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의 흔적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녹취자: 김경애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 가운데 유일하게 이 갈라디아서는 친절한 인사말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곧바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책망이 시작되고 하늘의 천사들이라도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음과 다른 것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까지 강력하게 경고하면서 갈라디아서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필기하지 마십시오. 강의안에 다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이니까 이 구절에 대해서 아마 관심이 목회자들보다 훨씬 더 많으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관심사는 뭐냐 하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는 것입니다. ‘시그마타 투 예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은 핍박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해서 여기 저기 죽을 고비를 넘긴 핍박의 흔적들이 육체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사도 바울이 예수의 흔적이라고 불렀다고 우리가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성경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만 말했지 이것이 핍박을 받아서 몸에 난 상처라는 것은 모두 우리의 해석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학문적인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이것은 우리들이 흔히 한국교회가 알고 있는 핍박설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구절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이 문제를 풀기 전에 먼저 예수의 흔적이라는 이 스티그마에 대해서 어떤 해석들이 있는지를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핍박설입니다. 이 설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고 실제로 사도 바울이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니까 그러한 죽을 고비를 넘긴 흔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예수를 위해 당한 고난이기 때문에 그것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불렀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별 커다란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제의적 문신설입니다. 그 당시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에게 자기를 바치는 표식으로 몸에 상처를 내어 자신을 Dedicate 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이방 종교에 헌신한 사람들도 자신의 몸을 그렇게 드린다면 나는 그들보다 더 많이 예수께 내 몸을 드리겠노라고 하고 제의적인 문신을 새겼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지지를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는 소위 이야기하는 성흔설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가톨릭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학설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아시시의 프란시스의 생애’라는 영화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영화에 보면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주님께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상을 주십니다. 오상이라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난 상처를 은사처럼 주셔서 실제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처를 다섯 군데 받았다는 것인데 양손과 양발에 박힌 못자국과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핏자국을 실제로 재현이 되어서 받았다는 전설이 가톨릭에서 상당히 신빙성이 있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벤저민 프랭클린 워필드라는 프린스턴의 신학자는 ‘가짜 기적들’ 이라는 책에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이것은 우리의 이성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성경에 그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통박하였습니다. 개신교도인 우리들로서는 그렇게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가톨릭의 성흔설을 우리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두 학설은 그렇게 썩 호소력이 없으니까 폐기처분하고 첫 번째 핍박설을 오랫동안 우리 개신교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해석이 있는데 왜 이것이 옳지 않은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하면 다음과 같은 논리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는 문맥으로 볼 때 그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문맥에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는지 기억하십니까? 사도 바울이 떠난 후에 유대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중에 완전주의자들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우리 유대인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지만 우리들은 이미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지만 너희 이방인들은(갈라디아교회는 이방인들의 교회였습니다.) 모세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잘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율법도 함께 지켜야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것이 왠지 종교적으로 유대인에 대해서 약간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이방인 교인들에게는 엄청난 호소력을 가진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율법을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다. 그래서 내가 율법을 지키겠습니다.’ 라는 서약이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까? 할례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할례가 무엇인지는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아이가 갓 태어나면 요즘도 산부인과에서 써컴을 한다고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고추 끝이 표피로 덮여있습니다. 거기에서 많은 나쁜 성분들이 거기에서 부패하게 되고 이것이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여성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을 때 매우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표피를 어렸을 때 아예 잘라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써컴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Circumcise라는 것은 희랍어에서 써컴이라는 것은 둘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둘레를 싹 베어내서 아이 고추의 귀두부분이 일체의 표피에 덮이지 않는 맨살이 될 때 이것이 아이가 자라면서 단련이 되고 그리고 성적인 생활도 원만해지고 부패한 불순물도 없어서 여러 질병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그렇게 언약백성들을 난지 8일 만에 의학적으로 난지 8일이 비타민 K가 가장 활성화되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것을 딱 벗겨내게끔 하나님이 율법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비유대인들 즉 이방인들이 그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하는데 한때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그렇게 기뻐하고 그리스도께 헌신되었던 사람들이 할례를 받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무어이냐하면 ‘할례가 도대체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율법을 이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어떻게 그리스도 십자가 이외에 다른 것도 더해야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느냐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기의 죽음이 뭔가 부족했다는 이야기냐?’ 하면서 그 할례를 받는 사람들을 치열하게 비판하다가 ‘야 너희들은 거기에 상처가 있느냐?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여기에 상처가 있다.’고 말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율법과 복음, 육체와 영혼, 그리고 외형적인 행실과 신실한 믿음, 이것을 대비시키면서 유대인 완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율법주의적인 구원관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를 대비하여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 고추에 흔적이 있느냐? 나는 여기 예수님을 위해서 태장을 맞고 채찍에 맞은 흔적이 여기도 있노라고 그렇게 육체를 육체로 설명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러면 여기에 보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고 옛날 성경에는 지녔노라고 했는데 그러면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가졌다고 하는데 몸에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너무 분명하지 않느냐! 그러면 그 동사를 어떻게 설명할거냐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쓰인 동사가 ‘바스타조’ 라는 희랍어입니다. 그리고 그 ‘바스타조’는 ‘실제로 지니고 있다.’ ‘가지고 있다.’ 간직하다는 뜻입니다. 내 몸에 여기서 이야기하는 몸은 육체다 그런데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은 핍박으로 말미암아 입은 상처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만 해석을 한다면 고린도후서 4장 10절의 해석이 매우 어렵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을 찾아봅시다. 우리 같이 큰소리로 읽어봅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이전 성경에는 이것을 뭐라고 번역했느냐하면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항상 우리 몸에 짊어짐은’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설교자들이 이 부분을 설교하면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죽인 것을 짊어져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 가책을 늘 느끼면서 혹은 겸손하게 혹은 헌신적으로 삽시다.’ 이렇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것은 성경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의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음은 추상명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몸이라고 되어있는 이 몸은 아까 갈라디아서 6장에서 본 ‘소마’하고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면 추상명사인 죽음은 우리의 몸에 어떻게 짊어집니까? ‘우리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짊어진다. 몸에 가지고 있다.’ 라는 표현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육체에 있어야 된다면 예수의 죽음도 이 육체에 있어야하는 것 아닙니까? 물리적인 이 몸에 있어야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녔노라’ 라는 단어는 ‘바스타조’ 이고 여기에 ‘예수 죽음을 짊어짐은’ 이라는 단어는 ‘페이페로’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의 의미가 다르다고 이야기하는데 에페스부루스 같은 학자는 이 두 단어는 거의 같은 의미라고 해석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그러면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다는 이 의미는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소위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의 교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죽음을 오늘 우리가 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 여기서 이야기하는 몸이라는 것이 60㎏짜리 70㎏짜리 피부를 지니고 있는 이 몸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존재가 영과 육이 모두 합쳐진 인간이라는 우리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을 하고보면 그러면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녔노라’ 라고 할 때 그것이 물리적인 몸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모두 연합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존재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해석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스티그마타 투 예수’ 라고 되어있고 복수입니다. 그래서 원래 단어는 ‘스티그마’입니다. 이 ‘스티그마’는 당시에 문화적인 맥락이 있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은 암호처럼 이 ‘스티그마’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던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로마시대 때에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로마시대의 노예제도는 구약시대의 노예제도하고는 완전히 다른 노예제도입니다. 구약시대의 노예제도는 세습되어 사회의 신분으로 굳어지는 그런 노예제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로마시대의 노예제도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목적 때문에 아주 철저하게 계급화 되어있는 노예제도였습니다. 이 노예들을 주인들이 많이 거느리고 있었고 이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은 로마의 사회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노예들에게 어떤 주인들은 자기 집안의 표시를 새겼습니다. 등이나 심지어는 이마에 새겨서 낙인을 찍는 것입니다. 불로 쇠를 지져서 등이나 어깨나 팔뚝에 새겨서 그것만 보면 이 문장이 뉘 집의 노예라는 것을 알 수 있게끔 한 그것이 ‘스티그마’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노예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김 씨 집안의 스티그마를 가졌다고 하면 김 씨 집안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스티그마를 지녔노라고 할 때의 이 사도의 발언은 사도가 쓴 모든 서신서에 첫 구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첫 구절에서 자기를 뭐라고 표현하느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은’ 할 때 그 단어가 ‘둘로스’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고 정확하게 실감나게 번역하자면 노예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내가 그렇게 너희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했고 그때는 너희들이 너무 은혜를 받아서 간이라도 나를 위해 빼줄 것같이 했는데 내가 떠나고 나니까 너희들이 거짓된 복음을 받아들여서 그래서 참된 복음으로부터 떠나려고 하는구나! 그리고 너희들이 복음이외에 율법도 행하고 할례도 받아야 된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고린도교회 같은 경우에는 저 사람이 12명 안에 들지도 않았는데 과연 사도일까? 하는데 그래서 너희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구나! 이제는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무슨 뜻입니까? 또 다시 복음에다가 율법을 비빔밥처럼 섞어서 예수 말고 율법도 지켜야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서 그 모든 율법의 허무한 것을 버리고 복음 하나로 살고 있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러면서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된 표를 내가 가지고 있단다. 그 종들은 이마나 어깨나 팔뚝에 새겨진 문신으로써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지만 나 바울은 나의 정신과 영혼 마음속에 예수의 종 된 흔적을 지니고 있단다. 그러니 더 이상 나의 가르침을 왜곡함으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 말씀드린 세 가지의 해석을 육체적인 해석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제가 주장하고자하는 것은 형상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고린도후서 4장으로 돌아가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가끔 생각날 때가 아니라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이것을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감동적인 것은 12절입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예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져서 우리는 죽는데 사도 바울의 일행들이 섬기고 수고했던 성도들은 사도 바울과 사역자들이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죽으니까 그러니까 성도들은 다시 살아나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종교개혁의 신학에서 특히 칼빈에게서 매우 유명한 ‘유니오콤 크라이 크리스토.’ 영어로 하면 ‘Union Christ.’ 라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의미인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라는 것은 신자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었다는 사실과 이 연합이 어떤 성격의 연합이고 어떻게 해서 이 연합이 이루어지고 이 연합이 촉진되는지를 가르쳐주는 교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할 때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예정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구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를 형성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보면 이미 구원받기 전에도 원리적으로 하나님과 구원받을 사람 사이에는 모종의 연합이 있었다고 상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교리학에서 배운 영원으로부터 칭의 즉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그 순간이 아니라 이미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은 의롭다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지정해주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 연합이라는 것은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설명을 드리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살아가다가 복음을 듣고 진심으로 믿었더니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을 안 듣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시지만 순종하고 예수님께 기도를 많이 하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주신다 그래서 그 사랑은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오늘날 우리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개신교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느냐하면 맨 처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왜?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은 원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부어준 이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을 사람들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후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영적이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적인 시야에서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있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영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서 그의 몸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고 또 접붙여지고, 접붙여지고, 접붙여져서 우주적으로 전체적으로 오직 하나의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영적 몸입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을 때 그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이신 교회의 머리에 부어지면 아론의 머리의 기름이 흘러내림과 같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부어진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 모두에게 분여되어서 우리가 그 사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 심지어 누구를 통해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할 때는 거기에 항상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머리를 통해서 몸에서 몸을 통해서 몸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사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그려내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개신교는 종교개혁 초기에 개혁자들이 고민했던 참된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너무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개념이 마음속에 분명히 서있지 않은 채 자기 홀로 각개전투 하듯이 그렇게 선교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은 없으시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반드시 교회에 의해서 파송된 사람이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파송된 교회가 없다면 반드시 교회를 찾아서 파송의 절차를 밟아야하는 것입니다. 파송교회는 돈을 대주는 돈줄이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한 지체로써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과 함께 선교중인 이것이 성경적인 선교입니다. 선교를 하는 여러분들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내야겠다는 구원의 열정 이들이 사는 나라를 어떻게 바꿔서 문명사회로 만들어야겠다는 사회적인 희망보다도 더 먼저 있어야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여기에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어야겠다는 교회를 세우고자하는 것이 선교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사랑을 받고 그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의 생명을 함께 분여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뇌가 이것을 명령하는데 몸이 그것을 움직이지 못할 경우 장애아가 됩니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분여 받고 그분이 이 세상에서 지금 아프리카에 살아계셨더라면 가지셨을 그 마음을 구원받은 모든 교회가 동일하게 품고 그분이 아프리카에 살아계셨더라면 섬기셨을 그 일에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이 함께 동참하며 살아가는 것이 선교입니다. 선교의 비전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저는 종종 텔레비전에서 헌신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사역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감동적으로 보도하는 장면을 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렇게까지 아프리카에 가서 헌신을 하지 못하니까 박수를 보낼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거기에서 얼마나 사회적인 수준에서 복지적인 헌신과 감동적인 드라마를 썼느냐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출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매스컴에 인정을 받기위해서 사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비전은 물론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헐벗은 사람은 입히고, 무지한 사람들은 교육을 시키고, 병든 사람에게는 의료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차적인 것이고 그 모든 섬김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고자하는 일은 예수의 몸을 아프리카에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주일학교 학생이라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이 거기에 살아계셨더라면 가지셨을 그 마음으로 정의롭게 사랑하면서 살고 예수님이 거기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을 재현하면서 살아가는 한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선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도슨 토르트맨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그 사람이 천국에 계신 예수께 가상적인 대화를 시도했답니다. 그때까지의 성과를 보면 예수님이 혁혁한 성과를 이루고 가셨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 다 도망가고 그리고 고기 잡으러 가고 당신은 이제 승천하니까 그것을 보고 놀라서 한 오백 명이 모였다가 날짜가 흘러가니까 한 480명은 가고 120명만 남아서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상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 ‘12제자를 세운 것이다.’ ‘그러면 그것 말고 당신의 선교사역을 위한 대책이 있느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 이상의 대책은 없다고 그러시더랍니다. 그 이야기는 황당한 대화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지만 나는 그것을 도슨 토르트맨의 이야기를 제자훈련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의 칭호가 바뀝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이라는 칭호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그러므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만물로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 잘 들어보십시오. 거기에 나오는 주라는 단어가 희랍어로 큐리어스라는 단어인데 이것의 히브리어가 아도나이입니다. 그 아도나이는 히브리어 여호와의 께레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께레와 케티브가 있는데 케티브는 쓰인 글자이고 께레는 읽으라는 것입니다. 야훼라는 4글자를 써놓고 이것이 너무 거룩한 하나님의 본명이기 때문에 읽지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께레를 써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아도나이라는 모음을 거기에다가 적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훼라는 단어가 나오면 히브리사람들이 모두 감히 야훼라고 읽지 못하고 아도나이 즉 주님이라고 읽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다 털어버리고 결론만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여호와가 되신 것입니다. 되였다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우주를 다스리던 왕으로서의 권한을 그리스도 예수께 대신 주신 것입니다. 그 영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신 날이 그날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 그 머리에 달라붙어서 하나의 몸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몸의 일부로써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사역은 항상 되물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 아프리카에 살아 계시다면 어떤 인격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사셨을까?’ 라고 생각하며 사역을 하셔야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가 받는 사랑, 심지어 오늘 저녁에도 혹시 여러분들이 말씀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면 한국에 있는 김남준이라는 사람이 와서 무엇을 좀 하나 가르쳐주고 갔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무엇을 배웠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거쳐서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혹시 좋은 무엇인가 깨달음이 있다면 기억해야할 사람은 그것을 전해준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핵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남이라고 했습니다. 자 우리가 늘 잘 쓰는 용어가 사실은 우리가 잘 모르는 말입니다. 생명이라고 여러분들이 많이 말하지만 ‘생명의 복음’ 혹은 뭐라고 그럽니까? ‘예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아니면 ‘생명이 있는 선교사역을 하게 해주십시오.’ 그러지 않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생명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생명입니까? 의학자를 만나서 생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모릅니다. 생물학자를 만나서 물어보았더니 생물학에서는 그런 것은 취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생명이 무엇이냐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생명은 긍정적인 방식으로는 정의를 내릴 수 없으니까 부정적인 방식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생명은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다. 살아있는 것은 모든 죽음에 항거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예수안의 생명이라고 하고 선교사만큼 생명에 대해 많이 말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생명이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죽음을 연구해야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자, 그런데 여기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이 육체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 것이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우리도 못 박혀 즉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이 영적인 것이라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예수의 생명도 육체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생명을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경에 보면 살았다는 이야기보다도 죽었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니라.’ 어디에 나오는 말씀입니까? 계시록에서 사데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니라.’ 또 성경에 뭐라고 나오느냐하면 ‘죽은 행실로부터 저희를 구원하사’ 그것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을 살리셨느니라.’ 죽는다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보십시다. 육체의 생명은 두 가지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Metabolism 즉 신진대사입니다.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몸이 계속 신진대사를 하면서 음식을 먹으면 소화를 시키고, 변을 만들고, 땀이 나오고, 오줌이 나오고, 눈물이 나오고, 이것이 신진대사입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추우면 추워하고 더우면 옷을 벗는 반응이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달팽이라도 갖다놓으면 더우면 꿈틀대고 추우면 오그라지는 반응을 합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이 두 가지의 기능이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신진대사의 기능이 멈추면 30분만 지나면 몸이 썩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뭐라고 반응해도 이야기를 해도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이게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육체와 다르니까 영혼의 죽음을 육체의 죽음과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입니다. 불신자의 영혼도 죽지 않습니다. 의미를 죽음이라고 할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만을 가리키느냐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살아있는 것이 모두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육체가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으면 행동을 많이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를 많이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죽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영혼이 죽으면 그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고, 순종할 힘이 없는 것이고,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을 때, 현저히 약해졌을 때 그것을 죽음의 상태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종종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여러분들도 탈진을 가끔 경험하시지 않습니까? 그때의 그것이 죽음과 아주 가까운 상태로 가는 것입니다.
한 7년 전인데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집회를 했는데 부부가 같이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의 연세가 그때 50대 초반인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 상담 좀 해주십시오.’ 그래서 무슨 상담이십니까? 저보다도 더 오래 사역을 하시고 그랬는데 무슨 상담이냐고 피했습니다. 자꾸 불러서 할 수 없이 만났습니다. 만나서 ‘제가 무슨 이야기를 들어 드릴까요?’ 그랬더니 ‘저 아무래도 이상해졌어요.’ ‘왜요?’ ‘저 대학교 1학년 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죄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면 너무 불쌍해서 전도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이 무슬림의 땅까지 저는 선교사로 왔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요즘은 너무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생각만 듭니다.’ ‘왜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들어서 이렇게 전도해도 절대로 예수를 믿지 않는 이 무슬림들을 쓰레받기로 쓸어서 아궁이에 집어넣든지 지옥에 보내실까 하나님께 너무 섭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셨으면 왜 마호멧을 태어나게 하셔서 그 이상한 종교를 전파하게 하시고 복음보다도 깊이 심겨지게 하셔서 절대로 예수를 믿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셨을까?’ 더 황당한 이야기도 합니다. ‘아니 그러면 구원하시고 싶으시면 당신이 그냥 하시면 되지 왜 우리 같은 사람을 해도 해도 성과도 별로 없는 이 일에 헌신하게 하실까?’ 그리고 기도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보고 ‘목사님 제 영적인 상태가 심각하죠? 제가 생각해도 제가 너무 무서워요. 저는 어떻게 해야지만 될까요? 정말 제가 신앙이 올바른 것일까요? 이런 이야기를 남편한테 하면 그럴 고민을 할 시간 있으면 성경이나 한줄 더 읽으라고 그래서 하도 마음이 답답해서 텔레비전을 틀고 앉았으면(남편은 고신 측 목사님입니다.) 선교사가 앉아서 초저녁부터 드라마를 보고 앉아있고 말이야! 정신상태가 그래서 어떻게 무슬림 선교를 해! 그러면서 드라마를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면 남편만이 맞는 것 같은데 목사님 저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제가 영적으로 깊이 병들어 있죠?’ 제가 뭐라고 그랬겠습니까? ‘사모님 영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제가 웃으면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와 목회자들이 그런 점에 있어서 제일 무지합니다. 그 이야기를 내가 아는 그 이야기를 한국에 돌아가서 이야기했습니다. 옆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기 아내와 너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선교사가 이야기했을 때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단칼에 날려버릴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제 보니 목사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참 깊으십니다.’ 우울증입니다. 여러분들도 조심하셔야합니다. 그리고 사모님에게 그랬습니다. ‘일하지 마세요. 인생을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 하십니까? 텔레비전 보세요. 그것도 남편 몰래 보다가 남편 발자국소리가 나면 끄지 마시고 “그래 나는 본다. 아니 이 나이에 이것도 내가 네 허락 받아야하냐?” 그러면서 보십시오.’ 자기는 요즘 비디오가 너무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보시고 보시면서 인간사가 흘러가는 것도 배우시고해서 비평을 써서 20개쯤 묶어서 ‘내가 본 비디오 선교사 아무개’ 그렇게 책을 내시면 내가 출판을 도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합니다. 우리가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허위와 거짓, 가식입니다.
나는 어떤 선교사들이 정말 사랑스럽고 도와주고 싶냐하면 승리의 소식만 계속 편지를 보내오는 선교사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와서 솔직하게 ‘목사님 제가 Burn out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와서 솔직히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이야기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보내주기도 합니다. 왜? 우리 중 누가 강한 사람입니까? 주님의 손에 붙잡혀있을 때 강하지만 우리 모두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저 사람이 연약한 말을 벌레 보듯 하지만 몇 년 전에는 자기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갱년기 우울증 같은 것이 오면 사춘기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무시무시한 영향을 우리에게 끼칩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러면서 그것을 자기를 객관화하면서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깨달음을 얻어가면서 그러면서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자, 곁가지로 갔습니다만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면 예수 죽음을 짊어지면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생명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활기,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힘 이런 것들이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려니와 영으로써 육신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라고 할 때 그 산다는 것이 영적으로 살아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충만한 생명력이 우리 안에 있게 될 때 이 생명력의 핵심이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나누는 교제의 핵심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이라고 보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것을 생명이라고 봤는데 사실은 이 둘은 하나입니다. 사랑이 생명이고 생명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충만한 생명은 곧 사랑이고 이 충만한 사랑은 곧 나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게 할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능력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넘치면 모든 것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핍박이 와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심지어 순교의 순간이 와도 ‘주님 감사합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주님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시련과 역경이 오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려고 할까하는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고갈되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동부 아프리카에서 선교하고 있는 친구 목사가 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속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흑인들이 자꾸 말썽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썽을 일으켜서 선교사역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도우라고 사역자로 세워놓았는데 말썽을 계속 일으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이제는 단호하게 조치를 취해야하는데 서로 서로 불평을 하면서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 입에서 ‘이 깜둥이 새끼들’ 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것입니다. 모두들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무엇이냐 하면 사랑과 생명이 거의 고갈된 상태입니다. 어떤 회사원 한사람이 가족들과 서해 바다로 놀러갔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조개를 잡았습니다. 신체가 건강한 30대 젊은이입니다. 저녁때 숙소로 돌아왔는데 몸에 열이 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래도 감기에 걸렸나봐. 몸이 너무 아프고 쑤셔.’ 그러니까 부인이 약국에 가서 쌍화탕과 몸살 약을 가지고 와서 먹었는데 아침에 낫지를 않아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오후에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진단이 나왔는데 급성패혈증으로 죽었습니다. 원인은 뭐냐 하면 슬리퍼를 신고 해변에 들어가서 노는데 너무 노는데 몰두해서 슬리퍼를 벗고 해변을 걸어간 것이 죽음의 원인입니다. 조개껍질을 밟았습니다. 작은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곳으로 비브리오 패혈증을 일으키는 균이 들어갔습니다. 순식간에 온몸에 확 퍼져서 그날 밤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보통사람은 어떻겠습니까? 그 균이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몸에 저항력이 있을 때는 다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이분은 저항력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입니다. 균이 들어오니까 확 퍼져서 죽어버렸습니다. 똑같습니다. 우리의 복음 사역이 속상하지 않은 날이 어디 있습니까?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을 때에는 오히려 그 괴로운 일들을 통해서 뭐라고 그럽니까?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그게 오히려 우리들에게 많은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력입니다. 그러면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목회를 한다. 선교를 한다고 할 때 돈도 필요하고, 일꾼도 필요하고, 기회도 주어져야하고, 지혜도 있어야하고, 장비도 있어야하겠지만 사실은 사역자의 심령 안에 생명이 충만하면 사랑이 충만하면 벌판에 던져놓아도 그 사람은 사역을 합니다. 왜? 매일 매일 기적을 보면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니까 말입니다. 우리의 간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생명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일어나느냐 하면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으로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방식만 설명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주어지느냐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혹은 죄를 지었습니다. 혹은 사역을 하다가 큰 시련을 만났습니다. 혹은 예전에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에 대한 결과가 나에게 돌아왔습니다. 가정에 견딜 수 없는 상처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너무 괴로운 일이 섭리가운데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부분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이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나의 죄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일이 생겼습니다. 견딜 수 없이 괴롭습니다. 이때에 어떤 태도로 이 고난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현저히 달라집니다. ‘남의 형제들은 차도 사주고, 집도 지어주고, 경제적인 지원도 해주는데 우리 집안의 형제들은 내가 막내로서 나와서 선교사역에 이렇게 애를 쓰는데 띠앗머리들이 없이 특별한 지원도 없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행한 것입니다. 옆의 선교사는 ‘큰형이 와서 아프리카에 땅을 사주고 갔다더라. 누나가 와서 지프차를 사주고 갔다더라.’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면 한없이 쭈그러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그 많은 고난과 고통은 오히려 나의 영혼의 끊임없는 죄와 그리고 불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그냥 배우일 뿐이고 내가 뭔가 모자라는 것을 하나님이 저 사람을 사용하셔서 나를 연단하시는구나. 그래 저 선교사는 형이 땅을 사주고, 동생이 차를 사주고, 누나가 와서 집을 사주었다는데 우리는 나는 아무것도 안 해준다. 그래도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다.’ 다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감사가 금방 됩니까? 견디기 힘들도록 괴롭고 고통이 밀려옵니다. 더욱이 거기에 아까 이야기한 것과 같은 중년의 우울증이라도 오면 너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때에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절대로 나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지금은 하나님의 그 비밀스러운 섭리를 다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왜 이렇게 취급을 받고 괴로움을 당해야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믿는 것은 하나이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러면서 믿음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당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자신의 섭리에 관한 글 속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가장 운명은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서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신 모든 일을 묵묵히 처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당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훌륭하게 그렇게 모든 것을 당한 본으로써 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오느냐하면 그렇게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을 다 당하고 그중에 어떤 것은 나의 죄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누명을 쓰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하고 쫓아가서 단칼에 죽여 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할 때는 웃지만 자기 이야기를 할 때는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당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 우리의 마음은 누구를 바라보게 되느냐하면 누구를 생각하게 됩니까?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러면서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대한 묵상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 신기하게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이 이천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오늘 내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하고 목회하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성도들의 아픔을 보거나 혹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서 나무에 못 박히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껴본 적 없습니까? 예수님이 이 불쌍한 선교지의 원주민들을 위해 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통이 지금 내 앞에서 예수가 죽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때에 영적으로 이 천 년 전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의 기운이 우리 속에 신비한 방법으로 확 스며드는 것입니다. 처녀 때 아프리카 선교에 헌신해서 싱글로 팽팽한 얼굴과 날씬한 몸매에 예쁜 가방 하나 메고 캐리어 끌고 타박타박 걸어왔었습니다. 지금은 흰머리도 나고 피부도 축 늘어지고 그리고 이상하게 나이가 들면 살이 한군데로 몰립니다. 거울을 보면 이게 내 모습인가? 왜 그럽니까?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서 생명을 없애버리고 생명을 점점 지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수하고 그냥 로션만 바르고 나와도 화장한 것처럼 예쁘던 얼굴이 이제는 변장을 해도 별로입니다. 왜 그럽니까?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서 그럽니다. 그래서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오면 펄펄 살아서 날뛰던 육적인 생명의 기운들이 죽는 것입니다. 혈기, 미움, 정욕, 야망 이런 것들이 다 죽어가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당하신 그 십자가를 보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가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상한 심령이고 그것이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영성을 생명력 있게 간직하는 핵심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선교사로서 영적인 생명의 풍성함은 통회의 정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최근에 한 달 동안에 혹은 일 년 동안을 돌아보면서 선교비가 안와서 속상하고, 남편하고 의견차이가 나서 속상하고, 사역자들을 세웠는데 헌신하지 않아서 화가 나는 것 말고 오직 하나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저렇게 큰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구나! 그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러면서 깊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 속에서 ‘하나님 내가 이렇게밖에 못살아서 죄송합니다.’ 그런 통회의 경험이 얼마나 많이 반복되느냐가 얼마나 풍성한 생명 속에서 사는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러느냐하면 이 천 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오늘 그 깨달음을 통해서 나에게 와서 이제 죽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기운이 스며 들어와서 나를 죽인 것만큼 즉시 거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이 천 년 전에 부활하신 그 능력으로 다시 내가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통회하고 난 다음에는 항상 마음속에서 희망이 솟는 것입니다. ‘환란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도 할 것이다.’ 라는 소원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역자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사람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타자와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많으면 이 사람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함이 보이지 않고 저 사람의 잘못을 보아도 저 사람의 약함으로 보이지 악한 의도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랑이 충만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유니온 크리스트의 교리입니다. 이것이 개신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의 영성은 기본적으로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깊이 자기가 죽는 영성,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영광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고난을 당하면서도 언제나 그 기쁨 속에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자기에게는 그리스도의 노예일 수밖에 없는 그 사랑에 사로잡힌 그 영적인 흔적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맨 처음이야 다메섹 가는 길에서 생겼겠지만 그러나 그러기에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매일 매일의 자기 죽음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거기에서 주님의 충만한 생명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선교사역의 성공은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드러나고 자신이 예수 때문에 너무 행복한 사람,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반영하는 인격이 되어서 은퇴를 하면 가장 훌륭한 선교는 자기완성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자기완성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나는 오히려 그분에게로부터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노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통회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터툴리안이라는 교부가 말했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매일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꺾어지는 자기 죽음 거기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신비한 영적인 기쁨, 그 사랑, 그 생명 속에서 살 때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긍휼히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사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가슴에 새겨야할 영적인 생활의 원리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