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4._무슬림권선교사수련회 1
무슬림권 선교사수련회 1
녹취자: 백지영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모든 소개가 그렇지만 분에 넘치는 소개를 해주셨는데, 오늘, 내일인데 저녁시간에 우리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가 오늘과 내일에 걸쳐서, 사실은 3일을 해야 되는데 제가 이틀밖에 없어서 이틀로 농축을 해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평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올 때 선교사님들 눈물을 확 쏟아야 되겠다 그런 결심으로 오지는 않았습니다. 늘 눈물을 많이 흘리시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되찾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중에서 가장 재미없고 지루한 성경책이 있다면 어디일까요? 레위기입니다. 그래서 이 레위기는 래(來) 위기(危機)입니다. 성경읽기의 래(來) 위기(危機)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5장의 ‘죽고’, ‘죽고’하고 그 다음에 마태복음의 ‘낳고’, ‘낳고’는 몇 장 안 되기 때문에 넘어가는데, 레위기는 40장이나 되는 긴 장(章)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레위기는 모세오경을 산이라고 묘사한다면 창세기는 밑의 산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해서 레위기가 산의 맨 꼭대기입니다. 레위기가 꼭대기이고 그 다음에 민수기, 신명기 평지로 내려가면서 이제 여호수아서부터 진짜 평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모세오경을 산에다가 비유하고 그중에 가장 재미없고 지루한 책인 레위기를 당신은 오경의 산의 정상이라고 부르느냐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레위기는 출애굽기의 연장입니다. 출애굽기가 1장부터 24장까지가 전반부고 25장부터 40장까지가 후반부인데, 출애굽기의 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는 전부 다 무슨 얘기냐 하면 성막을 짓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레위기는 27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성막에 관한 것을 상세하게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재미가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되려면 무슨 사건이 있어야 되는데 여기는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레위기가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레위기는 무엇을 다루느냐 하면, 어떻게 불결한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출애굽기 후반부에 나오는 성막의 이야기에 이어서 어떻게 그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나는가 하는 이야기를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게 다시 1부와 2부로 나눠지는데, 1장부터 16장까지는 제사와 의식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다음에 17장부터 마지막 27장까지는 생활과 윤리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큰 그림을 그려놓고 보면, 일단 이 레위기가 확실히 우리에게 재미는 없지만 모세오경에서 가장 중요한 그 무엇을 다루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를 챌 수가 있는 것이지요.
자, 이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창조하시는데, 사람들은 흔히 기독교 초기부터 시비를 걸었던 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한다 이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세상이 필요해서 하나님이 창조했다면 세상이 없었을 때는 하나님이 뭔가 모자라시는 분이었고, 또 만약에 필요가 없는데도 세상을 창조하셨으면 쓸데없는 일을 하셨으니까 세계가 필요하든 안 필요하든 이 세계 창조와 하나님의 존재는 모순이 된다는 것으로 기독교를 공격을 많이 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훌륭한 답을 우리는 어거스틴에게서 듣게 되는데, 어거스틴은 이 하나님의 창조를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지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필요하셔서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만약에 필요했다고 하면 하나님이 부족한 것이었을 테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세계를 왜 창조하셨느냐? 이것은 마치 김남준 목사가 책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책을 쓰는데 심혈을 기울여서 씁니다. 초창기 때에는 빨리빨리 쓰는 것을 자랑을 했는데, 자랑했다기보다는 빨리빨리 많은 것을 쓰자 했는데 요새는 심혈을 기울여서 씁니다. 우리 선교사님들 중에도 책을 내신 분들이 있지요. 한번 책 내시면 몇 교쯤 보십니까? 책을 한번 내시면. 보통 작가들이 4교, 5교? 좀 성실하신 분들은 6교정도 보시는데 저는 20교를 봅니다. 그러니까 같은 책을 원고를 완성한 다음에 교정을 보는 것이 20회 정도 된다 이것이지요. 많으면 25회 정도. 그런데 그 책은 어쨌든 저의 머릿속에서 나왔습니다. 저에게 그 책이 필요할까요? 안 필요할까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책이 출간됐을 때는 이미 제 관심사는 딴 데로 가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쓰는 것은 내가 그 책이 필요해서 쓴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정신의 산물인 것처럼, 이 세계는 하나님이 이 세계가 필요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넘치는 정신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듯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아주 뛰어난, 쉽게 이야기하면 부족한 것이 없으신 충만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계를 만드신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세계를 만드셨는데, 세계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나 하나님은 원래부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이므로 나는 시간과 공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만약에 이렇게 해 버리게 되면 시간과 공간 안에 살아가는 인간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교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놓으시고 인류를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특별히 인간과 만날 장소를 선택하십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막콤’이라고 합니다. 장소를 선택하십니다. 첫 번째 장소가 어디였을까요? 에덴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거기에서 인간과 특별히 만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인간들과 교통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면서도 시간과 공간 안에 계신 것처럼 말씀도 하시고 교제도 나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몸으로는 땅위에 살고 있지만 정신과 영혼으로서는 그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뭔가를 공급받으면서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게 하려고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그냥 쉬운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돌아가 보면, 처음에 인간이 창조될 때 보면 인간이 어떤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흙’, 히브리어로 ‘아파르’라고 하는데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티끌입니다. 티끌을 가지고, 하나님이 먼지를 가지고 사람을 빚으십니다. 그래서 몸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후’하고 숨을 불어넣으시는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불어넣는 과정이 아니라 창조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창조의 행위로 영혼을 만드셔서 육체와 만나게 하심으로 이게 히브리말로 ‘레피쉬 하야’라고 하는 ‘리빙 소울(living soul)’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 영어에서 ‘소울’(soul)은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데얼 이즈 노우 소울 인더스트리트.’(There is no soul in the street.)하면 ‘길에 한 사람도 없다.’, 소울이 그렇게 쓰입니다. 그런데 그게 결국은 히브리어를 번역하면서 생겨난 영향입니다. ‘레피쉬 하야’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생명’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게 아니라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과 육체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시는 하나님과 시간과 장소 안에 있는 하나님만큼이나 차이가 큽니다. 이 두 개는 서로 다른 실체인데 그 실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육체는 땅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고, 영혼은 하늘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천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우스와 플라톤 이후로부터 이제껏 이르기까지 철학사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를 소크라테스부터 수없이 얘기했지만,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최종적인 답을 들려준 철학은 없습니다. 아직도 그것은 모릅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뭐냐 하면, 인간은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질로만 되어 있고 나머지 정신은 물질의 반영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또 헤겔처럼 인간은 세계 전체의 한 부분이고 부속품일 뿐이고 그리고 그 전체가 굴러가는 속의 한 요소일 뿐이라는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 인간은 독자성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알고 나면 확실한 게 인간의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은 딱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 자원의 부족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원이 떨어지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자연사를 한다, 자연사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지만, 사람이 그냥 오래 살고 나이 많아서 죽는다 할 때 결국은 육체의 자원이 동나는 것입니다. 영혼은 늙지도 않는데, 그래서 결국은 육체의 자원이 모두 동나서 죽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뛰어다니고 걸어 다녀도 문제가 안 됐는데 나이가 들면 자전거를 타야 되고, 시내버스 타고도 잘 다녔는데 이제 택시 안 타면 너무 힘들고 그런 게 생기는 게 결국은 뭐냐 하면 육체의 자원이 점점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자원이 부족한 것과 그다음에 영적인 자원, 천상의 자원이 부족한 것 이것 두 개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약 14조원이나 가지고 있었던 어마어마한 회사의 회장이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졸지에 그 자녀들은 10대에 몇조씩 유산을 받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지상의 자원으로서는 그냥 하루에 몇십억씩 써도 죽을 때까지 써도 못 쓸 정도의 돈이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부족합니까? 천상의 자원이 고갈이 된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은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7시 30분에 모였습니다. 지금 8시 30분인데, 두 명이 자살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34분에 한 명씩 자살합니다. 왜요? 자살한 사람은 지상의 자원이 떨어져서 자살한 게 아니라 천상의 자원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원의 문제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그렇게 창설해 놓으시고 하나님이 아주 풍족하게 주십니다. 그래서 그 땅과의 온전한 평화 속에서 땅은 사람을 위해 기꺼이 먹을 것을 내고, 인간은 그것을 먹으면서 부족한 것이 없이 살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죄가 들어오지 않았어도 문명은 건설되었겠지요. 아주 아름다운 문명이 건설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문명하고는 비교 안 되는 아름다운 문명이 건설되었겠지요.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인간의 죄 때문에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추방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두 번째 인간과 만날 장소를 만드시는 이야기를 출애굽기, 레위기가 그 이야기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성막입니다. 성막은 이동식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아직 그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동하는 동안에도 항상 그 장소를 정하여 거기서 특별히 하나님이 장소를 지정하여 거기에서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교제하시면서 그들이 하늘의 자원을 충만하게 받고 땅의 자원을 약속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신의 온 정신과 영혼으로 의식하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이 땅 위에 살아가라고 하나님이 성막을 만드신 이야기가 여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평화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것입니다. 문제가 있는데 뭐냐 하면, 인간이 불결합니다. 출애굽기 40장 34절과 35절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자,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4-35)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대신해서 사람들과 만날 장소를 성막으로 선택하신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해 계십니다. 너무나 큰 영광과 거룩함으로 가득 차서 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그래도 거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던 최고였던 모세조차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 죽음을 당할까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모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만날 장소를 만들어 놓으셨으면 인간이 거기 들어가야지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데 들어갈 정도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사 제도를 이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통해서 우리 불결한 죄인들을 그 제사의 피로 깨끗이 씻으셔서, 비록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깨끗이 씻으셔서 잠깐 동안이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거룩함과 정결함이라는 두 개념이 레위기에 들어옵니다. 이 거룩함은 지위입니다. 정결함은 상태입니다. 거룩함의 반대는 속됨이고, 정결함의 반대는 부정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게 무슨 문제가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지위를 얻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제 더 이상 속된 백성이 아닙니다. 속되게 살면 안 됩니다. 이 거룩함에 어울리는 것은 정결함입니다. 정결한 백성이 되어야 되는데, 지위는 거룩한데 정결하게 못 살고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비록 거룩한 백성인데도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그래서 정결케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레위기가 아주 많은 교훈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거룩한 지위에 걸맞은 정결함을 가지고 그렇게 깨끗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제사와 의식을 통해서 보여주었고 그것이 결국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성취되고, 지위를 통해서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면 성화를 통해서 정결한 백성이 될 때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이제 마지막에는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됐을 때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이 완전히 하나님과 만나는 상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영화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기의 신국론에서 인간을 네 상태로 분류를 합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 ‘뽀세 빼까레’라고 하는데 라틴어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 그다음에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논뽀세 논뻬까레’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 거듭나고 구원받은 다음에는 ‘뽀세 논뻬까레'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상에 들어간 다음에는 '논뽀세 뻬까레'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이렇게 넷으로 구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이 성막을 만드셔서 레위기에 이 거룩함과 정결함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지루하도록 나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바로 어떻게 불결한 백성이 다시 정결해져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하는 규례들을 여기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아주 까탈스러운 규칙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도저히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규칙들이 아주 엄격하게 나오고 심지어 죽음까지 선고가 됩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 있느냐 할 때, 어떤 학자들은 아주 극단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거기엔. 그럼 뭐냐? 하나님이 일부러 까다롭게 만들어놓으려고 해서 만드신 것이다. 그럼 왜 그렇게 하시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반드시 케어풀니스(carefulness)가 있습니다. 주의 깊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경외의 표시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린 애가 물 좀 달라고 하면 이렇게 주지만, 아주 높은 어른이 달라고 하면 뭘 받치고 뚜껑도 덮고 그리고 살살 갖다 드려야 됩니다. 그리고 남편이 물 달라고 하는데 주다가 탁 내려놓았는데 물을 쏟았을 때는 문제가 안 되는데,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데, 그 높으신 어른한테 그렇게 하면 그것은 굉장히 실례입니다. 만약 그 물을 가져오라고 한 사람이 왕일 경우에는 그것은 사형입니다. 왜요? 주의 깊지 않은 것은 멸시의 표시입니다. 그렇게 학자들이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이렇게 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것을 하나님이 계시해 주실 때 하나님이 세세하게 드신 것은,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 가나안 땅 사람들의 문화를 좇아서 융합되지 않도록 분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섭생과 위생에 관한 규칙들은, 바이러스의 정체도 모르고 균의 정체도 몰랐으니까 하나님이 슬기롭게 어떻게 해서 전염병에 감염이 안 되고 어떤 음식을 먹음으로써 우리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을 규례를 주셨다는 것이고, 마지막에 세 번째는 뭐냐 하면 그 까다로운 규례들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상기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거룩하신 분이구나.’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그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지위인가 하는 것을 생각을 하면서 거기에 걸맞게끔 정결한 사람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그렇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레위기에 나오는 명령들을 어디까지 따라야 될 것이냐? 하나의 율법 안에 크게 세 가지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입니다. 시민법은 당시의 사람들의 법적 생활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다음에 의식법은 지금 말씀드린 바로 이 거룩한 백성의 정결한 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도덕법이 십계명입니다. 이 두 가지 법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보고, 이 도덕법은 한시적이지 않은 항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따라야 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 모든 법들을 지키는 동기가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자원이 없이는 도저히 이런 규례를 지켜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의 깊은 결심을 할 수조차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는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아, 우리가 이것을 모두 지킬 수 없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면 이제 이게 평화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보면 무슨 말씀이 나오느냐 하면 땅에서 복을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번 더 보겠습니다. 26장 3절부터 5절까지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그것 이후에 뒤에도 죽 나오는데, 결국 땅과 그다음에 사람과 하나님 이 세 관계는 삼각형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토대가 되고 그다음에 땅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삼각형인데, 이 삼각형의 내면이 모두 사랑으로 꽉 차 있을 때 하나의 사랑입니다. 땅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다른 사랑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인간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고 땅과의 평화를 이루고 사람과의 평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샬롬입니다. 신약에서는 에이레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샬롬’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스라엘에 가시면 빵집에 가지 않습니까? 빵집에 가서‘빵을 주세요.’라고 요청을 합니다. 히브리말로 ‘텐리 샬롬’ 그럽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빵집에 가서 ‘나에게 샬롬을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빵집 주인이 빵을 한 덩어리 모두 줍니다. 그게 샬롬입니다. 그런데 혼자 살아서 그것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텐리 핫지’라고 이야기하면 절반 자른 빵을 줍니다. 그래서 샬롬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개념에서는 ‘찌그러지지 않은 온전한 것’, ‘호울네스’(wholeness)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홀리네스’(holiness)가 ‘호울네스’에서 옵니다. 결국은 그것이 샬롬입니다.
그러면 이 샬롬이 뭐냐 하면 기본적으로 평화입니다. 평화인데 정신과 영혼만의 평화가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기반으로 하되 삶 전체를 통전적으로 아우르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이 샬롬의 번역으로 잘 맞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라는 개념은, 로마사를 보면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정복자나 군주를 가리켜서 ‘에이레네 포이메놈 포이메노스’라고 불렀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평화를 만든 사람’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이야기하는 평화는 뭐냐 하면,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로마의 강력한 군사적 위력 앞에 모든 자디잔 나라들이 더 이상 다투지 않는 게 그게 팍스 로마나입니다. 그러니까 그 팍스의 개념이 그런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힘으로 누르는 그런 평화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했는데, 그래도 우리 말 중에서 가장 가까이 다가간 단어가 ‘안녕’입니다. ‘안녕’이 ‘바이바이’(bye-bye)가 아니라, ‘어르신,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저녁 잘 먹고 아침까지 건강했느냐?’서부터 시작을 해서 ‘간방에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했느냐?’, ‘먼 데서 자식이나 친척들에게 나쁜 소식은 오지 않았느냐?’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상태가 안녕이라는 말속에 녹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샬롬에 대한 가장 어울리는 말이 안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안녕이든지 평화든지 우리에게 익숙한 게 평화니까 샬롬을 평화로 번역을 하고 보면, 그런데 여기서 이제 나오는 게 레위기가 나올 때는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을 차지하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미래를 바라보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주셨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보니까 어땠습니까? 포도를 꿸 채에 꿰 가지고 두 사람이 들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완전히 뻥이다 그러는데, 지금도 에스골 골짜기에 가면 한 송이에 6kg짜리 포도송이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게 과장은 좀 있었을지 모르지만 전혀 우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상당한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라 이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그런데 여기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포도열매를 따고 그 다음에 추수를 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중간에 곡식이 끊어지는 일이 없이 계속 곡식이 생산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굉장히 어려울 때를 보릿고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마지막 추수할 때부터 첫 번째 수확물을 거두기까지의 대책이 안서니까 그때 사람들이 수없이 굶어죽는 것입니다. 춘궁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없이 계속 해서 땅이 산물을 내고, 그 다음에 산물이 끝나면 파종을 할 수 있게 되고, 거둔 수확물을 먹으면 또 열매를 맺게 되고 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리라는 게 배고프지 않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조건으로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이냐 하면, 너희가 이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면 땅이 이렇게, 이렇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땅과의 평화입니다. 맨 처음에는 이 땅이 인간에 대해서 수동적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땅은 기꺼이 인간의 지배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고,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이 땅을 경작하고 다스리면서 그러면서 선한 임금이 나라를 통치하듯이 자연계에 있는 질서들을 다시 그 질서를 더 좋게 질서를 짓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 그랬습니다. 그것은, 창조하신 게 매우 좋았더라 그래서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면 인간에게 굳이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버려 두시면 됩니다. 그것은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사물의 현실태와 가능태가 다 하나님에게는 한꺼번에 보이면서 ‘심히 매우 좋았더라.’ 하나님의 판단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창조된 세계도 물론 아름다웠지만, 이 아름다움은 가능태로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이 많이 있어서 인간의 노동을 보태고 지혜를 보태면, 그러면 그 아름다움이 더 놀라운 질서를 드러내면서 더 아름다울 수 있는 여지를 그 안에 남겨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인간의 노동의 놀라운 가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오늘날 가치관은 잘못돼 있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일 조금하고 돈을 많이 받는 직장을 찾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라, 노동을 보태면서 이 세계를 하나님이 가능태로 주신 아름다움을 현실태로 바꾸는 일들을 위해서 자신의 노동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선교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노동을 보태셔서 그래서 가능태로 있었던 인간들을 현실태로 나타나도록, 빨리 가면 빨리 나타나고 열심히 하면 더 빨리 많이 나타나게 하셔서 그래서 만드시는 것입니다. 땅에게 그런 가능성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집니다. 그리고 운명공동체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땅이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왜? ‘제발 나 좀 구해 달라.’ 뭐라고 말하냐면, ‘너 때문에 앰한 내가 저주를 받지 않았느냐?’ 고통을 받으면서 사람의 몸이 구속에 이를 그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땅에 대한 사상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결국은 이 하나님과의 샬롬 속에서 땅과의 샬롬을 가지고 살면 인간의 지위가 땅이 인간을 의존하던 데서, 이제 반대로 인간이 땅을 의존하는 관계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했을 때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게 뭐냐 하면, 네가 땀을 흘리고 노동을 해야지 겨우 먹을 것이고 네가 애써서 농사를 지어도 가시와 엉겅퀴가 무성하게 될 것이라는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면서, 결국 그때부터 인간은 지상의 자원의 궁핍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를 가지고 그다음에 땅과의 평화를 이루면서 그러면서 땅과 조화를 이루고 평화를 누리면서 인간이 살 때, 그때 하나님이 땅에게 명하여 많은 열매들을 내게 해서 인간의 삶이 풍족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정확하게 땅과의 관계에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면 결국은 땅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마지막에 땅은 계속해서 열매를 주지 않고 인간은 굶주리게 되고 온갖 자연의 재해에 시달리고 마지막에 인간은 그 자연 때문에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심각하게 나타나게 된 것이 언제냐 하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서부터 이 땅과의 평화가 급격하게 깨지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소비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이 예전과 같이 함께 공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끊임없이 땅을 착취해야지만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관계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2, 30년 전의 이야기인데 그 당시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누리는 소비생활이, 20년 전쯤의 소비생활이 17세기의 왕족의 소비수준입니다. 그러니까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모든 물건이 공장을 통해서 생산이 되면서 엄청나게 가격이 떨어진 것입니다. 물건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면서 인간은 새로운 욕망을 계속 느끼게 되면서부터 그러면서 이제 그 원료를 자연으로부터 채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땅과의 불화가 생겨난 것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보면 인간이 빨대를 땅에다가 꽂고 시커먼 물을 빨아들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석유. 그래서 결국은 이 자연 그 자체를 그렇게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사실 서구에서도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별로 눈뜨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린 화이트라는 사람이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 논문이 뭐냐 하면, 이 자연의 생태계가 파괴된 책임이 기독교에 있다고 하는 요지의 논문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인이 아니라 서구제국주의에 물든 서구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연관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땅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고 그리고 인간은 이 땅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과 통치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인간의 처분에 맡겨 놓으신 곳이 자연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고, 그것을 확대해석을 해서 결국 자본주의와 맞물리면서 이게 경제논리와 함께 엮어지면서 이 땅을 파괴하고 착취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땅과의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지금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아이슬란드나 저 북쪽 빙하가 있는 쪽에 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하루에 30센티씩 빙하가 무너져 내립니다. 그게 수십 년 동안 녹은 게 몇 킬로가 것입니다. 빙하 1센티는 눈이 백 미터가 쌓일 때 7센티의 빙하가 됩니다. 그래서 빙하에는 기포가 없습니다. 워낙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이빨로 깨문다고요? 안 깨물어집니다. 깨지지를 않습니다. 돌입니다. 그런 빙하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흐르는 것입니다. 왜? 기후온난화에 의해서 흘러내리는 것이지요. 이게 높이가 몇 킬로씩 되는 게 무게를 짓누르면서 땅을 파버립니다. 그게 지질학적으로 피요르드입니다. 그래서 노르웨이 같은 데 가면 바닷물이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배타고 3분만 나가면 물의 깊이가 천 미터입니다. 1킬로입니다. 바로. 그게 빙하가 깎아 내려가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빙하가 흘러내리는 것이지요. 자연의 생태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산화탄소가 발생되고 하면서.
그런데 그게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부메랑이 되어서 인간에게 그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맹수의 습격을 당합니다. 예전에는 인간에 살고 짐승들이 사는 중간에 비무장지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굳이 거기까지 경작하려고 맘을 안 먹고 동물은 굳이 거기까지 내려와서 먹을 것을 구하지 않으니까 비무장지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발논리에 의해서 ‘무슨 소리냐?’ 그러면서 미친 듯이 땅을 갈아가지고 계속해서 자연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동물들이 사람 사는 곳으로 나타나서 민가에 해를 끼치고 사람을 잡아먹고 죽이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우리나라에도 멧돼지들이 심지어 은행까지 들어와가지고 현금인출기 속에 들어가는 이상한 사태까지도 벌어지는 게 바로 이런 자연과의 평화가 깨어지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정확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이 그렇게 미워하셔서 심판하시려고 땅을 쓸어버리셨는데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풍작이 들게 하실 수 있느냐?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별도의 신정론에 관한 문제이고, 여기서는 확실한 것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시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너희들이 가서 땅과 평화롭게 지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너희들이 배부르고 풍족하게 되지만, 땅과 평화가 깨지면 그러면 너희들은 이 땅으로부터 무서운 재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결국은 그 땅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땅이 사람들이 그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땅을 ‘아다마’라고도 이야기하고 ‘에레쯔’라고도 이야기하는데 이 ‘에레쯔’라는 히브리말이 ‘땅’이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 ‘땅 위에 사는 사람’도 에레쯔라고 합니다. 마치 코스모스라고 할 때 세상도 가리키지만 세상에 사는 사람들도 가리키는 것처럼 에레쯔의 용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사람들이 그 땅과 잘못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그것이 정확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탐욕을 위해서 땅을 그렇게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땅에 대한 파괴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이 탐욕을 부리면서 이 땅과의 평화를 깨뜨릴 때, 그때 땅은 메아리가 되어서 인간이 땅에게 행했던 그대로 다시 되돌아오면서 인간은 고통을 받게 되고 땅은 더 이상 인간에게 안전한 거처가 아닌 곳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크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계속 살았기 때문에, 전셋집일 수도 있고 사글세일 수도 있고 자기 집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살았고, 여러분 여기에 돌아오니까 선교지에 있을 때하고는 마음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 돌아가고 싶어서 마음이 안절부절 하신 분도 있겠지만 들어오면 이상하게 편안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누가 이야기하기를 그게 바로 소명이 아닌것이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소명을 받은 사람은 그 선교지에 가야만 마음이 편안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이 땅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이 됩니까? 땅이 없는 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시 신앙고백에 나옵니다. ‘우리 조상은 유리하던 아람 사람들이었는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절기에 나아가서 하나님 봬오면서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첫 번째가 자기들이 유리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보면 결국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가 죽었는데도 묻을 땅 하나 없어서 그 땅을 돈 주고 사지 않으면 안 되었을 상황이니까 그 심정을 우리들은 잘 이해를 못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그 종살이를 해야 했던 이유도 결국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의 엄청난 환영을 받으면서 요셉과 일가들이 왔지만, 부귀와 영화를 누렸겠지만 뭐가 없었습니까? 땅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살아라.’하고 주기는 했는데 그런데 그게 영구한 소유로 준 게 아닙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섰을 때 그렇게 두려움과 불안에 떨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땅이 없다는 이야기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고,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재물이 축적이 안 된다는 것이고, 재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성을 쌓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방이 완전히 열려서 텐트 치고 자는데 오밤중에도 적군이 쳐들어와서 우리를 진멸시킬 수도 있다고 하는 두려움, 그다음에 내일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하나님이 만나로 해결해주시지만 이런 두려움들 이 두 가지, 그러니까 외적의 침임과 식량의 공급 이 두 가지가 땅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불안한 두 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 일평생을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땅을 주신다고 할 때의 이 느낌은 이렇게 우리들이 한 곳에서 안전하게 살아온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어떤 정서를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과 평화롭게 살도록 하나님과 화해시킨 그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으며 살게끔 해 줄 것인가? 아마 여러분들이 선교지에, 대부분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선교하시는 분은 많지 않을 테니까 대부분 가난한 나라에 갔을 테니까, 그게 얼마나 심각하게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인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부의 80퍼센트를 10%의 인류가 다 소비합니다. 20%를 가지고 90%의 인류가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서 한 가족이 한 끼에 먹을 수 있는 식사가 가난한 나라에서는 일년치 생존을 위한 양식의 값이 될 정도로 그렇게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결국은 어떻게 땅 위에 있는 인간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과의 샬롬을 회복하게 하고, 그 샬롬의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땅과 평화를 이루면서 살게 할 것인가, 그래서 이 땅도 그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도 그 땅을 좋아해서, 서로를 해치지 않고 공생하면서 아름다운 평화를 이루면서 살 것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이 탐욕과 개발을 줄여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 대세 자체를 작은 교회 하나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적인 금욕주의를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확실히 가르쳐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 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르치고, 그 평화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자연을 학대하지 않고 땅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이 땅은 곡식을 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것 아십니까? 제가 주기도문이라는 책을 쓰다가 일용할 양식이라는 구절을 해설하면서 식량과 미식(美食)에 관한 책을 한 20여 권을 수집해서 통독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뭐냐 하면, 지금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가지고 150억 명을 먹일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있는 지구 인구의 두 배를. 풀(full)로 돌리면. 그러니까 이제 이것을 영악한 사람들이 자본을 가지고 이 곡식을 통제하면서, 내년도에는 기후가 어떻게 되고 식량이 얼마큼 필요하겠다는 것을 알면서 이것을 경작을 통해서 조절을 해서 이 곡식 가격의 등락을 결정하고, 그 다음에 매점매석을 통해가지고 이 가격을 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식량펀드도 있잖습니까? 곡식 펀드. 그런 중요한 하나의 무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오대호연안을 비롯해서 경작할 수 있는 기존에 있는 모든 땅들을 풀로 경작을 하면 지금 있는 인류의 두 배가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이 지금 조건에서도 생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안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이것들이 배분의 불균등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곡식 9kg 내지 12킬로를 소비해야지만 소고기 1킬로가 얻어집니다. 그러니까 그 많은 식량들을 이 가축들이 먹어치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급의 식품으로 탈바꿈 시켜주니까 경제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이것을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한쪽에서는 굶어죽고 한쪽에서는 비만으로 고생을 하고 일찍 죽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목회를 하든 선교를 하든 마찬가지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평화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 평화의 핵심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의 목표는 무엇이냐?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든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 사랑하게 하는 것이 선교다.” 목회는 무엇이냐? 여기에 있는 저의 이야기입니다. 목회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라면, 그러면 목회는 하나님 사랑하게 된 사람이 변심을 안 하도록 계속 하나님 사랑하게끔 돌보는 것이 목양입니다. 이게 목회입니다. 그리고 선교도, 결국은 많이 보셨겠지만 선교지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게 배신입니다. 저는 그것 때문에 가슴앓이 하는 선교사들 많이 만났습니다. 배신입니다. 돈도 주고 모든 것을 다 줬는데 마지막에 배신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중에는 계획적으로 우려먹으려고 들어오는 원주민도 있지만,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 중의 상당수는 그게 아니라 진짜 회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변심한 것입니다. 결국은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심지어 선교지를 찢어놓고 그다음에 선교사를 박해하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교나 목회나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든지 목회자든지 가장 중요한 자격이 뭐냐 하면, 어느 신학교를 나오고 그다음에 어느 선교회에서 몇 년을 훈련받았는가 하는 것이 결정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가장 결정적인 조건은 뭐냐 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야 하는 일이 사람을 설득해서 사랑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이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설득은 감언이설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30년이 이제 다 돼 가는데, 내년이 30년인데 별의별 교인을 다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수천 명의 교인을 목회하는 것도 할 만한데 한 명이 끝까지 목양권 안에 안 들어옵니다. 누구입니까? 누구겠습니까? 사모? 사모는 아닙니다. 사모는 웬만큼은 목양권 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 들어오는 한 마리의 어린양이 그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 선교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선교지를 넓혀가도 마지막에 정복이 안 되는 선교지는 어디인지 아십니까? 자기마음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선교지,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선교와 목회의 본질을 꿰뚫어본 것입니다.
저는 이 주제에 거의 30년을 천착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관심사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철학을 하든 아니면 과학을 공부하든, 성경을 읽든 신학을 공부하든 모든 관심사는 그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마지막까지 자기의 목양권에 들어오지 않는, 쉽게 얘기하면 그것이잖습니까? 선교의 성과가 나타나는 것만큼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선교한다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아마 존경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목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그것입니다. 설교? 쉽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가면 제 경험에 의하면 2, 3시간 설교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듣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그게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놓여있는 커다란 하나의 사명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자기가 세운 교회도 이별해야 하고, 40년, 50년을 함께 살던 아내와도 작별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만난다고 하지만 그때는 또 이런 인연으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또 거기서 전세방 얻고 신혼살림 차리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모두 다 헤어질 운명입니다. 자녀들도 다 마찬가지이고.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애착하고 인간적인 그런 애착과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신의 사람됨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마지막 죽는 순간에 하나님이 성화를 완성하시고 그리고 깨끗하게 만드셔서 주님 앞에 가겠지요.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주님이 무엇을 가지고 판단하시겠습니까? 나의 사람됨을 가지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착한 종이면 잘했을 것이고, 그다음에 게으른 종이면 악한 놈일 것 아닙니까? 결국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마지막에 가지고 가는 모든 것은 우리의 사역지, 선교적인 역량, 계획, 비전, 이따위가 아니라 다 두고, 그다음에 내가 일평생 얼마나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왔는가 하는 자기의 마지막 사람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너무 사람들이 성과 지향적입니다. 그래서 선교지도 그런 질문 많이 받습니다. 몇 교회나 세우셨습니까? 얼마 전에 선교지에 갔었는데 소개하는데 3천개 교회를 세웠다고 그럽니다. 우리는 그냥 입을 벌리고 말았지요. 우리는 상상도 못하는 거니까. 한 개 세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3천 개를 세웠을까. 그런데 어떻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너무나 성과 지향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자기 자신도 도취되거나 좌절하거나 교만해지거나 열등감을 느끼거나 그런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마지막에 결국은 우리는 바깥으로 끊임없이 뻗으면서 하나님과의 평화, 땅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를 확장해 가야 합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할 일이 있어야 하고 목표도 있고 비전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님을 향해 뻗어나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뻗어나가는 것이 건강하게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그 삼각형 안에 사랑으로 꽉 차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결국은 자연을 따뜻하게 대하고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고 그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때, 그때 자기 자신이 먼저 그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영적인 복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게 살 수도 있고 부유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공식으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따진다면 고난의 시기를 지났던 위대한 성경의 믿음의 위인들에게 공식이 맞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렇게 온유하게 살려고 몸부림쳤던 사도 요한은 마지막에 결국은 제자들은 모두 순교하고 사도 요한도 결국은 죽습니다. 순교합니다. 죽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땅 한 평도 못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이 단순하게 이 세상에서 물리적인 부를 가지고 이것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이 땅이 결국은 신학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을 주셨을 때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받을 복은 광야에서 받은 복과는 다릅니다. 광야에서는 그저 보호해 주시고 그 다음에 만나를 주시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들어와서 받는 복은 다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옴으로서 전쟁과 외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고 땅과 화해를 이루면서 풍족한 것을 누리게 되는 모든 그림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업으로 오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될 모든 다양한 복들을 상징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을 하나의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정리를 하자면 이것입니다. 땅과 평화로울 때 두 가지가 보장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배부름과 안전입니다. 그래서 그 안전은, 땅 안에서는 사나운 짐승들이 원주민들을 위협을 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전쟁으로부터 위협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땅과의 평화에서 인간은 두 가지, 배부름과 안전을 얻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영적인 완전한 만족과 그다음에 세상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그의 영혼이 안전하게 생명싸개 속에 보장되는 것처럼 그런 복을 하나님께서 누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선교를 통해서 목회를 통해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를 하면서 반드시 터득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을 설득해서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과 샬롬을 누리게 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그 샬롬을 계속 유지하며 땅과의 평화와 사람과의 평화를 계속 누리며 살아가도록 도울 것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기도와 많은 연구, 그다음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어떻게 이 땅과의 평화로 구현하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체험적인 자기의 지식이 체계적으로 녹아나서 그것이 인생관이 되고 세계관이 되어서 자기가 사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깨닫도록 만들어주고, 그것을 말과 글로써 표현해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그들을 설득해서 그렇게 살아가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이것이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목회를 해 보면 사람을 예수를 믿게 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국은 결판이 납니다. 그래서 결국은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지만 끈질기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믿을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변심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돌보는 그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며 자기 자신이 정복돼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땅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충만하게 누리고, 여기서 땅과의 평화는 그리스도와의 평화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끊임없이 돌봐야 하는데, 그것은 아주 철저한 자기의 경험과 기도는 물론이고, 그리고 철저한 탐구를 통해서 자신이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실존과 엮어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현대의 언어로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그러면서 그 사람들에게 호소력 있게 전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삶을 멘토링 해줄 수 있는 사랑의 교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결코 우리의 사역이 항구적으로 계속 열매를 맺는 사역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올 수 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도 재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 속에서 그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7장 1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결국은 땅이 망가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죄 때문에. 죄 때문에 망가지고, 죄 때문에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대로 땅과의 관계 속에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땅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땅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희생했는데, 결국은 마지막에 땅으로부터 배신당하고 인간이 완전히 소외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땅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리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결국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선교지의 양떼들을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도록 지도해야 됩니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어떻게 이 땅과의 관계에 구현하고 살아갈 것인가 그것을 가르치고 그래서 무너진 삶의 질서를 바르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물질주의와 비인간적인 이 세속주의에 매몰되는 인간이 아니라, 어떻게 이러한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고 자족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린 그 놀라운 안녕의 상태가 어떻게 이 세계 속에도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에 들어오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 땅에 살고 있으나 거룩한 백성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성막에서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는 결코 불결해서는 안 되는구나. 정결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구나.”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정결함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치는데, 결국은 자신이 모든 것을 지켜도 완벽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받음으로서 결국 정결해지는 것도 내가 애쓰지만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거룩함의 지위에 알맞은 정결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교지이건 국내 목회의 세계이건 사실은 사역자들이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문제가 거의 모두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문제가 무엇입니까? 거룩한 지위를 부여받았는데 속된 백성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부름을 받았으면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속에 섞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선교하다가 망가지고 목회하다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차라리 맨 처음에 목회 안 하고 소명 받으면서 겸손하게 신학교 들어가던 그때가 훨씬 더 순수하고 정결하고 그리고 훨씬 더 신실합니다. 어쨌든 선교지로 떠날 때 그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아마 제가 열린교회를 개척하던 그 전날 밤의 마음하고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그 마음으로 우리들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살면서 온갖 많은 일들을 만나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도 인정될 수 있도록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이 두 가지 감동적인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는, 여러분들 보다 대 선배님이시지요. 오래전에 은퇴하셨습니다. 누구라고 이름은 거명하지 않겠습니다. 거명하면 아마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여러 선교지를 돌아다니셨습니다. 부부가. 당연히 자식들에게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지 않습니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움직여 다니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아름답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후배 선교사들이 그 선배 선교사 사모님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도 애들을 키우는 입장인데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키우셨습니까?” 그랬더니 사모님이 하는 말이, “아무것도 못해줬어. 늘 있는 거처가 불안전하고 이 나라 저 나라로 옮겨 다니면서 애들을 교육을 못 시켰어. 그리고 돈도 없어서 아이들에게 잘해주지도 못하고 못 시켰지. 그런데 너무 잘 자랐잖아요.” “어떻게 하셨어요?”그러니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그러나 하나는 있었어.” “그게 뭐에요?” “얘들아. 너희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단다.” 다른 것은 못 해줬지만 일평생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들아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단다, 그것을 자기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자녀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사람들과의 평화를 누리고 땅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사니까 하나님이 복 주신 것이지요.
오래전이었습니다. 북경에 있는 교회인데 한 5천 명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서 조선족 부서가 한 5백여 명이 모이는데 그 교회에서 저를 초청했습니다. 벌써 한 20, 25년 전 일입니다.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큰 교회 담임목사님하고 같이 점심을 먹게 됐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연세가 너무 많으셔가지고 사실은 말수도 없으신데 옆에 있는 부교역자가 통역을 하면서 이야기를 해 주신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이분이 젊은 시절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선교의 열정이 막 불탔습니다. 그래가지고 결국은 신학교에 갔습니다. 그 신학교에 가기 전부터 이미 교회를 개척을 해서 열심히 전도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중국의 마오쩌뚱 시대에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것입니다. 그때에 수천만 명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 사람도 다른 이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서양사상인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이유 때문에 노동교화형에 처해지는데 강제노동수용소에 15년의 형을 살았습니다. 15년 동안 가족들 한 번도 면회가 안 되고 편지 왕래도 못하게 했습니다. 가족들은 이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15년 후에 고향에 돌아온 것입니다. 만기석방이 돼서. 이 사람이 보니까 완전히 피폐해 진 것입니다. 동네가.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더듬어서 가보니까 자기 집을 찾을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집은 다 무너질 지경이 된 것입니다. 원래도 그렇게 좋은 집이 아니었으니까 15년의 세월을 견디지를 못하겠지요. 집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네사람을 우연히 만났는데 동네사람이 알아보고 자기네 집 사연을 얘기해 주는 것입니다. 두 아들과 아내가 있었는데 (모두 예수 믿는 집안의) 자기가, 당신이 감옥에 가고 첫째 아들은 공산당원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마약중독자가 되었고, 당신 아내는 그 두 아들의 말로를 보면서 너무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병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첫째아들은 공산당원 됐으니까 당연히 거기에 없고, 그다음에 둘째 아들 마약중독에 걸린 이 형제는 그냥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이 목회자는 그 15년 동안을 가족생각만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돌아오니까 집안이 다 풍비박산이 된 것입니다. 그때에 무릎을 꿇고 마당에 앉아서 펑펑 울고 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얘야, 이런데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목회자가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통곡하면서 “예, 그렇습니다.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통곡을 하면서 그 마당에서 울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결국은 그 가정의 비극을 딛고 결국 목회의 길을 계속 갔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결국 땅과의 평화가 왜 깨집니까? 하나님 사랑에서 인간이 세상 사랑으로 돌아서고 탐욕중심으로 돌아설 때 땅과의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내일 다루겠지만, 왜 깨집니까?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기 때문에 깨지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결국은 죄 때문에 깨지는 것이고, 죄는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찾아온 결과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리 생태학자들이 지구의 환경의 위기를 가지고 떠들어도 땅과의 근본적인 화해의 열쇠는 여러분들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할 때 그가 땅과 평화를 이루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목회자와 선교사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충만히 누리면서 삶으로 보여주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