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과 삶 3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2)
녹취자: 백지영
오늘 아침에는 2절을 설교하겠습니다. 1절에서 시편 23편 전체의 총론을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목자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있는 것은 하나님 없이 생겨난 것이 없고 생겨난 모든 것들은 그분을 의지합니다. 그런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여호와로 계시된 것은 이 시인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관계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낮고 하잘 것 없는 시인의 목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을 통해서 그분을 받아들임으로 그렇게 자신의 인생의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시인을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인도해 오셨기 때문에 그 말할 수 없는 행복한 관계 속에서 이 시인이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I shall not want.”, “나에게는 모자람이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서부터는 이제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목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논증해 갑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먹고 살게 해 주시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이 목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2절서부터 신앙의 단계를 묘사한 것입니다. 2절에서는 먹고 살게 해 주신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회복시켜주신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지켜주셨기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이게 진도가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중년신사가 있었는데 세상 말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고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아주 크고 좋은 회사에 입사했고 능력을 인정받아서 초고속으로 승진을 해서 40대 중반밖에 안 됐는데 아주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잘 수가 없고 저녁이 되면 누군가가 자기의 목을 조이는 것 같은 병에 걸렸습니다. 의사를 찾아가 봤더니 의사들도 그 병이 뭐라는 것을 진단을 못합니다. 그래서 힘들어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기독교인이 하는 정신과가 있는데 한번 가보라고, 그래서 정신과라는 말이 좀 맘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기독교인이 한다는 정신과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의사에게 다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의사는 아주 마음을 기울여서 이 사람이 하고 있는 이야기를 한 시간 가까이 경청했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확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의 병을 꼭 고쳐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제가 약을 먹어야 됩니까?” “물론 약을 먹어야 되는데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이 사람은 이미 질병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서 회사도 그만 두고 자신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금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의사가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봉투에 넣어서 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봉투를 가지고 약국에 가시지 마시고 일단 집에 가셔서 저녁 시간에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에 펼쳐보십시오. 그리고 약국에 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집에 갔습니다. 집에 가서 저녁 조용한 시간에 혼자 침대에 누워서 스탠드에 불을 켜고 의사가 준 그 처방전을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처방전 이름 누구누구 귀하의 신속한 쾌유를 기원하며 다음과 같이 처방합니다. 1.약의 이름 구약 2. 약의 종류 시편 23편, 용법 및 용량 하루에 다섯 차례씩 물 없이 천천히 씹어 드심, 기타 꾸준히 복용하셔야 신속한 효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화가 나서 쓰레기통에 구겨서 던져 버리고, ‘내가 아무리 병이 들었지만 의사도 나를 조롱하는구나.’ 생각을 하니 그날 밤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아침에 너무 힘이 들어서 생각을 하는데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돈을 벌려면 약을 많이 팔던지 수술을 하던지 병원에 입원을 시키든지 그래야지 될 텐데 다시 치료를 받으러 오라는 말도 없고 약을 사먹으라는 말도 없고 그리고 이것을 주었는데 내‘가 이것을 한들 손해 볼 게 뭐가 있나, 내가 이것을 해서 효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무슨 내 몸에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번 해 보자.’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옛날에 교회 다닐 때 처박아 놓았던 먼지 묻은 성경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시편 23편을 펴보니까 어렸을 때 많이 듣던 것입니다.
(찬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주시네
그리고 23편을 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번, 아침 먹고 점심 사이에, 점심 먹고 저녁사이에 한번, 저녁 먹고 한번, 잠자기 직전에 한번, 하루에 다섯 번씩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두꺼운 성경을 읽을 때마다 펼치는 게 귀찮았습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카드에다가 시편 23편을 적었습니다. 카드를 들고 외우는 것입니다. 하루에 다섯 번이니까 일주일이면 서른다섯 번, 한 달이면 백사십 번입니다. 한 달 정도 되니까 카드가 필요 없었습니다.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다 외워졌습니다. 그렇게 한 두 달 했던 어느 날 자기 집안에 앞뜰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산책을 하면서 그것을 외우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죽 낭독을 하다가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하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마음속에 커다란 다 낡은 콘크리트 건물 같은 게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강인한 투쟁정신으로, 경쟁정신으로 일생을 살아왔고 엘리트코스를 밟아온 자신에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너무 나약한 것이었는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자기 앞뜰에 풀밭에 주저앉아서 눈물을 쏟으면서 자신의 인생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몰랐는데 마지막에 알게 된 것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목자가 없이 살아온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얼마 있다가 결국은 완전히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복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소위 이야기하는 로고세라피(logotherapy)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우리 인간의 영혼에 생명이며, 힘, 변화, 사랑, 이런 것을 주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2절에서는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그는 분명히 여호와이지요.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자, 시인은 팔레스타인의 목동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뉴질랜드나 혹은 오스트레일리아같이 끝없이 풀밭이 한없이 이어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굳이 이동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양떼를 이끌고 항상 풀밭을 찾습니다. 좋은 풀밭은 우리 사람들에게는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이지만 이 양떼들에게는 거기가 밥입니다. 그 풀을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양떼들이 풀을 뜯으면 그러면 목자는 이제 이들을 다 여기서 먹게 한 다음 어디로 데리고 갈 것인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높은 언덕에 올라서 어디에 좋은 목초지가 있는지, 혹은 경험에 의해서 그 목초지를 미리 생각하고 그 다음에 이 양떼들이 여기서 풀을 먹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떼는 풀을 뜯어먹으면서 ‘아, 우리가 이제 이쪽에 있는 풀밭을 거의 다 먹었구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라고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양을 너무 사랑하고, 이 양을 안전하게 이 풀밭이 끝나면 또 다른 풀밭으로 데리고 가서 그 풀을 먹이는 것이 목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이 자신의 삶의 보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 주어도 결코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살아있는 근본적인 증거를 불안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이 뭔가 불안을 느끼는데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거기에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만큼 불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데로 무엇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염려, 그리고 그것을 인간이 원하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그 염려와 불안을 스스로 짊어지고 사는 게 그게 인간입니다.
6.25 전쟁 때 사실 미군이 우리를 위해 해 준 고마운 일 가운데 하나는 그 어마어마한 수의 전쟁고아들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을 입양시켜 준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이제 코리언 아메리칸의 중요한, 일제 강점기시대 때 간 사람들을 빼고는 그때 넘어간 아이들이 굉장히 중요한 코리언 아메리컨 사회의 말하자면 주춧돌들이 된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대개 한 48년생 정도부터 시작해서 한 53년생까지니까 지금 벌써 그분들이 67세, 68세 그 정도 돼서 할아버지가 될 나이입니다. 그 엄청난 많은 아이들이 갔습니다. 내가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지만 미국에서 한국에 참전한 장군 가운데 밴 플리트(Van Fleet 1892~1992)장군이라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직접 데려간 고아들만 3만 명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아마 한 20만 명 가까운 고아들을 미국으로 입양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그때 있었던 일입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 걸어가다가 엄마 아빠가 비행기에서 쏟아지는 기총소사를 받고 엄마가 죽고, 폭탄이 떨어져서 옆에서 엄마 아빠가 찢어져서 죽는 것을 보았으니까 이 아이들에게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아이들을 모두 미군들이 거두어서 부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깨끗이 씻기고 미국에서 온 구호물자들의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맛있게 먹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캠프에서 재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잠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병사가 찬송가도 불러주고 주기도문도 외워주고 그러는데 아이들을 잠을 못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인 병사를 시켜서 도대체 이 아이들이 왜 잠을 못 드는지 한번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 왜 잠을 못자느냐고 그랬더니 대답이 너무 단순했습니다. “아저씨 내일은 뭘 먹어요?” 지금 이 아이들은 이미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른 상태인데 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도 오늘처럼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세 밤을 더 자면 미국에서 비행기가 올 텐데 그러면 그 비행기에 모두 타고 너희들이 전쟁이 없는 미국에서 새로운 부모님과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여전히 잠을 못 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혜로운 군인이 취사실에 부탁해서 아이들이 내일 아침에 먹을 빵을 미리 나누어주었습니다. 하나씩 비닐봉지에 담아서 이것이 너희들이 내일 먹을 빵이다 그리고 주니까 아이들이 그 큰 빵을 가슴에 안고 비로소 잠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매일매일 ‘우리가 믿음으로 살자’, ‘신앙으로 살자’, ‘주님이 함께 하시면 못할 일이 없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그러나 또 한쪽 저쪽 구석에서는 끊임없는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녹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주신 산상수훈의 말씀 가운데 아마 가장 핵심적인 요절 하나를 꼽으라면 틀림없이 마태복음 6장 33절일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가장 중요한 말씀을 주셨을 때 그때 문맥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그것이 문맥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그러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대적이 무엇이냐 하면 유혹이나 세상 사랑이나 정욕이나 이런 게 아니라 염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찬양)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결국 염려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한국의 어느 의사를 만났는데 예방의학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서 ‘야, 이건 정말 신기하구나.’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염려는 우리의 몸에 좋을 것 같습니까, 나쁠 것 같습니까? 염려하는 게 우리 건강에 좋을 것 같습니까, 나쁠 것 같습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막 염려하는 것이 우리 건강에 좋을 것 같습니까, 나쁠 것 같습니까? 나쁩니다. 그래서 결국은 뇌졸중을 비롯해서 암이나 이런 많은 질병들이 결국은 스트레스성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건강하게 잘 사느냐 하면 좀 생각이 없는 사람, 그리고 밑도 끝도 없고 남의 눈치도 거의 안보고 사는 사람, 그리고 태평하게 사는 사람, 특별히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하는 그런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는 의학자가 아니니까 그분의 설명을 그냥 그분을 믿으니까 내가 받아들이는데, 그분에 의하면 의학자로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놀랍게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하고 고통을 받을 때 몸이 그것이 어떤 종류의 스트레스인지 몸이 그것을 헤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선한 목적의 스트레스일 경우에는 이 몸을 자극해서 활기를 주고 잠자던 세포와 정신을 일깨워낸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학의 원리를 사용하는 게 뭐냐 하면 동양의학입니다. 침. 그 침의 원리가 무엇이냐 하면, 몸에 혈이 있는데 너무 아프고 몸이 너무 안 좋고 장기가 기능이 저하되었습니다. 그때 그것과 연결된 특정할 혈을 침으로 팍 찌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 몸이 어떻게 느끼느냐 하면 침이 들어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강력하게 외부의 무엇이 침투해 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온 몸이.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 몸의 힘을 동원해서 물리치고자 에너지 업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를 들어서 원래 달리기도 잘 못하고 힘도 없는데 만약에 불이 났다 그런데 그 안에 우리 아이가 있다 그러면 평소에 자신에게는 나오지 않는 엄청난 에너지가 나와 가지고 용기가 나와서 그 불속을 뛰어들어서 아이를 건져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피아니스트인데 자기 피아노를 너무 아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길 속에 뛰어들어서 업라이트피아노인데 그것을 그 가냘픈 자매가 짊어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도 너무 자기 행동에 충격을 받았는데 정말 자기가 놀라운 힘이 있는 줄 알고 다 상황이 끝난 다음에 업라이트를 들어보니까 한쪽 바퀴도 안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엄청난 자극을 주면 힘이 팍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침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침은 자기 안에 있는 잠재력을 불끈 일으켜 세워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방의학자의 말에 의하면, ‘어떻게 돈을 벌어서 내가 잘 살까?’ ‘어떻게 나의 정욕을 만족시킬까?’ 이런 걸로 받는 스트레스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웃을 위해 고통 하는 인류를 위해 이런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 스트레스가 들어올 때 몸이 선하고 합목적적인 스트레스인지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스트레스인지를 분별해서 전자의 경우에는 이 속에 있는 에너지들을 업 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왜냐하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오래 사는 사람들은 목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표세우면 그 다음서부터 고달파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지금 다이어트 열풍이 붑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살아가면 편하지만 내가 예를 들면 여자로서 48kg 이상 나가면 어떻게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 -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 스물네 살 때였는데 키 174cm에 몸무게 56kg 허리 27인치였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얼마 있다가 30인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잠을 못 잤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허리가 30을 넘을 수가 있을까? 이게 짐승허리지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 어쨌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 그 다음서부터 스트레스가 되는 것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주님이 보내주셨으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살고 간다 하면 되는데 내가 파키스탄의 영혼 모두 구원해내고 말 것이라고 목표를 세우면 그날서부터 스트레스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난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더군다나 성공한, 성공이라는 말은 웃기지만 어쨌든 괄목할 만한 선교의 업적을 이뤘던 동료들을 보면 ‘학교 다닐 때는 공부도 내가 훨씬 더 잘했는데, 마누라도 우리 마누라가 훨씬 예쁘게 생겼는데, 나는 이렇게 한쪽에 쳐져서 기도 못 펴고 있고 저 친구는 세계적으로 저렇게 돌아다니면서 유명해 졌구나.’ 그런 생각합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어야지’라고 맘먹으면 그때부터 스트레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이 그것을 훌륭하게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부자가 “오늘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구나. 어떻게 할까?”라고 고민을 하면 몸이 이게 어떤 종류의 스트레스인지를 알고 우리의 몸에 해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설명이 어느 정도 의학적인 근거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 설명을 읽으면서 뭔가 궁금증이 많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안하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너는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이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리고 그 다음에 죽 나옵니다. 그런데 그 앞에 보면 결국 그 염려하다는 문맥이 무엇으로 나오느냐 하면 “너희를 위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아라” 그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나오다가 갑자기 “마음의 등불이 어두워지면 무엇으로 밝게 하리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이어지다가 “염려하지 말라”라는 이야기로 나와서 마지막에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는 이야기로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이냐 하면 불안의 근거는 결국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거기에서 불안이 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종종 우리에게 성령께서 어느 한 순간에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셔서, 그런 믿음은 은사입니다. 큰 믿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담대해지도록 만드는 것처럼 마귀는 어느 한 순간에 근거도 알 수 없는 굉장히 힘든 불안을 확 안겨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온 몸과 마음의 기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우리의 영혼의 위험한 때입니다. 저는 최근에 어느 불교의 고승이 쓴 한 어록을 읽으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결국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문맥하고 많이 유사하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자, 어떤 수행자가 들판에서 밤에 홀로 수행을 한다고 치자. 눈을 감고 홀로 조용히 수행을 하는데 그때에 그 수행자를 해치기 위해서 어느 흉악한 놈이 큰 칼을 들고 와서 등에다가 콱 꽂는다고 치자. 죽을 것 아닙니까? 그래도 수행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칼로 나를 찌르지만 내 안에는 죽임당할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내용을 읽으면서 서로 다른 종교이기 때문에 다른 문맥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다” 이 두 가지 성경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 모든 불안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랑에서 생긴 것입니다. 좋은 사랑이 아닌 잘못된 사랑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랑에서 생겨나는 그 불안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육적인 불안들이 우리의 마음에 요동칠 때 마지막에 우리를 데려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냥 불안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모든 동기 이런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좌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아주 미묘한 것들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동남아에 있는 어느 국가로 선교사 어느 단체에서 선교사 지도자들을 모아놓은 수련회를 열었습니다. 제가 갔습니다. 가서 집회를 인도하는데 어느 여선교사님이 자꾸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자기를 좀 개인적으로 상담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주 시니어선교사이고 그 모임의 대표인 말하자면 최고 순열의 사모님이었습니다. 굉장히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선교사쯤 되시는 사모님이 왜 나한테 상담을 받으시려고 하나? 그리고 그냥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아무개 선교사입니다. 왜 제가 좀 드릴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데 왜 나를 안 만나주십니까? 제가 그 방으로 올라갈까요?” 그러는 것입니다. 알았다고 내려갔습니다. 오후였습니다. 앉아서 차를 마셨습니다. 사모님이 자기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는 스무 살 때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났고 그때 자신이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다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남아에 있는 어느 국가의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다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자기는 온 마음을 다해서 불꽃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지금쯤 됐는데 정말 자기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기 마음속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캠퍼스를 누비면서 선교하고 그래서 결국은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시니어선교사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는데, 지금은 다 은퇴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뜨거운 열정이 마음속에 사라지고 그리고 그냥 힘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한 생각이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고 했더니 이것 때문에 사실은 김 목사님을 뵙고 싶었다고 하면서 나의 이런 영혼의 상태를 가장 확실하게 분석하고 처방을 내려줄 목사님이 김 목사님밖에 없을 것 같아서 처음 털어 논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그랬더니 말씀드리기가 너무 죄송하다고 하면서 전도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했는데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좀 그러신가? 아니 구원을 하시려면 다 구원해 버리시지, 구원해 주시지 그 불쌍한 사람들을 믿으면 구원해 주시고 안 믿으면 지옥의 불에 던져버리시고 왜 그렇게 하실까? 그리고 도대체 그 지옥은 왜 만들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막 떨어져서 불속으로 들어가게 왜 하실까? 사랑의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실까? 그리고 아니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면 확확 도와주셔서 말만 하면 사람들이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그렇게 하게 해 주시지 그렇게 캠퍼스를 누비고 몸부림치고 애를 써도 안 믿게 만드시고 또 핍박은 핍박대로 있고 왜 이렇게 하실까?’ 그러더니 마지막 결론은, “목사님 제 영혼이 아주 심히 잘못돼 있지요? 제 인생에는 빠져본 적이 없는 영혼의 침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맞지요? 목사님.” “사모님, 정신 차리고 제 얘기 들으세요. 영적 침체에 빠진 것 아니고 사모님 신앙이 변질된 것도 아닙니다.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빨리 한국에 가셔서 정신과 가셔서 갱년기 전공하는 의사하고 의논하시고 약 몇 알만 먹으면 낳습니다.” 이분이 제가 아주 굉장히 영적인 목사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대답을 해 줄 것이라고 기대를 했는데 한방에 탁 쳐서 갱년기 우울증이니까 가서 약 먹고 치료받으라고 하니까 충격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남편은 선교사인데 아주 보수적인 교단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루 일과가 너무 힘들어서 텔레비전보고 있으면 저녁때 들어와서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런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탁 끄면서 “잘 한다. 선교사라는 사람이 드라마나 보고 앉아있고 은혜가 떨어져도 한참 떨어졌구나. 저걸 어떻게 해? 기도를 해야지 이 사람아.” 그리고 들어가서 문을 쾅 닫는다는 것입니다. 너무 외롭고 서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그러니까 영화를 실컷 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때는 비디오 디스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비디오플레이어 하나 사서 보내드릴까요? DVD 플레이어 하나 사서 보내드릴까요? 사모님 하세요. 하고 싶은 것 하세요. 그런데 그냥 보지 마시고 그 영화를 한편 보고 느낀 소감을 쓰세요. 제가 우리 신문에 실어드릴까요? 정기연재로?”
우리는 너무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거짓과 허위 속에서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한 이런 이야기는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일정한 나이가 되지 않으면 못 깨닫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이야기를 동료 목사님들이 있는데서 했습니다. 그 중의 목사님이 한분이 사모님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감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나한테 그러는 것입니다. “형님, 나는 형님이 그렇게 사람을 보는 시야가 깊어진 줄 몰랐습니다.” 그러한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분 말씀 안하지만 유사한 상황을 경험하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뇌부터 시작을 해서 호르몬이 나오는 컴퓨터 기능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거기에 의해서 다 분비액을 조절합니다. 등뼈가 약간만 틀어지면 조절기능이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에 나오는 분비액들 중에서 눈물방울이라고 하면 말도 안 되고 그냥 0.00몇 그람만 덜 나와도 깊이 우울해지거나 정신이상 상태를 보이며 그렇게 우울해집니다.
젊었을 때는 그걸 모릅니다. 제가 10년 전까지 50대 초반까지 평생소원이 입원 한번 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얀 시트에 누워서 사람들에게 연약한 사람으로서 문병을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얼마나 건강했을까요? 나는 이것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힘이 솟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해 안 가는 게 월요일 날 쉬는 목회자들 그리고 새벽기도 안 나오는 목회자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제가 말하자면 강렬했느냐 하면 새벽기도 하루도 안 빠졌습니다. 주일날은 제가 안 나왔습니다. 워낙 설교를 많이 하니까. 방송실에 전화했습니다. “야, 박 목사 새벽기도 안 나왔는데 집에 전화해 봐라.” ‘드르륵’하고 잠결에 전화가 옵니다. “왜?” “박 목사님 지금 아프시답니다.” “전화는 받디?” “살아있네. 나오라고 해.” 나왔습니다. “박 목사, 너 목사인데 어떻게 새벽기도를 안 나왔냐?” “제가 몸이 아파서.” “나왔잖아. 지금 걸어서. 아니 죽을병에 걸리지 않은 이상 나와야하고 또 아프다고 하더라도 네가 만약에 새벽기도를 나오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지면 교인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겠어? 담임목사도 어저께 8시간을 설교하고 오늘 여기 나왔는데 정신이 그렇게 해서 되겠니? 기도하고 들어가. 다음엔 절대 빠지지 마.” 그러니 부교역자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새벽 6시에 일어나고 아침 8시에 심방을 하러가서 마지막집을 심방을 하고 끝내니까 새벽 2시 반입니다. 부목사가 하도 “왜 안 와?”하고 사모한테 전화 오니까 “나 심방중이야.” 그러는데 새벽 1시였습니다. 전화기로 다 들립니다. “거짓말 하지 마.” 그런데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그 후에 십년동안 11번을 입원하고 아홉 번을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몸무게가 18키로가 줄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그 다음에 연약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안의 원인은 결국은 염려이고 염려는 결국 자기사랑에서 오고 그런 염려는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결핍된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마음이 결핍된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모님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내 이야기를 듣고 너무 황당해 하는 것입니다. “아직 몰라서 그렇지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가서 정신과 의사를 만나서 상담을 하십시오.” 실제로 선교사들을 많이 만나보면 남성선교사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 많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여성선교사들은 열 명 가운데 2명 정도는 정상이 아닙니다. 치료를 요하고, 20명중의 1명 정도는 빨리 치료를 안 하면 정신과적인 질환으로 번질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남성 선교사들이 너무 모릅니다. 의학적인 지식이 너무 없고 그 다음에 인간에 대한 배려나 이런 것들도 모자랍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나이가 들면 반드시 그런 게 오니까 그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치 여성이 나이가 들면 폐경이 오는 것처럼, 폐경이라는 것도 별로 좋은 말이 아니고 그래서 어떤 분은 완경이라고 하는데 끝납니다.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런 정신이나 이런 많은 것들이 젊었을 때의 그 젊음 같지가 않고 끝납니다. 힘이 사라집니다. 그럴 때 온갖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 불신앙이나 영적인 시각에서 그것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주사 한 대 맞고 약 몇 개먹으면 금방 낫습니다. 몇 달만 치료하면 금방 나아집니다. 그런데 방치하면 제가 아는 선교사 한분은 사모님이 우물에서 투신자살해서 죽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불신앙이니 하는데 그게 아니라 제때에 치료를 안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그렇게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보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지금 나오지는 않지만 시인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고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쪽 지역의 선교사이기 때문에 너무 잘 아시겠는데 우리 korean context에 의해서는 양이라는 짐승이 매우 긍정적인 짐승입니다. 누군가에 손해를 입히지 않는 온순한 그런 정도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어서 양이 더럽지만 않고 깨끗하다면 싫어할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는 양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중동 선교사가 자기도 처음 들어보는 속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돌아가서 중동사람들에게 확인을 해 봤더니 내 말이 맞았다고 나한테 연락을 보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라크 사람들이 무어라고 욕을 해도 다 참는데 한 가지 욕에는 절대 안 참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양 같은 놈, 거기서 양 같은 놈이 하는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분별력 없고 더럽고 자기처신도 못하는 머리도 나쁜 우리로 말하자면 개자식에다가 닭대가리 합친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가 집회를 듣다가 김 목사가 오버하는 게 아닐까 나는 중동에서 20년을 살았는데 저 속담을 못 들었는데 그리고 가서 원주민에게 물어보니까 정확하더랍니다. 그 속담이 있고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절대 안 참는 욕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양이 아주 긍정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양이라고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어린양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희생에 국한에서 희생당할 때에 대들고 항거하는 게 아니라 조용히 주인의 손에 자기를 맡기며 죽임을 당하는 힘없는 어린 양의 한 비유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목시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이 가지고 있는 전체의 그림을 예수님에게 적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비유를 해석할 때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바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그리고 있는 양은 어떤 것일까? 이런 것입니다. 양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한 근시안입니다. 그래서 멀리 보면 눈 나쁜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이듯이 잘 안 보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무리를 지어서 항상 앞에 있는 양들을 보면서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지 일단 양이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면 지독한 근시안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찾아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돌아온 양의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양이라고 하는 것은 또 고집도 셉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에서 뭐라고 나옵니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너무 많은 곳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나아가서는 더 넓게는 인간 그 자체를 양에다가 비유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수많은 짐승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성경은 우리 인간을 양에다가 비유할까?
그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모든 짐승들이 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빠른 다리를 가지고 있든지 치타 같은 것들은 110km를 달린다고 하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빠른 발이 있든지 아니면 물어뜯는 엄청난 이빨이 있든지 아니면 기린처럼 목이 길어서 미리 적군이 오는 것을 알아본다든지 아니면 말처럼 빨리 달릴 수 있는 게 있다든지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한다든지 스컹크처럼 방귀를 뀌어서 다 도망가게 한다든지 아니면 고슴도치처럼 따가운 몸으로 자기를 감싸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한다든지 다양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한 짐승이 양입니다. 거의가 아니라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양이 그럴까? 결국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은 양을 지으실 때부터 처음부터 독립해서 살기 위한 짐승이 아니라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고 인간의 돌봄을 받으면서 살게끔 창조된 존재가 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양에다가 비유하신 것입니다. 양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이빨이라든지 뿔이든지 빠른 다리라든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인간에 의해서 보호를 받아야 될 존재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야생의 양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야생의 양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 동물입니다. 양이 짐승들을 피해서 포식자들을 피해서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갑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먹을 것이 없습니다. 안전한 대신. 그러니까 모험을 무릅쓰고 포식자들이 올라올 수 없는 가파른 곳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수없이 추락사를 합니다. 그래서 죽습니다. 지금도 산양은 전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의 동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인간은 모든 면에 있어서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창조된 모든 동물의 힘을 합해도 인간의 지능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심지어 엊그제 신문에 보니까 15톤짜리 상어를 낚아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이미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동물인데 1억 5천만 년 전에 있던 상어가 잡혔다고 해서 엄청난 해외토픽이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있고 잠수함을 11000미터나 되는 해저에 내려 보낼 수도 있고 우주를 로켓을 쏘아서 별사이를 오고 갈 수 있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고민이 많은 존재이고 그래서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은 능력이 뛰어나지만 당신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안 해도 되는 어떤 것을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될 때부터 그렇게 살도록 된 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추함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언제인가하면 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살 때 그때 인간은 기도를 많이 하게 되고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 그 자체가 의존의 감정입니다. 의존하지 않고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시인이 실제로 시인은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춥고 배고픈 날이 많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제사장 이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까지 얻어먹습니다. 그렇게 곤궁한 시절에 자신과 자신의 일행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을 이 시인이 깊이 경험하면서 신앙이 어릴 적에 그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주님이 나를 돌보신다고 하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당신이 나의 목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을 놀라운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어제도 설명 드렸지만 조그만 주먹만 한 개를 하나 키우면서 참 많이 배웁니다. 그래서 엊그제는 신문에 수필을 하나 실었는데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이 아이가 난지 한 달 되었을 때 7월1일 날 우리 집에 입양이 되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두려움과 염려 불안으로 떨고 있는 온순한 모습입니다. 엄마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애견센터 왔다가 거기서 분양되어가지고 우리 집에 왔습니다. 분명히 형제가 있고 부모가 있을 텐데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뀐 환경에 오니까 그림처럼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뻐해 주니까 그 다음에는 우리 집이 참 화목한 가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기를 안전하게 생각하니까 요새는 우리들이 자기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줄 아는 것 같습니다. 온갖 일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예뻐해 줍니다. 먹을 것도 주고 예뻐합니다. 얘를 데리고 애견카페에 갔습니다. 애견카페는 뭐냐 하면 커피숍인데 뒤에 뒤뜰이 있습니다. 온갖 개들이 와서 거기서 기저귀를 차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개들이 변을 보니까. 거기 커피 한잔을 먹고 개먹을 것을 사 가지고 들어가면 풀밭에서 뛰어 놉니다. 그런데 거기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난지 그때 네 달밖에 안 된 주먹만하 개인데 덩치가 자기 세 배 네 배는 되는 개한테 가서 집적거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큰 개가 슬슬 피합니다. 그러다 화가 나서 덤벼들면 막 도망을 가면서 놀립니다. 한마디로 뭘 거기서 느끼느냐 하면 개새끼인데도 집안에서 충분히 사랑을 받으니까 구김이 없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우리 집 사람이 산책을 나갔답니다. 개 중에서도 굉장히 맹견 중의 하나가 불도그입니다. 불도그라는 뜻이 소를 죽일 수 있는 개라고 해서 불도그입니다. 외국 사람들은 절대 안 키웁니다. 너무 커다란 사고를 칠 위험성이 있고 영리할 뿐만 아니라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 불도그를 만났는데 불도그를 가서 막 무는 것입니다. 불도그가 덩치 큰 게 깨갱거리면서 도망을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람이 “얘가 왜 이러지?” 그러면서 얘는 개 종류가 무어냐고 하니까 불도그라고 합니다. “사나운 불도그이네요. 그런데 얘가 왜 자구 도망을 가지요?” 그러니까 “우리 불도그가 아직 어려서 그래요.” “몇 달 되었는데요?” “이제 세 살밖에 안 됐어요.” “우리 강아지는 여섯 달 됐는데요?” 집안에서 충분히 사랑을 받으니까 모든 개들이 졸로 보이는 것입니다. ‘내 뒤에 우리 주인이 있어서 이런 문제쯤은 해결해 줄 거다 까불어?’ 사실 불도그가 한번 물으면 뼈까지 아작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거기서 참 많이 느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를 포함해서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구김 없는 가정에서 한없는 사랑을 받으며 더군다나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받으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정말 죽도록 더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못 살았습니다. 항상 결핍이 있었고 그리고 부모님도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못 삽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자신감이 있고 우리 개처럼 겁도 없고 뭐든지 하면 될 것 같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 개를 보면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얼마나 구김 없이 저렇게 가끔은 무모해 보일 것같이 저렇게 안하무인 그렇게 구김이 없이 개도 그런데 하물며 인간이 어떨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부모 그런 집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떵떵거리고 그렇게 살아보라 이것입니다. 여러분 선교사역하다가 어려움이 있어서 돈이 한 5천만이 필요하게 됐다고 할 때 ‘아빠, 부쳐’ 그러면 그 다음날 보내주시는 선교사들이 여기서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렇게 못 삽니다. 우리 살면서도 부모님의 신세 거의 안 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결국은 그런 구김이 남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하나가 다윗입니다. 아버지의 편애, 그 다음에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신앙이 없는 자식들, 심지어 아들놈 한 놈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덤벼드는데 자기 뱃속에서 낳은 새끼입니다. 딸이 강간을 당했는데 강간범이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겪으면서 사실은 마음이 전부다 찢어지고 무너져야지 마땅한데 이 사람은 구김이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I shall not want.”, “나는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그런 부모를 못 만났어도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충만히 받는 사람들은 이렇게 구김 없이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살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다윗이 양을 그렇게 풀밭으로 데리고 가서 이끌었듯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면서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구나,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의지하며 살 이유가 있구나 하고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번역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still waters’ 그 다음에 ‘quiet waters’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괜찮은 번역입니다. 그런데 쉴만한 물가로는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번역도 아닙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쉴만한 물가’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말로 ‘알 메 멘호츠’ 라는 단어입니다. 직역을 하면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 그런 뜻입니다. 쉴만한 물가가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 제가 책을 읽어보니까 그 책에 양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는 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은 물을 먹는데 힘차게 흘러가는 물은 양이 절대로 못 마신다는 것입니다. 양에게는 본능적으로 물에 대한 엄청난 공포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흘러가는 물은 못 마시는 것입니다.
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어렸을 때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방학 때에 시골에 있는 우리 집에 내려갑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내려가는데, 여름에는 강둑 위에 서서 수많은 동네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흘러내려가는 강물을 봅니다. 장마철에. 왜냐하면 그때 우리 전국 산하가 지금 북한 민둥산하고 똑같았습니다. 하나도 나무가 없었습니다. 특정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다 잘라가서 불을 땠습니다. 다 잘라가서 불을 때고 땔게 없으니까 사람이 곡괭이를 가지고 올라가서 그 나무뿌리를 캐내서 그것을 볕에서 말렸다가 그것을 톱으로 잘라서 그것으로 불을 땠습니다. 그러니까 온 산이 전부 다 민둥산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유가 있느냐 하면 화전민들이 불을 질러가지고 감자나 옥수수 같은 것을 심는 것입니다. 너무 가난하니까 어떻게 하든지 산을 계속 훼손하면서 감자 이런 것들을 심어서 산 전체가 밭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웬만한 높이의 산은. 그러니까 비가 쏟아지면 거기서 흙탕물이 어마어마한 토사가 쓸려 내려오면서 수많은 이재민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물들이 모이면서 산이 물을 못 머금으니까 그 전부다 하류로 내려 보내서 개울이나 강이 넘치는 것입니다. 둑 시설 같은 것이 제대로 안 되어있으니까 집이고 뭐고 한꺼번에 쓸려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삽시간에. 우리는 거기서 똑똑히 봤습니다. 소? 소가 떠내려 옵니다. 그런데 헤엄 잘 칩니다. 물론 언젠가 가서는 지치겠지만 절대 물에 안 빠지고 헤엄 잘 칩니다. 돼지? 못 칠 것 같습니까? 헤엄 잘 칩니다. 그 다음에 고양이? 헤엄 잘 칩니다. 개? 개헤엄 잘 칩니다. 그 다음에 오리? 오리는 제세상이고, 닭도 안 빠져죽습니다. 토끼도 물에 쉽게 안 빠집니다. 그런데 강원도였기 때문에 양을 기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양은 못 봤는데 양은 엄청난 길이의 털이 있기 때문에 물속에 들어가면 이 자체가 전체가 물 덩어리가 되어가지고 밑으로 잡아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가라앉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양은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껴도 흘러가는 물은 못 마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의 약점을 아는 목자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얕은 개울들을 돌멩이나 풀뿌리 같은 것들을 캐 가지고 와서 댐을 쌓는 것입니다. 댐을 쌓으면 물이 오다가 딱 가둬지면서 흐름이 멈추게 됩니다. 그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메 멘호츠’라고 하는 히브리단어이고 그러니까 이것이 움직이지 않는 물, 그래서 잔잔한 그렇게 번역을 했다면 오히려 날 뻔 했습니다. “잔잔한 물 가장자리로 인도하시는 도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단일한 것이지만 그것을 적용시켜서 우리를 인도하심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도 일종의 오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마다 다른 방법으로 그의 체질을 아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서로 다르게 인도하시는 것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우리들은 인격적으로 우리를 대해주시는 하나님의 높은 섭리와 경륜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목회를 하다가 보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강하게 이야기해야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도 있고 이런 많은 고려 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오신 것처럼 또한 이 시인을 그의 마음의 결을 따라서 하나님이 인도해 오신 것을 보면서 아버지에게도 못 받았던 사랑, 아내에게도 못 받았던 사랑, 자식에게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런 배려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면서 그렇게 자기를 인도해 온 것을 생각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라는 그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염려와 불안, 근심, 걱정 그런 것들을 깊이 쌓아 놓고 살아가지 말고, 그런 것들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보고 그것이 만약에 자기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자기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른다면 뭐 그렇게 무서워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잠시 이 세상에 살다가 힘이 있는 동안 주님을 섬기다가 가는 것인데 뭐 그렇게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시편 23편의 2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 주님을 의지하고 염려와 근심과 불안을 버리고 우리 주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면서 사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