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역의 본질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잔대위의 등잔들을 항상 정리할지니라” (레24:1-4)
녹취자 : 조원정, 김경애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왔는데 한권은 주기도문입니다. 이 책은 주기도문에 관해서 쓴 책인데 특별히 저희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선물해 드리는 것입니다. 선교지는 상황이 한국하고는 좀 다르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개혁시대 때 칼빈의 경우에 주기도문을 1년을 가르쳤습니다. 주기도문을 제대로 가르치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고 마지막에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까지 전체적인 그림이 나오는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여러분이 주기도문을 잘 읽으시고, 책이 조금 어렵다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 정도는 읽어야 됩니다. 성도들에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잘 풀어서 잘 가르치시면 선교지에, 교회에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전체는 그리스도 신약을 통해서 봐야하고, 신약은 복음서를 통해서 봐야하고, 주기도문은 복음서를 바라보는 렌즈여야 합니다. 그 속에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하나님 나라의 전망, 당신의 사역, 이루어진 초대교회의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가 되기를 예수님이 기도하셨는가 하는가를 집약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 속에는 아주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460페이지 책을 제가 한달 동안 쓴 것인데 사실은 좀 절제했습니다. 마음의 소원은 650페이지 정도 쓰고 싶었는데 출판사에서 절대 사람들이 안 산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이렇게 했습니다. 부피도 크고 해서 저희들이 굉장히 투자를 많이 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책꽂이에 꽂아 두지 마시고 꼭 읽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나눠드렸는데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은, 지난해에 9월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개강집회를 인도를 했는데 저에게 세미나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는데 그때 먼저 영어로 작성하여 발표한 것을 한글로 옮겨서 여러분을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이 책은 사실 안 나눠 드리려 했습니다. 강의 시간에 강의를 안 들으시고 책을 자꾸 보니까 덮어두시고 제가 강의안에 얽매이지 않고 더 풍성하게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집에 가셔서 이것을 가지고 꼼꼼히 읽으면 되고 강의시간에는 필기 굳이 하실 필요도 없고 편안하게 일일연속극 시청하듯이 강의를 들으시고 집에 가셔서 차분히 읽으시면 좋을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해서 더 공부를 하고 싶으면 뒤에 나와 있으니까 한국에 주문해서 찾아가서 읽으시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느 날 이 부분 성경을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펼쳐놓고 다시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이 그려져 있는가를 보고 큰 감명을 받고 여기에서 책 한권을 쓸 수 있겠구나 하며 정리를 해 두었습니다. 그중에 일부를 여러분 앞에 나와 있는 작은 책자로 만들어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마른땅과 같은 성경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주 위대한 성경의 진리와 기지들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에서 어떻게 당신을 섬겨야할지를 가르치는 규례가 담겨있습니다. 성막은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생활 하는 중에 만들도록 지시하신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서 성막이 이동하면 이스라엘이 따라서 움직이고 장소가 정해지면 제일 먼저 성막이 서고 다음에 열두지파가 진을 치는 생활을 40년 이상 동안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막은 알다시피 울타리가 있고 그 안에는 직사각형의 텐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텐트는 다시 약 12평의 방과 6평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2평의 방은 성소라고 불리는 곳으로 제사장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었고 그 안에 있는 6평의 방은 지성소로서 오직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차례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성막을 보면 하나님이 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성막을 짓도록 계시하셨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창문이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막의 위에는 물 돼지가죽으로 만들도록 지정이 되었는데 물 돼지가죽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빛을 완벽하게 차단을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창문도 없이 성막에는 완전한 어두움이었고 오직 등잔불을 밝혀 그 불빛으로 사물을 분간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스로 섬기는 그런 구조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깊고 심오한 구속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당신의 종들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에 이 세상의 빛이 아니라 오직 거룩한 등불에서 비쳐오는 그 빛으로서 이스라엘 제사장과 대제사장들이 섬겼던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반드시,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도 영적인 측면과 육적인 측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를 잘 경영하면서 교회를 하는 것과 되는 데로 하면서 교회를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교회가 이 세상의 집단과는 다르지만 사람들이 모여서 일정한 자원을 가지고, 물론 세상에서는 세상의 자원으로만 하지만 교회는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을 사용해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일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영적으로 교회를 합리적으로 잘 하는 것은 아무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교회를 지어서 건축을 할 때에는 성령 충만하고 건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불신자라도 건축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을 데리고 교회를 짓는 것이 안전한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인간처럼 영적인 면과 육적인 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보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여기까지만 하면 이 세상에 회사는 잘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스피릿웨어입니다. 교회의 건물, 조직, 사람, 재정, 위치, 이런 것들입니다. 소프트웨어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어떻게 교회의 조직이 합리화 되어 있는가? 어떻게 교회의 조직이 경영적으로 최소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되어 있는가? 이런 것들이 소프트웨어입니다. 시스템이나 체제 같은 것들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피릿웨어입니다. 낮에 정 목사님 말씀 전해주신 것처럼 형언할 수 없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 왜 그런지 교회만 가면 눈물이 나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얘기치 않게 쏟아지는 폭풍과 번개, 우뢰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 이런 것들은 스프릿웨어입니다.
이것은 머리 좋은 사람이 도입할 수 있고 돈 있으면 사오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긴 오는데 이미 있는 사람들의 경험이나 지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 세 개가 다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야 하지만 교회에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위에 있는 스프릿웨어는 이 세상에서 돈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회의를 통해서 도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초자연적인 은사요, 선물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하드웨어에 집착을 하던 시대에 있었습니다.
교회만 지으면 성공할 거라는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곤충으로 사람을 죽이고 구속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천 오백만원을 뺏으려고 했는데 그것을 빼앗아서 교회를 지으려 했답니다. 실화입니다. 한 30년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그런가하면 너무 소프트웨어만 집중하는데 머리 좋은 사람만 모아놓고 심지어는 우리나라 큰 대형교회가 외국의 전문 기업 진단회사에 교회를 맡긴 적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다고 해서 교회가 올바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잘 활용한 교회가 얼마 전까지 미국에서 성장을 거듭한 교회가 마케팅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계속 줄어들어갑니다. 스프릿웨어 이것이 아주 건강하게 주어지는 형태여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스프릿웨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런데 이것이 건강한 영성이 아니라 신비주의적인 영성을 도입하고, 제가 관상기도에 대해서 2년 전에 총회에서 발표를 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운동을 통해서 사람들에 대한 욕구를 진리와 성령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세우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것들을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정신, 소위 이야기하는 뉴에이지 정신 같은 것들이랑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들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스프릿웨어가 아닌 다른 어떤 영적인 것들로 사람들을 충족시키고 종교심을 유발하는 이런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이 바로 교회의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올바로 갖추어야 합니다.
구약시대 제사장과 신약시대 목회자는 신학적으로 단절적인 측면도 있고 연속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직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기 전 성전 시대의 직분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공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함으로서 성막과 성전, 제사장들이 예표하던 바를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목회자는 구약시대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제사장이 된다는 개념이 훨씬 더 강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시대착오적으로 그런 설교를 공공연하게 하는데 신학적으로 잘못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도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휘장이 찢어졌다고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와의 구분이 철폐된 것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 이외에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었는데 이제 제사장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휘장이 찢어진 것은 바람이나 자연적인 현상 때문에 찢어진 것이 아니고 그것은 베로 짠 것이기 때문에 양쪽에서 황소가 채찍질을 하면서 반대방향으로 잡아 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의 섬유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위로부터 찢어진 것이었습니다. 찢어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성막들이 서 있고 제사장만 들어가는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철폐가 된 것입니다. 이제 모든 성도들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성소와 지성소와의 구분이 철폐되었기 때문에 성소에 들어간 모든 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게 되었다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제는 인간의 중보 없이 모든 하나님을 믿은 자녀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임재 앞에서 그분을 뵈올 수 있다는 것이 개신교의 만인 제사장의 교리입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하는 만인 제사장의 측면에서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는 다른 모든 신자들과는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매우 특별한 성소적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성소적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메리 데스 클라인이라고 하는 웨스트민스터에서 고대 근동학을 가르쳤던 60년대 유명한 교수님이셨습니다. 이분이 쓰신 대표적인 책이 'Kingdom Prologue'라고 하는 왕국의 서막이라고 하는 우리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여러 권의 책을 썼습니다. 성경구조의 권위 등 이런 책들을 쓰셨는데 아주 경건하고, 탁월하게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치던 유능한 학자였습니다. 이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하나님이 두 가지 명령을 주시는데 종교명령과 노동명령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이원론입니다. 이것을 일원론입니다.
(예화) 제가 캐나다를 갔습니다. 캐나다를 갔는데 연합집회를 했는데 어떤 분이 큰 차를 가지고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타고 고단해서 눈을 좀 붙이고 생각하면서 쉬면서 가고 싶은데 누군가의 강의를 틀어 줍니다. 틀어 주는 것을 끄라고 할 수 없어서 이게 뭡니까? 했더니 우리 담임 목사님의 특강인데 굉장히 놀라운 진리가 담겨있으니 들어보라고 합니다. 난 좀 쉬고 싶은데 할 수 없이 들었습니다. 이 분의 강의를 다 얘기할 필요는 없는데 지론이 이런 것입니다. 당신들은 잘못되었다. 당신들은 전부 이원론에 빠졌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과 삶 따로,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이원론에 빠지게 되고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특별히 ?식에 드리는 예배, 특별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삶 전체가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한 예배라고 생각을 해야 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계속 들으면서 저는 뒤에 조용히 앉아서 계속 이러면서 운전하신 분은 저를 못 봤을 것입니다. 전혀 잘못된 이야기를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아 아니다. 이원론에 관해서 이 목사님이 들으셨는데 잘못된 방법으로 시종일관 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강의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 삶, 잘못된 이해입니다.
실제로 서울에 있었던 어느 유명한 교회의 이야기인데 이런 식의 신학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니까 나중에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청년들이 주일 열한시 예배를 안 드리고 빈민가에 봉사를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받음직한 열한시 예배보다도 더 훌륭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아예 주일 예배가 붕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개를 엄격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교회 올 때에는 정말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 같이 행복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떠나갈 때 마치 가면 절대로 안 되는 타락의 소굴로 가는 것처럼 돌아와서는 일주일 동안 온전히 죄만 짓고 실패하고 비참하게 산 것처럼 고백을 하고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달라고 하고 그리고 또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 모두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메리 데스 클라인의 설명에 의하여 제가 적용을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원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여기가 일반적인 삶입니다. 여기가 예배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구분은 없습니다. 어디가 경계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가 일반적인 삶이고 위로 올라가면 예배가 되는데 어디까지라는 선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너희의 삶이 영적인 예배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둘 사이에 구분은 없지만 구별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별은 이렇게 위에 속한 것입니다. 이 아래 성도들이 정의롭게 살아라,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성공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것은 목사나 선교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들도 해야 할 일이고 부모들도 해야 할 일이고 스승들도 해야 할 일입니다. 목회자는 이 위에서 어떻게 한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 것인가 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으로 가르쳐야 할 고유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성소적 사명이라고 메리 데스 클라인이 얘기합니다.
이 사역을 온전히 하면서 이 사역에서 이렇게 내려오면서 이 사역을 통해서 성도들이 성소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그것을 일반 세상의 영역에까지 끼칠 수 있도록 이런 온전한 삶을 살도록 총체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 선교와 목회의 진정한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나 선교사나 여기 위에서부터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으로 마지막에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지식을 가지면서 신학을 공부해야 되는데 포괄적인 지식이, 여기에 제일 작은 것이 성경이라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신학적인 지식이 필요하고 이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일반 학문의 지식이 필요하고,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데 이것들이 이런 식으로 정점을 이루면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선교사든지 목회자든지 간에 이런 지식의 구조를 알고 진리를 다룰 수 있을 때에 이것이 진정한 목회사역이요, 선교사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회자의 소명을 받은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지만 그 이상의 사람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30년, 40년 전의 교회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제가 성도들 7명을 데리고 방배동 지하 예배당에서 교회를 시작한 것이 1993년 12월의 일이었습니다. 정확하게 20년 전입니다. 후배들이 그때 개척할 때하고 지금하고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면 나는 항상 하는 말이 완전히 다른 시대다. 1993년도에 교회를 할 때에 그때의 환경과 지금 환경이 너무나 다르고 한국사람 모양은 같아도 사고와 생각에 형언할 수 없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20년 후에 일어난 사회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목회를 하려고 할 때에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어려운 때를 만난다.
이제는 교회가 잘 안 되는 시대입니다. 부교역자를 교회 개척을 시켜 봐도 한 10명시키면 4명 정도는 교회가 되고 나머지 6명은 안됩니다. 다른 교회는 비율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교회가 문을 닫습니다. 다시 또 교회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얼마나 다른 시대가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40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서 목회자의 생활을 봐도 아주 단순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가방 들고 부지런히 심방하고, 눈물로 설교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러면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도 그렇게 하면 교회가 된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가 된다는 것과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 와서 가르침을 받았을 때에 그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면서 그 가르침을 그때와는 다른 현대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표현하면서 사회를 개혁하면서 사는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박사과정까지 공부를 하고 교수를 그만 두고 개척교회를 하니까 누가 나보고 학위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자유롭게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20년 동안 참 많은 책을 읽었고 자유로운 공부를 하면서 한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20여년의 과정을 통해서 학문을 하고 목회를 한 번도 쉬지 않고 하면서 내려진 결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재앙은 목사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두 눈을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불가불 교회를 한쪽 눈에 한주씩 교회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 입원했는데 사지는 멀쩡하니까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주일날 근처에 있는 예배당을 찾았습니다. 그 눈을 해가지고 본 교회 가기도 그렇고 해서, 오전에는 장로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고 어느 교단은 얘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합동측은 아닙니다. 오후에는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정말로 목사에게는 예배를 드릴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오랜만에 부담 없이 아래에 앉아 설교를 듣는데 한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는 못 느껴본 것입니다. 어떻게 저것을 설교라고 할까? 교인이 이백 명 정도 모입니다. 주일 낮 예배인데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목사를 잘 섬겨서 복 받은 이야기, 시종일관, 그리고 부자 된 이야기, 물론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 소중한 주일 예배시간에 그런 설교를 누가 듣고 목사님한테 돈으로 섬기고 무엇으로 섬기고 했더니 자손들이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후에는 침례교회는 낫겠지 하고 갔습니다. 제가 그래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유명한 학자는 아니었으니까 내가 공부를 해도 자기만큼은 공부를 했습니다. 거기 앉아 있는 평신도들 중에서 내가 최고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평균 이상 되는 지적인 능력은 갖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설교시간 내내 정확하게 이해되었던 시간이 성경봉독 시간이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은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하는 것일까? 그래도 앞에 있는 장로교 목사는 선명했습니다. 목사를 잘 받들어라, 그러면 잘된다. 그런데 침례교회는 그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 몇 사람한테 들었습니다. 예배에서 어디에서 드리고 왔는데 속에서 분노가 생겨났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저렇게 할까? 그것은 지식의 문제입니다.
선교사가 설교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처음 온 사람들에게 전도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를 십년 가까이 했고 성도들이 삼사십 명 모였는데 거기서 목회자가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은 읽었는데 계속 설교시간 내내 반복하는 것이 구호입니다. 따라합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됩니다. 믿습니까? 아멘. 그것을 삼십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하면 됩니까? 오늘 여기가 정글 속으로 들어가는 원주민 첫 번째 집회라면 내가 이해를 합니다. 여기에서 십년 이상 목회를 했고 이 사람들이 당신한테 복음 전도를 받고 큰 사람인데 당신은 지금 열 살 먹은 아이에게 맹물 탄 미음을 먹이는 중입니다. 다 영양실조입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상담 하나 해 주십시오. 내가 무슨 원주민을 상담하나 했더니 이 사람들이 영어를 할 수 있으니 상담해달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목회자 다음으로 권위를 가지고 성도들을 돌보는 여자인데 평신도 최고 지도자인데 상담할 이야기가 있답니다. 남편하고 25년 동안 각방을 쓰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평신도 최고 지도자입니까? 남편을 용서를 못한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제 엄청나게 많은 사역에 시달립니다. 교회가 이제 백화점입니다. 어머니학교, 아버지학교, 자녀학교, 성품학교, 제자훈련, 찬양학교, 예배학교, 기업경영학교에다가 심지어는 별의 별 것들을 만들어서 목회자들 자신이 자기 교회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지를 외우지 못할 정도로 백화점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되는 얘기, 안 되는 얘기, 다 듣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옛날과는 달라서 사회적인 책임을 요구하고 합니다. 옛날에 돌아가신 옥 목사님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김 목사 우리나라에 3D 업종이 세 개 있단다. 대학총장, 돈 거두러 다니는 사람, 두 번째는 종합병원 원장, 세 번째가 대형교회 목사랍니다. 목사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도 과로의 측면이 많습니다. 일주일에 여섯 번씩 설교를 했는데 거의 녹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들은 잊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경영하고 교회가 그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섬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고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지식이나 일리, 인간의 상식, 이런 것들로 가지고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바꾸는 것만이 목회자가 하여야 할 고유한 사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총신 총장님을 지내던 교수님을 만나서 저녁 내내 대화를 했는데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당신이 길러 놓은 제자들이 졸업을 했는데 실직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저보고 물으십니다. 어디엔가 사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하는데 정말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은 이제 교회를 개척하면 된다고 하지만 되지 않습니다. 정말 되지 않습니다. 후배들에게 무엇을 할까를 생각을 하지 말고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 나의 마음속에 있냐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목회는 선교는 이 안에서 자신이 거역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에 대한 열정이 동력이 되어야지 큰 교회를 하겠다는 비전이나 아니면 선교사로 나가서 외국 생활을 해 보겠다는 희망이 선교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갈증들이 이 속에서 막 솟아나야 되는데 진리에 대한 외치지 않으면 뼈가 녹는 것 같은 어떤 진리,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고 하는 예레미아 적인 그런 불붙는 그 어떤 메시지가 자신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돈이나 이 세상에 있는 지식이나 사회적인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선교사나 목회자의 뒤를 봐준다고 해서 생겨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자신이 각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께로 내려오는 어떤 빛을 받으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일본의 바둑의 역사에 보면 양쪽의 두 가문이 맞붙어서 바둑을 둡니다. 거기에 토혈국이라는 기보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양쪽에서 바둑을 두다가 한쪽이 졌습니다. 자기가 졌다라고 확인하는 그 순간 칼로 찔린 게 아니라 너무 원통해서 반상에다 피를 쏟고 엎드려져 죽어버렸습니다. 절명을 해 버렸습니다. 그게 지금도 역사에 토혈국이라는 기보로 내려옵니다.
오락을 하다가도 지니까 너무 원통해서 피를 쏟고 죽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들고, 진리의 말씀을 들고,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소명을 가진 사람에게 그것을 외치고자 하는 어떤 피 묻은 열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저 신앙적인 차원에서 그가 아직 사역에 들어설 사람이 아니라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서 선교지를 돕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를 심어서 그들에게 정말 하나님 앞에 사는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그 사람 속에 없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에게 유행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입에서 나온 말은 일반적으로 귀에까지 간다. 그것이 정말 성공하면 머리에까지는 들어간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성공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무엇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자신의 목회 철학이나 인생관이나 이 세상에서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의 하나의 이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 인류가 살고 죽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그것이어야 합니다.
(예화) 교회에서 주일학교 한 학생이 회심을 했습니다. 엄마에게 갔습니다. “엄마 나 오늘 예수님 만났어. 어떻게 만났니? 눈꺼풀이 촉촉이 젖으면서 엄마 나 오늘 예수님 만나고 구원 받았어. 나 예수님 너무 사랑해. 왜 그랬어?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나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많이 설교를 해 주셨어. 그때는 난 믿어지지 않았어. 그런데 오늘 성경 공부시간에 우리 선생님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말씀하면서 눈물을 흘리실 때 나는 그 모든 말씀이 믿어졌어.”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제가 많은 선교지와 목회지를 다니면서 동역자들을 만나면서 마음의 염려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공부를 너무 안합니다. 24시간 중에 책상에 앉아서 성경을 설교를 위해서 본문을 찾는 것 말고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성경을 읽고 탐구하고 성경의 이해를 심화하기 위해서 신학 책들을 읽고 또 성도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회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이 진리를 적실성 있게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이 성도들에게 던져주어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신자의 삶을 살아가게 할 것인가를 위해서 자기를 헌신하는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한 6-7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저보고 인터뷰를 하자고 제의가 왔습니다. 저는 신문에, 방송에 얼굴 나오고 하는 이런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싫었는데 불신자가 하는 잡지입니다. 홍보실에 이야기를 해서 이런 요청이 있는데 나는 하기 싫은데 한번 생각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다 검토를 하더니 한번 선교적인 차원에서 응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났습니다.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 잡지사인데 인물들을 다루는 것입니다. 정치계, 종교계, 문화계, 체육계를 다루다가 종교계가 나왔는데 카톨릭도 했고 불교도 했고 개신교 차례가 왔는데 몇 번을 돌았는데 이번에는 당신을 인터뷰를 했으면 좋겠다고 그럽니다. 질문을 하는데 불신자니까 신자들이 질문하는 것과는 다른 얘깁니다. 왜 인간으로 태어나서 예수를 믿어야 되는가? 진화론, 창조론, 이런 식들의 질문을 하는데 쭉 얘기를 했습니다. 인터뷰가 한 시간 반 정도 하고 끝났는데 불신자가 얘기합니다. 목사님 제가 수많은 개신교 목사들을 인터뷰를 했는데 목사님이 목사님 같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개신교 목사를 많이 인터뷰했는데 목사님은 좀 다르십니다.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고 스님 같으십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고 고승 같습니다. 그때 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나는 즉각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많이 인터뷰했는데 비즈니스맨 같았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을 인터뷰했는데 철학자 같았습니다. 그 얘기가 그 속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라 그렇게 말은 못했지만 나는 그 의미를 간파했습니다. 물을 얼굴에다 확 뿌린 것 같은 자괴감이 밀려 왔습니다. 불신자가 기독교, 불교에 가지고 있는 인상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목회자의 마음속에, 선교사의 마음속에는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가 이 안에 넘쳐나야 됩니다. 그것은 공부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생활,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깨닫는 은혜의 생활이 제일 먼저 중요합니다.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최근에 성경 읽다가 울어본 적 있습니까?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이렇게 놀랍구나,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은혜를 주셨구나, 그래서 성경에 얼굴을 묻고 울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유명한 말, 삶의 방식이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합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의해서 가르침은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서 치열하게 전도하는 사람은 원고가 필요가 없습니다. 전도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전도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터지면서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 많이 한 사람은 기도의 가르침이 풍부한 것입니다.
목회자와 선교사는 누군가 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자신 속에 계속 축적되어야 하는데 어떤 진리들이 축적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 이렇게 한 사람이 있고 이것이 온전한 삶이라고 하면 이중에서 전도 하나만 하고 나머지는 찌그러진 사람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전도하라고 하면 기운이 펄펄 나고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하게 강조를 합니다. 가정에 대해서 얘기를 하라고 하면 주저하고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가정이 깨어졌으니까,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교와 목회의 사명은 디모데에서 나오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정확하게 계승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입니다. 온전케 하는 방법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서 그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에 의해서 성경의 진리들이 구체적으로 조직되고 이해되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경만 읽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가 목회자와 이단들을 만나 보니까 성경만 읽는 것은 성경은 안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성경과 학문을 균형을 이루어서 하되 이 수많은 책들이 한권의 책으로 향하도록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한권의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면서 이 진리의 말씀들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 그래서 불완전하고 망가진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 에베소서에 보면 하나님이 일꾼을 세우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나옵니다. 온전하다는 희랍어가 복음서에 나오는데 그것은 찢어진 그물을 깁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망가지고 찢어지고 뜯어진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기워지고 온전해지는 그것이 바로 목회와 선교사역이 감당해야 될 사명인데 그것이 좋은 인간성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공적인 비전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을 가지고 목회사역을 해 나가서 목회 사역이 두루두루 펼쳐지는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두루두루 펼쳐지는 것과 일치를 해야지 목회에서 위대한 비전과 성공을 이루었지만 진리와는 상관이 없다면 뭐하겠습니까? 빌딩덩어리, 어마어마한 교인들, 그 속에서 무슨 장.차관이 나오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교회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진리를 배우고 그런 다음에 이 세상 어디에다 흩어져서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 빛으로 살고 소금으로 사는 그 삶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도록 이바지하면서 살고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알지 못했을 진리의 말씀을 발견하고 깨달은 그 무엇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목회사역, 선교사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속에서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것을 가지고 제가 한 3년 전에 한 권의 책을 썼는데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으로 산다는 것은’ 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나오는 빛,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가르침의 원조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미 구약에 빛에 대한 사상이 풍부하게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구약의 빛에 대한 이해의 뜻을 가지고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그 빛이 00입니다. 이 단어가 창세기에 처음 나오는데 1장에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 제일 먼저 창조된 것이 빛입니다. 시편 115편에는 여호와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고 나옵니다. 이러한 빛은 신약성경에 와서 예수님에 의해서 해석이 된 것입니다. 빛이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지만 이 의미가 신학적으로 사용이 될 때는 의심할 여지없이 진리입니다. 진리의 빛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할 때 그때도 역시 이 빛입니다. 이 진리를 빛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빛의 성질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뉴턴 같은 사람은 이 빛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했나 하면 빛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이다. 빛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서 그 빛이 없었더라면 못 보았을 사물들을 보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 자체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지만 진리의 빛을 가지고 이 빛을 통해서 예전에는 못 보던 것을 이 진리의 빛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 해야 될 중요한 사명이 바로 이 진리입니다. 캄캄한 성소에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았는데 등불에 빛이 비추어지면 찬란하게 빛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그렇게 모든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을 모든 인류의 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도덕적인 기준, ‘베리따스’라고 하는데 이런 진리가 기준이 되고 모든 인간들이 이 진리를 돌아감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진리주의적인 삶, 절대적인 어떤 진리가 있다는 사상들이 다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중심이 되고 하나님도 사람에게로 다시 돌아오셔야 할, 하나님도 옛날처럼 그러시면 안 되고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인간에게 맞추어주셔야 할, 그런 시대가 된 것입니다.
어제 정 목사님 회개하여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너무 놀라운 것이 교회에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회개와 중생, 중생과 회심에 대한 선포들이 사라집니다. 그들이 의식을 못하고 있지만 이러한 다원주의적인 현대사상,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현대사상, 인간을 중심에 놓은 현대사상이 바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이것 대신 사라지고 다시 들어온 것이 상처입니다. 난 상처 받았어 하면 다른 사람은 끔뻑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관념이 사라지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자기가 손해를 입히고 이런 것들에 대해 못 참는 상황이 생기는 것입니다. 벌써 계몽주의 사상 이후로 서서히, 서서히 데카르트, 칸트, 스피노자, 이런 사람들을 거치면서 세탁이 되면서 인간 중심의 사고에 대전환이 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현재 개신교가 윤리적으로 잘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전부 다 한 시대에 태어나면 그 밥에 그 나물이지 무슨 종교가 특별히 다른 것이 있습니까? 개신교가 욕을 많이 먹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언론들을 다룰 수 있는 통일된 창고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개신교가 지향하고 있는 신학적인 코드 자체가 현대 사람들에게는 아주 불편한 코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는 죄인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행복을 얻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간다. 이런 코드들이 인간을 절대적으로 기준으로 생각하는 현대사상하고는 너무 불편하게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서 우리들이 이런 진리를 포기하고 교회의 말씀이나 선포들을 복음을 세상 정신으로 희석을 식혀서 그렇게 해서 세상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현실 적응적인 교회로 갈 것인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듭난 사람으로 보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수의 영이 안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그 사람들을 잘 길들여진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이 있는데 종교적으로 잘 길들여져서 예의바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 살아서 빛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이 너무 타락했다고 하는데 세상이 타락하지 않은 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진리가 너무 외롭다고 하는데 진리가 보편화 된 시대가 있었습니까? 정의는 항상 박해를 받는다고 하는데 정의가 우세했던 시대가 도대체 어느 시대에 우세했습니까? 미국이 한국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시스템이 잘 되어있다고 하지만 그 이후에 뉴 올리안즈 사태를 한번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약탈과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결국 인간의 본성이고 인간이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안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말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 변화는 세상의 지식과 인간의 상식으로 온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정말 치열하게 어떤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교회에서 강단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고 돕고 있습니다. 제가 항상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네가 선교된 것만큼만 선교한다. 김준곤 목사님이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선교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인공위성 같다고 하셨습니다.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두 시간 사십분에 한 바퀴씩 수없이 돌지만 한 번도 지구와 만난 적이 없는, 떠난 그때 이후로는 만난 적이 없는, 만날 예수님 얘기하고 선교 얘기하는데 예수님은 만나는 적은 없이 계속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목회자의 삶이고 선교자의 삶이 된다고 한다면 그 속에는 생명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와의 맞딱드림, 진리와의 부딪힘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진리를 잃어버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역사가 보여주는데 경건주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 자유주의가 밀려오면서 19세기 후반 쯤 됩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제가 적어 왔습니다. 실제로 찰스다반이라고 하는 사람이 설교의 역사를 구하는 고전적인 책 속에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독일 교회에서 18세기 넘어 19세기 넘어 가면서 주일날 설교 되었던 설교 제목입니다. 들어보십시오. 하나의 음료로서 커피의 가치,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말할 수 없는 축복, 가축들을 축사해 먹이는 것보다 방목하면 더 좋다, 이것이 주일 설교제목입니다.
여러분 혹시 아브라함 카이퍼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아브라함 카이퍼는 존경할 만한 위대한 학자요 철학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볼렌호븐 같은 사람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의 사상을 키우면서 세운 학교가 화란의 자유대학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 시대의 물을 먹은 사람이 이성주의자였습니다. 설교를 하고 내려오는데 한 노파가 주일마다 목사님의 손을 잡으면서 사진도 있는데 악수를 하면서 젊은 목사에게 ‘목사님 오늘 말씀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좀 들려주십시오.’ 매주 똑같은 자리에서 들으니까 이 카이퍼 목사님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내가 마음에 없어서 그렇지 내가 하라면 못할 줄 알고 그리고는 설교를 해보려고 했지만 자기 안에 설교한 재료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어느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서 자유주의자에서 칼빈주의자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정말 선교를 하고 목회를 하려면 주님을 깊이 만나야합니다. 그리고 그 만남 만남이 왕년의 만남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누구나 다 왕년에 은혜로 살았습니다. 왕년에는 왕년의 은혜로 살았고 금년에는 금년의 은혜로 살아야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과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매일 접하면서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이 마음에 심겨져서 믿음이 매일 매일 강화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교사나 목회자들은 믿음을 이미 끝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렇게 마스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에게도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배를 타고 갈릴리로 가시다가 풍랑을 만날 때 살려달라고 제자들이 호들갑을 떠니까 예수님이 질문하셨던 내용이 그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도 옛날 한때에는 모든 것을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고 불완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은 목사라고해서 큰 믿음을 가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목사요 학자이신 분이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교회에서 성공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데 주님이 자꾸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하고 와서 그 교회에서 평생 사역하라는 것을 사인하라는 것을 싫다고 하고 일단 시간을 달라고 하고 한국에 와보니까 너무 비관적입니다. 왜냐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집값이 오르고 자기가 가진 재산으로는 가족들이 함께 쓸 수 있는 전세도 부족한 것입니다. 일자리를 구하기로 어렵고 그래서 가족들이 모여서 낙심을 하고 있는데 다섯 살 먹은 아이가 그러더랍니다. ‘아빠!’ ‘왜?’ ‘하나님이 도와주셔도 안 되는 거야?’ 그때 온 가족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도와주실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들이 하지 않았구나!’ 그리고 자기가 믿음으로 한국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다섯 살 먹은 애만도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장간에 성한 칼이 없다고 합니다. 만날 믿음을 가지라고 이야기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잘 믿어야합니다.
그런데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해서 이해하는 것은 같이 가야할 성질의 것입니다. 감동적인 구절이 한 구절 있어서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22페이지를 보십시오. 22페이지 각주 6번입니다. 이것이 안셀무스의 『프로슬로기온』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주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오, 주님! 저는 당신의 높으심을 꿰뚫어 알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은 저의 지성과 비교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이 있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기 위해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때는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는다는 뜻입니다. ‘믿기 위해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믿습니다.’ 이것은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탐구를 하면 반드시 사람이 차가운 사람이 되고 진리를 믿는 뜨거운 열망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부를 신앙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믿었는데 그것이 지식에 대한 욕구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올바르게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을수록 탐구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겨나고 그리고 잘 탐구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제가 선교지에 가서 세미나를 하는데 영국을 자주 갑니다. 영국에 가서 목회자를 만나는데 이제는 그러지 말고 매주 월요일마다 모여라. 먼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공부를 해라. 그리고 책을 가지고가서 몇 권을 주었습니다. 매주 모여서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니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이 와서 만날 가르치기만 했지 배워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같이 공부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 공부가 기도회가 되고 그러면서 교회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200km 씩 차를 타고 가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인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한국에서 목회자를 하면 만날 월요일에는 돈 많은 사람은 골프 치러가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볼링을 치러 다니는데 그러는 것도 좋지만 오전의 많은 시간은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족구도 하고 테니스도 하고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개장수를 하려면 오랏줄이 있어야 개장수를 하지 머리에 아무것도 든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선교와 목회에는 설교가 풍선 같은 설교가 있고 빙산 같은 설교가 있습니다. 풍선은 물위에 뜬 것이 전부 다입니다. 뭔가를 듣고 나서 ‘목사님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물으면 그 다음에 답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질문을 하지 열심히 기도하면 되지!’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빙산 같은 설교는 1/10만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고 이상해서 물어보면 한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이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설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문을 하고 그렇게 깊어지는 가운데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그 학문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고 내일 써먹을 공부를 하려고하니까 남의 설교집을 보는 것입니다. 설교집을 보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집을 보아서 그것을 카피해서 쓰고 어떤 부흥사는 한국교회 목사의 설교집을 아예 뜯어가지고 다니면서 하는 것을 내가 보았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쏟아져 나와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경을 읽고 학문을 계속 공부하고 연마하면서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진리를 가르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루만 시간을 내어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쓴 환경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이런 책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 사람들은 사상과 현실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찾은 것이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에게 그런 고민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해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보다는 딴 나라 사람들이 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책을 읽으면서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축구경기를 하면 골을 잘 넣어야지만 공격을 통해서 열 골을 집어넣었는데 수비가 아무것도 못해서 열두 골을 넣게 했다면 지는 것입니다. 공격도 잘하고 수비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은혜 받은 이야기,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되고, 예수님을 믿어야하는 이유도 설명해야하지만 안 믿는 사람들에게 왜 안 믿는지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불신앙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것인가? 하는 공부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일평생 그렇게 탐구하고 공부하면서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에는 다섯 번을 설교합니다. 그런데 설교시간이 70분정도 되니까 5번을 하면 너무 아파서 뻗어버렸습니다. 영상을 틀고 집에 와서 링거를 맞고 드러누웠습니다. 그 다음은 월요일입니다. 밤새도록 앓고 월요일에는 제가 공부하는 날입니다. 7시에 새벽기도를 못나가고 가방을 챙겨서 평소처럼 공부하러 갑니다. 우리 집사람이 현관에서 팔을 붙들고 ‘여보 가지마! 오늘 쉬어야해!’ ‘아니야 공부해야해!’ ‘여보 30년 넘게 공부했잖아! 그러니까 이제 당신 공부하지 않아도 충분히 당신 설교 어렵다고 투덜거리니까 이제 그만해!’ ‘아니야 나는 가야해!’ ‘여태까지 공부한 것 가지고 우려먹는데 아직 충분해 가지마!’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매주 이 추위에 떨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저 밑 막장 탄광으로 내려가서 일주일 내내 곡괭이로 석탄을 캐서 들통에 지게에 지고 올라와서 주일날 하루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성도들이 그나마 온기를 느끼도록 만들어 주어야하는 사람인데 내가 오늘 한주일 동안 석탄 캐러 내려가지 않으면 그 다음주일에는 성도들이 추위에 떨어야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그러지 마라! 놔라!’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옵니다. 내가 늘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모두 성공한 목회를 하거나 진실한 목회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으면서 진실해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왜? 진실해지려면 나는 모른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어떻게 매주 모른다고 합니까? 그래서 부지런히 탐구해야합니다.
여러분은 크리소스톰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저는 30대 때에 이 사람의 설교를 모두 공부하는 일에 공을 들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이 황금의 입입니다. Golden Mouth입니다. 어머니는 20세도 채 안된 나이에 홀로되었고 탁월한 미인이었습니다. 수많은 귀족들의 유혹이 있었지만 뿌리치고 오직 이 크리소스톰 하나만 길렀습니다. 그 사람이 설교한 곳이 그 유명한 이스탄불에 있는 소피아 성당입니다. 소피아성당 그 자리가 바로 크리스토톰의 설교하던 예배당이 있던 자리입니다. 시골에서 설교하던 그 사람을 거기에 있는 귀부인들이 작당을 해서 납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오자마자 그는 교회에 있는 금과 은을 다 떼어서 두들겨서 팔아버리고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의 양식을 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귀족들의 사치한 생활과 방탕과 불의를 통렬하게 탄핵하다가 결국은 순교합니다. 그 사람의 설교를 구할 수 있으면 읽어보십시오. 번역은 되지 않았는데 ___시리즈에 보면 나옵니다. 이게 과연 인간이 한 설교인가 할 정도로 감탄할만한 내용들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설교를 하기까지 10대 때부터 치열하게 연구해온 수사학적인 훈련과 성경에 대한 연구, 설교에 대한 구조, 내용의 전달하는 면에서 탁월하게 나옵니다. 7세기에서 8세기에 있던 동방교부 중 제가 아주 좋아하는 신학자 한사람이 있는데 다마스쿠스의 요한이라는 인물입니다. 다메섹의 요한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사람은 정통적인 신학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책을 몇 권 읽었는데 정말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합니다. 이 사람의 별명은 황금의 입보다 더 뛰어납니다. 뭐냐 하면 ‘황금의 청산유수’입니다. Golden Stream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젊었을 때 엄청나게 헌신했습니다.
저에게 목회와 사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4명의 인물이 있는데 대학을 다니던 만났고 존 오웬 목사님을 만나서 한 25년 멘토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만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예일대학에서 나온 28권으로 된 전집을 제가 거의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저는 교만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정말 이 사람이 뛰어난 학자다. 사상가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한 번도 이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누구의 책을 읽어도 정말 뛰어난 사람이다 존경할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두 권을 읽으면서 제가 그것이 깨졌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천재입니다. 6개월 동안 읽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이고 김남준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탁월한 지각을 주시고 나는 이렇게 작은 것을 주십니까? 그리고 6개월 동안 기도를 했는데 응답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제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아니고 내가 깨달은 것은 그것입니다. ‘얘야, 어거스틴은 너와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단다.’ 그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 사람처럼 신학을 했으면 하고 가슴속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남긴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아우구스티누스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나는 싫어합니다.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청교도만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거스틴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화를 하면 넓고 깊습니다. 저에게 미친 영향은 말할 수 없고 우리 교회에 아우구스티누스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이렇게 4개의 작은 공원입니다. 그 사람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원어)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당시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철학자가 아니라 신학자입니다. ‘진정한 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했는데 엄청난 양의 공부를 했던 사람입니다. 청교도 존 오웬은 아주 탁월한 사람입니다. 제 인생을 거의 바꿔놓은 사람입니다. 제가 존 오웬의 신학에서 간증도 썼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고 한 1년쯤 되었을 때 번아웃되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목이 너무 아파서 누워있는데 그때 ‘존 오웬을 읽어보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존 오웬을 꺼내서 힘이 없으니까 침대에 기대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400년 전의 아주 어려운 영어입니다. 어쨌든 천천히 천천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일주일을 읽고 나서 우리 집사람을 앉혀놓고 그랬습니다. ‘여보 나는 짐승처럼 살아온 것 같아.’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깊이 읽었습니다. 1년 가까이를 눈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오웬을 계속 탐독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탁월한 학문을 가졌고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10대 때에 거의 죽을 뻔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에드워즈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엄청나게 공부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늘로부터 두루마리가 내려왔는데 천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그 이야기가 들렸을 때에 세례 요한이 거의 100세가 되었던 늙은이였는데 이 노인이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희랍어성경에 ‘에카라이어 홀리’라고 나오는데 흐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서 방성대곡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기록해서 아시아에 있는 7교회에 보내야하는 것이 요한에게 주신 사명이었는데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도 뜯어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엇인가 알아야지만 자기가 외칠 텐데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두고 온 가족이 그리워서입니까? 아닙니다. 목회지가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사역에 성공을 하지 못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입니까? 오직 한 가지 이유입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통곡하면서 울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등잔불 그 불빛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 불빛을 비추기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 엇습니까? 감람유였습니다. 성경에서 이 감람유 기름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상징이고 또 이것은 언약과도 관계가 되고 특별히 이것은 성령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 해석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져야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도 진리의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조엘 오스틴이라는 사람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대단한 인물입니다. 미국에 가면 호텔에 들어가서 TV를 켜면 이 사람이 나옵니다. 머릿속으로는 ‘저것은 되지도 않는 소리야. 저것은 개소리야.’ 그런데 리모컨을 못 끄는 것입니다. 설교자인 내가 보기에도 너무 재미있습니다. 그림같이 탤런트처럼 예쁘게 생긴 사람이 원고도 없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리고 귀족타입입니다. 어디를 봐도 착해 보입니다. 그런 사람이 4만 명 이상 되는 사람을 모아놓고 아무 원고도 없이 설교를 하는데 적절한 조크와 지식과 예화를 가지고 많은 사람이 울었다 웃고, 웃다가 울고 그러는데 이 리모컨을 들고 30분을 서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서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갓프리 총장하고 줄리스 교수가 저를 맞이해주었습니다. 그들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설교라는 주제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각광받고 있는 조엘 오스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조엘 오스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어떤 사람은 조엘 오스틴이 영지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 현대 번영주의의 합성으로 볼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신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설교에 신학이 있습니까?’ 나는 한마디로 답했습니다. 조엘 오스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문제는 뭐냐 하면 순수한 진리의 선포가 있고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경험하게 해주는 성령의 순수한 역사가 사라질 때 인간은 비성경적인 신비에 눈을 뜨게 되고 그리고 뭔가 성경이 우리에게 원하지 않는 지시하지 않는 방법으로 신앙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번영주의이든지 아니면 그것이 쾌락주의이든지 아니면 그것이 신비주의이든지간에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친다는 것은 너무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성경의 진리와 신학의 지식을 아무리 잘 가르쳐도 그것은 갈멜산 위에 쌓아놓은 장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위에 불이 내려서 도랑의 물을 핥듯이 다 태워버리고 그리고 그 쌓아놓은 장작에 불길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미국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욕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 받지 말고 목회질이나 해라.’ 이것이 일반사람사이에서도 한때 악담이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이 보기에도 목사는 성령을 받아야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87년도의 일이었습니다. 수련회에 갔습니다. 설교를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고등부 전도사였는데 매주 밤 토요일에 가방을 싸서 교회에 가서 200명 들어가는 고등부 예배당에 가서 2시간에 걸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청소를 했습니다. 사찰이 청소하는 게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아서 깨끗이 청소를 하고 가운데 스티로폼을 하나 펴고 밤새 기도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대를 닦으면서 마지막으로 기도했습니다. 내가 내일 여기서 설교 할 텐데 반드시 내 설교를 듣고 아이들이 거듭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기도했는데 그 속에서 다 말씀드릴 수 없는 어떤 영적인 전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수련회에 갔습니다.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폭우가 쏟아져서 우리가 산속에서 고립되었습니다. 군부대에 구조요청을 해놓고 우리는 집회를 했습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가발전기로 통통거리며 희미한 불빛으로 모여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그리고 회개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그렇게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면 하나님이 장단을 맞춰주십니다. ‘우르르 쾅’하고 번갯불이 쫙 번쩍이면서 저쪽에서 천둥소리가 쾅 하고 나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회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는데 ‘우르르 쾅!’ 8시에 예배를 시작했는데 찬양하고 대표기도하고 길게 설교하지 않고 9시쯤 설교가 끝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다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면서 그 기도가 새벽1시에 끝났습니다. 1시 반쯤 되었는데 장로님이 저러다가 애들이 정신적으로 어떻게 되는 것 아니냐고 이제 멈추자고 그러셔서 애들이 기도하다가 너무 지치니까 졸도하고 쓰러지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주님을 깊이 만났는데 그때 제 마음에 든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신학이었습니다. 뭐냐 하면 신학을 하면서 제가 많은 책들을 읽고 배웠는데 이것은 흑백사진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은 총천연색 동영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그렇게 묘사한 것이구나! 그제야 이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결국은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 사상이나 칼빈의 하나님 주권사상이나 섭리사상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주님을 깊이 만난 체험으로부터 우러난 신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성령의 신학자였기 때문에 죽음을 불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그가 체포되어서 보름스로 갑니다. 마르틴 루터가 보름스회의에 끌려갔습니다. 거기에 서있는 것입니다. 카제탄을 비롯해서 당대에 저명한 가톨릭의 석학들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때 독일의 황제가 카알 5세였습니다. 카알 5세가 ‘루터! 우리 제국에서 이렇게 혼란을 일으키느냐 네가 믿는 바를 철회하라. 그러면 너를 살려주겠다.’ 그랬더니 마르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믿는 이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성경의 진리와 건전한 이성으로 입증하지 않는 한 나는 이 진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긴 유명한 어록이 있습니다. ‘Here sta,y 이히칸 리히츠’ ‘내가 여기 서있나이다. 내가 달리는 어찌할 수 없나이다. 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그것입니다. 그리고 갑니다. 그때에 프레더릭 3세가 작센에서 재워주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아무래도 가톨릭에서 열 받을 대로 열을 받아서 죽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사를 보내서 납치를 해버립니다.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을 시킵니다. 가톨릭에서 납치해서 죽여 버렸다고 소문을 내고 그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루터가 신약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을 깊이 체험하면서 사람이 그려낸 것입니다. 저도 책을 많이 내었는데 내 책을 읽으면서도 똑같을 것입니다. 나도 책을 총천연색으로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는 한계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아무리 학문을 공부하고 여러분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고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해도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좀 더 알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흑백을 총천연색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흑백사진도 백만화소하고 백오십만화소하고 천만화소짜리하고 다르니까 공부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펼쳐놓고 설교를 했는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가장 명료하게 귀에 들어오던 순간은 성경을 봉독하던 시간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성경봉독 위에 뭔가 자꾸 가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은 정말 위대하구나! 그러면서 어린마음에 사실 어리지도 않았습니다. 신학교 선생님이 갓 되었을 때입니다. 각성이 밀려오면서 그런 갈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 신학공부는 학문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더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만나는 것이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그리고 정말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요새는 저도 많이 타락한 것 같습니다. 게으르고 나이가 드니까 몸이 불편합니다. 주일에 설교를 하고 월요일에 새벽기도 안 나오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설교했는데 지금은 비성경적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정말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하루에 3시간씩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신학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수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바크레이라는 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회자는 여러 가지 재능을 가질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행정가일수도 있고, 학자일수도 있고, 연설가일수도 있고, 운동가일수도 있고,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뭐가 이렇게 범접할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거룩한 권위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하는 그 어떤 영적인 위대한 능력 그것이 그 속에 있어야합니다.
청교도 역사입니다.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유명한 청교도입니다. 목회자들이 모였습니다. 사회자가 ‘오늘 우리 모임을 위해서 아무개 목사님이 기도해주시겠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빨리 기도해라. 우리 회의도 해야 하는데 빨리 기도해라.’성령께서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는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오, 주여’ 그 순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목회자들의 모임에 회개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역사입니까? 연설을 하지 않았는데 ‘오, 주여’ 라는 말 한마디로 하나님의 탄식하시는 마음이 목회자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7, 8년 되었는데 어떤 교회의 성탄예배 때 철학자 한사람이 왔습니다. 그 사람은 플라톤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학교에 강의도 나가는 사람이었는데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를 다녀주는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철학하는 사람은 예수를 잘 믿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있는데 철학을 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집이 멀리 있는데 아내를 따라서 처남 집에 왔다가 이 교회에 가자하여 그 교회를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와서 보니까 교회의 의자가 너무 푹신하더랍니다. 그래서 잘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전날 24일에는 가족들을 처남 집에 두고 실컷 술을 먹고 왔기 때문에 ‘여기서 푹 자야지’ 하면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성경본문을 읽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설교는 시작하지도 않고 성경본문을 읽었는데 이 철학자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지?’ ‘뭐야?’ 그러는데 설교시간 내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배당에 와서 펑펑 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지?’ 집에 돌아가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제 너무 피곤해서 신경과민으로 말하자면 멜랑꼴리하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다. 아내는 다른 쪽에서 예배를 드려서 남편의 사정을 모릅니다. 남편이 좀 멀기는 하지만 다음 주에 그 교회 참 재미있으니 한 번 더 가보고 싶다. 부인이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대전부터 올라와서 참석했는데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 그러면서 가다가 그래도 세 번은 해봐야지 그러면서 다시 삼주 째에 올라왔습니다. 똑같은 현상이 있으니까 ‘아 이것이 바로 플라톤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체관, 인슐리션이구나’ 불교용어로는 득도입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한 순간에 소위 이야기하는 일자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그렇게 말하지만 하나님입니다. ‘아 이것이로구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6개월 만에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신학 교과서를 다 읽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성경 없이 누군가가 그 철학자를 놓고 네 철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계속 논쟁을 해서 설복을 시켰다고 칩시다. 예수를 믿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슨 역사입니까? 순수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선교사님들이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그런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선교지에 와서 너무 하지 마십시오.’ ‘왜?’ ‘아프리카는 다릅니다. 프랑스는 다릅니다. 필리핀사람들은 독특합니다. 일본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다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옛날에 있었던 부흥의 역사를 다 다시 써야합니다. 똑같은 일들이 옛날에도 선교사는 똑같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과 미국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 똑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이기 때문에, 필리핀사람들이기 때문에, 아프리카사람이기 때문에, 프랑스사람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을 미국교회사에 보면 테리미팅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테리가 무엇입니까? 영어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선교지에 나가면 사역을 해나가면 열매가 너무 없습니다. 돌아가서 테리미팅을 하는데 숲속에 들어가서 사역자들이 무기한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소명을 거두시든지 소명을 주셨다면 소명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때까지 우리는 테리하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성령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내가 설교자로서 후배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선 설교가 설교다운 설교가 되려면 재료가 좋아야합니다. 프랑스빵이 왜 맛이 있느냐하면 밀가루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햇빛이 좋은 땅에서 밀가루 자체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선 성경의 진리를 잘 캐어야합니다. 그것을 가루로 만들어서 그것을 눈물로 반죽해서 성령의 오븐에 구워야하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성령의 오븐에 잘 구워야하는 것입니다. 할 이야기는 많지만 마지막으로 5분 안에 정리를 하겠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찧어낸 감람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이라고 했습니다. ‘세멘 자이크 자크’ 라고 나옵니다. ‘세맨 자크 카티트’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기름입니다. 올리브입니다. 이것은 순결하다는 퓨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문제인데 따뜨라는데 이것은 카타트라는 말에서 나옵니다. 동사의 피동분사입니다. 남성 단수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카타뜨는 무슨 뜻이냐 하면 ‘To Break.’ 깨뜨리다라는 뜻입니다. 혹은 파괴하다는 뜻입니다. ‘Break, Crush’ 즉 부수다 는 뜻입니다. 수동태입니다. ‘부서진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당시에 감람유를 짜는데 우선 감람을 깨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에 그것을 프레스에 넣고 꽉 누릅니다. 그러면 기름이 나옵니다. 많은 양의 기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억지로 짜내니까 불순물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성소에서 불을 밝히는데 사용하는데 거기에는 그을음이 나오고 불의 밝기가 밝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감람이 있으면 그것을 씨를 그냥 깨뜨리는 것입니다. 연자 맷돌 같은 데에 넣고 계속 돌려서 깨뜨려지면 그것을 짜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 깨어진 사이에서 기름이 흘러나옵니다. 그것들이 골을 타고 내려와서 채집되는 것입니다. 그 기름이 바로 ‘세맨 자이크 자크 까띠뜨’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기름입니다. 이 기름은 아주 밝고 불순물이 없기 때문에 밝은 불빛을 냅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저 인간이 변화되었으면 좋겠다. 왜 저따위로 살까? 그러고 설교를 하니까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설교가 이렇게 왔다가 이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 말씀하셨습니까?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서 1장 4절입니다. Into입니다. 호세아가 이렇게 있으면 호세아의 귀에다 들려주고 입으로 말하라고 전달하신 것이 아니라 호세아에게 들려주신 것이 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서 이사람 자신을 깨뜨리고 변화시키면서 그래서 이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예수의 복음이라고도 했지만 내 복음이라고도 했습니다. 나를 깨뜨리고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더 하고 싶지만 마치겠습니다.
조그만 더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것입니다. 심오한 것입니다.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인데 서신서에는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인 베드로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구약의 선지서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하니라.’ 라고 나오는데 그 임하니라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예히 다마르 엘로힘…….’ 쭉 나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귀로 들어와서 입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와서 이 사람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과 외치면서도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이 하나님과 이 새사람이 된 선지자와 이것 말씀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성경을 읽으면서 이것을 집사들에게 설교해야겠다. 이것은 장로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목회자세미나에 가서 이야기하면 죽여주겠다. 이렇게 하면서 성경을 읽으니까 한 번도 성경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자기를 깨뜨린 적이 없는 것입니다. 정보만 넘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저것이 저 사람 깊은 영혼의 울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방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의 자기 깨어짐입니다. 이것이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원고 없이 이렇게 20년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모든 설교를 전부 Text로 풀었습니다. 원고지 400,000만장의 분량입니다. 작년 12월 15일에 모든 설교를 푼 기념식을 조촐하게 했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20년 동안 5,215번 설교를 했답니다. 그런데 물론 저도 인간이니까 설교를 하면서 다음 주에는 설교를 무엇을 하지? 하고 걱정을 한 적이 없지는 않습니다. 몇 주 있었을 것이지만 특별히 기억이 나지는 안습니다. 항상 내 마음속에는 설교할 시간보다는 양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또 주일을 기다려야 설교를 할 텐데 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라고 생각나면 한번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서 자기가 깨어지면 석 달 치 설교가 나옵니다. 그중에서 쭉 하는 것입니다. 저는 20년 목회를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제가 성질도 되게 못되고 사람이 평범하지 않으니까 교인들을 좋은 사람으로 보내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쁜 사람이 가끔은 온다고 하더라도 내가 더 나쁘니까 어차피 나와 싸워서 이길 사람은 없으니까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20년 목회를 하면서 교인이 찾아와서 ‘목사님!’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회가 힘들다는 것이 느껴지고 눈물이 나고 괴로운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괴로웠습니다. 어느 날 교회 마당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후배가 찾아왔습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왔는데 저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선배님!’ ‘왜?’ ‘생명력 있는 목회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무슨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교회가 활기차게 되겠습니까?’ 내가 그랬습니다. ‘생명력 있는 목회를 하기 원하니?’ ‘그렇습니다.’ ‘죽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죽음입니다. 목회자의 자기 죽음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목소리를 들려주신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얘야, 네가 20년 동안 정말 열심히 했다.’ 20년 동안 세어보지는 않았는데 60권의 책을 썼답니다. 그중에서 절반은 쉬운 책이지만 절반은 그래도 꽤 어려운 책을 썼습니다. ‘정말 고생했다. 그리고 7명이 개척을 해서 이만큼 했고 교회를 두 번이나 옮겼고 정말 고생했다. 그러나 네 몸에 나 예수가 얼마나 있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바람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점점 우렁찬 폭포수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거의 8개월간을 매일 눈물로 지냈습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할 때도 밥을 먹다가고 수저를 놓고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나는 놀은 적은 없습니다. 그 흔한 안식년 1년 휴가도 가지 못했습니다. 일 개월 이상도 가지 못했고 2주 이상 교회를 연속해서 비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하나님의 한 가지 질문에 걸립니다. ‘네 몸에 나 예수의 흔적이 있느냐?’ ‘시그마타 투 예수’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이것을 전통적으로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핍박설로 해석합니다. 육체에 대한 상처로 해석하는데 전혀 아닙니다. 제가 이것을 논문을 써서 입증을 했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형상입니다. 몸에 난 상처가 아니라 사도 바울의 인격과 영혼과 정신 안에 담겨진 예수를 닮은 표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것이 목회하기 전에 오히려 훨씬 더 많았습니다. 목회하기 전에는 늘 겸손하고 눈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선교사들이 제일 성령 충만할 때가 훈련원에 입소하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주님 일본을 위해서 제 생명을 드립니다.’ 일본에서 순교할 것도 아닌데 그래도 어쨌든 순교를 할지 안할지는 모르지만 ‘내 생명 드립니다.’ 그러면서 개척 선교사들은 아예 유서를 씁니다. 그때가 제일 예수의 흔적이 많을 때입니다. 목회상황은 언제나 개척하기 직전입니다. 돈도 없고 돕는 사람도 없고 사망이 막막할 때입니다. 믿음으로 개척을 하라고 해서 ‘주여’ 하고 문을 여니까 벼랑입니다. 그때에 예수의 흔적이 가장 많을 때입니다. 그러면서 8개월 동안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쓴 책이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깨어진다는 것은 형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감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형체를 외부의 압박에 의해서 으스러지면서 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달콤한 자기 깨어짐을 원합니다. 감미로운 희생과 자기죽음을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 자신의 본성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깨지고 죽어야하는데 그 깨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파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는 본성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받는 압박과 파쇄적인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깨어진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에 대한 사랑과 그 다음에 자기 의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사랑에 대해서 깨어지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자기 의에 대해서 깨지면서 십자가의 예수를 의지하면서 하는 것이 우리의 목회사역입니다. 선교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깊이 깨뜨려져서 자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그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깨닫고 책을 읽고 사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살고 죽고 정죄를 받음으로써 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향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그 사역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목회의 영광은 높은 장 자리에 오르고 출세를 하고 엄청난 자기의 꿈을 이루고 그런 것이 목회의 영광이 아닙니다. 목회의 영광은 사람이 회심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전혀 그 길을 걸어가지 않을 사람이 깊이 깨뜨려지면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나는 이제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회사역과 설교사역의 영광이요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에 원하시는 것이고 우리 선교사역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 선교사는 그런 것입니다. 중국 의학 역사에 신농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중국의학의 아버지입니다. 이 사람이 의학서를 쓰는데 어떻게 썼느냐하면 산을 돌아다니면서 이 풀을 상처에 바르면 어떻게 될까하고 자기 몸에 상처를 냅니다. 그리고 그 풀을 발라보는 것입니다. 독이 번져서 죽을 정도가 되면 상처가 났을 때 이 풀을 바르면 안 된다. 다른 풀을 발라보는 것입니다. 되네. 그럼 약초가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와 목회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는 그대로 믿어본 적이 없는 진리를 가르치고 자기는 적용해본적도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십시오. 그분은 굉장히 좋은 분입니다.’ 그리고 저기 있다고 가르치면 그것이 선교사입니까? 목회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만나시기를 원하십니까? 이리로 오십시오. 여기에 지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피가 떨어집니다. 여기에 우리들이 모여 있는 곳, 내가 있는 여기로 오십시오.’ 라고 할 수 있어야합니다. 정말 자기를 깨뜨린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바꾸어놓는 있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진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진리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만이 맺을 수 있는 큰 그것이 바로 선교사와 우리 목회자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모든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목회나 설교나 깊이는 넓이를 보장하지만 넓이는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깊은 사람은 넓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넓힌 사람은 모두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선교지에서 전하고 선교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배워야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50세가 넘으셔서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조그마한 개척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선명 파에 속하는 이화여대 여교수 한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오후설교를 6개월이나 들었습니다. 기이한 것 아닙니까? 부목사님이 알아보고 물어보았습니다. ‘교수님 이제 박 목사님 설교를 들으시면서 기독교가 이해가 되십니까?’ 이분이 솔직하게 ‘나는 우리 문선명의 말이 맞는지 박 목사님 말이 맞는지 6개월을 들어도 잘 모르겠다. 왜? 주일 낮에는 거기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여기에 왔는데 그러나 6개월 동안 설교를 들으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가슴에 다가오는 것은 있다. 나는 아직 잘 모르지만 저게 진리가 아니라면 저 연약해 보이는 노인이 저렇게 피를 토하듯이 온몸을 다해서 외치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입니다. 치열한 사역에 대한 열정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 기초해야하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은 진리에 목마른 지식에 기초해야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기독교의 위대한 힘을 이 세상에 보여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가르쳐서 이 세상의 철학이나 종교가 따라올 수 없는 확고한 사상의 체계가 이 기독교 안에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선포할 수 있도록 지적으로 훈련되어야합니다. 오늘날의 신학교를 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저렇게 공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신학교를 갈 때마다 이야기합니다. 한 학기에 몇 사람씩은 병원에 실려가야한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어제도 정 목사님이 말씀하셨지만 정말 같은 목사로서 보아도 구원이 있을까하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신앙은 고사하고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마음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인가? 확고하게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충분하다고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는 알았는데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힘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은혜가 이 사상과 이 윤리를 어떻게 하늘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은혜로 묶어서 아는 것처럼 살고, 사는 것처럼 알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면 그 일에 헌신하도록 고유한 사명을 받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말씀사역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아무리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도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건에 기초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념주의의 머슴으로 사는 것이지 참된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진리의 사역을 잘 감당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도록 하나님이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