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선교사 수련회 2
녹취자: 오희열
땅과의 평화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 땅과의 평화가 따로 떨어져서 땅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유기농 운운하면서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것에 대해 많은 이론들이 있습니다. 소위 유기농이라고 하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인가? 요새 특히 재활용을 한다고 해서 관심이 많은데 앞에서 보기에는 화려해보이지만 뒤로 보면 재활용하기 위해 들어가는 에너지를 계산해보면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플러스가 되는가 하는 다양한 이론들로 시작해서 환경문제와 기후문제에 대한 반론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성경을 이야기하는 시간에 그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고, 말씀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땅과의 평화는 무지무지 중요하다. 그 평화를 유지하지 못할 때 그것은 바로 부메랑이 되어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고 이 지구가 황폐하게 되어 굳이 하나님이 엄청난 처벌을 내리지 않아도 땅과 인간은 운명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땅이 받은 고통을 그대로 메아리처럼 인간에게 돌려주어 인간의 삶이 피폐해진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물질주의의 폐해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땅과의 평화의 문제는 사람과의 평화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유는 어떤 땅이 하나님 앞에 악하다는 판단을 받을 때는 사람이 그 땅을 곡괭이로 찍는다든지, 그 땅에 오줌을 싼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치 않는 사회를 건설해가는 것, 그 때 그 땅은 함께 고통을 받으면서 사람과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의해서 땅과의 관계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땅과 그 위에 살아가는 사람의 사회에 밀접한 관계가 땅과 말할 수 없이 평화로운데 사람들 사이의 평화가 다 깨졌다거나, 사람들과의 관계는 다 깨어져서 악한 사회가 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땅과는 평화를 누리며 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과 사람의 평화를 이야기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풍족한 곡식과 열매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땅과의 평화를 통해서였습니다. 가나안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물질적인 복을 주신 이유는 그냥 배불리 먹고 만족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 땅과의 평화를 통해서 땅이 많은 소산을 내면 그것은 사람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아주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흉년이 들면 민심이 사나워집니다. 경제생활이 각박해지면 변호사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호황기에는 분쟁이 많지 않지만 불황에는 경제가 어려워지고 이익의 충돌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극한 대결을 하게 됩니다. 한 나라가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흉년이 들거나 기근이 들어서 굶어죽을 정도가 되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남의 나라 것이라도 뺏어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분히 주시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기본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가진 문제와 똑같은 것입니다. 쇼펜하우어가 인생은 고뇌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서 유명한 염세론을 펼칩니다. 이 사람이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면 눈을 뜬 것입니다. 나중에는 의견을 달리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왜 인생은 그렇게 끊임없는 고뇌의 연속인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고뇌에 찬 삶을 살게 되는 이유는 어떤 욕망에 인간이 도달하고 나면 거기서 만족을 해야 하는데 절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욕망이 충족되면 더 많은 욕망을 갖게 됩니다.
심리학에 말하는 매슬로우의 욕구의 5단계가 있습니다. 맨 밑에 기본적인 생리적인 욕구부터 시작해서 안전의 욕구, 성적인 욕구, 이런 것들이 충족되고 나면 마지막에 있는 욕구가 뭔지 아십니까?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자아실현’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마음속에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자기 홀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속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가끔 기업가들이 이야기합니다. 기업가의 꿈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자기실현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질서를 세상에 한 번 펼쳐보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을 펼치는 데 돈이 아주 효율적인 것입니다.
재벌을 했던 사람들이 재벌총수의 지위를 민주적으로 투표해서 뽑거나 하지 않습니다. H그룹의 회장이 전체 주식의 30~40%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불과 몇 %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호지분을 다 결합해서 세력을 만들고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나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 맛에 한 번 빠지면 도저히 그것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제왕적 지위를 누리면서 자기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이 이만큼의 꿈과 욕구를 가졌는데 그것이 실현될 즈음에는 꿈과 욕구가 증대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현실과 자기가 꾸는 꿈 사이에는 간격이 존재합니다. 이 간격을 적절하게 해소할 수 있는 정신수련이 되지 않으면 인간은 결핍에 허덕이면서 현실보다 더 높은 꿈을 꾸기 때문에 고뇌는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가는 마차처럼, 그 마차가 내리막에서 저절로 브레이크를 밟을 리가 없이 계속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뇌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것들을 주셨기 때문에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굉장히 좋은 환경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그 욕구가 광야시대의 욕구보다 훨씬 커진 것입니다. 광야시대에 욕구라고 해봐야 먹는 것, 자는 것, 가끔 너무 허하면 고기 좀 먹게 해달라는 것, 그리고 물 먹는 것, 그것이 다였습니다. 이런 것은 가나안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입니다. 다 있는데 광야시대보다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욕망이 엄청 증대한 것입니다. 탐욕에 의해서 세계가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살아도 모든 사람들의 탐욕이 커지면 흉년이 들거나 농작물이 거의 없어서 굶어죽는 때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가 자기의 인생론에서 쇠로 만든 철창이 있는데 고무공들이 넉넉하게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공들이 편안합니다. 그런데 하나가 몸집을 확 불립니다. 옆에 있는 공들이 찌그러집니다. “내가 너무 힘들다”하면서 그 공도 옆에서 몸집을 불립니다. 그 옆의 공도 몸집을 불립니다. 그러면 쇠철창 속의 공들이 모두 압박을 받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압박을 안 받으려면 다른 공들을 더 압박해서 자신의 동그란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움직이기 시자가면 연쇄작용이 일어나면서 다른 것들도 찌그러지지 않기 위해서 더 커지다가 마지막에는 그 안의 고무공들이 모두 터져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같은 이유로 평화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이유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간단하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한 절 찾아보겠습니다. 신명기 9장 5절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신 9:5 上) 하나님이 아주 노골적으로, 조금도 감추지 않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내가 너희에게 준다. 그런데 잊지말아라, 그 땅을 네가 차지하는 것은 너희가 의롭기 때문도 아니고 또 마음이 정직하기 때문도 아니란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얻은 이유는 반사적 이익이다. 법학에서 반사적 이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주유소 두 개가 있는데 거리가 멉니다. 중간에 다른 주유소 하나가 들어오면 돈이 될 것 같은데 법이 생겼습니다. 두 주유소 사이의 거리는 500미터 떨어져야 한다는 법이 생겨서 땅까지 계약을 했는데 들어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래 있던 두 주유소는 잘 됐다고 할 것입니다. 세 개가 될 뻔했는데 영원히 못 들어오게 됐으니 말입니다. 그런 것을 반사적 이익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얻게 된 것도 일종의 반사적 이익인 것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악’이라고 하는 것, 히브리어로 ‘라’인데, 이 ‘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세 평화가 깨어진 극단적인 상태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우상을 섬겨서 하나님과의 평화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 깨어진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정의로운 사회는 하나님을 안 믿어도 우리가 악한 사회라고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깨어진 것입니다. 당연히 삼각형의 원리에 의해서 땅과의 관계도 깨어진 것입니다. 땅이 볼 때 그 위에 인간이 사는 것이 너무 부끄러운 일인 것입니다. 마지막에 땅이 토해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나안 족속들이 멸망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그 땅을 얻게 하신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지만 하나님은 쫓아내셨습니다. 땅과의 평화가 깨지고 사람과의 평화가 깨져서 하나님께서 악한 사회라고 낙인찍으시고 이것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당으로 하여금 토해내게 만드셔서 멸망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옮겨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땅을 넘겨받았는데, 그 한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 땅을 주신 것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신명기 9장 5절, 아까 읽은 그 뒷부분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과 과 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下) 단순히 가나안 사람들이 악해서 그들이 쫓겨난 것이라면 그 땅을 굳이 이스라엘이 상속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이유는, 의롭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따라서 주신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신실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언약과 관련될 때 우리는 신실하다고 합니다. Faithfulness, 히브리어로 ‘에메트’인데 많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에메트’를 ‘진리’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진리를 가리킬 때도 있지만 Faithfulness, 신실하심을 뜻합니다. ‘에메트’는 히브리어 ‘아만’ 동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만’에서 ‘아멘’이 나옵니다. 아멘은 ‘굳게하다’이고, 그것이 ‘오므나’라는 분사가 되면 ‘젖을 먹이는 여자, 유모’가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가나안 땅은 너희들이 그것을 얻을 자격이 있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당신의 신실하신 약속을 근거로 너희에게 주신 것이다. 가나안 땅을 물려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은 아무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이 땅을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다. 추호도 이 땅을 받을 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는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신실하심을 따라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올바로 깨달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은 땅이고 또 그들 자신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 꼭 달라붙어 있어야겠다는 의존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받으신 책이, ‘자기 깨어짐’ 다섯 권은 선착순으로 가져가셨고, ‘염려에 관하여’를 대부분 받으셨는데 이 책은 제가 병원에서 다섯 시간씩 다섯 번 링거를 맞으면서 6개월 동안 쓴 책입니다. 간단하게 쓴 책이 아니라 많은 기도와 눈물 속에서 쓴 책이고 제 인생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온 책입니다. 오늘부터 꼭 한 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쉽지 않을 수 있는데 읽고 나시면 읽지 전의 여러분이 아닌 사람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굉장히 나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절대 의존의 마음의 결핍에서 염려가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모자란 것입니다. 그것이 염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절대 의존의 마음은 성경책 전체의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잠시 후 나오겠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수페르비아’, 이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먹지말아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히브리어로 “모트 타모트”인데, “You shall die.” 즉, 화자의 의지가 그 안에 들어있는 화법의 형태입니다. 필연을 나타냅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습니다. 지성적으로는 자기 판단이 하나님 판단보다 낫다는 ‘수페르비아’, ‘교만’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의지의 측면에서, ‘아모르 수이’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욕망에 부복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할 때, 형태는 소유격으로 되어 있지만 목적격 소유격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사랑’입니다. ‘너희가 만일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너희 속에 없는 것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이 지성적으로는 ‘수페르비아’, 하나님의 판단보다는 내 판단이 훨씬 낫다는 것, 지적인 교만이고, 의지적으로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려는 의지,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선악과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는 결정적인 파괴력이 있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죄에 굴복할 때 이 두 가지가 항상 같이 옵니다. ‘수페르비아’라는 교만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가 함께 오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지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지니까 사람과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벌 받은 이야기는 나오는데 두 사람 사이의 평화가 왜 깨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2장에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데 히브리 문학에서는 최고를 뜻하는 것입니다. ‘바하르’라고 하는데, 최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무엇 중의 무엇’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함께 있게 하신 이 여자가 내게 줌으로 내가 먹었나이다”하는데 이때부터는 하와의 존재가 아담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매우 괴로운 존재가 되었고, 심지어 그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원망까지 생겨난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고 나니까 사람들과의 평화는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그냥 깨어진 것입니다. 사람과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해서 의존적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십니다. 그 땅을 주신 것은 조상과 맺은 언약을 통해서 주신 것인데, 우리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왜 땅을 주셨는지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땅을 주신 이유는 삼위일체 안에 있는 이 평화를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에 구현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 세계의 인류를 수많은 인류로 번성하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사랑의 아름다운 관계인 이 평화를 이 세상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의 세계 속에서 이것을 구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법칙을 세우시면 됩니다. 태양이 있고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왕성은 이제 태양계가 아니라고 과학자들이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여덟 개의 별들이 나란히 있습니다. 그리고 같이 도는 것입니다. 수성, 금성, 지구가 있고, 화성, 목성이 있습니다. 목성의 크기는 지구의 1천배입니다. 태양은 목성의 1천배입니다. 지구의 1백만 배 크기인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궁금했습니다. 천체가 우주를 돌고 있는 궤도가 일정합니다. 정확하게 달이 뜨고 지는데, 만약 목성이 없다면 지구가 어떻게 되었을지 시뮬레이션을 해 봤다고 합니다. 시뮬레이션의 첫 번째 현상으로 지구가 박살났습니다. 목성은 표면이 곰보처럼 되어 있는데 우주공간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돌멩이, 운석들이 충돌하면서 생긴 것입니다. 1900년대에 있었던 한 운석의 충돌은 목성에서의 불꽃을 1940km까지 치솟게 만들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상상이 안 가는 높이 있습니다. 한반도의 두 배가 되는 길이의 불꽃이 위로 치솟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수없이 날아오는 것을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목성이 지구를 품고 함께 돌면서 자기 등으로 그 모든 것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성이 사라지고 나면 10kg짜리 운석 하나만 날아와서 맞아도 지구는 또 다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6800만 년 전에 있었던 케이티 멸종사건 이라고 하는 멕시칸 유카탄 반도 아래에 떨어졌던 운석이 지구의 모든 생물을 거의 멸종시키다시피 한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증거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구 안에서는 절대로 생성될 수 없는 우주의 물질들로 일정층이 덮여 있는 것입니다. 이리듐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공전 궤도에서 점점 이탈하고 더 큰 궤도를 그리다가 우주의 미아로 사라져버린다고 합니다.
1700년대 요하네스케플러라는 유명한 과학자가 천체를 관찰하다가 이것을 연구해서 천체의 운동을 오선지에 그려놓고 수학적으로 비율을 맞춘 후 건반으로 연주했더니 기가 막힌 화음이 나왔다고 합니다. 자연세계에 있는 모든 조화는 하나님이 법칙을 만드시면 됩니다. 그러면 정확하게 그 법칙을 따라 움직이면서 이 자연세계는 모순과 갈등없이 운행합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우주공간의 별들이 부딪치지 않고 운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은하계는 태양과 같은 항성이 2000억 개쯤 있고, 그 별 하나에 딸린 것을 지구를 기준으로 계수하면 4조 개의 별들이 모여 있는 것이 우리 은하계입니다. 그런 은하계가, 관측범위 안에 들어오는 것만 추산해서 2000억개 정도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주의 크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측 범위 바깥에는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은하계가 초속 240km로 우주를 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은하계 통째로 말입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으로 증거가 다 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규칙을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의 모든 것들은 그것을 따랏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규칙대로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입니다. 인간은 규칙대로 안 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인 조건은 자연법칙을 따릅니다. 여러분이 운동을 하지 않고, 먹는 것을 조절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자기 마음대로 하다보면 반드시 50세가 넘어서 질병이 찾아옵니다. 빠르면 40대입니다. 40대에는 배가 바다 위를 항해하다가 50대가 되면 다도해를 지나는 것입니다. 60대가 되면 암초들 사이를 지납니다. 70대가 되면 바다로 깔린 그 사이사이를 도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굉장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55세까지는 평생의 소원이 병원에 입원해보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한 번 연약한 사람이 되어 마르고 하얀 손을 침대 바깥으로 내밀고 성도들이 꽃을 들고 와서 “우리 약한 목사님~”하며 제 손을 한 번 만져주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 소원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 너무 건강했기 때문입니다. 신대원 다닐 때 김철수 선교사님이 저보고 “형님, 형님, 나는 형님을 보면서 매일매일 절망해.”했습니다. 그렇게 몸이 약했습니다. 저는 미친 듯이 살았습니다. 안성진 선교사님은 저랑 같이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아실 것입니다. 자리에서 안 일어나고 스물두 시간을 에세이를 쓰는데, 물 한 통, 빵 하나, 책상 밑에 요강, 이렇게 놓고 에세이를 완성하고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기록은 열일곱 시간 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물 하나, 빵 한 덩어리, 밑에 요강을 놓고 말입니다. 그리고 열일곱 시간 만에 일어났습니다. 젊었을 때는 ‘내가 해야지!’하고 마음먹으면 무한대의 체력이 이 안에서 솟아났습니다. 48시간 동안 안 잔 적도 있습니다. 1분도 안 잤습니다. 무슨 고민이 있어서 안 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공부하고 뭔가 일을 하느라 48시간 동안 안 잔 것입니다. 그렇게 안 자고 대중목욕탕의 물속에 들어가서 잠이 들었습니다. 잠을 깨고 나니까 온 몸이 오징어처럼 불어서 너무 웃긴 기억이 납니다. 하얗게, 튀기기 직전의 오징어처럼 불었습니다. 한두어 시간 정도 물속에서 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체력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50대 중반부터 11년 동안 열두 번 입원하고 열 번을 수술했습니다. 매년, 그리고 마지막에 몸무게가 18kg이 빠졌습니다. 그때 비로소 아침에 눈을 뜰 때 한 성경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기력이 진하여 열조에게로 돌아가니라”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저, 젓가락이 그렇게 무거운 물건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몸은 자연 법칙에 달려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야 언제 죽어도 상관없지만, 죽어도 좋은데 죽지 않고 살면서 질이 매우 나쁜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것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철저하게 건강관리를 해야 합니다. 저는 10년 전보다 훨씬 더 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10년 전에는 설교도 나긋나긋하게 했는데 지금은 잡아먹을 듯이 빠르게 합니다.
자연의 법칙은 그렇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도덕법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법칙을 세워주셨지만, 그것을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는 인간에게 의탁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는 순전히 도덕적 질서의 산물입니다. 땅이 약간 굶주린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도적질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살인하거나 남의 물건을 강탈하거나 사기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의 도덕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는데 하나님이 대체 거기에 무엇을 만드시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끝도 보이지 않는 넓은 호수를 생각해보십시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헬리콥터가 호수 위로 높이, 한 점의 먼지처럼 떠 있습니다. 거기서 호수 정 가운데로 봉고차만한 바위 하나를 떨어드립니다. 저 새카만 꼭대기에서 떨어져 내려오다가 호수로 “풍덩!”하고 빠집니다. 그러면 호수 정 가운데 커다란 파문을 만듭니다. 바위가 엄청나게 크니까 한 2미터 정도의 물결이 생기고 그 물결이 동심원처럼 바깥으로, 찌그러지지 않고 완전한 원의 모양으로 퍼져나갑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오르도’, ‘질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신 이유는 나라를 만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이런 질서가 있는 나라입니다. ‘오르도 아모리스’, ‘사랑의 질서’가 있는 나라입니다. 사람 수없이 많아도 그 사람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똑같은 사랑이 풍덩하고 떨어지면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파문을 만듭니다. 그 파문이 마음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사람은 많아도 모두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동시에 똑같은 동심원에서 시작되어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대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만들어 낸 질서입니다. 사랑은 철저하게 어떤 질서입니다. 질서가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질서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 가장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아끼지 않는 물건들과 함께 섞여 있는 것을 여러분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아주 소중한 것은 구별된 자리에 두고 그 소중한 것을 위해서 덜 소중한 것은 무시되어도 좋은 것이 사랑입니다. 무시해도 좋은 것은, 각기 자기에게 합당한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모두 다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BTS를 아실 것입니다. 리더가 누구입니까? RM, 본명이 김남준입니다. 한자도 똑같습니다. RM은 랩 몬스터의 약자이고 본래 이름은 김남준입니다. 그 사람도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나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BTS가 부르짖는 것은 ‘Love Yourself’입니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 캐치 프레이즈가 맞는 것인지 기독교인으로서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디서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한토막 전해드리고 그 답을 들린 후에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자기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비관적으로 봅니다.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를 사랑하고’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질문합니다. 오늘날은 자애의 시대입니다.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답은, ‘자기’라고 할 때 그 자기가 어떤 자기인가에 따라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사랑하면 안 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자기’가 아까 있었던 물결의 파문, 이것을 따르는 자기일 경우에는 사랑해도 됩니다.
그런데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사랑의 물결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미 그 안에 자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 자신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해가 잘 안 되십니까? 더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버지와 자식이 한우집에 가서 고기를 먹는데 아버지는 이가 안 좋아서 하나 먹기도 힘든데 그동안 자식은 세 개씩 먹습니다. 한판이 금방 떨어졌습니다. 더 주문하면서 아버지가 말합니다. “임마, 아빠도 좀 먹자. 너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하지만 나는 곧 죽잖아. 나도 좀 먹자.”, “아빠, 그렇게 말하지마.”, “왜?”, “아빠는 여태까지 많이 먹었잖아.”합니다.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나면 운전자가 사망할 확률이 높겠습니까, 조수석에 탄 사람이 사망할 확률이 높겠습니까? 조수석에 탄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도 마찬가집니다. 부딪치는 순간, 그런 것을 생각하기 전에 눈을 질끈 감으면서 핸들을 돌립니다. 인간의 자기 사랑은 거의 본능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딸을 너무 너무 사랑하면, 딸이 기뻐하는 것 자체가 엄마의 만족이 됩니다. 굳이 엄마가 엄마 자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할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딸을 너무 사랑해서 기쁨의 합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두 요소는 delite, 기쁨과 evaluation, 가치, 소중히 여기는 것, valuation인데 사랑하면 기쁘고 소중히 여깁니다. 내가 딸을 너무너무 사랑하면 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 굳이 나를 딸에게 분리해야할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나오지만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자기’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기’일 경우에는 아까 일어났던 하나의 파문을 거스르지 않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파문, 사랑이 계속 퍼져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각각 달라도 그 다른 것 때문에 사랑이 일치를 이루면서 놀라운 하모니를 만들어냅니다. ‘콘꼬르디아 에뜨 하모니’, ‘콘꼬르디아’는 ‘일치’이고, ‘하모니’는 ‘조화’입니다. 피아노 100대가 모여서 똑같은 곡을 연주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너무 무섭지 않습니까? 그런데 피아노, 클라리넷, 바이올린, 콘트라베이스, 호른, 이런 것들이 오케스트라를 이루면서 서로 다른 것들이 같은 악보를 가지고 다른 음표를 연주하면서 일치를 이룰 때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겨줍니다. 그런 연주회를 실황으로 보려면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내고 가야 합니다. 왜? 한 번 밖에 못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하모니입니다. 하나님이 사회를 만드실 때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빼고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신 이유는 많은 백성으로 번성하게 해서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의 일치 속에서, 사랑의 일치, ‘콘꼬르디아’ 안에서 서로 다른 것들이 하모니를 이루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물결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함께 물결쳐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랑이 힘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파문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사회가 평화의 사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파문을 일으켰는데, 사랑의 파문이 일어난 사람이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랑의 파문은 다양한 무지개빛깔로 나타납니다. 마치 태양빛이 프리즘을 통과하기 전에는 안 보이는데 통과하고 나면 일곱색깔로 분광되면서 빨주노초파남보 색깔이 나타나듯이 보이지 않는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때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무지개 빛깔처럼 찬란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를 만나면 그 사랑은 정의가 되어 나타납니다.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악을 미워하지만 그를 사랑하면서 그를 반드시 정의로운 자리로 돌아오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참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랑은 긍휼, compassion으로 나타납니다. 한없이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거짓을 행하는 사람을 만나면 진실로 나타납니다. 참 진실한 자가 되기 전까지는 고통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는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가르침인데, 반대로 죄는 미워하지 않으면서 죄 짓는 사람은 미워하는 것입니다. 한 번 내 마음에서 잘린 사람은 영원히 참수되는 것입니다. 그 칼을 신속하게 많이 휘두르는 두 종류의 직업이 있는데 목회자와 선교사입니다. 일평생을 원수를 처단하는 삶을 삽니다. 목회자들도 잘 화합을 못하고 선교사들도 잘 화합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질서의 문제입니다. 왜 이렇게 깨어지는지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이렇게 사랑의 파문이 일어납니다. 모든 사회가 그렇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선교를 하고, 어떤 사람은 배를 만들고, 어떤 사람은 정치를 하고, 어떤 사람은 집안에서 살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짓습니다. 그 모든 직업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드시고 싶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이바지하며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을 따르는 인간의 선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바로 이러한 파문을 이루는 사회가 되도록,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그들이 살아가는 삶이 매우 독특하고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저들이 저런 삶을 살면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지를 묻게 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나게 만들기 위한 존재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시 가장 발달한 문명이 있었던 한 복판에 거의 꽂아놓다시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곳은 비어있는 공터가 아니라 이미 발달한 철기문화를 가진, 첨단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사회였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심으셔서 발달한 문명을 가진 모든 나라들이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보여주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The presence is the best proclaime. 실존이 최고의 선포인 것입니다. 행복한 존재로 살아있는 그 자체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전파하는 웅장한 선포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모순되는 것은 정의가 올바른 정의가 아니고 사랑이 올바른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가 충돌되는 것입니다. 정의라는 이름 아래 사랑을 짓밟고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불의를 포용해서 부패한 사회로 만드는 것은 사랑도 참된 사랑이 아니고 정의도 참된 정의가 아닌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사랑이 정의를 완성한다, 은혜가 번성을 완성하듯이 사랑이 정의를 완성한다’고 정리했습니다. 정의라는 질서 자체가 사랑을 전제로 만들어낸 질서이고, 사랑 그 자체는 마지막에 정의로 나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회를 가나안 땅에 만드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 평화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그 땅을 주신 목적을 따라 살아갈 때 이스라엘 백성도 행복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욕망이 증대하면서 정결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잡한 절차를 통해서 복을 얻는 방법대신 아주 손쉽게 복을 얻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우상숭배가 그렇게 뿌리깊게 나타났던 원인 중에 하나가 그렇게 자신이 사랑의 질서로 돌아가지도 않으면서 물질적인 풍요를 원했던 탐욕이었던 것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1계명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고, 마지막 10계명은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끝나는데, 골로새서에 보면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하시면서 다시 돌아갑니다. 십계명은 일자형구조가 아니라 원통형 구조로 되어 서로 순환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삼각형의 중심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 1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준수할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것만큼 계명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강령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창작해내신 말씀이 아니라 이미 신명기에 나온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파문이 없이는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평화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류 사회에서도 이 평화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악인도 평화로운 가운데 도둑질하기를 원합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도둑질하기를 원치 않고 평화로운 가운데 도둑질하기를 원합니다. 악인도 평화를 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류도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제연맹을 창설해서 평화를 도모해보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그때 인류가 느꼈던 좌절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것이 종교는 물론이고 철학, 역사, 사상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충격을 주어 인간 자신에 대한 회의에 빠지게 되었고 아직까지 인간은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 잔악한 존재이고 비이성적일 수 있는지 그 민낯을 봐버린 충격을 보면서 철학가들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불신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평화가 이루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우리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말 평화로웠어!’하는 날이 1년에 며칠쯤 됩니까? 사실 365일 항상 평화로워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염려에 관하여> 책을 읽으시면 그렇게 될 겁니다.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의 평화 하나도 그렇게 이루기 어려운데, 사람들 속에서 평화를 이루고, 사역지와 교회들 속에서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그렇게 평화를 이루는 일에 실패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예견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깨어지고 다 멸망합니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가 생겨나게 됩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교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 안에 그 돌멩이가 떨어져서 생긴 단 하나의 질서가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 파문이 영구히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새겨집니다. 한 번 생겨난 파문은 회심하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때는 그 질서가 완벽하게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이 사랑의 질서가 우리 안에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 얼마나 강한 힘으로 존재하느냐, 이 질서는 강한 힘으로 존재할 수도 있고 약한 힘으로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양한 나라에서 사역하시는데 어떤 사회는 질서가 확고해서 범죄자에게 에누리 없는 곳도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관광객이 여행하기 좋고 가장 안전한 도시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서울이 1위입니다. 밤거리를 10대 여학생들이 반바지 반팔을 입고 혼자 이어폰 끼고 걸어 다녀도 위험한 일을 당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다른 나라의 도시에 비해서 확률적으로 많이 낮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를 가보니까 명색이 인터콘티넨탈 호텔인데 “밤에 밖에 나가시면 총에 맞아 죽으실 수 있습니다.”라고 호텔 로비에 써 놓았습니다. 그런 나라는 밤에 무서워서 못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질서가 얼마나 확고한가입니다. 만약 서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수만 명의 경찰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잡아내고 처벌할 것입니다. 옛날에 중국 같은 경우는 제가 90년대에 갔을 때 거기 사람들은 살인을 해도 현금 600만원이 있으면 풀려난다고 합니다. 뇌물로 말입니다. 그런 사회는 질서가 있긴 있지만 매우 약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차이가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 안에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자신의 성화를 위해 노력했느냐에 따라 강한 은혜로 나타나기도 하고 약한 은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 각자의 몫인 것입니다.
오늘도 신대원 학생들이 와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목사님, 목회가 무엇입니까?”, “얘들아, 전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 전도이고, 목회는 그렇게 전도된 사람들을 계속해서 점점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 목회이다.” 전자도 쉽지 않습니다. 다른 질서를 숭상하던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온 사람이 변심하는 마음은, 한 여름에 밖에 내다놓은 두부 같습니다. 한여름에 두부를 사와서 밖에 내 놓고 모르고 한잠 자고 나면 그 다음날 아침에는 쉬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냉장고에 넣어야 합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인간성은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지만 타락하기 위해서 특별히 노력해야할 것은 없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살면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 구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을 한 번 설득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변덕스러운 인간을 계속 붙들고 하나하나 지도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지겹지 않고 불타오르게 만드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목회는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길입니다. 목회자는 자기가 살았던 삶 이하의 설교는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설교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교는 삶 안에 묶이고 삶은 설교 안에 갇히게 됩니다. 자신이 그런 질서로 돌아가야 하는데 목회자라고 해서 늘 그런 질서로 돌아갑니까? 그러면 목회자가 욕먹을 일이 없습니다. 선교사들이 모두 평화를 누리고 그 사랑의 질서 속에서 살면 선교사 간에 갈등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어느 해인가 말레이시아에서 선교사 집회를 하는데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돌아왔는데 한 선교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왜?”, “그날 선교사님들이 가슴에 칼 한 자루씩을 품고 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 칼을 내려놓고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아주 조금, 가볍게 싸우고 끝났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 사랑이 계속 물결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시고 교회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보여주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이고 등경위에 있는 등불입니다. 이 사랑의 질서의 파문을 일치하게 마음에 간직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서로 용납하면서, 기계적인 통일이 아니라 외적으로는 서로 달라도 서로 다름이 아름다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그 다양성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콘꼬르디아 하모니아’인 것입니다. 사랑은 ‘콘꼬르디아’이고, 서로 다름은 아름다움을 창출해내는 ‘하모니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것을 미리 보여주시려고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그때는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놀이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이 지구상을 다 다녀봤지만 우리나라 60년대만큼 가난하게 사는 곳을 어디서도 보질 못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더 가난한 나라는 못 가봤지만, 아프리카에서 본 곳도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60년대 초에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너무너무 비참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나이가 어리신 분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땅이었습니다. 눈을 들어서 보면 온 동네에서 높이 솟아있는 건물은 소방서와 학교, 관공서 외에는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판잣집이나 천막집으로 가득차서 고무든 뭐든 태워서 밥 짓는 데 썼기 때문에 파키스탄 같은 매캐한 냄새가 도시에 스모그처럼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것이 서울의 60년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한 시절에 엿장수가 다닙니다. 쩔그렁쩔그렁 가위질을 하면서 옵니다. 동네 아이들이 땅바닥에서 새카맣게 놀다가 새카맣게 모입니다. 그러면 엿장수 아저씨가 엿판에서 탁, 탁! 가위로 쳐서 잘라서 맛보기를 줍니다. 아이들 손이 너무 더러워서 엿판을 만지면 안 되니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는 비닐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고 요만큼씩을 입에 넣어줍니다. 그 당시에는 설탕도 부자의 상징이었습니다. 요만한 엿이 아이들 입에 들어가고 엿장수 아저씨가 말합니다. “가서 고물을 가져와라. 그러면 이 엿을 많이 주겠다.” 엿을 맛본 아이들은 달콤한 맛을 보고 세르토닌이 분비되고 몸 전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한자에서 ‘점심(點心)’을 아십니까? 중국에서는 ‘점심’이 snack이라는 뜻입니다. 중국말로는 ‘땡신’인데 글자 그대로 마음에 “딸깍”하고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가난해서 아침과 저녁 밖에 못 먹었습니다. 점심 때 몸이 다 지쳐있는데 뭔가 단 것을 하나 먹으면 신기하게 마음에 불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중국사람과 이야기하는데, “네 앞에 음식이 있다. 이것을 ‘점심’이라고 하지 않느냐? 너는 무슨 마음에 불을 붙이려느냐?” 그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철학적인 놀라운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십니까? 마음에 불을 붙이는데 도대체 무슨 마음에 불을 붙이려고 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아무튼, 동네 아이들이 그 엿을 먹었습니다. ‘땡신’이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세상 모든 물건이 고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정신이 확 도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은혜를 받고 회심하고 나면 세상 모든 사람이 딱 두 종류로 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그리고 안 믿는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민에게로 내가 보냄을 받았나니’ 하는 마음이 생기듯이, 그 아이들에게는 모든 물건이 고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마루에서 낮잠을 주무시는데 벗어놓은 고무신이 고물로 보여서 버릴 때가 된 것으로 보이고, 개밥그릇, 형이 보다가 댓돌 아래 내려놓은 책, 모든 것을 모아 가서 엿 바꿔 먹습니다. 그리고 저녁때는 이집 저집에서 얻어맞는 소리가 들립니다. 실화입니다.
바로 이 교회를 하나님이 맛보기로 주신 것입니다. 빌립보라는 도시가 유명했던 이유를 아십니까? 로마를 그대로 본떠서 미니어처처럼, 축소판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로마를 너무 보고 싶은데 거기는 너무 멉니다. 그런데 빌립보에 와서 그 도시를 보면서 “로마를 본떠서 조그맣게 만든 것이 이렇게 놀라우니, 로마는 얼마나 멋있겠는가?”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제국의 모든 사람들도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똑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실제로 르네상스의 역사를 보면 로마를 방문하고 온 사람들에 의해서 각 지방에서 르네상스의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을 만들었던 브루넬리스키 같은 건축가들이 로마에 가서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건축에 대한 인상을 받고, 자기 도시에 와서 세기적인 놀라운 건축물을 만든 것입니다.
로마가 끼친 영향이라는 것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가보면 어떻게 이것이 사람이 만든 도시일까? 하는 충격을 받습니다. 중국문명이 주는 것과는 다른 또 다른 종류의 질서정연한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이상 사회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만드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입에 넣어주는 엿 한 조각과 같은 것입니다. 이 교회의 맛을 보면서, ‘천국과 약간 비슷하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우니 하나님이 진짜로 다스리시던 이 나라는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도 어떻게 하면 그 일원이 될 수 있을지를 꿈꾸고 시기하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그때 맺어지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고 타락하고 나니까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신적인 이혼 상태가 된 것입니다. 남자는 폭압적으로 지배하고 여자는 항거하는 존재로 탈바꿈하고 지금은 한풀이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모님들께 잘 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잘 해도 나이가 들면 보험을 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릅니다. 웃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잘 하는 것이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만약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아이는 태어났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했으니 해산의 고통은 없더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아이는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두 사람에게서 끝나고 그 아이에게, “얘야, 엄마 아빠는 서로에게 살 중의 살이고 뼈 중의 뼈인데 너는 거기까지는 아니다. 우리는 서로 자기 살이고 너는 남의 살이란다.” 했겠습니까? “우리는 뼈 중의 뼈요 너는 뼈 밖의 뼈다, 그리고 살 밖의 살이다”라고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똑같이 됩니다. 또 그 동생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그 고백은 세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네 사람의 고백이 됩니다. 시간이 흘러 백만 명으로 늘어나면 그 고백은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백만 명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 수가 70억으로 늘어나면 70억 모두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바 나의 몸이니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는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주심으로써 우리가 서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사회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바 나의 몸이니,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바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떡과 포도주 잔을 주셔서 아담과 하와 사이에 있었던 원래의 인간과 인간의 고백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해석하는 것은, 그 고백을 부부 사이에나 가능한 고백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거기에서 벗어나서 배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놀랍습니다. 다시 살과 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몸입니다. 몸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피는 거기에 따라가는 부속물입니다. 생명의 상징입니다. 결국 그 고백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들의 교회, 우리는 신학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라는 땅에 들어가면서, 그 땅을 유업으로 받으면서 우리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실제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슨 파도가 쳐야 합니까? 사랑의 파도가 쳐야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선교사분들이시니까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선교의 소명을 받거나 목회의 소명을 받을 때는 영혼을 살려야겠다는 것, 그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일을 많이 해야 하고, 일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구분이 안 되고, 비즈니스맨인지, 진짜 선교사인지 목회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하지 말자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인데 그 정신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평화를 이루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이 사회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공유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한 맛보기가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들 속에서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평화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루게 되면 ‘사나운 짐승은 땅에서 제하시고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못하게 하겠다. 원수들이 쳐들어오지만 너희가 원수들을 따라가서 원수들을 진멸하게 하는 나라가 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사람과의 평화가 깨어짐으로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멸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진짜 평화를 이루시는 완전한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랑의 물결 속에 하나가 되는 그림이,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는 그림이고, 복음이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서 이방에까지 전파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삶의 방식이나 철학, 세계관 자체가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계관의 통일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한 사랑의 질서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려는 것은, 사람들과의 평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꾸 깨어집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깨어지는지 그 문제를 생각하려면 그리스도의 모본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동네,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유다, 그 땅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성경에서는 그렇습니다. 다른 문헌에서는 남미까지 여행하셨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진위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쁘게 다니셨지만 바쁘기로 따지면 대형교회 목사님들도 예수님 못지않게 바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걸어 다니시거나 나귀를 타고 다니셨지만 목사님들은 비행기와 차를 타고 다니는 차이가 있겠지만 정말 바쁘고 힘들게 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당신께서 하신 일이 어머어마하게 많은 일이라고 자랑하신 적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이루시고 완성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고 제자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리로레인즈 라는 사람의 책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에 올라가시는데 천사가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와 버리면 당신의 교회는 어떻게 합니까?”, “나에게는 아직 열두 제자가 있다.”, “그거 말고 더 좋은 또 다른 대책이 있습니까?”, “없다. 그것으로 충분하다.”했답니다. 제자훈련을 강조한 사람들이 즐겨서 애용하는 아주 유명한 예화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 자신의 일을 하셨고, 사역하신 기간도 3년 정도라서 길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고,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만 했다면 사람인 우리와 접촉점을 가지실 수 없었고, 사람이시기만 했더라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실 수 없었는데, 참 하나님이심으로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시고, 참 사람이심으로 사람인 우리에게 사람으로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비전이었습니다. 그 비전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뛰어넘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내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하면서 끊임없이 푯대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무슨 기업가의 정신이나 개척자의 불타는 사업의 야망을 뜻하는 게 아니라 비전 자체가 ‘콤포로마티오 크리스티’, 그리스도를 본받음, ‘콤포로마티오’는 conformation,일치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수스케마티지오’라는 단어입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에서 나오는데, 어떤 틀 속에 금속을 넣어서 만드는 것, 다이케스팅이라고 합니다. 밀가루 반죽이 다르고 종류가 다른 팥이 들어가도 붕어빵 틀에 부으면 다 같은 붕어빵이 찍혀 나오듯이 그렇게 너희는 세상에 의해 찍혀나오는 자들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해 conformation 되지 말고 그리스도를 틀로 삼아서 거기에 conformation하는 사람이 되라, 그것이 그리스도와 일치의 교리입니다.
신자의 가장 위해한 비전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살다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죽는 것입니다. 목회를 결심한 모든 사람이 웨슬레처럼 목회할 수 있겠습니까? 조지 윗필드처럼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에서 목회하면 모두 조용기목사님처럼 목회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훈련을 하면 모두 사랑의 교회가 되겠습니까? 문화사역을 하면 온누리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 교회는 지문과 같아서 각기 자기 자신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태어난 이유는 여러분이 여러분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저와 친구인 외국의 저명한 학자 한 분이 오셨는데 내 서재에 있는 책을 보면서 감탄을 하다가 저에게 개혁주의자나 칼빈주의자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내 기독교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어거스틴 주의자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칼빈을 훌륭하게 생각하고 평생 스승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칼빈주의자 김남준으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17세기의 청교도 존 오웬을 너무너무 존경하고 저작을 거의 다, 14천 페이지 정도 되는 17세기 영어를 거의 다 읽었습니다. 20년 걸렸습니다. 그렇게 존 오웬을 존경하고, 나는 평생 존 오웬 목사님이 담임 목사님이 계신 교회의 부목사라고 생각하면서 사역한다고 우스개소리로 말할 정도로 존경하지만 내가 죽은 후에 오웬주의자라고 불려지고 싶지 않다. 내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너무 좋아해서 15년 동안 1만8천 페이지 정도의 18세기 영어로 된 전집을 두세 권을 빼고는 다 읽었고 지금도 내가 웨스트민스터 박사과정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강의하고 있지만 내가 죽은 후에 에드워즈 주의자 김남준이라고 불리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너는 뭐라고 불려지기를 원하느냐?”, “김남준”. 그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나로 살아가라고 주신 선물들입니다. 그것이 자기 개인의 독특성입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전 세계에 1천억 정도의 인구가 살다가 죽었답니다. 그런데 1천억의 삶들 중에서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선교사님은 태어나셨지만, 이전 세대부터 지구의 종말이 올 때까지 똑같은 사람은 안 태어납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전 세계에 남은 희귀종의 마지막 개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데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여태까지 무시해왔습니다. 이것이 현대에 사람들과 대화가 안 되는 중요한 이유인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개인이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존중해주고 하나의 질서 속에서 서로를 용납하며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들 속에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가 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치의 놀라운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사회 속에서는 그것이 깨어집니다. 왜 깨집니까? 가장 커다란 이유는 교만입니다. 맨 처음에 아담과 하와도 ‘수페르비아’, ‘교만’ 때문에 부부의 일치가 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듯이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몸에 밴 교만은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유능한 사람에게서 겸손을 발견하는 것은 비굴한 자에게서 자존감을 찾는 것만큼 힘듭니다. 그것을 스스로 낙인찍는 것입니다. 유능하고 뭔가를 잘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 마음속에 교만이 스며들게 됩니다. 보통으로 정신차리고 경계하지 않으면 그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제레미 테일러 같은 사람은 ‘스코르니티’라고 불렀습니다. 어려운 말인데, ‘정사’라고 번역합니다. 면밀하게 살핀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진리의 빛으로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자기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기독교의 성찰의 정신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기독교의 위대한 힘인 ‘반성의 힘’이 나옵니다. 모든 동물들이 있지만 반성적인 존재는 인간이 유일합니다. 반성을 합니다. 반성을 하려면 거울을 봐야 합니다. 집에서 나가기 전에 거울을 봅니다. 머리를 빗고 단정한지,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지는 않는지 보고, 단정하게 하고 나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울’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동양 철학에서는 ‘도’라고 불렀고,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부릅니다. 율법과 복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직하게 비춰줍니다. 그 일을 쉼 없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의 평화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평화, 교회 안에서의 평화, 사역지 안에서의 평화를 누려가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집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합니다. 교만 때문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사소한 일 때문에 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아주 사소한 이견인데 서로를 아주 쉽게 등집니다. 의외로 목회자와 사역자들 가운데 ‘관종’이 많습니다. ‘관심종자’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교만의 발현입니다.
서구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의 어떤 좋은 점을 발견하면 그것을 깊이 공감하면서 칭찬해주고 배우려고 하지를 않고 어떻게 하든지 헐뜯어서 그렇게 높이 평가해주는 사람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를 씁니다. 교만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자기 깨어짐의 눈물과 회개의 은혜로 끊임없이 씻어내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는 자기중심성입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며 공감하기 보다는 시종일관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한 시간을 대화하면 59분은 자기 이야기만 하고 1분은 다른 사람이 이야기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한 시간 동안 자기 이야기만 하다가,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해서 미안하네. 당신도 좀 이야기를 좀 해보게. 최근에 내가 쓴 책을 읽어보니까 어떻던가?” 했답니다. 세상의 인간관계학에서 첫 번째로 관계를 단절해야 할 사람이 그런 종류의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관종들, 그 사람들과 상종하면 반드시 안 좋은 결과에 휘말리게 되니까 정리하고 끊어내고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인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고, 목회자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게 단절하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사랑으로 교화해서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남을 교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먼저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면서 그렇게 하지 않고도 얼마나 인간이 행복하고 자존감 있게 살 수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격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박수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과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는 열등감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대부분 어두운 성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들로부터 소중히 여김 받은 경험이 없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가슴 벅찬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과의 평화를 끊임없이 깨뜨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의 뿌리는 자기사랑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자기에 대한 집착적인 사랑이 이런 결과를 가져옵니다. 마음이 늘 허합니다. 일을 하고 있지 않거나, 사람들과 뭔가 갈등하고 있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늘 기억해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혼자서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사람은 둘이 살아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혼자 살아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하는 것은, 수영 못하는 사람이 수영 못하는 사람의 두 손을 물속에서 잡는 것과 똑같습니다. 함께 깊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나의 무게도 이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의 무게를 지겠습니까?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의 비결이 뭔지 아십니까? 바꿀 수 없는 것은 깨끗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늙는 것, 내가 여기 태어난 것, 내가 선교사가 된 것, 내가 목회자가 된 것, 바꿀 수 없습니다. 깨끗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집안에 태어난 것,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 돌아왔는데 살 집 하나 없는 것, 이런 것들을 깨끗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대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꿔야 합니다. 건강이 안 좋으면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합니다. 살이 계속 찐다면 덜 먹어야 합니다. 계속 마른다면 더 먹어야 합니다. 노력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바꾸지 않으며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질이 못됐다면 어디서 못됐는지, 내 마음이 어디서 망가졌는지 성찰하면서 이 마음을 가지고 지옥처럼 살기보다는 1년이라도 망가지지 않은 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뭐가 잘못됐는지 생각하면서 고쳐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무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런 자기중심성의 마지막은 ‘무례함’입니다. 사람들의 말투가 거칠고 야비합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무례한 태도, 이런 것들은 평화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평화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상처를 받는지, 자신의 말 한마디가 공동체에 무슨 파문을 그릴지,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들어감으로써 그 공동체가 좀 더 평화로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단 하나의 파문 속에 사람들이 함께 흡수되어가는 그 결과에 이바지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거기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마지막 결과는 행복하지 않은 것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식적인 설교를 시작하신 것이 산상수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산상수훈에서 기독교에 관한 긴 교훈을 남기십니다.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데,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시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바깥에서부터 이야기를 합니다. 지위가 어떻고, 생김이 어떻고, 나이는 얼마고, 행동은 어떻고 등등 시작하는데, 예수님은 바깥에서 사람을 보시는 게 아니라 인간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쪽에서 바깥을 향해 인간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일을 해야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존재 자체가 가난한 심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 등등 인간의 내면세계를 살피는 것입니다.
오리게네스라는 변증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클레멘트의 제자였습니다. 많은 재밌는 이야기가 있지만 거두절미하고, 오리게네스가 팔복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은 어떤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의 구조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팔복의 사람입니다. 진짜 그렇게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마음이 청결하고, 그런 마음이 되었을 때 그가 온전한 내적인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살아갈 때 그는 어디에 들어가든지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믿음이 없는 곳에 믿음을 심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그가 뭘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사람이 들어감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그것을 자각하면서 그 인격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누리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것을 ‘Beatitude’, ‘지복’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끝의 행복’, 무엇을 소유하거나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람 됨됨이에서 찾는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두 내려놓게 됩니다. 여러분이 사명감을 가지고 하던 일들이 언젠가는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구나 하고 내려놓는 때가 옵니다. 자신이 일평생 사역을 하고 살았을 때 남는 것은 자신의 인격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물론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죽음이라는 강을 건너면서 식구들이 모두 한 순간에 같이 태어난 식구가 없듯이 죽는 순간에도 달리 사라집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타인입니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타인은 지옥이다. 그렇게 삽니다. 모든 인연도 잠시의 인연이지 영원한 인연은 없습니다. 모두 끝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사람됨에서 오는 행복, 그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짜 최고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지만 자신은 누구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전혀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이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성인들이 누리려고 몸부림쳤던 지복의 세계입니다. 그 지복의 세계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지위나 하고 있는 일이나 사회적으로 받는 존경심이나, 혹은 내가 어떤 물질을 소유하고 있고 미래에 대한 어떤 보장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시차가 있을 뿐이지 모두 두고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그 사람됨으로 말미암아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목회의 최고의 열매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지막에 자신이 자신에 의해서 목회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의 최고의 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지막 선교지가 선교된 사람. 마지막 선교지가 어딥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선교된 사람. 그때 자기 자신이 진리의 목양을 받는다고 느끼고 자기 자신이 선교되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비로소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증명해주는 것이니,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을 그렇게 엄청나게 존경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를 아주 실망한 눈빛으로 쳐다볼 이유도 없고, 악인을 만났을 때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의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나도 그들 중에 하나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고 마지막 눈 감을 때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아주 장엄한 방식으로 자신의 인격을 통해 보여주고 죽는 것인데, 그 사람의 성숙한 인격, 그 자체가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는 괄목할만한 일을 한 사람만 기록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이름은 빠뜨립니다. 그것은 사람 역사가들이 쓴 발자취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가 섬겼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됨됨이를 굳이 우리의 말로 자랑하지 않아도 하나님 당신의 눈앞에서 우리의 됨됨이가 어떠한지를 하나님께서는 한눈에 보십니다. 그 행복을 죽은 후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팔복의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행복을 온전히 누리면서 이 세상의 누구도 맛보지 못한 희열과 기쁨 속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 희열과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내적인 구조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결’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결을 따라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사람들과의 평화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사람들 속에서 이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이 좋든 나쁘든 사람의 마음속에 매우 큰 고통이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사람들 속의 평화를 이루기 원하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미국에 있는 유명한 신학교의 총장이 되신 분이 있습니다. 총장이 되자마자 저희 교회에 찾아오셔서 교제를 했는데 떠나면서 “목사님, 제가 젊은 나이에 총장이 됐는데 무엇이든 하나만 충고해주십시오.”, “총장님께 내가 무슨 충고를 하겠습니까?”하고 극구 사양을 했습니다. 두 번을 계속해서 부탁하시기에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도 겸손이요, 두 번째도 겸손이요, 세 번째도 겸손입니다. 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라를 돌아다녀봤지만 아무리 문화의 차이가 커도 겸손한 사람을 싫어하는 나라는 없고, 아무리 문화의 차이가 똑같아도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문화를 가진 나라는 없었습니다. 겸손은 모든 사람과 소통하게 만드는 통로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완전한 평화를 사람들 속에서 구현해가는 한 방법인 것입니다.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최근에 누군가에게 가슴이 뭉클한 감동을 주신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눈물이 주르륵 흐를 정도로 깊은 감동을 주신 적이 있습니까? 설교, 그것 말고 무엇인가 그를 위해서 봉사함으로, 그가 흘리는 눈물은 여러분의 사랑에 감격해서 흘리는 게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만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매일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하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모든 사람에게 마지막에 쿵! 하고 받은 인격적인 감동이 단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선한 행실과 나의 배려, 나의 겸손함과 그를 위한 존중, 그 모든 것 때문에 마지막에 그 하나의 물결이 그 가슴 속에 출렁거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각각 생각은 다르고 이념은 달라도 그 사랑 안으로 모두 통합되어 들어와서 그 사랑의 물결 속에서 이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악입니다. 어거스틴은 “악이란, 전도된 질서, 뒤집힌 질서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어긋난 질서에 대한 사랑, 그것이 악입니다. 그것도 물결처럼 칩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은 권력이나 창, 칼의 힘이 아니라 Power of Love, 사랑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파문이 계속 일어나면서 물결이 사람들 속에 질서를 만들어내고 그 질서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보편적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느끼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순결한 사랑의 감화력입니다. 그것을 인종과 상관없이 민족의 구분 없이 이루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선교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역을 통해서 만들려는 공동체를 사역자들 안에서 먼저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유능하지도 못하고 큰일을 남기지 못한 나에게도 물결치고 있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선교지에서 사역하고 있지만 확실하게 나의 정신과 영혼과 모든 삶이 그 물결에 움직이고 있구나!’ ‘모든 사람들이 이 물결 속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면서, 아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면서 나 혼자였다면 도저히 창출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하모니들을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구나.’ 이렇게 될 때 무능해 보이던 사람이 너무 소중하게 보이고 거칠어 보이던 사람이 너무 소중하게 보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엄숙하도록 존엄한 존재라는 생각이 마음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인생이 뭐 있겠습니까? 제가 예수님 믿고 예수를 위해 살다가 죽어야지 하고, 신대원 다닐 때 은혜를 깊이 받고 3년 동안 순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응답을 안 해주셔서 아직 살아있습니다. 순교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가 유명해지면서 혜성같이 나타났다, 불꽃처럼 나타났다고 했는데 이제 벌써 불꽃이 꺼질 때가 되었습니다. 인생은 살아보기에 너무 짧은 순간입니다. 막 살기에는 너무 짧은 순간이지만 잘 살기에는 너무 긴 시간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기 자신이 이미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금방 지나갑니다.
여러분이 선교지로 떠날 때가 엊그제 같지 않습니까? 더 이상 선교지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시는 은퇴하신 목사님들은 감회가 새로울 것입니다. 이 수십 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 하나 남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때문에 평화를 이루며 살게 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었고, 우리의 만남을 인해 기뻐하고, 모진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서로 기대며 살아갈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 그런 것 아닙니까? 누가 얼마나 충성했는지는 최종적으로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것이지, 이 세상의 업적으로 우리가 판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땅과의 완전한 평화를 추구하고 사람과의 완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애쓰면서 살아올 때 그 평화가 주는 안식을 가장 먼저 누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사자가 울부짖어도 요동하지 않는 담대함이 어디서 나옵니까? 용기에서 나옵니다. 그 용기는 평화에서 나옵니다. 아무도 누구도 헤칠 수 없는 이 완벽한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의 행복, 그 행복을 여러분이 누리시면서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긴 설교를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