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험을 참는 자의 행복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녹취자: 황인준
I. 본문해설
가을이 정말 깊어가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 대공원을 혼자 산책하였는데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잎사귀가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때입니다. 작년만큼 단풍이 예쁘진 않지만 햇빛을 맞은 곳에는 군데군데 아름답게 물들어 가서 정말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를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잘 지내셨습니까? 늘 녹화로 만나다가 7주만에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면 오늘 라이브 ‘시험에 관하여’ 라이브 공과 제 7과를 성도들의 나눔 영상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인생에서 큰 성경적인 시련은 없었지만 마음이 무척 여렸기 때문에 삶 자체가 힘들고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웠습니다. 작은 시골 사택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무뚝뚝하고 무심한 남편과의 관계가 어려웠고 이웃을 잘 사귀지 못해서 참 외로웠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외로울 때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 후 열린 교회에 와서 더욱 깊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자존감이 회복되면서 남편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지체들과 사랑을 나누며 생명의 말씀이 주는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고 그 분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섬기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인내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기다려주는 것, 사랑하는 것이 참 힘든 일이었습니다. 나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볼 때 아니라고 생각이 들고 상황을 보면 낙심과 절망, 원망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며 또 다툼이 생기게 되고 불행한 일을 겪게 된다는 것을 과거의 삶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인내와 사랑은 하나님께 붙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살아오면서 많이 느꼈고 인내를 배워서 감사하고 지금도 계속 배워 나가고 있습니다.”“가장 최근 일을 나누겠습니다. 시련은 인생을 살면서 계속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감당할 수 없는 업무 양과 스트레스로 너무 힘들어서 급작스럽게 살도 빠지고 숨도 잘 안 쉬어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름에 받은 은혜는 온데간데없고 그로인한 분노가 가족과 일하는 팀들에게 터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며 사랑으로 참고 견뎠어야 했는데 제 힘으로 참아냈다가 번 아웃이 오고 심신이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상황만 탓하며 일에 쫓겨 기도가 부족했던 것이 시련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러던 중 사경회로 인해 다시 기도드리기 시작했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어제는 어제의 은혜로 지금은 오늘의 은혜로 살아가야 함을 알았습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와의 충만한 교재를 통해 다시 평안을 찾고 나아가고자 하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시험을 몸소 여러분들이 겪으시면서 또 이기신 경험들을 들어보니 정말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이 듭니다.
제 7장 시험을 참는 자의 행복에 대해서 우리 같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온통 복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인류의 머리로서 아담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의 화두는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시편에서도 150편의 시편 중 맨 앞자리에 배치된 ‘복 있는 자는...’이라는 선언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얼마 안 되어 본격적인 말씀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그때 주셨던 산상수훈에 첫 부분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는 역시 복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이 되고 모든 계시의 종결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에서도 역시 관심사가 복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구원받은 교회의 신자들에게 선언하는 복. 그리고 불신자들과 구별되어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복은 사람들이 학습을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행복에 도달해 본적도 없는 사람이 그런 행복을 느낄 때 그것이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이 경험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이 행복인 줄 아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결국은 인간에게 태어날 때부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직관을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 심으셨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복이라고 할 때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구약에서 섭리적인 복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베라카(berakah)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폭넓기에 물질적인 복부터 시작해서 정신적인 행복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포괄하는 그런 복이고 이것은 선택받은 사람이나 선택받지 않은 사람이나 공히 받는 복입니다. 그래서 요셉만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요셉이 종살이 하던 보디발의 집안도 저런 종류의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섭리적인 복입니다.
그런데 아주 특별한 단어가 있습니다. 에세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똑같이 복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이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복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않고...’라고 시편1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쓰인 단어가 바로 에세르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복을 많이 받았더라, 하나님이 요셉에게 복을 주셨더라할때는 베라카가 됩니다. 에세르는 일반적인 복보다더 훨씬 더 독특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누리는 영적인 복입니다.
섭리적인 복은 하나님이 물질 내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았는데 어떤 아이에게 어떤 특별한 자연적인 재능이 있다든지, 음악을 잘한다던지 이 모든 것이 복입니다. 공부 관련하여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면 굉장히 속 많이 상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부모에게도 스트레스이겠지만 아이들에게도 스트레스입니다. 오늘 제가 한 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상에 공부 못하는 아이는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가 무엇이냐라고 할 때 공부를 수학이나 영어, 국어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많은 공부 가운데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고등학교 때 미분, 적분 배우고 이과에 있는 사람들은 복소수, 벡터까지 배우는데 살면서 사용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더하기 나누기도 매번 틀리면서 미적분 기억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결국은 공부가 그 만큼이 아니라 훨씬 더 범위가 넓다는 것입니다. 많은 공부 중에 이 부분을 잘한다. 고해서 다른 부분의 공부도 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학교 성적 좋은 사람이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개념도 뛰어나고 처세도 잘할 것입니다. 또한 돈도 잘 벌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어느 방면의 공부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부모들이 발견하고 그 부분으로 그 아이가 승부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체험한 부모로서 말씀 드리는데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를 못한다면 ‘우리 아이가 지진하구나! 공부를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아이에게는 ‘이 나라 교육이 맞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자녀들도 직접 체험했기에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가 미국이나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로 가서 공부했더라면 훨씬 더 뛰어나게 재능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깐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주눅이 들어도 그것을 격려해 주셔야 합니다. 이 나라 교육이 문제가 있어서 너한테는 맞지 않는 것이며 이제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해보라고 하면서 그 아이가 어느 공부를 잘할 수 있는지 알아보며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에디슨은 수학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대발명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깐 그 공부와 그 공부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 공부 잘한다고 우쭐할 필요도 없고 공부 못한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부모가 기죽는 것을 보면 애들이 더 기죽습니다. 아이들을 격려하고 그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 주고 그가 하고 싶다는 것을 최대한 뒷받침해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회를 열어주게 되면 그 아이들이 진짜 자신의 적성에 맞고 소질에 맞는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섭리적인 복입니다.
영적인 복은 하나님이 사물들을 간접적으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직접 만지셔서 주시는 복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할 때, 이 복이 바로 그런 종류의 복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복에 대해서 길게 설명을 한 것입니다.
고통은 몸이나 마음에 아픔이나 괴로움. 이것을 고통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통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인내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아까 우리 프로젝트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신다는 자매님의 간증을 은혜롭게 들었습니다. 자매님뿐 아니라 성도 여러분들도 지금 굉장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계시지만 더 심한 사람은 스트레스로 인해 온 몸에 열꽃 같은 것이 발생하고 때리지도 않았는데 푸른 멍이 든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수십 명에게 장작으로 맞은 것처럼 온 몸에 멍이 든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예 그것을 못 이겨서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널리 알려진 프랑스 요리사들의 자살입니다. 프랑스 궁전에서 요리하던 사람들이 귀족들이 요구하는 새로운 요리를 요구하여 그로인한 스트레스로 많은 자살을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프랑스에서 요리사 직군은 자살률이 상당히 높은 직업군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만약에 내가 그러한 경쟁이 없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겠다고 일을 덜컥 내려놓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히 돈이나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일터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로운 길을 걸어가라고 사회에 우리를 직업인으로 파송하셨는데 거기서 사명감을 느끼고 뜨겁게 에너지가 자기 안에 넘쳐서 그 일을 덮어야 되는데 일에 덮쳐 거기에 깔려서 산사태를 만난 사람처럼 깔려있는 모습을 볼 때에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결국 기도로 상황을 덮어야 합니다.
저녁때 꼭 기도하러 나오는데 1층에서도 그렇고 3층에서도 그렇고 흐느끼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 분은 얼마나 괴롭기에 교회에 오자마자 쏟아내며 하나님 앞에 통곡하면서 울었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보면서 너무 눈물이 나고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도 똑같이 상황에 깔려버릴 것입니다. 결국 신앙도 잃어버리고 영혼도 망가지고 마음도 망가지고 마지막에 육체까지도 망가지고 우울증도 오고 엉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이끌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가야하는데 일이 우리를 노예처럼 끌고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정상적인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스펠젼이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오늘 너무 바쁩니다. 그래서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어떠하든지 그 기도로 그것을 극복하고 마음의 중심을 확고하게 잡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삶이며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분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기쁨으로 감당하며 모험적인 삶을 주님 앞에 살아갑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도표를 보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합니다. 고통 받는 시련과 시험 상황 속에서 말씀과 기도로 참내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수록 우리가 온전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고통을 주시기 위해 시련을 주시거나 능력이 모자라 시험에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우리에게 의도가 있고 그러니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경회 때에 말씀의 은혜를 받은 분들의 간증이 있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기도하셔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은혜만 있으면 어떻게든지 살아낼 수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다고 했는데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가?’입니다. 처음 시험을 당할 때에는 자신의 상황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됩니다. 마치 당구장에서 당구공을 놓고 큐대를 가지고 이 공을 때리면 이 공이 이곳을 맞고 저곳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똑같이 이성적으로 내 문제는 지금 돈이 없는 것이고 어떻게 돈을 조달하고 사업이 어려운 것이고 어떻게 이 사업의 난관을 극복하고 누구한테 부탁하고 어디서 대출을 얻고 등등 어려움이 생기면 인간은 제일 먼저 대책을 세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대책이라는 것이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서 그것을 자기 힘으로 막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과 기도로 참으면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자신의 상황에 골몰하던 사람이 이 시련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됩니다. 제가 시금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돌멩이에 광석을 문질러 보면 분명 광석이 검은색인데 초록색 줄로 그어집니다. 분말의 상태였을 때엔 초록색인데 광석으로 있을 때엔 검은색이 나는 겁니다. 그리고 짙은 회색이었는데 갈아보니 하얀 가루가 나옵니다. 시험이라는 시금석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한번 문질러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어떤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도표를 보시면 이 부분이 희랍어 성경이 꽤 어렵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뎌낸 자가...’ 이렇게 나오는데 두리뭉실하게 해석을 한 겁니다. 그래서 원래의 직역을 하면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시련을 통해 옳음이 증명될 때 이러이러하니라’로 번역됩니다. 그러면 빨간 글씨로 된 부분을 주목해 보시면 ‘시련을 통해 옳음이 증명될 때’에서 중요한 것은 옳음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옳다’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옳았다고 할 경우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으로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그 뜻이 아니라 처음엔 옳지 않았는데 믿음으로 그 시험을 참아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보고 기도로 간절히 그 은혜를 간구하면서 나아갈 때 이 사람이 변화되고 이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 이제 네가 옳다!’ ‘아 이제 네가 제 자리로 돌아 왔구나!’ ‘네가 행위도 온전하고 생각하는 것도 온전하구나!’ 이런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면 시험이 옵니다. 제일 먼저 정서와 생각의 혼란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판단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왜 나에게 이러한 시련이 온 것일까?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시지도 않고...’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핑계를 댑니다. 또한 하나님 핑계를 안대더라도 끊임없이 시련을 당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돈, 건강, 관계 등의 문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고민을 하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원망할 사람도 생기고 빠져나갈 핑계도 생기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가 여기(자신의 상황)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옳은 생각, 옳은 정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견디면서 계속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 이 시험을 통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구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뉘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본래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원래 자신이 했던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뉘우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마지막에 ‘아! 내가 이러한 시련을 당했는데 이것은 사실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워낙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달구시는 구나! 나를 옳게 만드시기 위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구나!’고 올바른 판단이 서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이것이 예전엔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수 없는 그른 사람이었는데 이걸 통해서 옳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단계에 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더 이상 이 사람을 시련으로 연단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이가 잘못했다고 매를 들고 책망을 하는데 아이가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반성하는 것이 명백하다면 그 징계를 계속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냐는 것입니다. 아이를 죽이는 게 목표가 아니기에 아이의 태도를 바꾸고 생각을 바꿔서 그릇 행하던 아이가 올바르게 행하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근데 종종 부모가 자기의 분을 못 이겨서 아이들에게 폭언을 하는데 그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육의 탈을 썼어도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자신의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한 형상으로 여기고 그 자식은 부모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더라도 부모는 자식을 인격적으로 대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교육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 자기 자식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포기 한다는 것이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얜 뭘 해도 안 돼’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얘는 공부가 이 방면이 아니라 다른 공부에 뛰어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아이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옳음을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자녀와 교감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 둘이 있는데 첫째 아이는 아주 친화성이 좋은데 또 다른 아이는 친화성이 별로 없지만 그 대신 혼자 매달리고 혼자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친화성이 좋은 첫째가 엄마에게 싹싹하게 잘 하는 것보다 친화성이 없는 둘째가 큰애의 반만큼 엄마에게 싹싹하게 하는 것은 이 아이에게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모가 공감을 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편애하면 곧 가정의 비극이 됩니다. 결국 아이들을 징계하는 것도 그의 생각과 행동을 옳은 곳으로 옮겨 놓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약 우리가 어떠한 시련을 당하거나 시험을 당했을 때 옳은 생각과 태도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더 이상 그런 시련을 계속 주셔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 받는 것은 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의 그리스어 직역인 그냥 시련을 견뎌낸 자가 아니라 시련을 통해 옳음이 증명될 때에 그 이하가 된다는 부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라(Sulpicius Severus)라는 사람인데 거의 어거스틴과 겹치는 시기의 기독교 작가였습니다. 감동적인 문헌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중에 유세비우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속에서 시험과 믿음의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헐벗음과 굶주림, 강도의 위협, 이 모든 재앙들은 그 일을 겪어야 했던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 의인의 덕은 분명하게 눈에 띄는 것이었으니 곧 그 시련들을 견디고 이기는 것이었다.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힘으로 그들은 모든 시련을 견뎌냈다. 고난이 힘겨울수록 그들은 더욱 더 승리를 확신하였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꽃밭에서 돗자리 깔고 노는 것 같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을 달라고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굉장히 두려워해야 할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디모데후서 1장 8절을 보면 “네가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능력을 따라...’라는 것은 ‘능력에 알맞게’ 혹은 ‘능력에 비례하여’, ‘능력에 맞추어서’라는 뜻입니다. 이 얘기는 하나님이 능력을 많이 주시면 복음과 함께 더 많은 고난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깐 성경을 보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많은 인물들이 그렇게 많은 시련을 이겨내면서 고난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인격이 풍기는 권사님들, 장로님들, 또 권사, 장로가 아니더라도 집사님들 중에도, 심지어 청년들 중에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많은 고통의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많이 겪고 시련을 많이 겪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덜 사랑하기 때문이라곤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진 사람들에게는 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고 그 속에서 옳다고 인정을 받고 또 더욱 옳다고 인정을 받고 그러다 물러나 보면 더 옳다고 인정을 받으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조각하는 것을 보면 돌멩이를 깎아서 사람 모형을 만드는데 우선 톱으로 먼저 크게 얼굴 형상을 만들고 그 다음으로 때려서 사람 모양을 만들어 갑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반복하는 동안에 턱선과 눈매, 귀, 머리 모든 모양이 점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이제 작가가 모든 걸 완성했다고 망치와 정을 놓을 때는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일생이 끊임없이 다듬어져 가는 것입니다. 제가 책을 쓰다가 World play를 하였는데 정 받은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정 맞은 사람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사람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연단의 정을 많이 맞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영혼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현재 드론이 엄청나게 활용되고 또한 앞으로의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나왔는데 전투기와 함께 전투기와 똑같이 생기 작은 드론 전투기들이 전투기에서 나와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부분을 드론이 먼저 넘어가서 적군들의 위치나 위험 요소들을 탐색해서 정보를 보내줍니다. 한 대의 모(母 )기가 여러 대의 자(子 )기를 거느리고 협동작전을 하는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처럼 드론을 띄우면 나는 지금 숲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드론을 통해 그 길이 어떻게 펼쳐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거기서 산, 강, 길이 있고 저 방향으로 가면 낭떠러지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기까지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육신을 중심으로 한 사고에서 영적인 사고로 전환이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그 말씀이 내 인생을 비추면서 그리고 내가 지금 산꼭대기에 있는지 저 계곡 아래에 있는지를 발견하게 되면서 갈 길을 찾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시험을 통해 우리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은 승리한 사람, 혹은 왕, 이긴 사람에게 씌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결국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는 죽지 않는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육신적으로는 결국 죽습니다. 이 점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시험을 참는 자, 시험에서 옳다 인정을 받은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 이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뿐만 아니라 내세에서까지 그리스도와의 충만한 교제를 주십니다. 그래서 아까 간증에서 들었던 것처럼 현실에서의 스트레스를 받고 죽을 것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충발하게 기도를 하고 나면 갑자기 현실의 무게가 아주 가벼워지는 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것이 현실의 무게가 아니라 영혼의 무게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반성하며 자신을 돌아보면 어떨 땐 어려움을 겪고 마음이 가라앉고 침체에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다가도 생각을 돌려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적을 회상해 보게 됩니다. 그때도 견뎠고 그뿐만 아니라 너무 많은 은혜를 어려움 가운데 주셨습니다. 결국 현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지만 내 마음 속에서 주시는 생명의 에너지가 컸기 때문에 현실이 가볍게 보인 겁니다. 지금은 그보다 덜 한 어려움인데 더 많이 낙심하고 힘들어하는 것은 결국 현실의 무게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의 무게라는 점입니다. 그 영혼의 무게는 죄의 무게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시험을 극복하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죽음이야 늘 곁에 있는 것이고 언제 주님이 불러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오히려 주위의 사람 모두 울고 있어도 자신의 소망이 가득한 얼굴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교회에서 별로 믿음이 없어 보였는데도 놀랍게 마지막에 그렇게 영혼이 정화되어 담담하게 주님을 만날 소망을 얘기하게 됩니다. 영혼의 무게가 가벼워 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국 얼마나 충만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생명을 우리가 누리고 사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에 하나의 중요한 숙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살던지 죽든지 믿음으로 이기셔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하기에 어려운 현실은 없다, 무거운 것은 모두 현실의 무게가 아니라 우리 영혼의 무게라는 것. 그리고 주님 앞에 마음을 쏟으면서 간절히 매달리면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진실한 예배자가 될 리 없습니다. 예배가 무너지고 기도가 무너지고 말씀이 막히고 그럴 때에 결국 인간에게 솟아나는 것은 불평과 불만, 현실을 도피하고자하는 마음, 절망, 현실을 도피하고자하는 쾌락의 추구, 오락 등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 것은 진실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기도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자기를 움직이는 살아있는 말씀이 항상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럼 그러한 시험을 이기게 하는 원동력이 사랑입니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통 속에 고뇌하는 사람이 가는 길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고통 속에 고뇌하던 사람이)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고통이나 고뇌하는 마음을)이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결국 우리가 좋은 예배자가 되자, 말씀을 듣자, 말씀을 깨닫자, 은혜를 받자는 것은 사랑의 힘으로 현실을 이기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사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모든 것들을 이기면서 살아가셔야 합니다.
“저에겐 삶의 순간순간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며 묵상하는 것입니다. 현실은 고통일지라도 과거 나의 삶에 임하셨던 실수 없으신 하나님, 성경 인물들 삶 속에 임하셨던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 이 하나님이 저의 삶에도 함께 하실 것을 생각하면 현실을 이길 힘이 솟고 자유 함이 생깁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저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아들을 애어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되거든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이 하나님이기에 말씀을 알아가고 순종하고, 견고한 믿음으로 믿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가족과 이웃에게 흘러가야 함을 깨닫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더 풍성하게 사랑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더 아는 사람으로서 그 사랑의 기쁨과 평안을 깨달았기에 세상을 향한 사랑과 자기 사랑을 저버릴 수 있는 것 같아요. 간절히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순종할 수 있는 힘과 은혜를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삶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우리가 그런 시련 등을 이겨야 하는데 결국은 기도생활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고 여러 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기도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이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조금만 활용하며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조금밖에 없는데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은 그것을 모두 활용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잘 이기면서 승리하며 사셔야 합니다.
문제1) 시험을 만날 때 참으라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험을 참는 자에게 영적인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복이 핵심이고 결국 그 복과 함께 하나님이 베라카의 복도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2) “시련을 견디어낸”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것이 시험에 든 자들에게 요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시험을 통해 믿음이 증명되는 것, 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 또 시험에 든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하나님이 이 시험을 통해서 자기를 어떻게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하는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었을 때에 시험에 질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탓하면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문제3) “생명의 면류관”에서 “생명”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현재적으로는 그리스도와의 충만한 교제를 뜻합니다. 그 교제가 생명의 교제입니다. 그 능력을 충만히 누려야 합니다.
문제4) 시험을 참는 궁극적인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떠한 시럼가운데서도 두 가지만 놓치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 선하신 하나님은 나를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 이 두 가지만 놓치지 않고 살아도 우리가 시험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