 결국에 인간은 헤 아가페로 돌아오는 것 이외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목회의 영광, 선교의 영광이라는 것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한번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말론 카이 말론’ 라고 말합니다. ‘점점 더 풍성하게 하라’는 단어는 ‘프레세이 오우’라는 단어인데 테두리를 둘러놓고 물건을 산처럼 쌓아 놓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런 사랑이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고 ... 믿는 사람은 계속 뒤로 물러납니다.
저는 교회에서 25년을 설교했고 약5500편의 설교를 남겼는데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은 어렵지만,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계속 예수 믿게 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실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이유가 분명한데, 예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유가 매우 복잡하고 심리도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선교를 경험하셨으니 알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가서 피를 토하듯이 전 세계의 영혼들에게 가르쳐 주면서 결단하고 내 젊음 예수위해’하고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주 귀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맨 처음 선교지에 와서 유서를 쓰던 그날 밤의 정신으로 죽을 때까지 선교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렵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열린 교회를 하고 2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수천 명 목회하는 것? 물론 힘들지만 그렇게 힘든 일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그 정도의 힘도 안들이고 하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제일 어려운 일은 ‘자기를 목회하는 것’인데 이것은 끝까지 말을 안 듣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선교가 안 되는 사람은 식인종이나 원주민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선교하기 어려운 난공지역입니다. 우리는 선교지를 탐사하면 누가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선교사 마음에는 뭐가 있는지 아직 자신도 모롭니다. 30년을 선교했는데도 모릅니다. ‘헤 아가페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사역과 선교사역의 보람은 두 가지입니다. 사람이 회심하는 것. 회심한 사람이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 그러므로 선교사님들은 ‘선교사’인 동시에 - 선교 비즈니스맨만 되지 말고 – ‘설교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원주민들을 놓고 깊이 있는 설교를 해서 그들로 하여금 주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우리는 죽고 혹은 순교하고 잊혀지고 사라져가도 우리가 몇 십년 이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고 그 사람들이 (후패되고 보호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면 그것이 우리 존재의 목적에 충실하게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과에 따라서 각자는 하나님 앞에 - 이 지상에 사는 동안에 평안과 주님과의 동행을 누리고 - 하늘나라에 가서는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절대로 일의 크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한 가지를 정리하였고 중요한 주제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그 사람이 ‘카이 마이 카이 말론’ - 점점 더 풍성하게 될 수 있느냐 –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들이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줍니다.
우리들은 많은 잘못된 사상에 접해있기 때문에 지성과 사랑은 대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성적인 것과 사랑적인 것은 – 제 표현으로라면 지성(智性)과 애성(愛性)은 – 대립관계라고 간주하여, 덜 지적일수록 사랑이 많아지고 사랑이 많아질수록 덜 지성적인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이 우리들의 방황하는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지식과 총명으로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지식은 ‘에피그노시스’인데 ‘–에 관하여’라는 에피와 ‘알다’라는 그노시스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이 ‘에피’는 신약에서 10개 안에 들어가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고 이 단어의 연구가 신약의 이해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노시스’라는 단어도 신약에서 덜렁 생겨난 단어가 아니라 구약에 있는 ‘야다’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야다는 창세기에서 처음 쓰여진 것으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할 때 동침하다의 동사가 ‘야다’로 나옵니다. 그래서 영어의 know라는 단어에는 ‘동침하다’라는 뜻이 담겨있고, knowledge에는 성교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히브리에서는 어떤 여자가 남자를 향해서 ‘아노키 예다 에토’ 이렇게 말하면 시집을 못 갔답니다. 왜냐하면 ‘자 보지도 않고 어떻게 저 남자를 알수 있냐? 네가 안다는 것은 경험했다는 것이 아니냐?’ 이런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야다’는 단순한 information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알다’라는 단어를 처음부터 그렇게 쓰지 않았고, 아는 것에 관하여 지성이냐 의지냐 감성에 속한 것이냐 라는 식으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분석적인 시도들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들어온 것입니다. 이러한 히브리방식의 사유에 뿌리를 두고 ‘그노시스’라는 단어가 차용된 것입니다.
이것이 명사로 쓰이면 ‘다트’라고 하고 ‘다트 엘로힘’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됩니다. 이것은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호세아서 4장에서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다. 그래서 나도 이스라엘을 버려서 제사장의 나라가 못되게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을 버린 것이 얼마나 큰 벌이냐고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제사장 나라를 삼겠다고 하셨는데 내가 그것을 안 하겠다’고 하실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지식을 버리면 하나님을 버린 것과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는 그 어떤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린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서는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형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나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사람이 한탄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백성이 지식에서 멀어지는구나.’하고 그걸 통탄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야기했던 지식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냥 분석적이고 개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경외하면서 살게 하는 총체적인 원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때 인간이 타락한 후 이 모든 인류를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이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그 지식이 아담에게서 부터 시작해서 계속 언약의 백성들에게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다트 엘로힘’ 즉 ‘여호와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과 사랑은 쪼개지지 않는 것입니다. 쪼개진다면 그것은 이미 참사랑도 참지식도 아닙니다. 11세기에 끌레르뵈 보나르라는 신학자는 어마어마한 신학의 대가였습니다. 그가 칼빈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등에서 입니다. 그가 책(라틴어)속에서 ‘아모르 입세 에스트 로띠기아’ - 사랑 그 자체는 곧 지식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그노시스’(지식)는 ‘아모르’(사랑)와 나뉘어 질 수 없는 – 로띠기아가 지식입니다 - 성경이 바라보고 있는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 사랑은 반드시 지식과 함께 있는 사랑입니다. 사도가 말한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에서 ‘지식과 총명으로’의 영어 전치사는 by로도 말하여지지만, in으로도 말하여집니다. 다시 말하면, 에피(ㅇㅇ)와 그노시스(지식)안에서 사랑은 풍성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엔 에피그노시스)
에피그노시스가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사랑은 더 풍성해진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실제로 지식을 가르쳤는데 사랑이 증가하더냐? 해서 그 답이 ‘아니다’고 한다면, 그 지식은 그노시스의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그림)에서 ‘다트 엘로힘’으로 계속 내려와요?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끊임없이 이것을 버리면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갑니다. 그리고 회개하면 ‘다트 엘로힘’으로 돌아오고, 이 ‘다트 엘로힘’을 가져다주는 주재료가 율법입니다.
율법과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는데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 오면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전환이 찾아옵니다. Theological conversion이 찾아오는데 그것은 많이 들어보신 바와 같이 ‘그노시스 투 크리스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됩니다. 이것을 영어성경에는 ‘servant’로 번역하는데 아주 의도적인 오역(誤譯)입니다. 원래 ‘둘로스’라고 하는 단어이고 servant가 아닙니다. ‘servant’는 계약관계로도 성립될 수 있으나, ‘둘로스’는 slave입니다. slave는 신분도 유지되고 그 집안에서 떠날 수 없으나 servant는 출퇴근도 할 수 있고 마음에 안 들면 사표를 낼 수도 있습니다. 왜 이런 단어로 번역했을까? 킹 제임스 버전이 1611년에 나올 때 영국신학자들이 이것을 놓고 고민을 했는데 그것은 노예제도에 대한 컴플렉스때문에 죽어도 slave라고 번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유페니즘을 사용하여 약간 떨어뜨리면서 servant를 택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란 slave -운명적으로 노예가 된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펄펄해서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해치려고 했던 사람이 그렇게 안앙테(?)에 사로잡혀서 민족들에게 동족들에게 버림을 받고,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유대교 지도자가 되는 영광대신 예수의 노예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노시스 투 크리스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때문에 어떤 운명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 운명이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계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왜 한사람만 흙으로 창조하셨을까? 이러한 것들을 저도 몰랐었습니다. 조각조각으로 돌아다녔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까 이 분이 결국은 오는 세대 그리고 흘러간 시대의 모든 비밀이 여기에 집약되었고 전개될 시대의 비밀이 여기에 있던 것이었습니다. 세계의 창조와 구속과 완성의 모든 경륜이 비밀처럼 감추어져 있는데 그 분이 누구인지 알면 알수록 이 세계의 경륜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사람(바울)이 에베소서, 골로새서를 썼을 때에는 그것이 단순히 형벌, 구원, 속죄를 뛰어넘어서 온 우주를 휘감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과 천지창조의 계획을 보면서 역사가 어떻게 흘러오고 어떻게 가는가? 그리고 왜 육적인 이스라엘은 궁극적인 관심사가 아니어야 했는가 라는 등의 모든 비밀을 깨달으면서 그렇게 위대한 세계가 펼쳐지고 우리는 그 사람이 깨달았던 것의 아직 10분의 1도 펼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조금이나마 여러분들이 보신 것입니다.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아주 원숙한 사도바울의 위대한 지식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다트 엘로힘’은 결국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지 않고 선지자와 왕과 제사장을 통해서 당신을 보여주시고, 이 3직이 통합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incarnation(인카네이션). 까르네가 ‘고기’이며, ‘살’을 찢고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믿음은 없지만 예수는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셔서 모든 사람이 감각으로 예수와 접하게 하시고 그 관계를 통해서 행위를 통해서 상상으로만 그리던 하나님의 성품을 한 인격 안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실 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하여 어떤 마음이었던 것인가를 알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육신의 성육신의 생애가 있으셨기 때문에 복음서가 남았고 복음서가 남았기 때문에 이것을 재구성하면서 우리는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세계를 향한 단 하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모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에피그노시스’안에서 사랑이 ‘칼론 카이 말론’-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진다-고 했는데, 이 ‘에피그노시스’가 무엇이냐?
에피그노시스는 결론부터 내리면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희랍철학에서 말하는 두 지식, ‘독사’와 ‘에피스테네’가 있는데 ‘독사’는 ‘주관적인 의견‘이고 ’에피스테네‘는 근거가 있는 것이며 어떤 사물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도 사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지식’을 말합니다. 에피스테네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같이 에피그노시스는 경험과 지식, 논리, 연관관계, 이 모든 것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에피그노시스는 무엇에 대한 에피그노시스인가? 그것은 사물에 대한 에피그노시스입니다. 그렇다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키면 사랑이 증가하는가? 답은 아니다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가르치면 사물에 대한 지식은 사랑을 증가시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먼저입니까? 하나님의 지성 속에 있는 세계에 대한 ‘관념’이 먼저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마음에 ‘관념’이 먼저 있었겠지요. 이것을 ‘이데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관념에는 이렇게 창조하고자 하는 모든 만물이 있을 것이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나하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연관을 이루면서 어떻게 하나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잇을까를 보여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이렇게 하나의 목적(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드러나는 것) -어떻게? 인류가 서로 뼈중의 뼈 살중의 살로 여기며 사랑함으로써 영광을 드러내고, 모든 사물과 사회가 인간들이 서로 협력하여 새롭게 문화를 건설함으로써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 세상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이 연관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연관속에서 이 세계가 확하고 한 순간에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한 인간이 있습니다. 이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면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무가 왜 여기에 서있는지, 왜 여기에는 시냇물이 흘러가는지, 왜 하늘에는 태양이 빛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 모든 만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삼위일체에 의해서 창조하십니다. by the Father 성부에 의해 창조되고, through the Son, 성자를 통해서 창조되고, 마지막에 in Holy Spirit 성령안에서 창조하십니다.
여기서 두 번째에 나오는 ‘성자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소위 Logos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각 사물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 사물 하나하나가 연결되어서 그 사물체계로 존재하게 하는 모든 만물의 존재원리를 심으시는데 그것을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말씀 없이는 창조된 것이 없고 모든 만물은 그 안에서 지탱되고 그 안에서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가는 것입니다. 헤링스 바빙크는 이러한 원리가 학문이 성립하는 근거라고 보고, 그런 원리를 하나님이 모든 만물에 심어놓으셨기 때문에 지금도 식물을 연구하는 식물학이 가능하고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이 가능하고, 천문학이 가능하고, 결국은 그 원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에피그노시스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온전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선교사는 첫째로 중요한 것이 ‘지식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신약의 용어로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 분이 누구인지를 안 다음에는 치열하게 학문을 공부해서 이 만물을 지탱하고 있는 원리가 어떻게 한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 다니는 동안에 단 하루도 학교가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단 하루도! 저는 스스로 공부에 취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14살 2개월 되었을 때 - 어려서부터 교회 다니고 있었는데 주일날 교회를 가는데 슬픔이 확 밀려와 논두렁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울었던 이유는 질문이었고 그 질문이 나에게는 매우 절박한데 교회는 대답을 안 해주고, 단 한편의 설교도 내 마음을 울려주는 설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14년 2개월 되었을 때 –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정말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내 머리에 찍혔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박수치고 예수는 믿지만 도덕적이지도 않고 신실하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왜 예수 믿는지도 모르고 믿는 사람들처럼 14살짜리의 내 눈에 비쳤습니다.
그렇게 울게 하고 떠올랐던 질문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누군가? 나는 누군가? 그럼 나 어떻게 살아야 되나? 그리고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마지막으로 신은 있는가? 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펑펑 울고 난 다음에 눈물을 씻고 일어나면서 결심했습니다. 나는 무신론자로 산다. 하나님은 없다.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나와 상관이 없다. 내 인생은 내 나와바리다. (웃음들) 그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자격이 없다 나를 이렇게 내팽겨져 두었는데 무슨 자격으로 내 인생에 주인권을 행사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나는 문학을 읽었습니다. 읽어보니까 - 내가 이야기해도 친구도 선생님도 아무도 내 고민에 동참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 문학작품을 읽어보니까 나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주인공들이었습니다. 너무 위로를 받았습니다. 한참 읽고 보니까 계속 공감은 가는데 답을 말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상, 철학자들을 읽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프레드리히 니체같은 사람들이 휩쓸고 있던 때였습니다. 까뮈, 카프카 같은 사람들. 그 다음에는 이것이 길이구나 하고 박수를 쳤는데 아무도 행복한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무신론자가 된 것도 행복해지려고 된 것인데 이 길을 가면 내가 뭐하나? 그러다가 결국은 하나님 앞에 나 스스로 깊이 생각하다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지식의 한계입니다.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나고 사물들을 배우지만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도대체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 예수를 믿고도 처음엔 못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저 혼자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면서 비로소 이 원리들을 위대한 신학자들의 도움으로 깨달으면서 위안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에피그노시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두 가지인데, 지식의 근원은 그리스도이니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시고 그 만남을 일상속에서 유지하여야 된다는 것과 두 번째는 공부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선교지에 아직까지 몇 권 썼는지는 모르지만 – 어떤 사람은 80권 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100권 썼다고 그러는데 – 수많은 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선교사님들 가운데에는 제 팬들이 별로 없는데 사모님들 중에는 많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께 보내면 선교사님이 부인에게 패스하여 실제 읽는 것은 사모님들이 읽는 것입니다. 읽다가 인터넷으로 들어오고 설교를 들어보고....
말씀의 요지는 공부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들이고 사상이 없다면 전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도하는 것은 결국은 하늘나라 보내기 위해서 하는게 아니라 그것은 결과이고,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들이 이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렇게 살게끔 하나님을 향해 회심한 사람들에게 이런 깊은 그리스도를 중심에 세운 그 지식들을 새롭게 가르침으로써 그 사람들의 사랑이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선교사역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선교만 하고 목양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선교가 아니고, 그것은 마치 ‘목회만 하고 전도를 안 하는 것’(서로 반쪽만 있음)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지런히 공부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목회자(선교사)의 죽을 때까지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한계는 있지만 힘닿는데 까지 성경을 탐구하고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들을 발견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책을 읽으시고 –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커다란 논제로 별도로 다루어야 하고 -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로부터 왔기 때문에 모든 만물의 지식을 환원하면 그리스도로 귀속이 되는 것입니다.
빅뱅을 통해서 만물이 태어났다면, 스티븐 호킹박사는 거꾸로 만물을 한 지점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만물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이런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죄에 의해 가려져 있고, 아직까지도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진노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 피조물 하나하나가 가지는 영광이 태초와 같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맨 정신으로 사물만을 탐구해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어떤 연관이 되어있는지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과 성경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학문을 끊임없이 탐구해서 손에서 죽는 순간까지 책을 놓지 말아야 됩니다. 특히 선교사님들에게 신신 당부하는데 선교지에서 책을 못 삽니다? 그것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맘만 먹으면 돈이 없습니다? 사람은요 자기가 너무 원하면 결국은 해요! 문제는 원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아!아! 하고 깨닫는 것이 있어서 3년 전의 선교사였던 나에게 나를 앞에다 놓고 내가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지적으로 성장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지식에 매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입니다. 총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33:49)
총명이라는 것은 영어로 understanding이고, understanding은 고대철학에서 오성(悟性)이라고 쓰이는 단어인데, 이 오성이라는 의미가 칸트 이전과 그 이후에 사뭇 다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칸트이전에까지의 오성(悟性)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저 초월적인 세계를 깨닫는 것’ 혹은 ‘논리와 상관없이 감각으로 확확 찍히는 것’ 이것들이 오성의 기능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테시스가 라틴어에서는 셀시스라고 불리웠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기능은 고등한 기능과 하등한 기능으로 나뉩니다. 하등한 기능은 단순히 보고, 듣고 하며 감각을 통해 지각하게 되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면, 고등한 기능은 지성에 속한 기능들이고 지성에 속한 그 능력을 가리켜서 ‘지적능력’이라고 부릅니다.
후자는 ‘멘스’(mens)라고 하는데 멘스의 지적기능은 두가지 –latio라는 기능과 inteligentia라는 기능-으로 나뉘고, 라티오는 이성(理性)으로 추론을 담당하며, 인텔리젠티아는 오성(悟性)으로 변증을 담당합니다.
변증은 논리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빛이 들어오면서 예전의 것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반합 부정반합 이렇게 전개해 나가는 것이 오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라티오)은 사물의 관계를 가지고 추론해 나가는 것이고 이것(인텔리젠티아)는 그야말로 초월적인 것들이 빛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아이스테시스’라는 단어이고 원래 ‘아이스테노 마이’라고 하는 ‘깨닫다, 놀라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것은 ‘초월적인 세계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이고, 이 단어가 결국은 ‘총명’이라는 단어인데 궁극적으로 이것은 ‘판단력과 관련’되며 성경은 총명의 중요성에 대해 수없이 언급하며 그것은 또한 ‘지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종합을 하면 ‘아이스테시스’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것은 “어떤 사물들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모든 만물들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관이 되는지, 또 그리스도는 만물과 연관을 갖는지에 대해서 빛에 의해서 하나하나의 지식”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인간이 그렇게 이해해도 알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것들을 단번에 깨닫는 ‘지성의 빛’인데 그것들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에피그노시스는 ‘끊임없는 지식의 활동’을 말한다면 아이스테시스는 ‘믿음의 활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그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거룩하심을 아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논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면서 그것에 의해서 ‘헤 아가페’(참사랑)는 ‘말론 카이 말론’(점점 더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웨스트민스터교회에서 설교를 하시면서 그 전임자가 켄달 모건이라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신데 그 분이 1차 대전에 참전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게 되고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트라오마 상담을 합니다. 사람을 만났는데 모두 듣고 나서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줍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이 일어났고 너는 정당하게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고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에 죄가 아니다. 라고 고전적인 답을 주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상담가를 만나고 목회자를 만나서 설명을 받아도 이 사람은 사람을 죽였다는 마지막 인상에서 놓여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군목을 찾아가게 되고 모두 이야기했더니 군목이 아무 대답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더니 그는 모건이라는 청년을 끌어안고 잠시 후에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건은 술회하기를 수많은 말을 했던 그 사람들에 의해서는 내가 치료되지 않았지만 나를 끌어안고 울어주던 그 목사님에 의해서 아무 대답도 듣지 않았지만 그 사슬에서 놓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이스테시스. 그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다스리시는데 근거를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쫘악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아이스테시스.
우리 집사람이 너무너무 건강했었고 그래서 아프리카에 아웃리치를 오고 저녁때 비행기 도착해서 다음날 새벽기도 나올 정도로 강철이었는데 결국은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3일간 온 몸을 진찰했는데 원인을 찾지 못했고 나중엔 점점 심해져서 매일 저녁에 유언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아팠기 때문에 심각히 들었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서 새벽기도도 못나가던 때인데 그러던 어느 날 일어나 침대에 똑바로 앉아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데 갑자기 확신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들려주셨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거의 유사하게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는데 결론은 이것입니다. “네 아내는 안 죽는다.” 그리고 나서 마음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이 막 밀려오고 아내가 매일 유언을 남기는 것이 짜증이 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웃음) 그래서 아침에 이야기 했습니다. “여보, 내 이야기 잘 들어. 나의 하나님이 당신 안 죽는데! 그러니까 제발, 그런 이야기 이제 그만해. 내가 확신하는데 절대 안 죽어. 당신은 김남준 목사 천국 소천 20주기를 할지도 몰라! (웃음) 안 죽으니까 걱정하지마! ” 그 후에 단 한 번도 우리 집사람을 죽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에요? 이 라치오로-이성으로-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런데 설명을 들은 것은 의심이 가는데 이것은 설명할 수는 없는데 한 순간에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안 죽는다!’ 그것이 번개같이 확 들어오는데 어떻게 들어 왔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생각을 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종합을 하면 –더하고 싶은데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 정리하면 이것입니다.
목회자와 선교사의 사명은 “결국은 마지막에 사랑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시덥지 않은 오만가지 사랑이 아닙니다. 예로 114에 전화를 걸면 ‘사랑합니다 고객님’하는데 사랑은 그럴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김용욱씨가 책을 1권 썼는데 창가에 서서 책을 다 읽어버렸습니다.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사랑하지 말자’입니다. 기독교가 사랑을 펼치면서 어떻게 이 나라를 망가뜨렸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만약에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의 말에 현혹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안타깝습니다 도울선생님! 당신이 기독교가 전파했다고 믿는 그 사랑은 원래의 기독교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원래의 기독교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했다면 당신의 이 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하는 생각을 하고 책을 덮었습니다.
‘헤 아가페’ -한 사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러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와 온 땅과 모든 만물을 하나로 묶는 그 단 하나의 사랑으로 온 인류를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 댓가로써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우리자신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예루살렘교회에 지도자로 세우실 때 ‘너 파송교회는 있냐?’ 라고 물어보시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무슨 돈으로 할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말씀으로 세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존경하는 은퇴하신 선교사가 계셨는데 예전에 여기저기 사역을 많이 하셨습니다. 직접 못 만났는데 들리는 바에 그 집 아이들이 너무 훌륭하게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은퇴하실 무렵이 되어 여선교사님들이 물어보기를 ‘사모님, 어떻게 아이를 길렀길래 어떻게 저렇게 좋게 기르셨습니까?’ 그 선교사가 하는 말이 ‘나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어요. 돈도 없고 선교지는 계속 옮겨다니고 제대로 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일평생 아이들에게 하나만 가르쳤습니다.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느니라.’ 그것입니다.
“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찬송)
인간이란게 무엇이냐 하면 사랑의 하나님께로 나와서 그리고 인간의 육신을 입어서 태어나고 자라고 한껏 아름다움을 발산하다가 여자는 23살 남자는 25부터 늙기 시작합니다. 완전성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집니다. 그럼 나중에 늙고 소멸하고 마지막에 죽고 소멸되어서 불과 몇 백년 지내고 나면 어무 것도 남지 않고 원소로 다 돌아가 버리고 끝납니다.
그리고 그 인간은 마지막의 하나의 사랑이신 그분께로부터 온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을 남겨두고 그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그 사랑안에 영원히 있는 것으로써 그 사람의 인생은 끝나는 것이니까 온 주님께로부터 돌아갈 주님, 지속될 영원한 날에 비하면 어둠속을 가르고 지나가는 한 마리의 반딧불의 반짝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찬송)
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찬송)
선교사와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 사랑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신이 그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령함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모든 선교적이고 목회적인 비즈니스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두고 가고요.
부부가 한없이 다정스럽잖아요. 결혼한지 38년 되었거든요. 마지막으로 말다툼한 것이 22년전입니다. 사랑하지만 잠시의 인연입니다. 결국은 같은 날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것은 사고로 죽는 것입니다. (웃음) 그렇게 하면 사람들의 가슴에 얼마나 대못을 박겠어요. 같은 날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기도는 무식하게 할 필요 없습니다. 결국은 가는 것인데 내가 먼저 갈수도 있고 아내가 먼저 갈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20년이나 30년후에 불행히도 중증치매에 걸려서 가족도 알아볼 수도 없고 그래서 정신병원에, 요양원에 보내어져서 거기서도 감당이 안 되어 왼쪽 손에 수갑을 차고 침대에 묶여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여서 죽음을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전개되는 삶의 여정 자체가 그 자체로만 보면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지만 그것이 단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빛나도록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눈부신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내 마음이 가슴이 시리도록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을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이 내가 매일매일 발견하는 지식때문에 말론 카이 말론 – 점점 더 풍성해지고 – 어둠을 뚫고 내게 들어오는 그 초월적인 믿음의 인식과 계시의 빛때문에 내가 이유는 말할 수 없고 근거는 설명할 수 없지만 톨스토이가 말했듯이 자신은 구름위에 있지만 아무리 뛰고 굴러보아도 흔들리지 않는 아주 튼튼한 기둥위에 서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 사랑이 내 안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고 모래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지만, 그리고 목회에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고, 선교지에서 선교역사가가 내 이름을 기록할 정도로 위대한 기념비를 남기지 못했다 할지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사랑으로부터 태어나서 그 사랑 안에서 살다가 마지막 우리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 바다를 먹물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모두 쓸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즐거워하면서 그렇게 살다가 인간이 어차피 통과해야할 이별과 슬픔, 고통, 이런 것들을 지나면서 오히려 거기서 하나님의 빛나고 찬란한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꽃놀이하면서 불꽃이 터질 때 온갖 아름다운 불꽃을 내는 이유가 바로 매체인데 각기 다른 색깔이 나오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를 돌아보면 모두 나쁜 일이 있었을 때에 그것을 느꼈었습니다. 좋았을 때보다 오히려 나쁘고 힘겨운 상황을 통해서 예전에는 몰랐던 에피그노시스(온전한 지식)를, 예전에는 받지 못했던 아이스티시스(믿음의 활동)를 그 깊은 기도와 하나님께 모아지는 마음과 정신속에서 반짝이는 불빛처럼 혹은 번개처럼 느끼면서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삶과 죽음은 아이들이 땅따먹기위해 그어놓은 금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너희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나에게 더욱 좋다’ 쉽게 말해서 나는 너희를 떠나서 그리스도께 가고싶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사랑을 외치고 그랬지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면서 그것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속으로,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갈 때까지 수많은 다양한 일들을 겪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말론 카이 말론’하는 ‘헤 아가페’속에서 살면 그것이 모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더 잘 믿고 그래서 그 사랑을 더 풍만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체득되고 그것을 양떼들에게 그렇게 되게끔 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소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